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AFE

디모데 전.후서 연구(1)

작성자항상 새롭게(김종신선교사)|작성시간18.04.22|조회수123 목록 댓글 0

   

   

디모데 전.후서 연구는 선교지에서 강의용으로 준비를 하고자 시작을 해 본다. 틈틈히 시간을 내서 하다보니 진행 속도가 일정하지 않지만 은혜 주시는대로 진행을 해가고 있다. 아쉬운 점은 진즉 이 목회서신을 붙잡고 은혜를 받았어야 했다고 여긴다. 얼마나 사도께서 디모데에게 주옥 같은 말로 주님의 몸 된 교회와 성도들을 어떻게 인도해 갈 것인지, 구구절절 붙잡고 깊이 묵상하다보니 너무 은혜가 깊고 놀랍지 않을 수 없다. 성령께서 강렬하게 이끌어 가주심을 강하게 느끼면서 해석을 해가고 있다. 뜻있는 성도들이나 목회자들이 함께 은혜 받기를 원한다.

   

   

  

디모데 전.후서 연구

  

 

서론/ 글을 시작하면서

  

   

본서는 바울사도가 자신의 영적 아들 디모데에게 보낸 서신이다. 바울 서신서에서 디모데는 자주 등장한다. 디모데는 소아시아 루스드라 사람이다. 그의 아버지는 헬라사람으로 일직 죽었던 것 같다. 유대인인 어머니 유니게와 외할머니 로이스로 부터 유대교의 교육 아래서 성장했다. 모범적인 사람으로 굳세고 알찬 사람이었던 것 같다. 사도와의 관계는 제2차 선교여정에서 만난 제자이자 조수와 같은 역할을 한 동역자로서 믿고 신뢰하여 중요한 일들을 맡길 수 있었던 대상이었다. 순회 선교는 물론 사도의 2, 3차 선교여정에도 함께 했다. 또한 사도가 만년에 개척하고 목회를 했던 에베소 교회의 후배 담임으로 목회를 했다.

 

이 서신의 기록 시기는 주후 60 년 중반 경이다. 이 서신의 특색은 디도서와 함께 목회서신으로 분류된다. 사도께서 자신의 영적 아들이자 제자인 디모데에게 서신으로 목회의 도를 전수하고자 한 것임을 알 수 있다. 그러므로 본서는 영적 제자들이요 자식들인 디모데디도가 주님의 몸 된 교회를 맡아서 어떻게 목양하느냐? 그리스도의 피로 값 주고 사신 양 무리들을 어떻게 먹이느냐? 이에 대한 교훈을 구체적으로 명시하는 교훈서라는 점이다. 이런 점에서 중요한 부분 몇 가지를 먼저 살펴 볼 필요가 있을 것이다.

  

맨 처음은, 사도 자신의 사도직 문제이다.

 

이것은 사역 내내 사도자신을 시험하게 하는 아킬레스건이었다. 사도에게 문제가 있었던 것이 아니다. 언제나 비방자들이 시비꺼리들을 만들면서 걸고 넘어졌던 것이다. 이것은 오늘날 우리들에게도 동일하게 일어나는 문제이다.

 

사도께서 13권의 서신서 서두에 강조하는 것은 사도직과 관련이 많다. 본문에서도 동일하게 강조를 한다. “우리 구주 하나님과 우리의 소망이신 그리스도 예수의 명령을 따라 그리스도 예수의 사도 된 바울은”, 이렇게 시작하고 있다. 영적 아들 디모데는, 이런 자신의 사도직을 그 누구보다 더욱 잘 이해를 하며 동의를 하는 대상이다. 이런 디모데에게 다른 서신보다 사도 직분에 대해서 더욱 강조를 하고 있다.

 

그 이유가 무엇인가? 복음의 사역자로 임하는 자들은 하나님께서 그를 당신의 종으로 부르셨다라는 소명 의식이 확고해야 한다. 왜냐하면 이와 같은 소명의식 없이 이 자리에 설 수도 있기 때문이다. 본서에서도 그런 자들이 누구인지 지명 하고 있다. 이런 점에서 바울 사도께서는 1절에서 자신 사도직의 보증이 되시는 하나님을 구주로”, “그리스도 예수를 우리의 소망이신 분으로 소개를 하고 있다는 것은 매우 중요함을 일깨워주는 부분이다. , 하나님과 예수님의 이름을 걸고서 자신의 사도 직분을 거론한다는 사실이다.

 

우리의 구원자이시오 우리의 소망이신 하나님과 그리스도의 명령에 따라서 사도가 되었다고 분명한 소명의식을 밝히는 것이다. 이 점을 디모데에게 인식시킨다는 사실이다. 사람은 하나님의 명령을 거역할 수 없다. 명령을 거역하면 죽음이다. 거역하고자 하는 모세를 죽이려 하지 않았는가? 사도께서는 자신이 받은 사도 직분을 얼마나 귀하게 여겼는지 모른다. 확실히 오늘 날 사명자들과는 그 근본부터가 다른 점이다. 그래서 이 사도직이 어떻게 자신에게 주어졌는지를 고백하는 것이다.

 

자기가 원해서 취한 것도 아니다. 자신의 사명의식이 좋다고 해서 가진 것도 아니다. 더욱이 자신의 학식의 소산이거나 어떤 사람의 권유로 말미암은 것도 아니다. 조직적으로 예속 된 관계에서 시작 된 것도 아니다. 오늘 날은 이렇게 양다리 걸치고 사명의 길로 들어오는 자들이 태반이다. 하지만, 사도는 우리의 구주이신 하나님과 소망이신 그리스도 예수의 명령을 따라 되었노라! 라는 사실을 강조하면서 고백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다음은, 명령과 사명감의 함수관계(函數關係)이다.

 

바울사도가 말한 것처럼 명령을 따라 사명을 받았다는 말이다. 이것은 하나님이 주시는 직분의 불가피성(不可避性)과 사명감에 대한 책임에 근거하고 있다. 여기서 몇 가지로 나누어서 생각할 수 있다.

 

- 명령을 받았다는 말은, 다른 사람의 생각이나 판단에 좌우 될 수 없다는 것을 의미한다. 타인이 뭐라 해도 명령을 받은 것은 자기나 자신과 관계 된 그 어떤 것도 그 직분을 포기 하게 할 수 없으며, 등한히 하게 할 수도 없으며, 누구의 권유로라도 그 직분을 변경시킬 수 없다는 뜻이다.

  

- 명령을 받았다는 말에는, 명령을 받은 사도께서 사명감을 전제로 하고 있다. 하나님과 그리스도 예수로 말미암아 받았으니 다만 자신이 섬기는 하나님께 죽도록 충성해야 될 것을 사명으로 각오한 바울의 결심을 보여 준다.

   

- 이 같은 바울사도의 표현은 교회에서 받는 모든 직분에도 해당된다는 사실을 알아야 한다. 교회에서 받은 직분은 하나님의 명령으로 받은 것이다. 명령으로 받았으니 그 직분에 대한 책임이 따르는 것이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그 책임을 묻는 일이 반드시 있다고 하는 사실을 알고 두려운 마음을 가지고 직분에 충성해야 한다.

   

정리를 해 보자! 사명감이란 하나님의 부르심의 명령을 받은 인간이 어떤 자세로 임하고, 그 책무를 다하기까지 어떻게 얼마나 수고를 마다하지 않고 끝까지 감내하는가? 이런 점에서 하나님의 명령을 따르는 인간의 태도요, 사명의식을 갈무리 하는 인간성이라 할 수 있다.

   

한 달란트 받은 악한 종처럼 수건에 싸서 땅에 묻어 둠으로 책망 받는 어리석은 종이 되지 않도록 하는 것이다. 직분에 대해 끝까지 책임을 다해야 한다. 명령에 대한 책임은 회피할 길이 없다. ‘못 하겠다라고 물러선다고 물러설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직분을 받지 않겠다고 던져 버린다고 던져 질 수 있는 것도 아니다.

   

하나님께서 내가 네게 준 그 달란트를 어떻게 했느냐라고 반드시 물으실 때가 있다. “맡은 자에게 구할 것은 충성이라고 했다. 충성하므로 맡은 자의 책임을 모두 감당해야 한다. 잘하면 주님으로부터 놀라운 칭찬을 듣게 된다. 이 칭찬은 장차 받을 상급과도 연관이 있다. “네가 지극히 적은 일에 충성하였으니라고 말씀해 주신다.

   

그렇다. 직분에 대한 책임은 지극히 작은 일에까지 미친다. 그리고 칭찬 역시 지극히 적은 일부터 인정해 주시는 것이다. 잘못 하거나 고의적으로 회피하면 주님의 무서운 책망을 듣게 된다. “악하고 나태한 종이란 불명예스런 책망을 듣게 되고 거기에 해당되는 문책을 받는 것이다.

  

  

끝으로, 바울사도께서는 그의 영적 아들 디모데를 가리켜서믿음 안에서 참 아들이 된 자라고 부르고 있다. 왜냐하면 사도께서 믿음으로 이끌고 양육하였기 때문이다. 자기가 전도하여 주님 앞으로 인도한 사람을 큰 그릇으로 만들 수 있는 일은 대단히 보람이 있고, 상급 받을 만한 하나님 나라의 마땅한 행위이다.

 

그런데 오늘 날 교회들을 보면 담임목사가 후배들을 하나님의 교회에 귀한 지도자들로 육성하려고 하기 보다는 개인적으로 자신의 부하직원 부리는 것으로 이해하려고 한다. 그래서 선교 3세대 교회적 환경은 비정상적이고 교회를 어지럽히는 지도자들이 배출 된다는 사실이다.

 

우리는 질서 때문에 존중하는 관계는 되어야겠지만 사적으로는 주님과 각자 관계를 하는 종들이라는 사실을 간과(看過)해서는 안 될 것이다. 담임이든 부목이든 모두가 주님으로부터 명을 받았다는 사실이다. 비단 관계 문제뿐만이 아니다. 주님께서 우리에게 분부한 지상명령으로부터 시작해서 교회의 영적 소산물을 지키고 유지하고 발전하여 주님 오시는 그날까지 예비하는 삶을 살아가야 한다.

 

그것은 성도로써 거룩한 삶을 지향하여 깨어 있어야 한다. 그것은, 우리에게 맡겨 주신 교회의 직분을 하나님과 예수 그리스도의 명령으로 받았다고 하는 책임감을 가지고 영광스럽게 수행하는 자세를 말하는 것이다. 이것은 교회의 순전성에서 나오는 교회의 온전한 환경이다. 교회는 신령성과 함께 순결성, 순전성, 온전성, 거룩성, 등 이런 교회 본래적 환경을 잃어버리지 않으려고 힘쓰고 애써서 지키는 것이 교회 근본이다.

 

 

그런데 오늘 날 교회는 이런 근본적인 문제들을 귀찮게 생각하는 경향성이 강해진 시대가 되었다. 이는 세상 풍조(風潮)가 과거 유산들을 경시하는 유행이 주도하는데서 오는 영향이다. 목회자든 성도들이든 자신들 사감(私感)에 따라서 좋은 게 좋다는 식으로 신앙생활을 하는 교회 세대가 되어버린 것이다. 성경이 아니라 대세나 유력한 인간 말들이 주도하는 환경이 되어버린 것이다.

 

성경에 위배 되요하면 피곤한 사람으로 매도 해버린다. , 신앙을 강조하면 조용히 뒤에서 왕따를 시키는 교회나 노회 내부 룰이 작용되고 있는 세대이다. 주님께서 얼마나 마음 아파하시겠는가? 아마도 이것은 멀지 않아 교회 안에 배도하는 힘이 본격적으로 자리를 잡아가는 과정으로 연결 되는 현재의 현상이 아니겠는가?

 

다시 말해서 세상의 이치는 하루아침에 시작 되는 것이 아니라 점진적으로 변질 되면서 그것이 결정적 역할을 하는 힘을 갖는다는 사실이다. 주님께서는 마지막 때 배도의 물결이 교회 안에서 일게 될 것을 예고했다. 그 이전에 성경대로의 삶을 버려도 인간의 감각이 없어져 버리는 교회 환경, 더욱 교회 안에서 악을 행해도 피곤하다고 눈을 감고 방임하는 이런 지금의 교회적 배경이 아니겠는가?

 

그러므로 우리 자신이 버림받는 거치는 자가 되지 않도록 스스로 조심해야 할 것이다. 지금은 심판의 시대가 아니기 때문에 교회와 주님의 의를 가로막는 역할을 해도 당분간은 아무렇지 않을 것이다. 그렇다고 담대하지 마라! 주님의 사랑을 악용하지 마라! 악이 차지 않도록 조심해야 할 것이다.

  

  

다음은 본문 해석으로 이어서 계속 진행 됨

다음검색
현재 게시글 추가 기능 열기
  • 북마크
  • 신고하기

댓글

댓글 리스트
맨위로

카페 검색

카페 검색어 입력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