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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님과 함께 다시 걷는 축복의 해/ 시편 100:3

작성자항상 새롭게(김종신선교사)|작성시간18.01.01|조회수395 목록 댓글 1



주님과 함께 다시 걷는 축복의 해

-성경적 세계관을 여는 선교의 문-

시편100:3

김종신 선교사

 

  

     

여호와가 우리 하나님이신 줄 너희는 알지어다. 그는 우리를 지으신 이요 우리는 그의 것이니 그의 백성이요 그의 기르시는 양이로다

 

겨울 찬바람이 세차게 불고 눈보라가 몰아치며 우리 앞을 가로 막을 때, 우리가 앞을 향해서 걸어가기에 무척 어렵고 힘듭니다.

 

우리 그리스도인들도 걸어가는 인생길이 이와 꼭 같습니다. 우리의 앞을 가로 막는 세상의 벽은 너무 강하고 매서워 우리를 자빠트리고 주저앉게 하여 앞으로 나아가지 못하게 합니다. 우리의 기운을 빼버리고 맥 빠지게 하여 앞으로 진행을 못하게 합니다. 요즘 더욱 그렇습니다. 그래도 우리는 가야 합니다. 왜냐하면 주님께서 우리와 함께 하셔서 우리의 손을 붙잡고 함께 걸어가 주시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태어나서 지금까지, 매년 나이를 한 살씩 더 먹으면서 항상 새로운 해를 맞는 전환점이 반복되어 옵니다. 그 때마다 결심합니다.

 

하지만 사람에 따라서 다릅니다. 어떤 사람에게는 놀랍게 성장하고 발전하는 중요한 전환점이 됩니다. 하지만, 어떤 사람에게는 더욱 무의미한 시간들로 채워지고, 더 나쁜 방향으로 나아가고, 더욱 이해 할 수 없는 모습들로 변해지는 해가 된다는 사실입니다.

 

주님께서 2018년 한 해를 우리 앞에 이미 시작하게 해 주셨습니다. 벌써 한 달이 다 차 가고 있습니다. 여러분! 어떻게 시작하고 있습니까? 우리는 주님과 함께 다시 걸어가야 합니다. 우리 믿는 성도들은 주님과 함께 다시 걷는 해가 되어야 합니다. 그러자면 무엇보다도 이 새로운 해를 다시 맞으면서 우리 믿음이 더욱 굳건해 져야 합니다.

 

오늘 본문 속에서 그 답을 몇 가지로 정리하고 말씀을 전하도록 하겠습니다. 주님의 큰 은혜가 함께 하시고 우리에게 놀라운 은혜가 부어지기를 축원합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다시 한 해를 허락하셨습니다. 우리는 이 해를 어떻게 잘 보내야 하겠습니까? 여러분들은 어떻게 계획들을 세우셨습니까? 이런 차원에서 첫 번째는,

합당하게 살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오늘 분문은, 여호와가 우리 하나님이신 줄 너희는 알지어다라고 말씀하십니다.

 

여기서 알지어다라는 알다의 동사를 눈여겨보아야 합니다. 이는 기본이 확인하다라는 의미입니다. 여기서 파생 되어서 인정하다, 이해하다, 분별하다 등의 의미를 나타내 주고 있습니다.

 

우리와 세상이 다른 점이 무엇입니까? 하나님을 믿고 안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믿고 안다는 것은 점진적으로 관계가 깊어진다는 의미입니다. 하나님과 친밀한 관계를 의미합니다. 이는 일상의 인간관계와 좀 차이가 큽니다. 그것은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것을 잘 하는 것입니다. 예배하고, 경배를 드리고, 영광을 돌리는 섬김으로 하나님과 친근해 지는 것을 의미합니다.

 

창조주 하나님, 전능하신 하나님, 상천하지에 홀로 계셔서 우주 만물의 주인이 되셔서 통치하시고 다스리시는 하나님, 교만한 자를 낮추시고 겸손한 자를 높이시는 하나님, 이 분을 잘 믿고 잘 알아가는 것입니다. 이것은 하나님께로 귀의(歸依)해 가는 것이고, 나님을 인정해 드리는 겸손의 자세입니다.

 

그럼 무엇으로 이 분을 우리가 인정해 드려야 합니까? 삶입니다. 구별 된 삶입니다. 거룩하신 하나님의 이름을 걸고 살아야 하는 삶입니다. 이스라엘에게 찾아오셔서 자신이 거룩하니 너희도 거룩하라!”라고 명하신 것입니다. 이것은 그 분의 백성으로써 그에 걸맞게 합당하게 살라는 것입니다.

   

요즘은 너무 비정상이 판치는 세상입니다. 비정상이 정상을 밀어내버리고 악이 정의처럼 행동을 합니다. 불법이 신앙처럼 행동을 합니다. 세상이고 교회고 뒤죽박죽되어서 옳은 것을 옳다고 하지 못하는 세상이 되어버렸습니다.

 

사람들이 비정상의 행보를 해야 성공을 하고, 일이 더 잘 됩니다. 이제는 사람들이 젖어 버렸습니다. 분명히 정상이 아닌데 잘못 되었다고 말하지 못하고 서로 눈치보고, 혹은 귀찮아서 그냥 넘어갑니다. 그래서 갈수록 더 문제가 많아집니다.

 

현재 우리가 사는 세상이 그렇고, 교회라고 별 다르지 않습니다. 주님께서 죽으시고 부활하심으로 세우신 교회는 신령해야하고 순전해야 합니다. 하지만 2천년 동안 흘러오면서 인간들은 이제 그 교회를 자신들 이익을 추구하는 집단으로 만들어 버렸습니다.

 

합당한 삶이란 무슨 의미입니까? 살전 2:12절에서 이는 너희를 부르사 자기 나라와 영광에 이르게 하시는 하나님께 너희로 합당히 행하게 하려 함이니라!” 여기서 합당히라는 의미는 적당한’, ‘알맞은이라는 것으로 경건한등의 의미입니다.

 

이것을 오늘 본문에서 여호와가 우리 하나님이신 줄 알라는 것입니다. 이것은 그리스도인답게 살라는 것입니다. 구약에서는 이스라엘을 보고 거룩하게 살라!” 라고 하셨습니다. 신약에서는 뭐라고 강조를 하십니까?

 

1:10에서는, 세 가지로 강조를 합니다. 주께 합당히 행하여 범사에 주를 기쁘시게 하고, 모든 선한 일에 열매를 맺게 하시며, 하나님을 아는 지식이 자라게 하시고라고 강조를 합니다.

 

가장 먼저는, 범사에 주를 기쁘시게 하라는 것입니다. 우리는 주님을 기쁘게 해드리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무엇을 하든지, 말입니다. 그러자면 무엇보다도 죄를 멀리하고, 거부하고, 대적하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다음은, 주님의 이름으로 선한 일에 부유하라고 합니다. 바울 사도는 영적 아들 디모데에게 권면하기를 이 세대의 부한 자들에게 가르치기를, 선을 행하고, 선한 사업을 많이 하고, 나누어 주기를 좋아하며, 너그러운 자가 되게 하라! 이것이 장래에 자기를 위하여 좋은 터를 쌓아 참된 생명을 취하는 것이니라(딤전6:18~19)

 

늙은 여자로는, 이와 같이 행실이 거룩하며 모함하지 말며, 많은 술의 종이 되지 아니하며, 선한 것을 가르치는 자들이 되고(2:3)”, 범사에 네 자신이 선한 일의 본을 보이며(7~)”, 3:8~, 이는 하나님을 믿는 자들로 하여금 조심하여 선한 일을 힘쓰게 하려 함이라! 이것은 아름다우며 사람들에게 유익하니라

 

하나님을 아는 것은, 점점 하나님을 섬기는 일에 부유해져 가는 것을 의미합니다. 성경에서 보여 준 하나님에 대한 지식과 경외심과 경배에 대한 자세가 깊어지고 묵직해 져 가는 것입니다. 매사가 하나님 중심으로, 하나님께서 명하시는 말씀을 순종하고, 전적으로 하나님을 의존하는 삶의 자세가 계속 부흥되어야 합니다. 이것이 진정한 그리스도인의 참 된 모습입니다.

 

성경은 이를 경건하게 살고자 하는 성도의 참 된 모습으로 소개를 하는 것입니다. 주를 기쁘시게 하는 것이고, 선한 열매를 맺는 것이고, 하나님을 아는 지식입니다. 세상은 비정상으로 가득 차 가는데 우리 믿는 자들은 정상의 모습으로, 삶으로 가득 차 갈 수 있어야 합니다.

 

그것이 무엇입니까? 경건하게 살고자 하는 것입니다. 어떻게 경건하게 살고자 하는 것입니까? 하나님께 대하여! 입니다. 그럼 그것은 주를 기쁘시게 하는 것이고, 선한 열매를 맺는 것이고, 하나님을 아는 지식에 부유해지는 것입니다. 이것이 합당하게 사는 성도들이며, 주님께 헌신 되는 그리스도인들입니다. 우리 모두가 이렇게 되길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다음 두 번째로 올 한 해가 주 안에서 특별한 해로 승리하시려면 어떻게 해야 하겠습니까? 아니면 무의미한 한 해로 넘기시렵니까?

하나님이 우리를 지으신 이요라는 창조신앙이 확고해야 합니다.

 

 

그는 우리를 지으신 이요, 우리는 그의 것이니라고 하십니다.

 

오늘 이 대목은 우리 그리스도인의 근본에 관한 말씀입니다. 영적 뿌리입니다. 우리 신자가 이 세상과 또 다른 점이라면 이 부분입니다

     

오늘 날 시대적 특징은 진정함이 사라지고, 애매모호하고, 불확실한 이상 기류가 판을 치기 시작했습니다. 혼합 문화가 주도하는 시대입니다. 이를 가리켜서 불확실성의 시대 혹은 복잡함이 주도하는 시대라고 합니다.

 

모든 성질이 인위적으로 결합되려 합니다. 인위적으로 법을 집행하려 합니다. 자기 기반을 더욱 어렵게 만들어 가는 법이 공공연하게 통하는 시대입니다. 지금은 정의, 원칙, 등의 좋은 의미들을 엄청 싫어합니다. , 이럴까요? 규칙적 성질이 아니라 불규칙이 주도하는 인류시대가 문이 열렸다는 것입니다.

 

성경은 이를 지옥 무저갱에서 풀러 난 사탄이 강력하게 활동하는 시대적 특징으로 소개합니다. ‘최후 마지막 발악이라고 표현하고 있습니다. , 사탄적 성질이 강해져 가는 시대이기 때문에 모든 것이 비정상의 인간 세상이 판을 치는 것입니다. 그래서 성경의 사실들을 부정하고 하나님의 뜻에 반하고 대립하는 사탄적 성질이 강해지고 의로운 힘들이 약해져 가는 것입니다.

 

교회적으로는 성경의 모든 사실들이 변경 되려 하는 위험에 놓이고, 목회자들이나 성도들은 이로부터 교회를 보호하고 지키려 하지 않는 배도의 물결이 주도되는 현상, 즉 교회는 본 길에서 이탈하려 한다는 것입니다. 무엇보다도 인간이 자신들 중심의 세상을 만들고자 성경중심의 창조 신앙을 부정해 간다는 사실입니다.

   

성경은 이 창조신앙, 여기서 복음의 핵심과 맥락이 시작되고 완결 된다는 사실입니다. 왜냐하면 그것은 4 가지 연속성을 갖고 있다는 사실 때문입니다. 하나하나 단절 된 내용들이 아닙니다. 이 네(4) 의미들이 연계(連繫)되어 신성의 문제, 즉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인간 문제를 다루어주는 히스토리입니다. 하나님의 천지창조’, ‘인간의 타락’ ‘그리스도의 초림의 구속종말의 심판입니다. 이것은 기독교 복음의 핵심입니다. 그런데 이것이 창조로 조명된다는 것입니다. 첫 번 째 창조두 번째 창조입니다.

 

첫 번째 창조하나님의 기쁘신 뜻대로 영광을 받으시고자 삼위가 합의하여 성부께서 주도하심으로 세상과 인류를 창조하셨습니다. 그런데 인간이 자신들에게 주어진 자유의지를 가지고 선악과를 따 먹는 하나님의 말씀에 불순종하는 죄를 범함으로 저주를 받아 죽을 수밖에 없는 죄인으로 떨어지고 말았습니다.

 

이를 가리켜서 타락한 인간으로 결핍 된 존재, 오염되고 부패한 인간으로 불행에 처해졌다라고 그 상태를 말하고 있습니다. 무엇을 해도 진정한 만족이 없고, 무기력한 상태, 무엇을 해도 진정한 문제 해결이 없는 부족함에 빠지고 만 것입니다. 스스로 선을 행하고 구원을 얻을 수 없는 자들이 되고 만 것입니다. 무엇보다도 죽음으로 세상과 단절 되고, 그 후에는 심판이 기다리는 불행한 인생으로 떨어진 것입니다.

 

, 그렇습니까? 사탄의 유혹에 빠져서 사탄의 지배 아래로 떨어져 버렸습니다. 하나님께서 어떤 조치를 취하지 않으시면 도저히 안 되는 인간이 되어버린 것입니다. 하나님은 자신의 독생자를 이 세상으로 보내시기로 작성을 하신 것입니다. 성경은 이를 하나님의 사랑의 절정으로 소개 합니다. 이것이 첫 번째 창조와 보호하심에 대한 성경적 이해입니다. 이 사실에 문제가 없지요?

 

그런데 또 다른 창조의 의미가 있습니다. 이를 직접적으로는 예수님께서 세상으로 오셨다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성경은 이를 둘째 창조로 말하고 있습니다. 처음 창조는 하나님께서 무에서 유를 말씀으로 창조를 하셨습니다. 그런데 인간은 하나님께 불순종함으로 하나님께서 창조하신 모든 물질계와 정신계를 변질, 변형되게 하는 자들이 되고 말았습니다.

 

인간은 자신들 세계와 함께, 사탄의 지배 아래로 떨어지고 말았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이 오셔야만 했던 것입니다. 성경은 하나님의 보내심을 받았다라고 합니다. 예수님은 이런 자신을 소개하시기를 하나님의 뜻을 이루시기 위해서 왔노라!라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여기서 우리가 중요하게 여겨야 하는 점이 있습니다. 그것은 하나님께서 말씀으로창조를 하셨는데 말씀이신 그리스도께서 오신 것입니다. 그래서 첫 번째 창조와 두 번 째 창조로 구분 되고, 이를 구분하는 키워드가 있습니다.

 

첫 번 째 창조는 만들다, 제작하다, 조작하다 등의 이런 의미로 표현 되었습니다. 그렇다고 하나님께서 무슨 도구를 가지고 만드셨다는 의미는 아닙니다. 무에서 유를 만드시는 창조를 인간적인 이해를 돕고자 똑 같이 표현 한 것입니다. 이것이 언어의 인카네이선이라고 합니다. 망치질을 하고, 톱질을 해서 만드시는 것처럼 표현하신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오셔서 창조하셨다 할 때 키워드는 새롭게 하다입니다. 여기에서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회복이란 어원적 의미가 나왔습니다. 그 기본 어는 되돌아가다라는 동사적 의미입니다.

 

하지만 창조의 상태로 되돌아가다라는 의미인 동사로 사용 된 것이 아니라 부사적 의미인 다시로 사용 된 것입니다. 그러니까 다시 창조하다라는 두 번째의미를 갖는 것입니다. 성경은 예수님을 둘 째 아담이라고 칭호를 했습니다. 여기에서 소생하다라는 의미가 나오고 이것을 가리켜서 회복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다시 살다 , 새롭게 되다, 거듭나다라는 의미로써 회복입니다.

 

부연 설명을 하자면 다시 새롭게 하다, 다시 일으키다, 다시 소생시키다라는 의미로써 회복입니다. 성경은 이것을 그리스도께서 오셔서 십자가에서 희생하시고 부활하심으로 우리에게 새 생명을 주셨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첫 번 째 창조로 되돌아가서 새롭게 하여 다시 완전히 복구를 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렇다면 지금 세상이 완전히 완벽하여 문제가 없어야 합니다. 물질계, 정신계, 인간의 인격과 행위 등, 인간과 세상이 완전한 모습으로, 문제없는 상태로, 처음 하나님이 만드신 세상 그 상태로 되돌아가야 합니다. 전혀 문제없는 진정 평화의 세상으로 드러나야 합니다. 그런데 지금 그렇습니까? 우리가 예수님을 믿는 그 순간 완전히 완벽한 문제가 없는 세상이 열리고 우리의 인격이 곧 바로 문제가 없어져 버립니까

    

이것은 영적 회복을 의미합니다. 범죄함으로 죽었던 인간의 영을 살리고 회복시키시는 것을 말합니다. 그래서 소생, 새롭게 하심, 거듭남, 회복, 부흥 등의 의미를 가지고 오신 것입니다. 이를 마태복음 5:16에서는 너희 빛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새 생명, 그리스도의 생명의 빛으로 설명해 주는 것입니다. 그런데 요한복음1:4절에서 그리스도 안에 생명이 있었으니 이 생명은 사람들의 빛이라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리스도께서 생명을 가지고 계셨고, 이 생명은 사람들의 빛이라고 한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이 생명을 받는 것을 다시 소생, 혹은 회복이라 하고 이것이 빛인 것입니다.

 

그리스도께서 오셔서 만물을 새롭게 하셨다라는 의미로써 다시창조’ ‘재창조로 밝혀주는 것입니다. 그래서 주님께서 니고데모에게 너가 거듭나야 영생을 소유하게 된다라고 말씀하시며 강조를 하셨습니다. 어머니 뱃속으로 되돌아가는 것이 아니라 다시 태어나는 것입니다. 처음 창조로 되돌아가는 것이 아니라 다시 재창조를 하신 것인데 새롭게 하심입니다.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말입니다.

 

여기에는 중요하고 핵심 의미들이 있습니다. 먼저는 죄와 죽음의 문제 해결로부터의 새롭게 하심입니다. 다음은, 신분상 하나님의 자녀 되도록 새롭게 하심입니다. 다음은, 하나님의 공의를 만족케 하심과 화목케 하시는 새롭게 하심입니다. 끝으로, 생명의 빛과 영생하게 하시는 새롭게 하심입니다.

 

이것이 우리에게 있는 창조신앙입니다. 가장 성도다운 신앙의 기능 성경적 인간 회복에 대한 고찰이란 글을 주제를 치면 인터넷에 뜹니다. 이 두 글을 꼭! 읽으시면 더욱 은혜가 될 줄 믿습니다.

 

그리스도의 새롭게 하심이라고 할 때, 중요한 포인트 하나가 더 있습니다.

 

첫 번째 창조 시에는 가정이었지만 두 번째 창조로 오신 주님은 교회시대를 가져 왔다는 사실입니다.

 

이는 교회 중심 시대로써 교회를 통해서 구원의 시대를 여시고자 하신 것입니다. 이런 점에서 교회 밖에는 구원이 없다라고 강조를 한 어거스틴의 성경 해석은 맞는 것입니다. 이것이 새롭게 창조하심입니다.

 

그래서 주님은 제자들을 부르시고 세우셔서 교회를 맡기신 것입니다. 바울 사도도 자신의 남은 고난을 주님의 몸 된 교회를 위해서 채운다라고 고백 했습니다. 그러니까 신약 시대의 강조의 초점은 가정이 아니라 교회요 사명이라는 것입니다.

 

가정은 구약 창조시 타락의 의미, 그래서 타락의 첫 열매가 가정 안에서 형제의 살인으로 드러났지 않았습니까? 주님께서도 자신이 오신 것은 가정에 불을 던지시기 위해서 왔노라! 강조해서 말씀하셨습니다.

 

이를 육적으로 해석하고 받아들이면 말 그대로 시험이 될 수밖에 없습니다. 왜냐하면 세상은 가장 선이 가정이기 때문입니다. 천국이 없고, 예수님과 진리를 인정하지 않는 세상은 가정이 가장 중요할 수밖에 없습니다. 하지만 하늘나라의 법칙은 타락한 가정이 결코 천국일 수 없습니다. 오직 진리를 받드는 가정이 될 때, 즉 주님 안에서 가정의 의미가 새롭게 주어지는 것입니다.

 

통일교는 가정 중심의 천국을 외치고, 이 가정을 중심으로 세계 평화를 외치고, 결국은 가정 중심의 세계 통일을 외칩니다. 그렇다고 통일교가 진정으로 가정을 중심하는 것은 아닙니다. 사람들의 마음을 사로잡는 구심점을 위해서 가정을 앞세우는 것입니다.

 

이런 식의 기독교 신앙 원리가 성립되면, 교회는 그 올무에 빠져서 정작 성경과 교회의 중심이 무너지는 기반이 되고 말 것입니다. 이런 인간 중심의 신앙원리, 혹은 세상 기준의 원리가 신앙으로 둔갑되는 거짓의 신앙으로부터 벗어나는 새로운 회복의 역사가 일어날 수 있기를 축원합니다.

  

      

끝으로, 우리는 2018, 한 해 가장 좋은 한 해가 되기를 원한다면 어떻게 해야 하겠습니까?

우리의 실존의식입니다. 사람이 자기를 아는 것입니다.

 

 

현대인들만큼 무의미한 삶을 살아가는 이들은 없을 것입니다. 그래서 현대는 상실시대라고 부르고 있습니다. 자신이 누구이고 왜 살아가는지 갈수록 무지하고 귀찮아하면서 아무렇게나 살아갑니다. 현대가 그렇게 만들고 있습니다.

 

그래서 흥청망청, 혹은 거짓으로 자신을 포장하면서 매일 그럭저럭 살아가는 자들이 너무나 많습니다. 무의미하게 너무 낭비 하는 인생으로 살다가 문제만 산적이 쌓이고 인간의 심리는 편하게 살고 싶고, 그렇게는 안 되고 계속 어려움만 쌓여가다 보니 스스로 절망이 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세상 사람들의 모습입니다. 술 퍼먹고 혹은 요즘은 피시 방에서 죽쳐서 세월을 보냅니다. 그러다가 어느 날 미쳐버리는 것입니다.

 

너무 낭비를 많이 한 시간을 보내다 보니까 그것이 쌓여서 더 이상 길이 보이지 않습니다. 그래서 세 자녀를 죽이는 지경까지 이르고 맙니다. 얼마나 악이 쌓이고 쌓이면 그렇게 하겠습니까? 세상에 친자식을 얼마나 심하게 때렸으면 그 어린아이 갈비뼈 3개가 나갔고 결국 죽여서 생매장을 하고 말았습니다. 그 뿐인가요? 자신의 어머니와 이복동생, 계부까지 죽이는 세상이 되었습니다.

 

아버지란 작자는 피시 방에서 어머니란 여자는 술 취했다는 핑계로 아이들 셋을 죽이고, 재산 문제로 어머니를 죽이고, 이제 막가는 세상이 되고 있습니다. 이것은 세상 사람들의 삶의 방식입니다. 아무런 의미 없이 낭비 인생으로 살아오다가 어려움이 쌓여만 왔고, 자신은 더욱 무력해지고 성격은 더욱 난폭해져 가면서 이렇게 막가는 행동을 아무렇지도 않게 해대는 인간들이 많아진 시대가 되고 만 것입니다.

 

하지만 우리 신자들은 이 세상 속에서 아무런 의식 없이 살아가면 안 됩니다. 우리 믿는 자들은 결코 이런 세상을 따라가면서 원망하고 절망해도 안 됩니다. 비록 가난하고 부족하다 할지라도 주 안에서 용기를 잃지 않으면서 더욱 부지런하게 살아야 합니다. 우리가 누구입니까? 그리스도인입니다. 그리스도인이란 예수님의 제자들, 혹은 예수 믿고 구원 받은 신자들이란 뜻입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은, 좀 더 구체적으로 말합니다. 우리는 그의 것이니 그의 백성이요 그의 기르시는 양이로다 그의 것, 그의 백성, 그의 기르시는 양라고 합니다. 여기에는 각각 관계가 되는 대상이 있습니다. 이것을 가리켜서 신앙의 대상이라 할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신앙은 대상이 있기 때문입니다.

 

첫 번째는 창조주 하나님, 두 번째는 통치자, 세 번 째는 목자와의 관계 속에서 조명되는 대상이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창조주이신 하나님께서 우리를 만드신 분이시기 때문에 우리는 그의 것입니다. 두 번 째는 하나님의 다스림을 받는다라는 차원에서 백성입니다. 마지막 세 번 째는 하나님께서 우리를 돌보아 주신다라는 차원에서 양입니다.

 

그러니까 우리는 어떤 자들입니까? 하나님께서 지으신 그 분의 것, 그 분의 백성들, 그 분의 양입니다. 이것이 우리입니다. 그냥 인간이 아닙니다. 특별히 하나님의 지음을 입고, 다스림을 받고 돌봄을 받는 대상들입니다.

 

, ‘하나님은 창조주이시고 나는 피조물이며, 하나님은 나의 왕이시며 나는 그 분의 백성이며, 하나님은 나의 목자가 되시고 나는 그 분의 어린 양입니다. 이런 귀한 존재가 세상 또 어디에 있겠습니까? 그래서 천사도 흠모할 만한 존재라고 말하고 있지 않습니까? 이것이 우리의 실존의식입니다.

 

그럼 어떻게 해야 합니까? 전적으로 하나님을 의존해서 살아야 합니다. 행전 17:28, 우리가 그를 힘입어 살며 기동하며 존재하느니라라고 말씀하십니다.

 

이 말씀은 우리 성도들의 실존의 근본을 말합니다. 여기서 힘입어는 하나님을 의존해서입니다. 하나님을 의존해서 살아갑니다. 하나님을 의존해서 움직입니다. 하나님을 의존해서 존재합니다. 이런 인간 실존 의식이야 말로 인생의 근본입니다. 하나님을 의존해야 한다는 것은 철저하게 하나님을 중심한다는 의미입니다. 이것이 인간을 가장 행복하게, 의미 있게, 보람 있게, 후회함이 없게 하는 인생의 길입니다.

 

올 한 해 전적으로 하나님을 의존해서 사시는 축복 된 한 해가 되길 축원합니다. 기도하는 해가 되십시오. 정말 무릎 꿇는 생애가 되십시오. 이것은 전적으로 하나님을 붙잡고 살아가는 인간의 겸손한 자세입니다. 오로지 하나님 앞에서 기도하는 자만이 하나님을 의존하는 자입니다.

 

 

말씀을 맺습니다.

 

 

2018, 어느 해보다 이러한 성도들의 발걸음이 되시길 축원합니다. 우리 가정은 올 해 선교 주제를 이렇게 정했습니다. 주님과 함께 다시 걷는 축복의 해라고 정하고 성경적 세계관을 열어가는 선교의 문이 열리게 하소서!”라고 부르짖고 있습니다.

 

우리는 오늘 본문 말씀을 잘 참고해야 합니다. 하나님께 합당히 행하는 해가 되기를 원합니다. 이는 적당한, 알맞은 행위, 그래서 경건한 자의 삶입니다. 너무나 거짓이 난무한 시대입니다. 유사한 신앙이 우리를 미혹해서 바른 복음에서 멀어지게 하는 때입니다.

 

이런 때에 정신 차려서 더욱 겸비하여 바른 교훈, 바른 말, 바른 복음에 합당히 행하고, 그것으로 하나님께 합당히 연합하여 살아가는 것, 이것이 경건의 진수입니다. 그러한 축복의 해가 될 수 있기를 축원합니다.

 

다음은 그 어느 해보다 창조주 하나님, 전능자께서 자신의 독생자를 통해서 어떻게 우리를 자신의 자녀들로 삼으시고, 언제나 거룩한 삶 가운데로 인도하시는? 어떻게 영원한 생명의 나라로 인도해 가시는지? 그 창조하심과 보호하심과 새롭게 하심에 대해서 확고한 믿음으로 흔들림이 없는 한 해가 되어야 합니다.

 

이 시대는 인간들이 과학적 발견으로 교만해 져서 창조의 의미를 버리고 원시적인 신앙의 산물로 취급하기 시작했습니다. 이 같은 인간적 노력들은 성경에서 말하는 하나님의 창조신앙을 흔들어 놓고 있습니다. 이런 때에 우리는 결코 우리의 근본이 되는 창조주 하나님과 멀어져서는 안 됩니다.

 

하나님의 섭리로 그리스도 예수로 안에서 구속함을 받아 새롭게 된 새 생명의 삶의 회복이 무엇인지를 잘 새기시고, 주님께서 우리를 새롭게 하신 자들로써 거룩한 삶으로 헌신 되는 축복의 해가 되기를 축원합니다.

 

무엇보다도 우리는 그 분의 것이요, 백성이요, 기르시는 양인 성도들로써 귀한 존재들임을 알아야 합니다. 이것은 우리 자신이 누구임을 믿음으로 직시하고 그에 걸맞게 잘 살아야 합니다.

 

천사도 흠모할 만한 존재들로써 경건하게 살고 자신을 더러움에 물들지 않도록 깨어 기도로 무장하여 하나님의 뜻을 잘 따르는 복 되고 은혜롭고 평안이 넘치는 “2018년 주님과 함께 다시 걷는 축복의 해가 될 수 있기를 그리스도 예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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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작성자마라나타jk | 작성시간 18.01.14 은혜 말씀 감사드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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