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디모데 전.후서 연구(9)/ 제1장 사도의 인사, 다른 교훈 금지, 감사와 기도에 대한 가르침/ 2. 다른 복음을 가르치지 말라!(3~11)|

작성자항상 새롭게(김종신선교사)|작성시간18.10.12|조회수95 목록 댓글 0

 

앞글에 이어서 계속

번호 8번 내용은 좀 보완하여 올리도록 하겠습니다.

   

 

2. 다른 복음을 가르치지 말라!(3~11)

   

    

   

다른 복음은 신약시대에 와서 매우 중요한 문제로 다루어졌다. 특히 사도에게 있어서 이 다른 복음 문제는 가장 직접적인 문제라고 볼 수 있다. 왜냐하면 거의 바울서신에서 강조되었기 때문이다. 소위 초대교회 안에서 초대교회의 시작과 함께 일어난 문제들이 대부분이었다.

  

사도께서 그리스도 예수로 말미암아 우리에게 오직 믿음으로 주시는 구원의 은혜에 대해서 가르치고 떠나면 그 후에 그곳에 율법주의자들과 할례주의자들이 와서는 거기에다가 + 율법과 할례를 받아야 구원을 받는다고 가르침으로써 이방인 성도들을 혼란스럽게 했던 것이다.

 

이에 대해서 사도께서는 더욱 확고하고 분명하고 명쾌한 그리스도 중심의 복음에 대하여, 그리스도 외에는 구원이 없다라는 바른 복음을 변증함으로써 그들을 물리쳤던 것이다. 특히 목회 서신에서는 이런 내용을 더욱 구체적으로 예를 제시하면서 다루어주는 그와 관련해서 다른 복음이 무엇인지를 분명하게 제시하며 다루어주는 내용이라 할 수 있다.

  

여기서 우리는 다른 복음에 대해서 구체적으로 해석을 할 필요가 있다. 왜냐하면 이제 막 복음이 시작 된 초대교회 안에 이미 다른 복음들이 들어와서 당대의 교회 안을 어지럽혔는데 다양성이 판치고 삶의 중심이 되는 오늘 날은 더더욱 심각한 현상들이 주도 될 수 있기 때문이다.

 

교회가 너무 세속화 되는 경향성으로 인해서 복음이 아닌 내용들이 얼마나 교회 안에 들어와서 똬리를 틀고 있는지 목회자들은 충분히 숙지할 필요가 있을 것이다. 비단 목회자들뿐이겠는가? 성도들도 이에 대해서 각성할 필요가 있을 것이다. 초대교회 당시 다른 복음의 내용들이 무엇인지, 이것이 오늘날 어떤 형태로 진행 되는지 바른 복음과 비교 차원에서 다루면서 교회를 바로 잡고 세워 가는데 심혈을 기울려야 할 것이다.

 

또한 사도가 말하는 부분을 중점으로 해서 복음에 있어서 무익한 것들이 어떻게 다른 복음과 직결되는 것이고, 그것들이 무엇인지에 대해서 소절에 따라서 구체적으로 다루도록 할 것이다. 지금도 애매모호하게 하고 비슷하게 하는 복음 인 것 같은 내용들이 얼마나 교회 안에 침투하여 복음을 방해하고 있는가? 복음이 아닌 것은 온 교회적으로, 목회자들은 당연하고 성도들이 멀리하고 경계를 해야 한다.

 

가령 예를 들자면, 내 앞에서 빤스를 내리지 않는 여권사나 집사들은 내 양이 아니다! 이것은 결코 복음이 아니다. 거룩한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는 목회자의 입에서 담지 못할 그런 말을 하는 것도 정죄의 대상인데 하물며 설교에 그 같은 표현으로, 그런데 더욱 기가 찬 것은, 그렇게 말하니까 아멘 하는 성도들이 있다는 것이다.

 

이럴 때 그곳의 성도들은 모두 일어나서 밖으로 나와 버리든지 그 교회를 떠나야 하는 것이다. 공식적으로 설교를 하면서 하나님과 그리스도와 성령의 이름으로 자신과 성적 관계를 해야 한다는 말이나 다를 바 없는 매우 부도덕한 언사를 한 것이다. 직접적으로 나하고 자야 한다 그런 말을 아니지만 그와 연관 되어 생각할 수 있는 비속어의 용어로 설교한답시고 사용한 것이다. 그것도 교회 공적인 설교 시간에 그렇게 한 것이다.

 

문제는 우리 한국교회이다. 가재는 게 편이라고 했던가? 이런 거짓 된 행위들로 인하여 교회가 타격을 입고 우리사회로부터 배척을 당하는데도 같은 수준이라서 그런 것인가? 교회 공회가 왜 있는 것인가? 이런 문제들을 바로 잡으라고 있어야 하는 것이 아닌가?

  

그런데 방임하고 묵인을 하니까 우리 한국사회가 교회를 저급하게 보려고 하면서 배척운동들이 일어나는 것이 아닌가? 혹시 이것은 그가 주장하는 대로 교회 핍박이라고 생각하는 것인가? 정말 그렇게 생각하는 목회자들 세계라면 정말 큰일이지 않을 수 없다.

오히려 그런 문제가 아니라는 점이다. 치리가 없는 한국교회 문제라는 사실이다. 치리가 없는 기반은 목회자들과 성도들로 하여금 더욱 타락으로 치닫도록 방치를 한다는 사실을 기억해야 할 것이다. 우리 한국교회가 이를 전혀 문제를 삼지 않고 그냥 넘어 가기 때문에 교회가 더러워지는 것이 아닌가? 교회의 생명은 깨끗함이다.

 

하나님께서는 내가 거룩하니 너희도 거룩하라!” 하셨다. 교회가 더러워지면 그것으로 교회 생명은 끝나는 것이다. 이것은 확실히 하나님의 이름을 욕되게 했고, 망령되이 한 것이다. 세상에 복음과 교회의 거룩성을 파괴했고, 저급한 교회 기반인 것처럼 만들어 버린 것이다. 한 사람의 더러운 입으로 인해서 말이다.

 

그런데 이 사람이 기독교의 이름으로 자유 기독당이란 정치 정당을 만들어서 한국교회를 대표한다고 하면서 정부와 대통령을 빨갱이 몰이까지 하는 것이 아닌가? 도대체 어떻게 이런 무리들이 교회 안에 들어왔고, 어떻게 저 정도의 위치까지 올라갔는지 모르겠지만 확실한 것은 바른 복음이 아니라는 사실이다. 자신들 편에 서지 않고 오로지 복음을 위해서 자리를 지키려고 하는 정상적인 목회자들보고 좌파 목회자들이라고 정치적인 용어로 매도를 하면서 말이다.

 

하나님 의식이 전혀 없는 자들의 전형적인 모습이다. 전혀 이들 모습 그 어디에도 하나님 두려워하는 하나님 존재 의식이 전혀 없다. 하지만 하나님께서는 지켜보시고 계신다. 언젠가 그 분의 심판이 시작 될 때, 자신 이름으로 악을 행하는 자들은 그대로 놓아두시지 않으신다고 하셨다.

 

의롭고 참 된 성도들은 그런 곳에서 나오게 되어 있다. 왜냐하면 그의 입에서 나오는 말들을 찬찬히 살펴보면 바른 복음이 아니라는 사실 때문이다. 성경이 말하는 전형적인 거짓 교사들의 형태가 우리 한국교회 안에서 드러나기 시작 한 것이다. 물론 다른 유형이 거짓 교사들 또한 너무 많은 시대가 되었다. 주님의 말씀이 생각나는 때이다. 더러운 것이 거룩한 곳에 선 것을 보거든(24)”라고 강조하시지 않으셨는가?

 

정이 많은 우리 한국인들은 목회자와의 정적인 관계로 인해서 거절을 못하고 의리 지킨다고 남아 있는 것이다. 이것을 신앙이라고 생각할지 모르겠지만 결국 신앙이 병들어서 죽기 전에 무너지는 신앙의 모습으로 들어가고 마는 것이다. 그러다가 나중에는 술까지 마시면서 교회 비판자들로 전락하거나 오 마이 뉴스 같은 언론인들이 되어서 교회를 핍박하고 배격하는 자들이 되고 만다는 것이다.

 

물론 이것은 거짓 된 교사들의 신앙의 불법으로 인해서 시작 된 것이지만 처음 이를 좋아하며 따랐던 자신에게 더 문제가 있다는 사실이다. 성경은 이를 가리켜서 원망할 수 없다고 강조하고 있다. 결국은 반작용으로 자신이 신앙을 부정하고 배격하는 자리에 들어가고 만 것이다.

 

이때가 화인 맞은 상태로 들어 갈 수 있음을 기억하고 베드로 같은 회심으로 들어가야지 가롯유다와 같은 후회함으로 들어가면 오히려 주님을 배반하는 자리로 떨어지고 말 것이다. 물론 이것이 하나님의 뜻이라면 어쩔 수 없지만 어리석은 성도들이 되어서는 안 될 것이다.

 

 

이런 점에서 오늘 본문의 내용을 귀하게 살피면서 오늘 자신과 교회 환경을 돌아보아야 할 것이다. 오늘 이 부분은 목회에 있어서 실생활과 관련해서 매우 중요한 내용들이 다루어지고 있다. 목회서신 전체를 살펴보면 교회적 환경으로써 성도들을 어떻게 신앙으로 잘 지도해야 할 것인지에 대해서 전반적인 내용들로 가득 차 있음을 알 수 있다.

 

목회자들이 이를 잘 연구하고 현실 삶에 그대로 반영한다면, 목회자 개인 자신은 물론 온 교회적으로 건강한 기독교를 지향하는데 지침서로써 귀한 은혜들이 주어진다는 사실이다. 목회자들이 이를 등한이 하여 숙지하지 않고 너무 현실 논리에 눈이 밝아지니까 교회가 세속화로 급속도로 변질되어 가는 것이다.

 

사도는 수리아 안디옥에서 비시디아 안디옥디모데의 고향을 거쳐서 웃 지방으로 가고자 비두니아에 머물면서 드로아로 내려갔다. 이때까지는 디모데가 바울사도와 함께 했던 것 같다. 바울은 이곳에서 본래 웃 지방으로 거쳐서 터키와 인도 등을 거쳐서 아시아 지역으로 방향을 잡아서 행진을 하고 있었던 것이다.

 

사명자들, 그리고 신자들의 삶에는 특별한 경우가 있다. 그것은 하나님께서 삶에 개입하신다는 것이다. 특별히 하나님께서 자신의 일을 진행해 가실 때 사명자들에게 매 순간 결정적인 때에 신비한 방법으로 역사하심을 체험한다.

 

성도들에게는 하나님의 보호하심의 손길을 통해서 더욱 믿음의 방향으로 인도하신다는 사실이다. 사도의 선교 여정에는 더욱 특별하게 강하게 개입하신 하나님의 역사를 느낄 수 있다. 그것은 당신의 종들이 어떻게 행동해야 할지에 대해서 자세하게 개입하시는 섭리이다.

 

본인의 선교 여정에서도 이와 같은 하나님의 은혜의 역사를 매번 체험한다. 하나에서부터 열에 이르기까지 작은 사건에서부터 큰 사건에 이르기까지 하나님께서 역사하실 때는 온 마음이 순간 감전되듯이 포근해지고 감동의 물결로 하나님께 절로 영광을 노래한다.

 

, 신앙의 선진들이 입을 열 때마다 하나님 영광, 하나님 영광을 노래했던 것이 바로 이런 경우이구나! 절로 머리가 숙여지면서 믿음의 마음이 더욱 깊어짐을 느끼지 않을 수 없다. 그렇다. 하나님은 우리 삶에 깊숙이 역사하셔서 세밀하고 세세하게 인도하시는데, 그 놀라움은 이루 말할 수 없다.

 

그런대 조용히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고 할 수만 있으면 그것을 입 밖으로 내면 안 된다. 왜냐하면 그 순간 하나님께서 순전하게 주셨던 그 은혜가 변질되고 사람이 들어나기 때문이고, 결코 영광이 하나님께로 돌아가지 않는다는 사실 때문이다.

 

그런데 순복음이 우리한국교회 기반을 주도하기 시작하면서 간증이라는 형태로, 그것도 하나님의 이름을 들먹이면서 앞에 나가 고백하는 것처럼 하면서 결국 인간들이 서로 PR하면서 사람 잔치가 되고 마는 것이다.

 

그리고 자기들끼리 좋은 일은 알려야 확산 된다라는 이유들을 붙여서는 은근히 세상처럼 선전 효과를 이용함으로 유명세를 타면서 돈벌이와 연결 되는 그릇 된 교회적 환경을 가져 온 것이다. 지금은 이 간증의 형태가 얼마나 식상하고 위선적이고 거짓을 부리는 도구들로 이용되고 있는가?

 

무엇보다 심각한 것은 이 간증을 하면 누구도 실제로 안 믿는다는 사실이다. 왜냐하면 너무나 거짓으로 꾸미고 잘 전달하려고 얼마나 살을 붙이고 빼고 해서 기계적으로 말들을 얼마나 잘하는가? 이런 것을 인간들이 모두 알아버린 것이다. 하지만 조직의 생리 때문에 호응하는 것이지 속으로는 비웃는 것이다.

이러한 배경에서 계속 하니, 식상한 교회 기반을 가지고 온 것이다. 이것이 인간들이 저지르는 외식하는 행위이지 하나님께서 허용하신 것이 아니다. 이제는 선교지에까지 그런 식의 잘못 된 기독교를 전하고 있는 실정이다.

 

참 된 신앙은, 결코 인간적으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다. 인간적이라는 것은, 타락한 인간성이기 때문이다. 타락이란 하나님과 대립이요 반역이다. 그래서 주님께서 불을 던지기 위해서 이 땅에 왔다고 했지 않는가? 그런데 교회가 복음이 전파되고 선교 2, 3세대로 접어들면 이 인간성을 강조하게 된다는 사실이다. 이때 교회 기반이 급속도로 무너지는 것이다.

 

우리 한국교회가 지금 그와 같은 배경으로 들어와 있다. 얼마나 교회 안에 신앙인 것 같은 휴머니즘적인 경향성들이 판을 치고 그것이 성경 말씀으로 둔갑해서 성도들을 미혹하는 내용들이 되고 있는가? 그런데 실상은 성도들이 이를 좋아한다는 사실이다. 이것이 거짓되고 사술에 잘 빠지는 타락한 인간성이기 때문에 그렇다.

 

 

하지만 우리는 본문이 사도의 행적을 눈여겨보고 우리를 들여다 볼 수 있어야 한다. 하나님께서는 성령으로 말미암아 사도의 발걸음을 돌리시고자 비두니아해변 드로아에서 하루 밤을 자도록 했다. 이 때 꿈속 건너편 마게도냐에서 손짓을 하는 사람이 있었다. 빨리 자신들에게로 건너오라는 신호를 보냈던 것이다. 잠에서 깨어난 사도는 이를 고민할 때에 성령께서 건너편으로 가라시고 감동을 하셨던 것이다.

 

우리는 영적으로 민감해져 있어야 한다. 너무 무디어 있으면, 이는 영적으로 잠자는 상태를 말한다. 그렇게 되면 성령께서 느낌을 주시는데도 그것을 영적으로 감지를 못하는 것이다. 온갖 합리적인 이유들로 세상과 가깝게 사는 이들은 이런 점에서 성령의 역사를 놓친다. 교회 부흥이 멈추는 것이 바로 이와 같은 경우에서 비롯되는 것이다.

 

하지만 영적으로 민감했던 바울사도는 즉시 순종하여 행동했다. 즉각 행동하는 믿음은 바로 깨어 있는 신앙에서부터 비롯되는 것이다. 하지만 디모데로 하여금 함께 건너오지 말고 에베소서로 가서 그곳에서 머물면서 그곳에서 만날 때까지 머물고 있으라고 했던 것 같다.

 

그러니까 사도는 자신이 마케도니아로 해서 유럽으로 갈 뿐만 아니라 아시아 에베소서로 다리 돌아와서 복음을 전하겠다는 결심을 이미 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러던 차에 에베소서에서 어떤 사람들이 다른 복음을 전한다는 말을 들었던 것이다.

 

디모데로 하여금 그것을 바로 잡도록 하기 위해서 에베소에 머물도록 했던 것 같다. 이는 디모데가 일을 잘 처리하는 젊은 친구임을 보여주는 대목이기도 하다. 다시 말해서 주님 일에 얼마나 충성 된 자임을 보여주는 대목이다.

 

사도에게 디모데는 믿음을 주는 제자였기 때문에 중차대한 일을 맡긴 것이다. 여기에는 사도이든 디모데이든 초점이 주님에게 맞추어져 있음을 의미한다. 요즘처럼 목사 개인에게 충성을 다하는 약삭빠른 그것을 원하는 지도자도, 부교역자와의 관계를 말하는 것은 아니다. 주님 일에 있어서 스승이든 제자이든 한 마음에서 나오는 충성을 의미한다.

 

에베소서는 사도에게 있어서 매우 중대한 지역이었던 것 같다. 다시 말해서 하나님은 바울 사도에게 에베소를 마음에 담도록 사도의 안목을 높이셨던 것이다. 사도는 2차 선교여정 시 고린도에서 17개월 목회를 하던 중에 박해가 일어나서 잠시 피하면서 건너갔던 장소였다.

 

그곳에서 만난 아굴라브리스길라부부와 함께 에베소서에 와서 잠시 머물다가 떠나면서 두 부부를 에베소에서 머물라 하고서 하나님께서 허락하시면 다시 돌아오마!’ 하고서 떠났던 것이다.

 

그러니까 사도와 에베소와의 관계는 매우 특별하다고 할 수 있다. 왜냐하면 사도는 에베소가 얼마나 복음의 거점지역으로써 중요함을 일찍부터 감지했던 것 같기 때문이다. 바울사도의 그 예상은 적중했다. 3차 전도 여정은 에베소에서 23개월을 머물면서 집중적으로 목회를 했다.

 

에베소가 복음 화되자 그 인근 지역의 위성도시들이 복음화 되면서 초대 일곱 교회들이 모두 형성 되었던 것이다. 이것이 바로 오늘 본문의 디모데와 관련이 있다는 사실이다. 오늘 본문에서는 마케도니아로 가려고 하면서 디모데를 권하여 에베소에 머물라고 말하고 있다.

 

이를 행전 16:1~10까지 상황을 보면, 2차 선교 시작에서 디모데를 대동하였음을 볼 수 있다. 그런데 비두니아에서 무시아를 지나 드로아로 내려갔는데 거기서 꿈으로 마케도니아 행을 하게 되었던 것이다. 여기서 바로 디모데를 에베소에 머물도록 권유했다는 것이다.

 

왜 그렇게 했느냐? 하면 수리아 안디옥에서 지금의 터기 지역으로 올라오면서 그 쪽 해변가에 있는 에베소를 지나쳤는가? 하는 것이다. 아마도 사도는 자신 선교 사역 마지막 정점에서 에베소를 공략하리라고 생각했던 것 같다. 그렇기 때문에 디모데를 2차 선교 출발 선상에서 마케도니아로 함께 건너가지 않고 에베소에서 남아서 정지작업을 하도록 한 것이다.

 

, 그럼 디모데를 남겨 놓았던 것인가? 디모데는 소아시아 지역에서 평판이 좋은 젊은이였다. 그래서 그를 유대인들에게 멸시 당하지 않도록 할례를 행하는 조치를 취하고서 대동을 했던 것이다. 왜냐하면 디모데가 앞으로 소아시아 지역에서 목회를 하려면 소아시아 여러 지역에 분포되어 있는 유대인들로부터 공격을 받지 않도록 조치를 취할 필요성 때문이었다.

 

지도자들의 이와 같은 배려는 목양에서 주님의 뜻을 위하여 매우 지혜롭고 자상하며, 예상 되는 문제들을 사전 제거 하는 예시적 행위들은 주님의 뜻을 이루는데 마땅한 처세로써 주님의 충실한 종들의 모습이라 할 수 있다.

 

하지만 오늘날 복음 때문보다는 자신의 일신상이나 위치를 지키려는 사감(私感)에 교회 정치를 하기 때문에 교회 안에 시험이 많이 일어나는 것이다. 사도는 복음을 위해서 제자의 약점 문제를 해결함으로써 정치적인 공격 거리를 제거했던 것이다.

 

그랬는데 초기에 출발을 같이 했지만 에베소에 남겨 놓은 것이다. 아마도 이는 3차 전도 여정에서 온 힘을 에베소에서 쏟고자 미연에 방법을 강구했던 것 같다. 물론 도중에 불러내서 2차 선교여정의 마무리와 3차로 이어지는 그림을 그렸지만 말이다.

 

그런데 왜, 디모데를 이곳에서 머물도록 했는가 하는 문제이다. 본문은 다른 복음을 전하는 자들이 있다는 것이다. 잘못 된 복음들을 전하는 자들을 바로 잡도록 디모데를 보낸 것이라고 여겨진다. 그러니까 사도는 지역 안배나 계획을 잘 세우면서 행보를 했음을 보여주는 증거이다.

 

2차 선교 여정은 생각 밖에 성과가 별로 좋지 않았다. 계속 가는 곳마다 박해자들이 시비를 걸면서 방해를 함으로 피하기가 일수였다. 도망을 하던 중 아덴에서 실라와 디모데를 기다리다가 그 곳이 우상으로 가득 찬 것을 보고 한 곳에 머무르지 못하고 이동을 했다.

 

결국 고린도에서 실라와 디모데를 조인하게 되었던 것이다. 이곳에서 사도에게 중요한 동역자들이 된 아굴라브리스길라부부 또한 만나게 되었다. 그러니까 고린도에서 디모데, 실라, 아굴라 브리스길라 부부 등이 연합하여 사도를 협력했음을 알 수 있다. 여기서 처음으로 목회 스타일로 비교적 오랫동안 머물면서 복음전파를 이어 간 것이다.

 

15개월 정도 고린도에서 목회를 하던 중 핍박이 일어나자 잠깐 피하겠다고 배타고 건너 간 에베소로 간 것이다. 실라와 디모데는 나오지 않는다. 하지만 고린도로 내려온 디모데가 행전19:22절에 등장하여 함께 있는 것을 볼 때, 에베소서 사역까지 쭉 함께 동행을 하고 있었던 것 같다.

 

그렇다면 2, 3차 선교 여정에 디모데가 바울 사도의 선교 여정에 얼마나 중요한 역할을 해 주는 핵심 멤버였음을 잘 드러내 부여주고 있다. 에베소 사역에 얼마나 디모데가 중요한 역할을 했는가? 라는 점이 부각 되고 있다는 사실이다. 더군다나 3차 에베소서 중점 사역에 디모데와 이 두 부부가 함께 사도의 에베소 사역을 기다리면서 중요한 작업을 했을 것이라는 것은 자명한 일이다.

 

어떠한 이유로든 디모데는 에베소서 교회에 남아서 바울 사도의 제3차 선교 여정의 길닦이를 했다는 사실이다. 충성 된 자들의 모습이다. 이름 없이 빛도 없이 자신이 가야 할 길을 묵묵히 걸어가는 이들의 모습이다.

 

다음에 이어서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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