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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경승[?-1197(신종 원년)] 고려 무신집권기의 무신, 재상

작성자두촌장|작성시간12.03.19|조회수274 목록 댓글 0

#高麗史100卷-列傳13-杜景升-000


杜景升    두경승

 

 

 

#高麗史100卷-列傳13-杜景升-001


○杜景升全州萬頃縣人

 

두경승은 전주 만경현(全州萬頃縣) 사람이다.

 

質厚少文有勇力

 

소박하고 순후하여 외식이 없었으며 용력(勇力)이 있었다.

 

初補控鶴軍手搏者招景升爲伍其舅上將軍文儒寶聞之曰:

 

처음에는 공학군(控鶴軍)에 편입되어 수박(手博)하는 사람의 대오에 있었는데 그의 장인

 

상장군(上將軍) 문유보(文儒寶)가 이 말을 듣고 그에게 이르기를

 

 

          두경승

 

 

 "搏賤技也非壯士所爲."

 

“수박(手博)이란 천한 기예이니 장사(壯士)가 할일이 아니다”라고 하였다.

 

景升遂不往. 

 

 그후부터 두경승은 수박하는 대오에로 가지 않았다.

 

後以隊正充厚德殿牽龍. 

 

 대정(隊正)으로서 후덕전(厚德殿) 견룡(牽龍)으로 보충되었다.

 

鄭仲夫之亂武人多劫奪人財景升獨不離殿門秋毫無犯.  

 

정중부(鄭仲夫)의 난에 무관들이 남의 재물을 약탈하는 자가 많았으나 두경승만은 홀로 전문(殿門)을 떠나지 않았으며 추호도 범하지 않았다.

 

明宗初再遷散員李義方聞其名引爲內巡檢軍指諭

 

명종 초년에 다시 산원(散員)으로 올라갔는데 이의방(李義方)이 그의 명성을 듣고 내순검군지유(內巡檢軍指諭)로 임명하였다.

 

一日退朝步出泰安門變服亡匿家人尋之三日得北山巖石*閒

 

하루는 퇴근 후 도보로 태안문(泰安門)을 나가서 변복하고 어디론지 도망가서 숨었다. 집안 사람들이 사흘 동안이나 찾으러 다니다가 북산(北山) 바위 틈에 숨어 있는 것을 발견하였다.

 

 問其故云: "嘗入直怳若夢有數人謀殺己懼而微服遁去俄有數萬人逐之因以至此."

 

까닭을 물으니 그의 대답이 “입직하여 있노라니 정신이 황홀하여지며 꿈속 같은 중에 몇 사람이 나를 죽이려 하므로 무서워서 변복하고 도망가는데 갑자기 수만 명이 뒤를 쫓아 와서 여기까지 도망왔노라”고 하였다.

 

人謂庚寅橫死者爲崇也.

 

사람들의 추측이 경인(庚寅)년에 억울하게 죽은 사람들의 작회나 아닌가? 라고 보았다.

 

義方聞景升復出喜曰:

 

이의방이 두경승이 다시 나와서 벼슬한다는 말을 듣고 기뻐하면서 말하기를

 

  "此人世不多有." 復授指諭遷郞將 

 

 “이런 사람은 세상에 그리 많지 않다”라고 하고 다시 지유(指諭)로 복직시켰다가 후에 낭장으로 올려 주었다.

 

東北面兵馬使金甫當起兵南方皆響應

 

동북면 병마사 김보당(東北面兵馬使 金甫當)이 병란을 일으킬 때에 남부 지방에서 모두 이에 호응하여 일어났다.

 

義方以其從兄郞將李椿夫及景升爲南路宣諭使椿夫性暴虐多殺邑宰

 

이의방이 그의 종형 낭장(郞將) 이춘부(李椿夫)와 두경승을 남로 선유사(南路宣諭使)로 임명하였는데 이춘무는 성질이 포학하여 고을의 원을 많이 죽였다.

 

景升從容謂曰:

 

두경승이 조용히 말하기를


"受命之日以爲方鎭構逆州郡響應禍亂連結恐難底定

 

“우리가 임명 받을 때에 지방의 군대들이 반역을 도모하고 주와 군이 적들과 연결되어 평정하기 어려울 염려가 있던 때이었다.

 

今賴公威靈巨魁已殲先聲所至束手請命誅戮旣多

 

그러나 이제는 당신의 위엄으로 해서 괴수가 이미 섬멸되었고 관군이 온다는 소문만 듣고는 손을 들며 명령에 복종하겠다고 하는데 그들을 너무 많이 살륙하였다.

 

請自今皆寬之脫有反狀情迹昭著然後誅之."

 

지금부터는 모두 관대히 처분하며 혹 반역의 정형과 죄행이 현저한 자에 한하여 처단하기로 하자!”라고 하니

 

椿夫從之南方悅服.

 

이춘부가 그의 의견대로 하였더니 남방 사람들이 기뻐서 복종하였다.

 

使還椿夫謂景升曰:

 

 이춘부가 귀환하여 두경승에게 말하기를

 

"始以公爲庸怯乃今知公寬厚謹愼能濟大事

 

“처음엔 당신을 비겁한 사람으로 여겼더니 알고 보니 당신은 관후하고 근신하여 능히 큰 사업을 완수할 인물임을 알았다.

 

向非公策豈惟叛逆未息亦使僕陷於不義."

 

전일에 당신의 정책을 적용하지 않았던들 비단 반란을 종직시키지 못하였을 뿐만 아니라 나 자신도 불의(不義)에 빠졌을 것이다” 라고 하였으며

 

 

  이춘부

 

因結爲刎頸交.

 

이것이 인연으로 두 사람은 사생을 같이 할 것을 맹세한 친우로 맺았다.

 

#高麗史100卷-列傳13-杜景升-002


景升以功拜將軍出爲西北面兵馬副使戍昌州

 

두경승은 이번 전공으로 장군에 임명되었고 서북면 병마부사로 되어 창주(昌州)를 지키고 있었다.

 

 

 

 

 

 

西京留守趙位寵起兵分道將軍朴存偉李彦功等爲位寵所執

 

서경 유수(西京留守) 조위총(趙位寵)이 반란을 일으킬 때에 분도 장군 박재위(分道將軍朴在偉)와 이언공(李彦功) 등이 조위총에게 잡혔다.

 

時景升戍旋至香山洞通路驛遇西兵與戰敗之

 

그때에 두경승은 창주로부터 돌아오는 도중이었는데 향산동(香山洞), 통로역(通路驛)에서 서경군(西京軍)과 만나서 교전하였으나 패전하였다.

 

景升至撫州館方晝食西兵千餘人突至

 

 두경승이 무주관(撫州館)에 도착하여 점심 식사를 하고 있었는데 서경군 천여 명이 돌연 나타났다.

 

景升開館門西兵爭入景升射一人

 

두경승이 관문(館門)을 여니 서경군이 앞을 다투어 들어왔으나 두경승이 쏘았다.

 

 

 

 

 

卽仆地西兵敗走.

 

한 사람이 즉석에서 넘어지니 적군이 패하여 달아났다.

 

景升謂士卒曰:

 

 이때 두경승이 병사들에게 이르기를


"賊在前不可從舊路."  

 

“적군이 앞길을 막고 있으니 구로(舊路)로 갈 수 없다”고 하고

 

乃由徑夜行至一寺解鞍與僧問路

 

지름길을 찾아 밤길로 가다가 어떤 절(寺)에 당도하여 말안장을 끊어 중에게 주면서 길을 물었다.

 

僧指之景升日夜兼行八日而至京.

 

중이 가르키는 길을 따라 낮에 밤을 이어 8일 간 행군하여 서울에 도착하였다.

 

時元帥尹鱗瞻已出軍王以景升爲東路加發兵馬副使

 

그때 원수 윤인첩(尹麟瞻)은 이미 서경으로 출병한 때이므로 왕이 두경승을 동로 가발 병마부사(東路加發兵馬副使)로 임명하였다.

 

景升率兵五千餘人至孤山分軍爲三以左右翼急擊西兵大破之斬首千餘級

 

두경승이 병정 5천여 명을 인솔하고 고산(孤山)에 이르러 군대를 셋으로 나누어 좌익(左翼)과 우익(右翼) 군(軍)으로 하여 서경군을 급히 돌격하여 크게 격파하고 적병 1천여 명을 죽였다.

 

至宜州位寵將金朴升列車城外禦之

 

의주(宜州)에 이르니 조위총의 부하 장수 김박승(金朴升)이 성밖에다 수레를 늘어놓고 방어하였다.

 

景升選銳攻拔其城擒朴升斬之傳首于京.

 

두경승이 정예군을 선발하여 성을 공격하여 함락시키고 김박승을 생포하여 목을 잘라서 서울로 보내었다.

 

諸州鎭稍稍歸附

 

그리하여 각 주와 진(州鎭)이 점차 귀순하기 시작하였다.

 

定長二州及宣德鎭欲投女眞景升遣人撫安之

 

그러나 정주(定州), 장주(長州)와 선덕진(宣德鎭)이 여진(女眞)으로 투항하려는 동향이 보이므로 두경승이 사람을 보내 그들을 안정시켰다.

 

 女眞千餘人到定州門外欲乘危鈔掠景升諭解之女眞乃退. 

 

 여진 사람 천여 명이 정주 성문밖에 와서 이 위급한 틈을 타서 노략질하려 하였으나 두경승이 해설과 권유로써 대하니 그들도 물러갔다.

 

景升至孟州西兵據險以拒

 

두경승이 맹주(孟州)에 이르니 서경군이 험한 지형을 이용하여 항거하였다.

 

與李義旼石麟等擊破之斬四百級孟德二州兵弃城走

 

이의민(李義旼), 석린(石麟) 등과 더불어 적을 격파하고 적병 백여 명을 죽이니 맹주(孟州), 덕주(德州) 적병들이 성을 버리고 도망하였다.

 

景升慰居民令按堵

 

 두경승이 주민들을 위로하여 안착시켜 살게 하였다.

 

撫州堅拒不服雲中兵又至爲聲援

 

그러나 무주(撫州)는 견결히 반항하며 굴복하지 않았으며 또 운중(雲中) 군대가 도착하여 서로 성원하였다.

 

景升分兵擊之雲中兵退撫州遂降.

 

두경승이 군대를 둘로 나누어 공격을 가하니 운중 군이 퇴각하게 되고 무주도 마침내 항복하였다.

 

時行營兵馬使及四摠管戰不利還京西兵遮路

 

 

 

 

 

 

 

 때마침 행영 병마사(行營兵馬使)와 4총관(四摠管)들이 전투에서 실패를 당하고 서울로 돌아가는 도중이었는데 서경군이 길을 차단하였다.

 

景升迎擊于大同江凡二十戰皆捷西兵大敗.

 

두경승이 대동강에서 적을 맞받아 싸우기를 무릇 20회에 달하였는데 모두 승리를 거두었고 서경군은 크게 패배하였다.

 

#高麗史100卷-列傳13-杜景升-003


景升還至平州王遣知奏事李光挺郊迎勞問. 及至王曰:

 

 두경승이 돌아올 때에 평주(平州)에 이르니 왕이 지주사 이광정(知奏事李光挺)을 파견하여 교영(郊迎) 나와 위문하게 하였으며 서울에 도착한 후에는 왕이 그에게

 

 "卿以死許國使兇徒挫氣功不細矣

 

“그대는 목숨을 돌보지 않고 나라를 위하여 분토해서 흉악한 무리들의 기(氣)를 좌절시킨 공이 적지 않다.

 

然大憝尙存社稷之恥也

 

그러나 원흉(元凶)이 아직껏 남아 있으니 국가의 치욕이다.

 

卿其勉之."

 

그대는 더 한층 분투 노력하라!”고 하고

 

仍命爲後軍摠管使復遣之.

 

이어 그를 후군 총관사로 임명하여 다시 전선으로 내보내었다.

 

景升踰鐵關從耀德雲中路行所至風靡

 

두경승이 철관(鐵關)을 넘고 요덕진(耀德鎭)을 거쳐 운중로(雲中路)로 들어섰는데 지나는 곳마다 적들이 바람에 쓸리듯 하였다.

 

 西兵入保漣州景升積土城外列大砲攻拔之又斬義州都領崔敬若及令猷令英等

 

 서경군이 연주(連州)로 입성하여 그곳을 확보하려 하므로 두경승이 흙을 성 밖에 쌓고 그 위에 대포(大砲)를 설치한 후 성을 공격하여 마침내 함락시켰으며 의주 도령(義州都領) 최경약(崔敬若)과 영유(令猷), 영영(令英) 등의 목을 베었다.

 

士卒入城爭取貨寶景升下令禁止之惟聽取釜鼎

 

 병사들이 입성(入城)한 후 앞을 다투어 재물을 탈취하므로 두경승이 금지령(禁止令)을 내리고 오직 가마솥 가져올 것을 허락하였다.

 

於是西北諸城皆迎降遂移師攻西京連捷.

 

연주가 함락된 후 서북 방면의 여러 성(城)에서 모두 관군을 영접하며 항복하였으므로 드디어 병력을 이동하여 서경을 공격하였는바 전투마다 계속 전승하였다.

 

西人負固久不下軍中以漣州釜鼎爲爨器

 

 서인(西人)들은 성이 견고한 것을 믿고 오랜 기간 자랑하였으므로 관군은 연주에서 가져 온 가마솥으로 취사를 하였다.

 

人便之曰: "公之計遠矣."

 

사람들이 편리하여 “대장의 계획은 참으로 원대하다”라고 말하였다.

#高麗史100卷-列傳13-杜景升-004
西兵夜出犯陣燒營門景升令曰:

 

서경군이 밤중에 성을 나와 진(陳)을 침범하며 영문(營門)에 불을 지르니 두경승이 군령을 내리기를


 "旣火矣救之何益?"

 

“이미 불이 붙었으니 불을 꺼도 별 이익이 없다”고 하면서

 

 因取物投之火益熾明如晝兵不敢入.

 

물건을 불 속에 던지니 불길이 솟아 백주같이 밝으므로 서경군이 감히 더는 접근하지 못하였다.

 

景升恩信素著西人多出城投降者遂與鱗瞻破西京擒位寵殺之西京平

 

두경승은 평소부터 은혜와 신의가 있는 사람으로 알려졌으므로 서경 사람들이 성을 나와 투항하는 자가 속출하였으며 드디어 윤인첨과 더불어 서경을 격파하고 조위총을 잡아 죽이니 서경이 평정되었다.

 

餘兵尙在復以景升爲西北面兵馬使鎭永淸.  

 

그러나 패잔병이 아직도 남아 있으므로 또다시 두경승을 서북면병마사로 임명하고 영청(永淸)을 진수하게 하였다.

 

 北路處置使李景伯欲與議軍事遣五百騎

 

북로처치사(北路處置使) 이경백(李景伯)이 군사 문제를 의논하기 위하여 5백 명의 기병을 보내 두경승을 청하였다.

 

邀之西人設伏狙擊于路騎兵皆沒唯郞將高勇之等十餘人走免

 

그러나 서인(西人)들이 중도에 매복하고 있다가 저격하여 기병은 거의 다 죽고 오직 낭장 고용지(郞將高勇之) 등 십여 명이 도망쳐서 살아났다.

 

景升已就途聞變馳還八城西人追不及執電吏殺之. 

 

 이때 두경승은 이미 출발하였는데 도중에서 사변이 있다는 말을 듣고 앞서 달려 되돌아와서 성안으로 들어가니 서경군이 따라 잡지 못하고 전리(電吏)들을 붙잡아 죽였다.

 

景伯與景升不愜戰數不利召景伯還以石麟代知西北路兵馬事景升兼處置使.

 

이경백과 두경승의 협등 작전이 원만하게 되지 못하여 수차의 전투에서 불리하였으므로 조정에서 두경백을 소환하고 그 후임으로 석린(石麟)을 지 서북로 병마사(知西北路兵馬事)로 임명하였으며 두경승은 처치사(處置使)를 겸임케 하였다.

 

金使將還西兵梗路不得過

 

 그때에 금나라 사신이 환국하는데 서경군이 통로를 막고 있어서 지나갈 수 없었다.

 

景升募士卒掩擊殺之王嘉其功陞上將軍知御*吏{史}臺事驟遷守*大尉叅知政事判吏部事修國史

 

그래서 두경승이 병사를 모집하여 적을 가로막아 공격 섬멸하니 왕이 그의 공을 가상히 여겨 상장군 지어사대사(上將軍知御史臺事)로 승진시키고 수태위 참지정사 판 이부사 수국사(守太尉參知政事判吏部事修國史)로 벼슬을 뛰어올렸다.

 

掌銓注雖內寵莫敢撓之.

 

두경승은 전주(銓注)를 장악하였을 때 비록 왕의 총애를 받는 사람이라도 감히 그를 굽히지는 못하였다.

 

 


 

#高麗史100卷-列傳13-杜景升-005


進平章事封三韓後壁上功臣勑畫工李光弼圖形光弼曰:

 

평장사로 벼슬이 오른 후 삼한 후벽상공신(三韓後壁上功臣)으로 봉하고 왕의 명령으로 화공 이광필(李光弼)이 그의 초상을 그리는데

 

"畫法生時畫半像耳." 

 

 “당시 그림 그리는 법은 주로 반신상(半像)을 그리는 것으로 되어 있다”고 말하니

 

景升怒使具體.

 

두경승이 노하여 전신 화상을 그리게 하였다.

 

 兩府文武百官就第賀重房諸將宴賀酒酣各執樂器景升歌守司空鄭存實吹小管

 

양부(兩府)와 문무 백관들이 그의 집으로 모여서 축하하였는데 중방(重房)의 여러 장군들이 축하연을 베풀고 술을 취하도록 마신 후 각기 악기(樂器)를 잡고 즐겼는데 두경승은 노래를 부르고 수사공 정존실(鄭存實)은 소관(小管)을 불었다.

 

李義旼怒罵曰:

 

 이의민이 보고 노하여 

 

 "安有宰相自同伶人歌吹也?" 乃罷歸

 

“재상이 어찌 광대와 같이 노래를 부르거나 악기를 불고 있단 말인가?”라고 하였으며 이어 연회를 파하고 돌아갔다.

 

景升目不知書

 

 두경승은 무식하여 글을 알지 못하였다.

 

時有一醫題壁自稱玉堂人有人嘲之曰:

 

당시 한 의원(醫員)이 자기 방 벽에 글을 썼는데 옥당인(玉堂人)이라고 자칭하였으므로 어떤 사람이 비웃어 말하기를

 

 "戰將今爲修國*吏{史}不妨醫作玉堂人."

 

“백전 장군이 수국사로 되는 이 판에 의원이 옥당인이라 해도 무방하다”라고 하였으므로

 

 聞者齒冷

 

 듣는 사람마다 이가 시리도록 웃었다.

 

 

 

 

 

景升與同列奏:

 

두경승이 동료들과 함께 왕에게 고하기를


 "式目都監所藏判案國之龜鏡部秩錯亂漸難稽考宜加檢討謄寫以藏." 從之.

 

“식목도감(式目都監)에 보관하고 있는 판안(判案)들은 나라의 귀중한 참고 도서인데 그 순서가 뒤섞이어서 점차 상고하기 어렵게 되었으니 검토하고 베끼어서 보관하여 두기를 바랍니다”라고 하니 왕이 그 의견을 좇았다.

 

又奏:

 

또 그가 임금에게 아뢰기를


"祖代諸功臣贊定大業厥功卓然宜追加爵命以示不忘."

 

 “선대 때의 여러 공신들은 왕실을 보위하고 나라에 공훈을 세웠으니 그 공적이 탁월한 사람들이니 응당 관작을 추증하여 길이 잊지 않음을 표시하여야 합니다" 하니

 

 王嘉其奏皆贈爵又爲錄*券各賜其後.

 

왕이 그의 건의를 좋은 의견이라 칭찬하고 역대 공신들에게 모두 작위를 추증하고 또 녹권(錄券)을 만들어 각각 그들의 후손들에게 주었다.

 

#高麗史100卷-列傳13-杜景升-006
與義旼同拜門下侍中位在義旼上義旼在中書大詬景升笑而不*荅

 

그 후 두경승은 이의민과 함께 문하시중(門下侍中)으로 임명되었는데 석차가 이의민의 위에 있었으므로 이의민이 중서성(中書省)에서 욕설을 퍼부었으나 두경승은 웃기만 하고 상대를 하지 않았다.

 

 

 

尋加中書令

 

미구에 중서령(中書令)의 임명이 가첨하여 내렸다.

 

舊制三品以上每遷級例上讓表降詔不允然後表謝上官

 

옛제도에 3품(三品) 이상 관리는 급이 올라갈 때마다 사양하는 글을 올리되 왕이 조서를 내리어 허락치 않은 후에야 글을 올려 감사의 뜻을 표하고 도임하는 것이 예의었다.

 

景升獨曰: 

 

 그러나 두경승은 그렇지 않고 말하기를


"內不欲讓而假人筆外爲禮文吾不忍爲也."

 

“내심으로는 사양치 않으면서 남의 붓을 빌려서 외면으로 사양하는 형식을 취하는 짓은 나로서는 차마 못할 일이다”라고 하였다.

 

王移御延慶宮訛言變生輦下扈駕百官皆狼狽四散景升獨按轡神色自若. 

 

 왕이 연경궁(延慶宮)으로 처소를 옮길 때 유언이 있어서 왕의 행차 대열에서 산변이 일어난다고 떠돌았으므로 호위하고 따라가던 백관들이 모두 낭패하여 뿔뿔이 흩어졌는데 오직 두경승은 말고삐를 잡은 채 안색이 태연하였다.

 

崔忠獻謀廢王勒兵市街托議事召景升

 

 최충헌이 왕을 폐위시킬 음모를 꾸미고 저잣거리에서 군대를 포치하여 놓고 의논할 일이 있다는 구실로 두경승을 불렀다.

 

景升女壻將軍柳森栢疑之自刎死

 

두경승의 사위 장군 유삼백(柳森栢)은 의심을 품고 자살하였다.

 

 

           유삼백

 

遂流景升于紫燕島又流森栢父得義于南裔

 

최충헌은 두경승을 자연도(紫燕島)로 귀양 보냈으며 유삼백의 아버지 유득의도 남방 먼 곳으로 귀양 보냈다.

 

景升在島憂憤嘔血卒

 

두경승은 섬에 있으면서 울분으로 인해서 피를 토하고 죽었다.

 

或云景升有金其奴欲盜密毒之.

 

 일설에는 두경승이 금을 가지고 있었는데 그의 종이 금에 욕심을 내어 몰래 독약을 먹여 죽인 것이라고도 하였다.

 

 

 

 

 

출처/김윤자 cafe.daum.net/rock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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