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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학

"바르트의 신학과 설교"(김명용 교수 강의 요약)

작성자TaeYoung|작성시간10.08.29|조회수228 목록 댓글 0

출처: 김명용교수(장신대 조직신학)의 강연. 2010년 8월 23일 교회신학연구원 주최의 신학심포지움에서.
정리: 최태영교수(교회신학연구원장)

 

서언

 

바르트는 하나님의 말씀의 신학자이다. 바르트가 하나님의 말씀의 신학자란 것은 이미 바르트의 신학이 성서와 설교와 매우 깊은 관계를 맺고 있을 것이라는 것을 암시한다. 바르트는 성서의 중요성을 강조했고 교회의 선포(Verkündigung)의 중요성을 강조했다.

 

I. 성서의 실재영감과 설교

 

성서는 문자적으로 많은 오류를 가지고 있는 것이 사실이다. 그러므로 근본주의자들처럼 축자영감설적으로 성서를 읽으면 안 된다. 그러나 성서에 오류가 있다고 하여 그것이 하나님의 말씀이 아니라는 것은 아니다. 자유주의자들은 성서에 오류가 있으므로 하나님의 말씀이 아니라고 하지만, 바르트는 그러한 자유주의자들의 견해를 넘어서서, 하나님은 그 오류에도 불구하고 성서를 통하여 말씀하신다고 주장하였다.

 

바르트가 말하고자 하는 초점은 성서의 증언들은 오류가 있는 그대로 하나님에 의해, 하나님의 말씀의 도구로 쓰이고 있다는 점이다. 바르트는 이와 같은 자신의 성서관을 실재적 영감(reale Inspiration)이라는 용어로 표현했다. 실제적 영감이란 성서에 오류가 없다는 축자영감과는 다른 개념이지만, 성서적 본문이 있는 그대로 하나님의 말씀의 도구로 쓰인다는 의미에서는 축자영감과 매우 유사하다. 그런 까닭에 바르트는 17C의 옛 정통주의자들의 축자영감론과 19C의 자유주의자들의 성서관 중 하나만 택한다고 강요받는다면 단연코 17C의 옛 정통주의자들의 영감론을 택하겠다고 말한 것이다.

 

바르트의 이와 같은 성서관은 그대로 설교에 적용할 수 있다. 많은 경우에 설교자들도 오류를 범한다. 그들은 연대를 전할 때 오류를 범하기도 하고 지명을 전할 때 혼동을 일으키기도 한다. 그런데 이런 사소한 실수를 넘어서서 하나님의 말씀 자체에 대한 일부 오류를 범하고 엉뚱한 주장을 하기도 한다. 이럴 경우에 그 설교자의 설교는 어떻게 되는 것일까? 바르트의 신학적 관점에 의하면 그 오류들은 분명히 오류로 남아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께서는 오류가 있는 그 설교자의 설교를 통해 직접 회중들에게 말씀하신다. 바르트의 신학과 설교에 있어서 매우 중요한 것은 하나님께서 직접 말씀하신다는 점이다. 바르트는 언제나 살아계신 하나님께 초점을 맞추고 있었고, 이 살아계신 하나님께서 직접 성서를 통해 말씀하시고, 또한 교회의 설교를 통해 직접 말씀하신다는 것이다.

 

II. 하나님의 말씀의 양태들

 

바르트에 의하면 하나님의 말씀은 세 가지 양태를 띠고 있는데 그 중 첫째는 역사적 예수 그리스도이고, 둘째는 성서이고, 셋째는 교회의 선포(Verkündigung)이다. 그런데 이 하나님의 말씀의 세 가지 양태 가운데 세 번째 양태인 교회의 선포를 잘못 알고 있는 사람들은 의외로 많이 있다. 많은 사람들이 교회의 선포를 교회의 설교로 인식하고 있다. 그런데 바르트가 말하고 있는 교회의 선포는 교회의 설교가 포함되는 개념이지만 교회의 설교로 제한되는 개념이 결코 아니다. 바르트가 말하고 있는 교회의 선포는 교회의 가르침을 의미하는데 그것을 다른 말로 다시 표현하면 교회의 교의를 의미한다. 즉, 교의학이 말씀의 셋째 양태라는 뜻이다.

 

이와 같은 바르트의 신학적 입장에서 보면 교회의 설교는 하나님의 말씀의 세 번째 양태에 속하는 어떤 것이다. 바르트에 의하면 교회의 설교는 분명히 하나님의 말씀의 양태이다. 그런데 이 세 번째 양태인 교회의 설교는 하나님의 말씀의 첫째 양태인 예수 그리스도 계시와 둘째 양태인 성서에 의해 끊임없이 검증되고, 만들어지고, 비판되어야 하는 하나님의 말씀의 양태이다. 교회의 설교가 예수 그리스도 계시에 반하는 경우에는 그 설교는 수정되어야 한다.

 

Ⅲ. 설교의 주제인 예수 그리스도

 

바르트 신학에 있어서 하나님의 계시이자 하나님의 말씀은 예수 그리스도이다. 성서가 하나님의 말씀인 것도 전적으로 예수 그리스도에 의존한다. 구약은 예수 그리스도를 예언하는 책이기 때문에, 신약은 예수 그리스도를 증언하는 책이기 때문에 하나님의 말씀이다.

 

하나님의 계시가 예수 그리스도이기 때문에 교회의 설교도 예수 그리스도에 초점을 맞추어야 한다. 예수 그리스도의 정신이 교회를 지배하지 않으면 그 교회는 참 교회가 아니다. 교회의 머리가 예수 그리스도이시고, 교회는 전적으로 예수 그리스도께 의존하는 공동체이고, 교회의 설교도 철저히 예수 그리스도께 초점을 맞추어야 한다. 그러면 예수 그리스도께 초점을 맞춘 설교는 과연 어떤 설교일까? 바르트에 의하면 예수 그리스도께 초점을 맞춘 설교는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부활을 통해 계시된 놀랍고도 놀라운 화해의 사건에 초점을 맞춘 설교이다. 이 화해의 사건은 곧 복음이다. 그런 까닭에 교회의 설교는 예수 그리스도께 초점을 맞추어야 하는데, 곧 복음적인 설교여야 한다.

 

복음적인 설교는 율법적인 설교와 크게 구분된다. 바르트는 율법과 복음 사이의 전통적인 관계도 복음과 율법이라는 도식으로 바꾸었다. 바르트에 의하면 율법은 복음이 드러나는 형식 이외의 다른 것이 아니다. 바르트는 평생 율법주의를 자신의 신학적 적으로 생각했다. 바르트에 의하면 자신의 신학에 문제가 있다고 비판하는 사람은 틀림없이 심술 사나운 율법주의자일 것이라고 단언했다. 예수 그리스도 사건은 오직 은혜만을 계시하는 사건이다. 하나님의 무한한 은혜가 인간을 구원하고, 살리고, 거룩하게 만든다는 것이 예수 그리스도 사건의 계시의 내용이다.

 

복음적인 설교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진리라는 것을 선포하는 설교이다. 진리는 예수 그리스도이시지 다른 어떤 것도 아니다. “예수께서 승리자!”(Jesus ist Sieger!)이시고 악마의 세력은 끝장났다는 것을 선포하는 것이 복음적인 설교이다. 예수 그리스도 외의 다른 주를 만드는 것은 가장 비복음적인 어떤 것이다. 바르트가 종교를 우상숭배라고 규정한 것도 이와 같은 맥락을 갖고 있다. 바르트에 의하면 세상 종교는 하나님 외의 다른 신을 만들고 이 신을 경배하게 함으로 말미암아, 참으로 인간을 구원하시는 하나님께로 오는 길을 막기 때문에 매우 위험하다. 그런데 이 다른 신은 은혜롭지 않고, 인간을 구원하지도 못한다. 복음적인 설교는 진리시고, 인간을 참으로 구원하시고, 인간에게 무한히 은혜로우신 예수 그리스도를 전하는 설교이다.

 

Ⅳ. 설교의 준비와 하나님의 말씀의 기적

 

1. 교의학의 중요성

 

교의학은 설교가 오류에 빠지지 않고, 이단적 사상에 물들지 않도록 하는 경찰의 기능만 수행하는 것이 아니다. 바르트에 의하면 교의학은 설교의 내용이다. 설교자가 설교에서 전하고자 하는 바 그것(was)이 바로 교의학이다. 교의학은 설교의 바른 길잡이를 위해서 있을 뿐만 아니라 설교의 주제와 내용이다. 교의학은 교회가 세상을 향해 전하고자 하는 내용인데 바르트의 신학에 의하면 하나님의 말씀의 셋째 양태이다. 이 교의학이 설교의 양태를 띠게 되면 교회의 설교가 되고, 가르침의 양태를 띠게 되면 교회의 교육이 되고, 전도자의 입을 통하게 되면 세상을 향해 선교하는 말씀이 된다. 즉, 교회의 모든 실천적 행위는 교의학을 그 내용으로 담고 있는 행위이다. 그런 까닭에 교의학은 교회를 살아서 장성하게 만들거나 혹은 교회를 쇠퇴하게 만들 수 있는 결정적 자리이다. 교회가 잘못된 교의학을 갖고 있으면 교회의 설교와 교육과 선교가 모두 잘못되고, 이로 인한 교회의 손실은 심각하게 된다. 이는 교의학이 하나님이 쓰시는 진정한 도구가 되어야 한다는 말인데 교회가 매우 심각하게 생각해야 하는 차원이다. 잘못된 교의학은 하나님의 말씀의 도구가 되기에 실패할 가능성이 매우 높고, 결국 성령께서 역사하지 않는 설교와 교육과 선교가 행해질 가능성이 높아진다.

 

그런데 설교의 주제와 내용이 교의학이라고 했을 때, 많은 한국의 설교자들이 의아해할 것인데, 그 이유는 그들은 설교의 주제와 내용이 성서라고 생각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런 이유로 설교학자들까지도 설교를 위해 조직신학자와 대화를 하지 않고 오직 성서학자와 대화를 하는 경향을 나타낸다. 바르트에 의하면 성서는 설교의 모체가 되는 텍스트(Text)이다. 성서본문을 떠난 설교는 있을 수 없다. 하나님은 성서 본문을 통해 직접 말씀하신다. 그러나 그 말씀하시는 하나님의 말씀을 정확히 듣기 위해서는 오늘의 정황을 정확히 알아야 하고, 오늘의 정황과 성서를 연결시키고 있는 교의학이 매우 필요하다. 바른 성서주석도 교의학의 도움이 매우 필요하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는 오늘의 정황 속에서 새롭게 말씀하실 가능성이 많기 때문이다. 교의학은 오늘 이곳에서 떨어지는 하나님의 말씀을 찾는 학문이다. 설교자는 지금 여기에서 하나님의 말씀을 들어야 하고 이를 전해야 한다. 바르트의 신학에서 듣는 교회(Hörende Kirche)의 중요성은 엄청나다. 하나님의 말씀을 바르게 듣기 위해서는 오늘, 이곳의 상황에 대한 바른 인식이 매우 중요하다. 왜냐하면 오늘 이곳에 있는 인간과 세상의 곤경을 구원하시고자 하시는 하나님의 은혜의 말씀이 떨어지기 때문이다. 교의학은 성령에 의해 만들어져가는 하나님의 말씀의 셋째 양태라는 것을 늘 유념해야 한다.

 

2. 바른 주석과 바른 교의

 

바르트가 바른 교회의 선포를 위해 언급한 3가지 단계, 곧 주해(explicatio), 사상(meditatio), 적용(applicatio) 가운데 첫째 단계가 주석이다. 바른 주석을 위해 성서비평학은 필요하다. 바르트가 성서비평학을 넘어서는 하나님의 말씀에 관한 교의를 체계화시켰지만 성서비평학을 무시한 것은 절대로 아니다. 성서비평학을 넘어선다는 것과 성서비평학을 무시하는 것은 굉장히 다르다. 성서비평학의 사용과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바른 선포는 이것이냐 저것이냐의 대립관계가 아니다. 바르트가 성서비평학을 공격한 것은 하나님의 말씀 자체가 성서비평학의 대상이 아니라는 것이지 하나님의 말씀을 듣기 위한 전단계로 비평학이 필요 없다는 것은 아니었다. 바르트의 강조는 성서비평학은 자신의 한계를 지켜야 한다는 것이었지, 성서비평학적인 모든 노력이 잘못된 것이라는 뜻이 아니었다.

 

바르트에 의하면 바른 주석만 중요한 것이 아니고 바른 교의 역시 매우 중요한다. 왜냐하면 바른 교의가 바른 설교로 가는 결정적 위치에 있는 것이기 때문이다. 바르트는 바른 교의를 위한 복음적(evangelisch) 신학의 중요성을 강조했다. 바르트는 가톨릭이나 자유주의 신학의 교의에 대해서는 매우 회의적이고 비평적으로 보았다. 바르트는 루터(H. Luther)와 칼빈(J. Calvin)에 의해 시작된 복음적 신학이 하나님의 말씀을 바르게 담고 있는 신학으로 보았는데, 개신교 신학전통 가운데는 개혁파 신학 전통에 큰 가치를 두었다. 바르트의 신학적 관점에서 보면 개혁파 교의학이 하나님의 말씀의 셋째 양태의 기능을 하고 있는 것으로 추론할 수 있다. 자유주의 신학의 교의학은 바르트의 신학적 관점에서 보면 잘못된, 이단성을 갖고 있는 교의학이다. 그런 까닭에 그것은 바른 교의학이 아니다.

 

설교의 일차적 콘텍스트(Context)는 교회이다. 그런 까닭에 교회의 정황은 설교에 매우 중요하다. 설교자는 회중의 곤경을 깊이 알아야 하고 그 곤경 위에 비취는 하나님의 은혜의 빛과 말씀을 정확히 보고 들어야 한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 회중들의 곤경과 질문에 대해 분명히 답을 말씀하고 계시기 때문이다.

 

3. 성령의 역사와 인간의 기도

 

잘 준비된 교의학을 기초로 설교를 잘 준비했다고 해서 설교의 준비가 끝났다고 생각하면 큰일이다. 왜냐하면 그 모든 준비는 사실상 아무 것도 아닐 수 있기 때문이다. 설교는 하나님께서 인간의 말은 통해 듣는 자들에게 직접 말씀하시는 사건(Ereignis)이 일어나야지 참된 설교가 된다. 그런데 설교자가 아무리 주석을 잘 하고 바른 교의학에 기초한 설교 본문을 가지고 설교를 해도 하나님께서 그 설교를 통해 아무 말씀도 안하실 수도 있다. 하나님께서 말씀하시지 아니하시면 그 설교는 공허한 인간의 말로 전락할 수밖에 없다.

역으로 성서분문에 대한 주석에 문제가 있고 교의학의 체계에 결함이 있는 설교여도 하나님께서 그 설교를 통해 직접 말씀하실 수 있다. 설교준비가 완벽하지 못해도 하나님께서 그 완벽하지 못한 설교를 통해 직접 말씀하시고 청중들이 하나님의 말씀을 듣는 놀라운 사건이 일어날 수 있다.
 
설교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말씀의 기적이다. 하나님께서 친히 말씀하시는 말씀의 기적이 일어나야 한다. 바르트의 신학에서 중요한 것은 설교에 있어서 설교자와 회중만 있는 것이 아니고, 말씀하시는 하나님이 계신다는 것이다. 많은 설교자들은 설교의 준비에 있어서 자신과 회중만 생각하는 경향이 있다. 그런데 설교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설교자와 회중이 아니라 말씀하시는 하나님이시다. 이 말씀하시는 하나님에 대한 시각을 상실하면 이미 그 설교는 실패한 설교이다. 그것은 인간의 연설이고 웅변이지 결코 하나님의 말씀이 아니다.

 

바르트에 의하면 하나님께서 말씀하시는 말씀의 기적은 성령의 역사이다. 그런 까닭에 설교자는 반드시 성령과 함께 강단에 올라가야 한다. 그리고 하나님께서 친히 말씀하시도록 기도해야 한다. 설교자의 겸손과 기도는 말씀의 기적의 가능성과 많은 부분 연계되어 있다. 설교자는 자신을 감추고 하나님께서 친히 말씀하시도록 끊임없이 기도해야 한다. 설교의 성공은 설교자의 말이 관철되는데 있는 것이 아니고 하나님께서 친히 말씀하시는데 있기 때문이다. 설교는 성령의 사건이고, 하나님께서 말씀하시는 말씀의 기적이다. 그런 까닭에 설교자와 회중은 이 하나님께서 말씀하시는 말씀의 기적이 일어나도록 끊임없이 기도해야 한다.

 

결언

 

바르트의 하나님의 말씀의 신학은 하나님께서 직접 성서나 교회의 선포를 통해 말씀하신다는 독특한 특징을 갖고 있다. 그런 까닭에 설교자는 직접 말씀하시는 하나님의 말씀에 초점을 맞추어야 한다. 이 하나님의 말씀은 언제나 복음이고 인간과 세상을 살리시는 예수 그리스도이시다. 설교자는 오늘 이곳에서 인간과 세상을 살리시는 예수 그리스도의 음성을 정확히 듣고 이를 전해야 한다. 이 음성을 정확히 듣기 위해서는 바른 주석과 바른 교의학은 매우 중요하다. 그러나 바른 주석과 바른 교의학보다 더욱 중요한 것은 겸손과 기도와 성령의 도우심이다. 설교자는 언제나 성령과 함께 강단에 올라가야 하고 자신의 설교를 통해 하나님께서 친히 말씀하시는 말씀의 기적이 일어나도록 기도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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