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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니티야

작성자초원의 꽃향기|작성시간24.04.30|조회수62 목록 댓글 0

 

아니티야 

 

 

 

 

 

 

 

 

 

월정사 '단기출가학교'에서 있었던 일이다. 비록 한 달간이지만 '묵언(默言)'과 '하심(下心)'을 내세운 엄한 규율이 얼음장 같다고 정평이 나 있는 곳이다. 새벽 3시 30분에 일어나 각종 예불과 수행으로 잠시도 짬이 없던 빡빡한 일정, 그나마 겨우 한숨을 돌릴 수 있는 저녁 강의시간이었다. 여느 때 같으면 경전을 강독하거나 교리를 해설할 시간인데, 뜻밖에도 지도스님이 편지지 한 묶음을 들고 오셨다.

 

"자, 오늘 이 시간에는 평소 가져보지 못한 특별한 경험을 해 보겠습니다. 내일 여러분들이 죽는다고 가정하고 유서를 써보세요. 우선 누구에게 쓸까를 정한 연후에 남기고 싶은 말들을 잘 정리해보시기 바랍니다."

 

49명의 남녀 행자(行者)들은 서로를 쳐다보며 당혹감을 감추지 못했다. 줄을 맞추어 책상에 앉은 사람들의 얼굴엔 심각함이 역력했다. 나는 망설임없이 '아내에게'라고 모두(冒頭)를 썼다. 하지만 한 줄도 더 나가지 못한 채 망연히 편지지만 바라보고 있었다.

 

어디선가 옅게 흐느끼는 소리가 들렸다. 둘러보니 아예 책상에 엎드려 우는 사람도 있었다. 누구에게나 생을 마감하는 감회는 감당키 어려운 설움일지 모른다. 시간이 지날수록 머릿속은 텅 빈 듯 아무 생각도 떠오르지 않았다.

 

울컥 치밀어 두 손을 부르쥐었던 일도, 한숨과 뒤섞여 가슴을 쥐어뜯던 일도, 주마등처럼 스치며 회한과 범벅이 된 채 한갓 낡은 보따리처럼 한쪽 구석으로 밀려났다. 굳이 내세울 일도, 크게 애통할 일도 없이 밍밍하게 살아온 탓일까. 아무리 휘저어도 건져 올릴 건더기가 없었다. 몇 번의 재촉을 받고 겨우 끼적여 놓은 것은 부모님과 두 아들에 대한 염려를 아내에게 당부하는 내용이 고작이었다.

 

갑작스러운 죽음 앞에 끌끌히 마무리 못한 너절한 일들이 여기저기 나 뒹굴고 있으니 무슨 수로 가닥을 잡아 가지런히 정돈할 수 있단 말인다. 시간 반을 훌쩍 넘긴 후에야 유서들은 모아져 스님이 가지고 나갔다. 상기된 얼굴로 잠자리에 누운 행자들은 내남없이 뒤척이며 잠을 이루지 못했다.

다음날 아침, 한여름의 따가운 햇살이 등줄기를 훅훅 볶아댔다. 아침 공양을 마친 행자들은 각자가 쓴 유서를 받아들고 다비장으로 향했다. 월정사는 한국불교 제4교구 본사로 전통불교장례의식을 위한 화장장(火葬場)을 갖추고 있다. 그곳은 전나무숲길에서 한참 벗어나 후미지고 으슥한 곳이었다.

 

아름드리나무가 빽빽이 둘러쳐진 둥글고 평평한 공터는 여름내 우거진 잡풀에 뒤덮여 한낮에도 선뜩하고 스산한 기운이 감돌았다. 가운데엔 오랜 세월 그을음이 앉아 시커멓게 변한 소대(燒臺)가 하늘을 향해 입을 벌리고 있다. 우리들은 그 소대를 중심으로 빙 둘러섰다. 밀짚모자를 쓰고 있었으나 온몸으로 땀이 비오듯 흘렀다.

 

"아함경에는 '이 세상에서 가장 확실한 일은, 살아 있는 자는 모두 죽는다는 사실이다.'라고 적혀 있습니다. 분명 우리는 언젠지 모르지만 반드시 이 세상을 떠나게 됩니다. 가뭇없이 사라질 그날을 상정(想定)하며 지금부터 자신이 쓴 유서를 한사람씩 차례대로 읽겠습니다.

 

모든 사람들이 다 들을 수 있게 큰 소리로 읽어주십시오. 그리고 듣는 분들은 한 인간이 자신의 생을 마무리하면서 어떤 생각을 하고 무슨 말을 남기는지 귀를 기울리며 스스로를 되돌아보십시오. 죽음을 직시하는 순간 오히려 각자의 삶에 새로운 의미가 더해질 수 있습니다. 잘 살면 아름답게 죽을 수 있으니까요." 웃음기 없는 얼굴로 스님은 근엄하고 단호하게 말했다.

 

이윽고 한 사람씩 자신의 유서를 읽어나갔다. 하지만 끝까지 읽는 사람은 없었다. 떨리는 목소리로 서너 줄을 읽다간 그만 흐느꼈다. 아예 시작조차 못하고 주저앉는 사람이 태반이었다. 정수리를 녹일 만큼 따가운 햇볕이 내리쪼이고 육신을 태우기 위해 장작더미가 쌓였던 소대의 시커먼 공혈(孔穴) 속에서 눅눅한 열기가 내뱉듯 뿜어 나왔다.

 

내 차례가 왔다. 나라도 제대로 읽어 땡볕을 버티는 도반들의 시간을 아껴주고 싶었다. 입술이 가볍게 떨렸다. "아내에게. 먼저 떠나 미안하오. 느닷없는 죽음엔 앞뒤가 없다지 않소. 우리 그 이치를 원망치 맙시다. 돌아보건대 만 36년, 짧지 않은 세월을 함께 해주어 정말 고마웠소." 여기까지가 다였다. 꽉 메인 목으로 더 이상 읽을 수가 없었다. 눈앞이 뿌옇게 흐려지며 눈물이 쏟아졌다. 문득 느껴지는 덧없음. 그동안 내 몸을 친친 감고 있던 끝없는 탐욕과 벌컥대던 성냄, 그리고 베풀지 못한 어리석음이 이글거리는 불길처럼 내게 달려들었다. 허무감이 밀려왔다.

세상 온갖 일들은 시간의 흐름에 따라 변하고 소멸하는 과정에 불과하다. 홀연히 생겨났다가 부질없이 사라지는 것이다. 예외는 결코 있을 수 없다. 인연에 의해서 생겨나는 모든 것은 반드시 변하고 사라져 어느 것도 지금 그대로 있을 수 없다는 것을 범어(梵語)로 아니티야anitya라 한다. 우리말로 옮기면 무상(無常)이라는 말이다.

 

"태어날 때는 어디서 왔으며, 죽으면 어디로 가는가? 태어남은 한 조각 뜬구름이 일어나는 것이요, 죽음은 한 조각 뜬구름이 사라지는 것이다."

화엄경 한 구절이 소소한 바람을 타고 들리는 듯하다.

무상하다, 다 무상하다.

 

 

 

- 조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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