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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크랩] 여수 아리랑 1화 인사글/ 열이 할아버지 결혼과 죽음

작성자공도식|작성시간20.04.12|조회수134 목록 댓글 0

 



인사 글


잃어버리기 쉬운 어린 시절의 우리 조국 시골 모습과 인생들의 모습을 그려보고 싶다.


나 하나만을 위하여 전 생과 재산을 다 바치시고 돌아가신 아버지의 애환과 죽는 순간까지도 잊지못하고 첫사랑을 가슴에 품고 돌아가셨던 실연의 괴로움도 그려보고 싶다.


또한 어머님의 한과 어리석은 나의 인생도 고백하고 싶다.
인생이란 사라지지만 인생이 남긴 글은 남는것을 알기때문이다.
틈나는대로 조금씩 써나갈것이다.


아담으로부터 온 지구상 인류가 퍼졌습니다.


공자는 중국 산동성 태산 아래 당시 노나라 곡부에서 태어났습니다.


열 아버지 정규는 열에게 조상 공자에 대해서 이야기 해주셨습니다.

정규: 공자님이 도를 펼치기전에는 부모님이 돌아가셔도
개.돼지처럼 산에 가져다 버렸단다.

열: 아이구 어디 그럴수가 있다요?

정규: 그러게 말이다. 그래서 공자님이 부모에게 효도하는 말씀을 맨 처음으로 가르치기 시작 하셨단다.
그후부터 부모님이 돌아가시면 꽃상여를 만들어서 명당자리를 잡아서 묘를 써드리게 되었단다.

열: 아부지 우리 공가가 우리나라에 언제부터 왔나요?

정규: 고려시대에 할아버지가 나라 사신으로 오셔서 임금을 돕다가 귀화 하셨단다.


해설: 열과 아버지 정규는 농사일을 하다말고 휴식 시간이면 조상에 대한 이야기를 하였습니다.

열의 조상중 가까운 할아버지 이야기를 정규는 열에게 해주셨습니다.

정규: 우리 공정승 할아버지가 여수 삼일면 낙포로 귀향오신후 자손이 번성하여서 남한 전체로 퍼졌단다.
공정식 해군 참모총장은 경상남도 진해에서 살고 있단다.

해방전에는 개성에 공가들이 매우 부자로 살고 있었단다.
열이 너로 치면 5대조 할아버지도 한 의사였단다.

열: 그래서요.

정규: 그 할아버지가 우리 차동 마을에 자리를 잡고 살게 되었단다.

그때는 차동 마을에 김씨들이 많이 살고 있었단다.
김씨 문중과 s씨가 살고 있었는데 한의사 할아버지가
김씨 종가집 오대독자를 죽을병에서 치료해주게 되어서 집터를 구하게되고 토지를 구입하여서 자리를 잡았단다.

이때에 p씨가 순천에서 이사와서 살았단다.

그리고 j씨들이 이사와서 살게되었단다.
그때는 텃세가 심했단다.
열:근데 지금은 김씨가 한 사람도 없네요??

정규: 그렇지, 김씨가 지금은 한 사람도 없는 것은 세력싸움에서 져서 그런 것이란다.

너희 5대조 할아버지는 혼자 차동 마을로 이사왔 으나 한의사로서 사람들을 치료해주고
공자님 자손이여서 아무도 함부로 업신여기지를 못했단다.

열:공자님 자손이라고해서 함부로 왜? 못하나요?

정규:응, 여수에 가면 향교라고 있고 전국 도시 어디에나 유교의 항교가 있단다.

그 항교는 공자님을 모시고 섬기는
사람들이 모인단다. 향교는 원님도 함부로 못한단다.
향교는 유교의 지방 단체이고 서울에는 성균관이 있단다. 나라 임금님도 공자님을 섬기고 공자님 도를 배우고 따른단다.

만일 누가 공자 후손을 건들었다가는 향교에서 잡아다가 혼줄을 내놓는단다.

열: 와 ㅡ 공자 할아버지 덕을 수천년이나 보네요.
정규: 응 그런 셈이지,
기독교 성경에도 착한 사람은수천대로 복을 받는다는데
바로 공자 할아버지가 착한자는 하늘이 복을 주고 악한자는 하늘이 화를 준다고 말씀 하셨단다.

열:그러면 공자님도 하느님을 믿은거네요.

정규:그럼, 공자님도 하늘을 믿은거지.
공자님은 동양식으로 하느님 도를 하늘로부터 받아서
제자들에게 가르친 동양의 선지자란다.









열이 할아버지 결혼


오늘은 열이 할아버지의 슬픈 사랑과 인생을 이갸기하련다.

 나라만 빼앗기지 않았으면 행복하게 살았을 열이 할아버지이시다.
일제 시대이다.
1920 년도
한일 합방이 되었다.
일본인들은 동양척식주식회사를 세우고 황금들판 호남 평야와 김제 평야를 비롯하여서
전국의 농토를 교활한 수법으로 빼앗아서 일본인 지주로 세워 나갔다.

 일본놈들은 오래전부터 조선땅을 노려왔다.


 왜구들의 출물온 고려시대이전부터였다.

 매년마다 황금벌판의 쌀이 가장 탐이 났었다.

 그리하여 임진왜란을 일으키고 조선땅을 다 먹어가던중에 이순신장군이 나타나서 조선땅을 먹지못함이 칠천지 한이였던 것이다.


 이때에 경상도를 점령하고 7년간이나 지배하였고, 오로지 호남땅만을 점령하지 못한 것이다.


 이순신장군이 여수 진도를 방패삼아서 지키고 있었기 때문이였다.


그런데 이제는 아주 손쉽게 조선땅을 먹어버린 것이다.


열이 아버지 정규는 열에게  "만일 왕정이 아니고 자유민주주의였으면 일본놈들에게 나라를 빼앗길리는 없었단다."


그렇다.

왕은 자기 목숨이 온나라 백성들 목숨보다도 더 귀중하다고 여긴다.


꿀벌을 보라!

여왕벌을 잡아가면 남은 모든 일벌들은 여왕벌에게로 모여든다.


왕을 협박하면 그리고 왕이 항복하면 모든 백성이 더 행복하고 만다.

 이것이 왕정이다.


 하지만 민주주의는 그렇치가 않다.


  일반 국민 한사람 한사람이 국가의 주인이다.


 모두를 항복 시켜야만 된다.


 열이 아버지 정규는 열에게 이렇게 말씀 하신다.

  "왕정이 문제란다.

 

 한일합방전에 전북 고부군수의 학정으로  동학혁명이 일어났단다.


 이때에 이씨왕조는 일본군인들을 끌여들여서 진압하였단다.

 

 그때에 잘하였으면 동학혁명군이 민초들의 나라를 만들었을것이다.


 그러나 왕정에서는 자기들 권력을 위해서는 온 백성들을 죽여도 된다는 잔인한 탐욕을 버릴 수가 없단다.


 결국 일본놈들에게 나라를 통째로 갖다 바친꼴이였단다."




 


 


조선을 접수한 일본에서는 조선으로 가자!는 슬로건을 걸고 너도 나도 조선으로 건너와 지배층을 찾이하였다.


일본에서는 맨 밑바닥을 기어다니던 벌레같은 깡패 도적  인간들도 조선에 가면 지배층으로 되었던 것이다.



조선에는 독립군들이 일어났다.

 그들은 민초들이였다.

독립군들과 의식있는 젊은이들은 일본 경찰의 무자비한 총과 칼날에 무참하게 쓰러져가고 있었다.


 

그러나 대부분 조선인들은 현실에 본의 아니게 순응 하면서 미래를 대비하였다.

공자의 87대 후손 석호는 직접 일본인들에게 대항해서 비참하게 목숨을 잃는것보다는 미래를 대비할 야심을 가지고 있었다.

석민은 4남2녀중 둘째 아들이였다.


석호는 마을 서당을 어려서부터 다녀서 천자문을 6세에 떼고 명심 보감을 7세에 줄줄이 외우고 썼다.
8 세에 소학을 떼고 9세에 대학을 뗏다.


10세에 덕양 예배당 학교에 들어가서13살까지 일본어와 신학문을 100 명의 학생들중에서 1등으로 졸업하였다.

석호는 17세때에 현천 멀랑 마을 조씨 가문의 15세 우엽과
혼인식을 한식으로 치루었다.

우엽은 3남2녀중 둘째 딸이였다.

당시예는 장가가는 신랑은 신부 집으로 말을 타고 갔다.

공가 후손은 대부분 풍채가 크고 콧날이 오뚝하고 손발이 크다.

그리고 피부가 하얗다.

또한 학문과 예능에 천부적인 재능을 타고 난다.


공자가 학문과 예능에 특출한 재능이 깊고 운동에도 재능이 많았다.

공가는 외유 내강형이다.

평소에는 버들처럼 유순하다가도 유사시에는 벽력같은
무서운 분노를 숨기고 있다.


이것은 장점이면서 단점이 된다.




공자님이 중국 최고의 주먹 자공을 손가락 하나로 제압한후 수제자로 거느린 일화는 공자전에도 나온다.

바로석호가  이와 같은 공가의 특성을 두루 갖추고 있었다.


석호는  백마를 타고 사모관대를 하고 현천 멀랑마을 우엽의 집으로 들어서자 축하객들은 탄성을 발하였다.

천재로 소문난 공자 직손이 인물까지 환하게 멀랑 마을을 비추자 혼인 잔치는 더욱 흥겨워졌다.

신부 고을에서 제일 미녀로 소문이 나고 얌전하기로 으뜸이며 바느질과 음식 솜씨 좋기로 최고였다.

사람들은 "하늘에서 뚝 떨어진 신랑 신부 같네 그려 "

"마저 딱 맞는 말일세! 오늘 많이 마시세 "

우엽의 아버지도 기분이 좋아서 손님들에게 음식을 많이 드시라고 권하고 다니며 손님들과 함께 술을 권하기도 하고 권하는 술 마시기도 하였다.


신랑은 신랑측 손님들과 우엽의 큰방에서 진수 성찬을 대접 받고 있다.

큰 상을 두개로 이어진 상위에는 토종 닭이 통채로 맨몸으로 올려져 있고 꽃감 대추 감 낙지꼬쟁이 고막 엿등등 산해진미였다.

잔치가 끝나고 저녁 신방에 들기전에 현천 멀람 총각들은 자기 마을 최고의 미녀를 데려가는 석호에게 신랑 길들이기라는 전통 놀이를 시작하였다.

이들중에는 우엽을 몰래 짝사랑한 총각들도 있었다.

어느 마을이나 인물이 고운 처녀는 몰래 흠모하는 총각들이 있기 마련이다.


이때 시집을 가면 홀로 한탄하면서 울게 되어 있다.


그래서 그 한을 풀게하려고 아리따운 처녀를 데려가는 신랑에게 작은 한을 풀라는 놀이가 있다.



총각들은 신랑의 손과 발을 묶는다.

그리고 빨래 방망이로 발바닥을 때린다.

이때 신랑이 고함소리가 커지면 신부가 음식과 술을 내오면서 살살 다루어줄 것을 부탁한다.

이러한 놀이를 통해서 새신랑과 신부 마을 총각들과 일시에 친해진다.

우엽을 짝 사랑했던 총각들도 서운함을 풀게 되었다.

그후 밤 12시쯤 석민은 신부와 오붓한 시간을 갖게 되었다.


이때에 신랑 신부 야참상이 들어오고 두 신랑신부는 족두리를 벗겨주고 상면식을 치룬다.

석호는 " 오늘 혼인식 치루느라 고생이 많았지요. 족두리부터 벗읍시다. "

수줍어하는 어린 신부의 족두리를 풀어주는 석민의 손이 떨리고 있었다.

문밖에서는 호기심 많은 여인네들이 손가락에 침을 묻히고 새 창호지문을 뚫고 들여다보고 있다.

석호는 그런 사실을 알면서도 신경 쓰지않고 신부 우엽의 족두리를 벗기고 곧바로 키스부터 하였다.

우엽도 자기 신랑이요 영원한 남편의 자연스럽게 석호의 키스를 받아들인다.

이미 불은 꺼졌다.

창문 밖에서 군침을 삼키던 구경꾼들은 아쉬웠으나 어쩔수가 없다.면서 물러간다.


조선시대말 일제시대 초기의 혼인 모습이다.


열의 할아버지 할머니의 젊은 시절 혼인 모습이다.


열이 아버지 정규는 아들 열이에게 할아버지 이야기를 많이 해주셨다.



열이 할아버지 석호의 죽음


조선을 식민지로 만든 일본인들은 실업자 도적 깡패들을 조선의 지배층으로 만들어주고 조신인의 땅들을 빼앗아 착취하고 탄압하며 죽이는 만행을 저질르고 있을때에 조선의 지식층들 청년들은 독립군으로 대항하든지 또는 일본으로 들어가서 공부를 하는 자식들은 친일파 자식들이고 대부분은 열악한 광산촌으로 노동자로 들어가서 취업을 하였다.




정규의 아버지 곧 열의 할아버지 석호는  현천 조씨댁으로 장가를 들고서 처가댁 처남들이 먼저 가 있는 일본 동경으로 돈을 벌러 갔다.

처가집 처남들이 먼저 일본으로 건너가서 탄광에서 일하며 자리를 잡고 산다는 말에 석호도 마음이 움직였다.

조선에서는 희망이 없었기 때문이다.


 당시에 조선과 일본은 한일합방으로 한나라가 되어서 일본 가는 것은 배를 타면 되었다.

 여권이 필요가 없었다.

 여수에서 일본 가는 배가 있었다.

석호는  4남 2녀중 둘째입니다.

 조그마한 조선땅 여수 시골 산골마을 차동에서는 대가족이 살기에는 좁다고 느낀 석호이다.


 정규를 낳고 행복한 신혼생활을 해왔으나 아들 정규의 장래를 위해서는 결단을 내려야 했다.

 몇날 몇일을 고민하다가 어느날 밤 품속의 아내에게 말했다.

 "여보 처남들도 일본으로 가서 돈을 벌며 큰 형님 아들은 동경 제국대학도 다니고 있다는데 우리 아들도 동경제국대학으로 보내고 싶소. 내가 먼저 가서 자리를 잡아놓고 당신과 아들을 데리러 올테니 조금만 고생하시요,"


 석호의 아내 우엽은 "당신이 고생이 많을텐데요. 그래도 아들을 위해서는 그렇게 하셔야죠."


 다음날에 석호와 아들 정규를 등에 업은 우엽은 여수 구항까지 배웅을 해주었다.


 여수 구항까지는 석호가 사는 차동  마을에서 30리 길이였다.


 차동마을에 자리를 잡은 차동 공가 첫번째 할아버지는 한의사였는데 여기 저기 돌아다니면서 자손들을 낞고 살만한 곳으로 자리를 잡은 곳이 차동마을이였다.


 차동마을은 산이 100미터 미만의 산으로 둘러싸여 있고 그 안에는 논과 밭이 많았으나 30호 이상은 살기가 어려운 작은 지역이였다. 

 가까운 지역 십리 안에는 바닷가가 있어서 해산물도 주어올 수가 있었다.


 농토는 천수답이였다.


 그래도 살만한 지역이였다.


 당시에는 굼주리지않고 사는 것이 가장 큰 문제였던 것이다.


 이러한 정든 마을에서 일본으로 떠나가는 석호의 마음은 무거웠다.


 형님도 있고, 동생들도 있고 부모님도 계시지만 독립해서  오두막을 짓고 살아가는 아내를 아들과 함께 살아가도록 하면서 일본으로 그것도 좋은 직장도 아니고 위험한 광산으로 간다는 사실이 슬펐다.


 나라만 빼앗기지 않았으면 과거를 보아서 참봉 벼슬이라도 따서 서당 훈장이라도 지낼수있는 자신인 것이다.


 여수 읍내에 도착한 석호는 아내와 아들에게 주막으로 들어가서 막걸리와 순대국을 시켜두고 석호는 막걸리를 마시고 아내와 다들 정규에게는 순대국을 먹게 했다.


 식사를 마친후 종고산을 바라보니 커다란 종을 엎어둔것처럼 생겼다.

 그 아래에 남향받이에 충무공 이순신 장군이 살아계실때 근무하던 진남관이 우뚝 서 있었다.


 이순신 장군의 모습이 뇌리를 스쳐갔다.

 슬펐다.


 식민지 국가로 전락한 조선의 슬픔이 가슴에 와서 아팠다.


 사랑하는 가냘픈 미모의 젊은 아내와 어린 아들을 바라보면서도 슬펐다.


 그러면서서 힘이 솟아났다.


 안녕을 고하였다.


 "여보 정규를 잘 길르면서 집안 일을 해나가시오. 농사일은  형님과 동생들이 잘 도와줄 것이요."


 아내 기엽도 "여보 고생이 많을거에요. 우리가 항상 기도할게요. 잘다녀오세요."


 "그래 내가 돈을 버는대로 집을 얻어두고 당신과 아들을 데릴러 올 것이요."


 더 이상 지체를 할 시간이 없었다.


 사랑하는 가족을 두눈에서 떼고 돌아서는 석호는 터져나오는 울음을 삼켰다.


 서둘러 배안으로 들어왔다.


 그리고 결심하였다.


 "내 아내와 내 아들을 위해서는 무엇이든지 하련다."


 일본으로 떠나는 연락선은 조그마한 배였다.


 배안에는 기관실이 있었고, 소음이 심하였다.


 기관실이 보이는 그 배 밑창에 석호와 일행들이 가득하였다.


 모두가 석호와 같은 사람들이였다.


 초라한 한복을 입고 짐보따리를 들고 있었다.


 배는 큰 소리로 기적을 울린후에 통통거리면서 여수항을 떠나갔다.


 종고산도 울고 오동도도 울었다.


 멀리 오동도와 조고산이 안보일즈음부터 파도는 거세어졌다.


 배안에는 멀미를 하며 토하는 사람들도 많았다.


 대마도를 거쳐서 이름모를 동경 근처의 일본 항구에 도착하였다.


 미리 나와 있던 처남 형님의 안내를 받으면서 동경으로 향하였다.


동경에 도착한 석호는 일행들과 함께 광산촌으로 향하였다.


 광산촌은 살벌하였다.


 식민지 국가 백성은 서러웠다.


 노예같은 취급을 하였다.


 광산은 군대와 같아보였다.


 사고가 하루도 끊이질 않았다.



 석호가 광산촌으로 들어가던 날에도 사고사가 있었다.


 전쟁터와 같았다.


 다시 조선 여수 차동마을로  돌아갈 수도 없었다.


 광산은 흉축한 바위들로 가득하였다.


 광산 한쪽으로 광부들의 기숙사가 있었는데 길게 열차같은 형식으로 집이 지어져 있었고 식당이 중간에 있었다.

한방에 광부들 10명씩이 기거하였다.


  방에는 방장이 있었다.


  방장은 같은 광부인데 조선인이였다.


 방장은 위엄스러운 동작으로 방안에서의 생활 방법을 안내해주었다.


 " 여러분은 오늘부터 토요타 고아산의 광부가 되브럿소.

 우리가 일본의 식민지로 되어서 저나 여러분이나 이렇게 불쌍하게 되브럿소.

 어쩔거요.잉. 좀 위험항게로 조심들 하시소. 오늘도 한 사람이 사고사로 당하여 가브렀소.

 이왕지사 요기까지 와브렀응게로 고향에 계신 부모형제와 처자들위해서 열심히 일해서 돈을 벌어봅시다요.

 우리처럼 요렇게 시작해서 그래도 돈을 벌어서 동경 변두리에 집을 장만하고 아들을 동경 제국대학까지 보낸 사람도 있응게로요."


 석호는 방장의 이야기를 귀담아 들었다.


 동경제국대학까지 보낸 주인공이 바로 자신의 처남형님이라는 사실도 눈치를 채었다.


 그 말에 아들 정규를 생각하면서 힘을 내었다.


 마치 전투병처럼 말이다.


새벽 4시부터 기상을 시켰다.

기상후 일본 도수체조를 하게하였다.

석호는 잘 모르지만 대총 따라서 했다.

식사후에 곧바로 깊고 깊은 굴로 이동을 시켰다.

 인도자는 일본인이였다.

 일본인이 앞장을 서고 일본인 곁에는 조선인 통역이 통역을 해주었다.

여기까지 왔음에도 도망을 치는 사람들이 있어서 밖에는 철조망이 쳐져있고 경비병들이 총을 들고 지키고 있었다.


 석호는 죽어라고 정을 내리치고 함마를 내리치면서 작업을 했다.

 3년동안이나 그 무서운 노동을 해내었다.

 하루도 쉬지않고 일을 했다.

 그리하여 돈을 모아서 전대에 차고 조선으로 돌아와 절반은 부모님께와 형제들에게 나누어주었다.

 남은 절반으로 가족을 데리고 일본으로 돌아왔다.


 일본으로 돌아온 석호는 고항산 근처의 작은 집을 빌렸다.

 여기서 가족과 더불어서 오랜만에 행복한 생활을 했다.

 여전히 금광을 다니면서 밤이 되면 사랑하는 아내와 아들이 기다리는 자기 집으로 돌아오는 것이 행복이였다.


 아들 정규는 근처의 소학교에 보내주었다.


 아들 정규는 7살에 일본 소학교를 들어갔는데 총명하여서 공부를 잘하였다.

 아이들은 모두가 광부의 아이들로서 조신인 아이들이 많았다.

 일본인 아이들도 있었다.

 그들은 관리의 아이들이였다.


 그런데 일본 아이중 하나가 정규를 조센징이라면서 놀렸다.


하루 이틀 매일처럼 조센징이라면서 놀리고 때렸다.


 정규는 어렸으나 조센징이라는 말이 때린것보다 더 듣기가 싫었다.


 그때는 일본 정부가 일본과 조선의 문화정책을 펼치면서 일본과 조선은 한몸임을 강조하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차별은 심하였다.


 정규가 3학년때에 9살이였다.


 그 일본 아이와 싸움이 붙었다.


 조센징이라고 놀리는 일로 인하여서 싸움이 붙었다.

 정규가 그 아이를 때려주었다.


계속 맞고 놀림을 받아오던중 분풀이를 해준 것이다.


 이에 그 일본 아니는 자기 아버지에게 "아버지 조센징 아이가 저를 때렸어요."라고 하였다.


그 일본 아이 아버지는 학교로 달려와서 사정없이 조센징 아이 정규를 뺨을 몇차례 때려부쳤다.


정규도 울면서 집으로 돌아가서 엄마에게 사실을 말하였다.


 저녁에 정규 아버지 석호가 돌아왔다.


 정규 엄마는 남편에게 사실을 말하였다.


 그밤에 석호씨는 불같은 진노를 하면서 일본 아이 아버지에게로 달려가서 대판 싸움을 했다.


 평소에는 양처럼 순하던 석호씨가 아들 정규가 조센징이라는 놀림끝에 아이와 싸워서 때렸는데 그 사실을 간과한채로 어른이 아이를 뺨을 사정없이 때렸음에 분개한 것이다.


 두 아이의 아버지는 일본과 조선인으로서 결투를 벌였다.


 일본인들은 싸움을 할때 검을 들고 하는 것이였다.

 한국인은 맨손으로 싸움을 한다.


 일본인 아이 아버지는 검을 사정없이 휘둘렀다.


 석호씨도 검을 피하면서 주먹과 발차기로 그를 공격하였다.


 광산에 노등으로 단련된 몸이여서 호락호락 당하지 않았다.


 결국 피투성이가 되면서 싸워서 일본인을 국복 시켰다.


 일본인은 결찰서에 고소하였다.


 일본인 경찰들은 석호씨를 잡아서 가두었다.


 석호씨는 경찰서장에게 " 일본과 조선은 한나라라고 하면서 이럴수가 있느냐? 아이들끼리 조센징이라고 놀리는 바람에 싸움을 했는데 어른이 개입하여서 이렇게 된 것 아니더냐?"라고 말하였다.


 다행히 일본인 경찰서장은 석호씨 말에 일리가 있다면서 풀어주었다.


 그날 밤에 석호씨는 아들 정규를 품에 안고 입을 맞추면서 약속을 했다.


 "아들아 공부를 열심히 해서 나라를 찾아다오. 내가 열심히 일해서 너를 동경제국대학교까지 보내주마."


 그런데 다음날 광산으로 일하러가서 굴이 무너진 바람에 석호씨는 이 세상을 떠나고 말았다.


 굴이 무너져서 숨을 거두기까지 애타게 아들 정규와 아내 이름을 목놓아 부르며 통곡하였다.


 나라잃은 서러움을 한탄하면서 죽어갔다.






그날 정규는 학교를 가서 공부를 하는데 예감이 이상하였다.
사랑하는 혈육 아버지가 비명횡사하는 그 순간에 정규 마음도 전율이 일어났다.
영적으로 통하였기 때문이다.

아버지 철민이 애타게 숨 넘어가는 그 순간까지 정규를 목 놓아 부르고 있었던 것이다.
그러면서도 정규의 아버지 철민은 동료들부터 살려내고 자신은 희생을 하였던 것이다.

집으로 돌아온 정규는 어머니가 서럽게 애통하는 모습을 보아야만 되었다.

광산 회사에서 달려와 비보를 전해주었던 것이다.

9살 정규가 이제는 가장이였다.

서럽게 울고 있을 틈이 없었다.

고향 조선 여수 죽림 차동에 할아버지께 급전을 쳤다.

고향에서 큰 아버지가 달려 오셨다.

큰 아버지가 오시기전에 시신 발굴 작업을 하고 시신의 모습은 눈을 뜬 그대로였다.

차마 눈을 감을 수가 없었던 것이다.

고향에서 구장일을 하셨던 정규의 큰 아버지이지만 동경 사기꾼들에게 농간을 당하여서 정규 아버지의 보상금 대부분을 털리고 말았다. 일본인들중에도 간교한 사람들이 순진한 정규 큰아버지를 꼬드겨서 재판을 하게 만들었다.

그러나 식민지 나라 조신인의 억울함을 풀어줄 일본인 재판관들이 아니였다.

 그나마 받은 보상금을 모두 날리고 조금의 돈만 들고

정규는 아버지를 화장하여서 유골을 상자에 담아 목에 메고 29세 청상 과부가 된 어머님을 모시고 큰 아버지와 함께 고향으로 돌아오게 되었다.




 그 배는 아버지 석호가 타고 일본으로 오던 배였다.


 유골함을 맨 9살 정규의 마음은 슬픔과 억울함으로 눈물이 말라버렸다.


 그토록 동경제국대학을 외치던 아버지 석호의 모습이 눈에 선하였다.


 또한 광산 지하동굴 속에 갇혀서 자신의 이름과 어머니의 이름을 간절히 부르며 죽어가는 아버지 모습이 오버랩되어 왔다.


 고향 여수 시골 차동마을로 돌아와서 아버지 장례를 치루어드렸다.


 큰아버지와 작은 삼촌들과 할아버지 할머니가 함께 슬퍼하며 도와주었다.


 



 그나마 다행스러운 것은 정규 큰 아버지는 남은 보상금으로 야산 천평을 직원영감으로부터 사서 아버지의 유골은 새로 구입한 야산 위 양지 바른곳에 묻어주었다.


그리고 산을 밭으로 개간하였다.


그 산은 남향받이로서 밭과 논으로 나누어 개간을 하였다.



개간작업은 정규와 정규 막내 작은 아버지가 해주었다.


9살 아이가 지게를 지고 삽과 괭이로 흙을 파서 져날랐다.



동경 제국대학의 꿈을 꾸면서 일본 동경 소학교에서도 일등을 하던 정규가 하루 아침에 고아가 되어 홀어머니를 모시고 농사 일을 해야만 되었다.

또 산에 가서 나무도 해야만 되었다.

마을 아이들은 양쪽  부모님 아래서 서당을 다니고 면소재지 덕양에 있는 소학교도 다니고 예배당 학교도 다니고 있었지만
정규는 그들을 부러운 눈으로 바라보면서 지게를 지고 밭으로 산으로 가야만 되었다.

정규는 일을 하면서 아버지를 그리워하면서 수없이 눈물을 삼켰다.

9살의 농부 가장이였다.

정규는 이러한 신세를 자신의 뒷꼭지가 둘글지 못하고 틀어져서 그런다고 여겼다.

자신의 뒷꼭지 때문에 아버지가 일찍 비명황사 하였다고 믿었다.

앞 얼굴은 아랑드롱같은데 뒷꼭지가 문제였다.

정규는 자신의 뒷꼭지에 대한 열등감이 심하였다.


하지만 정규는 주경야독을 했다.


옥편을 사와서 한문을 배워나갔다.


명심보감도 배워나갔다.



 석호 할아버지가 열이에게 남긴 유품은 사진 한장이 전부였다.


 동료들과 찍은 흑백 사진이였다.


 좀이 쓴 흑백 사전일 정규는 아들 열에게 나중에 보여주었다.




차동 마을은 30호 가량의 작은 마을인데도 세 성씨가 서로 대립을 하면서 살았다.

씨족사회이기에 대립이 극심하였다.


잘사는 집도 있고 못사는 집도 있었으나 정규 외에는 거의가 다 아이들이 소학교 또는 예배당 학교 아니면 서당이라도 다니고 있었다.

얼마전에만 해도 그들 모두가 부러워하던 동경 소학교 우등생이던 정규다.

어느날 정규는 저녁밥을 먹고나서 어머니에게 말씀을 드렸다.

"어머니 저도 서당을 다니고 싶고 예배당 학교를 다니고 싶습니다. 학교 다녀와서 일을 열심히 할테니 학교를 좀 보내주십시요."

정규 어머니 우엽도 그러한 정규를 가엽게 여겨서 허락해주었다.

그리하여서 덕양 예배당 학교를 다니에 되었다.

일본 동경에서 3학년까지 다녔기에 동무들하고 같은 학년으로 다녔다.

소라면 전체에서 소학교를 가지못하는 아이들이 모여서 정규반에만도 80명이 넘었다.

정규는 들어가자마자 반에서 일등을 하였다.

학교 다녀오면 일을 하면서도 말이다.

차동 마을 오촌당숙 용은 부자집에서 잘 먹고 비단옷만을 입고 공부를 해도 정규에게 당하지 못하였다.

원래는 석용이 일등이였다.

이렇게 학교를 다니는데 마을에 매우 난폭한 아이가 있었다.

매일처럼 정규를 놀리고 때렸다.

무려 3년 동안이나 그러하였으나 정규는 꾹 참으며 매를 맞아주었다.

그의 아버지가 난폭하고 성질이 광포하고 무조건 자신의 아들만을 감싸주었다.

차동마을에 정규의 친구 을과 매일처럼 싸우고 을은 그 애를 이기지못하고 울면서 자신의 아버지에게 일러주면

을의 아버지가 그 애를 꾸중하고 그러면 그 애의 아버지에게 일러바쳐서 매일처럼 두 애의 아버지들은 고함을 지르면서 싸웠다.

하지만 정규에게는 자신을 막아줄 아버지가 없었다.

그래서 싸우면 이길수가 있어도 매를 맞아주고 다녔다.

덕양 예배당 학교를 다니면서도 공부는 항상 일등이였다.


공부도 잘하고 착하고 정직한 정규를 못마땅해하면서 깡패같은 돌석이가 3년동안 하루도 안걸르고 정규를 때렸다.


나이도 정규가 한살이나 많고 덩치도 정규가 컸다.


돌석은 정규만이 아니라 다른아이들도 괴롭혔다.


차동마을에 조와는 매일처럼 싸우고 조를 때려서 조의 아버지와 돌석 아버지는 또 싸웠다.


두 아이의 아버지들도 싸나운 사람들이였다.


아이 싸움이 어른 싸움이 되었다.


그러나 정규는 말려줄 아버지가 없었기에 힘은 있는데도 돌석에게 맞아주면서 학교를 삼년이나 다니던 어느날 결심을 굳혔다.


안그러면 계속 맞고 다녀야만 되기 때문이였다.


한번 맞서서 싸워보기로 다짐을  했다.


"좋아 한번 해보자! 깡패 돌석이와 한판 붙어보자. 죽을 각오로 한판 해보자!"


 


돌석은 싸나운 종자였다.


돌석의 아버지도 엄마도 싸나운 종자였다.


요즘 대한 항공 회장 부인과 딸들이 연일 싸나움때문에 문제가 터지고 있다.


나라에는 싸나운 성씨가 있다.


돌석은 악종이였다.


공부는 못하는데 싸움은 좋아하였다.


돌석의 형은 일본 큰 회사의 통역이 되어 많은 돈을 벌어서 고국으로 보내주어 논과 밭을 많이 샀다.


그래서 잘 먹어서 덩치도 좋았다.


반면에 정규는 아버지도 없고 잘 먹지를 못해서 나이에 비해 힘이 좋은 편은 아니였다.


하지만, 공부 끝나고 집에 가면 농사 일을 해서 근력은 있었다.


그리고 일본에서 가라대를 좀 구경을 했다.


돌석은 그날도 강도굴재에 올라서면서부터 시비를 걸었다.


"야 정규 쌔끼야 호로자식아. 니가 공부만 잘하면 다냐?"


정규는 침묵을 지켰다.


또 돌석은 "야 개새끼야 호로자식아 애비도 없는 호로쌍놈의 자식아 왜 가만 있냐? 엉" 탁 탁 주먹으로 정규의 얼굴을 때렸다.


사실상 정규는 돌석보다 한살이 위였다.


정규가 지금까지 힘이 없어서 맞아준 것은 아니였다.


자신은 아버지가 안계시니 돌석을 때리고나면 돌석이 틀림없이 자기 아버지에게 일러줄터인데 그 일이 감당이 안되었다.


그래서 참은 것이다.


또 사실은 돌석의 할머니가 정규 어머니를 중매를 해준 사이이다.


정규 어머니는 돌석이 할머니를 형님이라고 깎듯이 대접한다.


따지고보면 정규는 돌석이의 외가쪽 삼촌뻘이다.


그러한 생각을 하면서 맍아주는데 또 돌석이 욕설을 하면서 발로 정규의 가슴을  찼다.


그때 정규는 살짝 뛰면서 피하였다.


돌석은 "어쭈 이새끼가 내 발차기를 피하네"


정규는 "돌석아 그러지마라."라고 점잔하게 말을 해주었다.


돌석은 "야 호로자식아 개새끼야 내 발차기를 피해 이 새끼야"


또 발차기를 해왔다.


이번에도 피하면서 말하였다." 돌석아 나에게 다른 욕은 다 좋은데 호로자식이라는 말은 하지말아라."


돌석은 이미 이성을 잃었다.


정규의 말은 듣지도 않고 욕설과 함께 주먹과 발로 차고 밞았다.


정규는 어쩔수없이 반격을 하였다.



정규도 화가나면 무서웠다.


공자가 중국에서 제일 용맹한 장수 출신 자공을 휘잡은후 제자로 삼은 기질이 정규에게도 있었다.


정규는 돌석이 애비가 나중에 쫒아와서 행패를 부릴 것에 대한 두려움을 억제하고 돌석에게 수도치기로 돌석의 목을 향하여  가격하였다.


정규의 수도치기는 돌석의 목에 명중하였다.


정규는 눈이 밝았다.


돌석의 주먹과 발차기가 환하게 보였다.


헛점이 수두룩 하였다.


돌석은 정규를 공격하였으나 정규는 그 공격을 시작하면 재빨리 돌석의 목과 눈을 가격하였다.


아이들은 놀라운 눈으로 정규의 싸움 솜씨를 구경하면서 감탄하고 침묵을 지키다가 나중에는 "정규야 이겨라 정규야 이겨라 "라고 응원을 해주었다.



돌석은 정규에게 상대가 안되었다.


정규는 동작이 빨랐다.


돌석보다 덩치는 작지만 돌석이 공격을 하면 그 공격을 피하면서 헛점을 공격하였다.


제비처럼 빨랐다.


까치와 뱀이 싸우는 것처럼 싸웠다.


싸움을 시작한지 한시간이 넘어도 계속 되었다.


나중에는 돌석은 돌을 정규를 향하여 들고 던졌다.


정규는 이번에 확실하게 돌석을 기를 꺾어주어야 한다고 생각하였다.


돌을 들고 공격해도 그 돌을 피하면서 달려가 발로 차버렸다.


돌석은 박치기도 사용하였다.


그러나 정규를 이기지 못하였다.



아이들은 깜짝 놀라고 말았다.


그렇게 순하고 착한 정규가  깡패 대장 돌석을 확실하게 제압하다니?


싸움이 끝나고 집에 돌아오니 곧바로 돌석이가 자기 아버지를 데리고 정규집에 나타났다.


돌석이 아버지는 고래 고래 소리를 질렀다.


"야 이 애비도 없는 호로자식아 어디서 내 아들 돌석이를 때려서 이렇게 만들어 ?엉 이 개 쌍노무 쌔끼야?"


정규의 오른 뺨 왼 뺨을 사정없이 올려부쳤다."


사정도 안봐주고 힘께 때려부쳤다.


심지어 발로도 차고 밞았다.


그리고 정규 어머니에게도 욕설을 퍼부으면서 때릴리고 윽발 질렀다.



차동마을 공씨들은 아무도 정규를 말려주지를 않았다.


아이 싸움이 어른 싸움되고 집안 싸움 될까보아서 숨을 죽였다.


그러나 집안 작은 아버지들이 달려와서 지켜보니까 그때서야 돌석 아버지는 슬금 슬금 물러갔다.




그 일이 있은후로는 돌석이는 정규를 괴롭히지 못하였다.


어느날 열이 아버지 정규는 참봉 할아버지에 대한 이야기를 해주셨다.




공 참봉 해골재판

공정승의 후손중에 공참봉이라는 위대한분이 계셨다.
열이 아버지 정규는 유명한 이야기꾼이였다.


집안 조상님들 제사날이 돌아오면 제사를 지내는 집은 웃골 샘으로 가서 물을 길어와 그 물로 목욕재개를 하였다.

그후 집안 대청소를 한다.

온 가족이 새 옷으로 갈아 입고 설날처럼 제사 음식을 준비를 했다.

일가들은 부조를 하는데 달걀 한 바구니를 가져오는 사람
수박을 몇통 가져오는 사람등

온 공씨 일가들은 조상 제사를 위해서 정성을 모았다.

그리고 그날 오후부터는 일가들이 제사지내는 종가집으로 모여드는 것이였다.

종가집은 초가 사칸집이였다.

방과 대청과 큰방 그리고 부억으로 만들어져 있다.

보통 여수 사골의 집들은 사칸집이 대부분이다.

더 큰 부자집은 사랑채가 별도로 있다.

제사집에 오는 사람들은 남자들이 대부분이다. 그 남자들은 큰방에 앉아서 이야기를 나누고 


 시루떡과 찰떡을 해서 일가들이 오는대로 대접하였다.


 여자아이들은 작은방에서 모여 놀며 떡도 먹고 한다.


 큰 여인들은 부억에서 음식을 준비한다.


 제사날은 집안 잔칫날과도 비슷하였으나 약간은 엄숙하였다.



그날에 일가들은 제사 음식장만을 돕고 아이들은 아이들끼리 모여서 일가의 소속감을 누린다.

저녁식사는 일가들이 모두 모여서 함께 먹는다.

저녁식사후에는 여자들은 부억에서 음식 장만하고 남자들은 큰방에서 둘러앉아서 이야기 꽃을 피운다.

여자들은 아무런 말이 없이 음식만을 준비하였다.

그 자리에서 주요 이야기 메뉴는 조상들 이야기였다.

공자님 이야기와 공정승 이야기와 공참봉 이야기는 단골 메뉴였다.

군대 이야기도 주요 메뉴였다.

이야기의 주도권은 언제나 열이 아버지 정규가 주도하였다.

이제부터 정규의 공참봉 이야기를 들어보려고 한다.

정규: 공참봉 할아버지는 한재 부락으로 가셔서 마을을 이루며 사셨단다.

어려서부터 천재이셨지

천자문, 명심보감, 소학,대학 ,논어, 맹자를 다 마치고


한양으로 과거 시험을 보러 가셨단다.
무슨 벼슬을 위해서가 아니었다.
공정승 할아버지가 후손들에게 정치는 공가에게는 맞지않다고 하셨으니 학자가 되시려고 하셨단다.

이조 시대는 여수에서 한양까지는 걸어서 한달 걸리고 말을 타더라도 쉽지않는 길이란다.

참봉 할아버지는 걸어서 가셨단다.

과거 시험 날자보다도 약 두달 남겨두고 산천도 유람할겸 서서히 가셨지


등에는 시험 볼때 입을 깨끗한 의복을 싸서 지고 한복 두루마기에 갓을 쓰고 여유롭게 걸어가셨단다.

가다가 어두워지면 주막에서 식사하고 잠을 자면서 말이다.

그때는 주막이 길 요소 요소에 있었단다.

그렇게해서 한달만에 한양땅에 도착한거야

남은 한달은



임금님 계신 궁전에서 제일 가까운 양반집을 골라서 문객으로 들어갔단다.

그 집은 궁전만큼 큰 집인데 이조판서 대감 집이였단다.

그때는 시골에서 과거 시험을 보러 올라온 인재들을 대감들 집 사랑채에서 공짜로 밥을 주고 잠을 재워주었단다.

그 이유는 인재 발굴이 목적이지

장래가 촉망한 인재를 미리부터 대우하여서 자기 사람을 만들려는거다.

참봉 할아버지는 그때가 총각시절이였지

참봉 할아버지 역시 옥골 미남자였단다.

대감에게는 예쁘고 총명한 딸이 있었단다.

셋째 딸이였지

참봉 할아버지의 아내가 바로 대감의 사랑스러운 셋째 따님인거다.

즉, 우리들 할머니가 되신거다.

참봉 할아버지는 벼슬에는 처음부터


아예 마음이 없으셨단다.
그래서 대감 딸에게 미리 물어보았단다.
"소저 저는 과거시험을 보러 왔으나 벼슬에는 맘이 없습니다. 참봉 자격만 따서 여수로 내려가서 시원한 가막만 바다를 바라보며 구봉산 중턱에 그림같은 초가사칸 집을 짓고
제자들이나 기르키면서 시를 짓고 낙시나 하면서 살아가고 싶습니다. 그래도 제가 좋으시다면 몰라도 아니시라면 저에 대한 미련을 버려주십시요. "

그러나 한번 반해버린 대감 셋째 딸은 눈을 빛내면서
" 님의 소원은 소녀의소원이며 님의 취미 역시 소녀의 취미가 아니옵니까? 저 역시 구봉산 중턱 남향 받이에 그림같은 집을 짓고서 님의 제자들 가르치는 음성을 들으며 님과 함께 시원한 가막만 푸른



바다를 바라보고 여가시간에는 님을 따라서 낙시도 해보며 살고 싶습니다."

결국 참봉 할아버지는 참봉 시험에 장원으로 되셨단다.

참봉 다음에는 진사 시험이 있단다.
진사가 되면 군수나 왕궁 관리로 가는거지

대감이 장인이니 출세는 보장되는줄 알지만 평안감사도 제 싫으면 그만인거지

대감 장인도 참봉 할아버지의 고집에는 두 손을 들고
사랑스러운 셋째딸을 주고 만거야

대감은 참봉 할아버지와 셋째딸 혼인식을 한양에서 성대하게 치루었단다.

여수 신월로 내려와서도 결혼식을 성대하게 치루었지ㅡ
참봉 할아버지가 내려올때는 마차를 타고 내려왔단다.

열:와ㅡ아부지 이야기 증말 잘하시요 잉?

일가들:하하하


해설: 열 오촌 채영 당숙은 그당시에는 어려운 여수중을 졸업한 수재입니다.

채영은 "열아 느구 아버지 정규 형님은 동경 제국대학까지 갈분인데 느구 할아버지 나의 큰아버지가 갑자기 사고로 돌아가신바람에 이렇게 이야기꾼이 되신거란다. "

정규는 이어서 이야기를 계속 하였습니다.

" 참봉 할아버지는 여수로 내려와서 소망대로 대감 셋째딸 할머니랑 알콩달콩 살았단다.
바다가 보이는 동산에 그림같은 초가 사칸을 짓고 서당을 열으셨단다. 여수의 선비들 대부분은 참봉 할아버지 제자들이란다. "

열: "아부지 참봉 할아버지가 조상님들중에 진짜로 유명하게 된 그 이야기 쫴끔 해주시시요 잉? "




열" 아부지 참봉 할아버지가 해골 재판한 이야기 해주시요 잉?"

채영 " 그래요. 정규 형님 해골 재판 이야기 한번 더 해주시요 잉?"

정규" 이야기에 공짜가 어디 있다냐? 할아버지 제사는 12시에 드릴테니까 시간이 많이 남았구나. 이야기가 듣고 싶으면 막걸리 좀 내오너라. 열이랑 영이랑 아그들은 시루떡 좀 내다가 주어라."

열이 숙모님이 막걸리 상을 봐 오시고 시루턱 한 바구니를
가지고 오셨습니다.

어른들은 막걸를 마시고 아이들은 시루떡을 먹으면서
화기애애 하였습니다.

먹는 것은 다 마쳤습니다.

열" 아부지 후딱 해보시요 잉 ?"

채영 " 열이 너는 이야기를 좋아하는구나 잉? 정규

형님 퍼뜩 해보시요 잉? 열이도 듣고싶다고 안해싸소?"

일가들도 이구동성으로 열이 아버지 정규에게 이야기를 재촉하였습니다.

정규는 큰 기침을 한후 이야기를 시작 하였습니다.
" 때는 1890 년도였단다.
참봉 할아버지는 대감 셋째딸 할머니와 서당을 하면서 행복하게 사셨단다.
아들들 삼형제를 낞고 딸 자매를 낞았단다.

자식들을 모두 출가시킨후부터는 공정승 할아버지 묻히신
산소를 찾아 나섰단다.

서당 훈장은 큰 아들에게 물려주고 열이로 따지면 서당을 물려받은 우리들 증조 할아버지쯤 될거다.


참봉 할아버지는 매일처럼 새벽일찍 아침을 드시고 도시락을 싸서 한재에서 30리가 넘는 낙포로 가서 공정승 산소를


주민들에게 물었단다.
열" 아부지 정승 할아버지 무덤이 사라져버렸어요?"

정규 " 응, 임진왜란통에 낙포가 치열한 전투 지구여서 피난 다녀온 사이에 그만 그렇게 되었단다. "

열" 아무리 그래도 정승 할아버지 묘소를 잃어버린다요?"

정규" 그러게 말이다. 그래서 참봉 할아버지가 석달을 하루같이 30 리길을 도시락을 싸가지고 오고 가면서 기어코 정승 할아버지 산소를 찾아냈단다. "

열 " 우와 ㅡ 신난다."

정규" 근데 말이다. 정승 할아버지 산소 자리에 여수에서 젤 권력자 조상의 묘를 써낞지 않았냐? "

열" 그래서요."

정규 "참봉 할아버지가 그 권력자를 찾아가서 당신 왜 ? 우리 할아버지 산소에다가 당신 할아버지 묘를 썼소. 당장 파내시요?"
라고 하였단다.

그 권력자는 오히려 큰소리를 치면서 " 당신 할아버지 산소라는 증거를 대보시요? "라고하더란다.

그래서 그 권력자를 데리고 산소로 와서 산소 주변을 일군을 불러 파보니까 공정승지 묘 라는 작은 비석이 나왔단다.

그런데도 그 부자는 참봉 할아버지의 말을 무시하고 자기 할아버지 유골을 옴겨갈 생각을 안하고 어디 빽이 있으면
맘대로 해보시요. 하면서 삿대질을 하고 욕을 하더란다.

그래서 참봉 할아버지는 그날 밤에 그 귄력자의 묘를 파헤치고 그 권력자 할애비 유골을 파서 보따리에 싸가지고 집으로 돌아와서 유골을 아무도 모른곳에 숨겨두었단다.


열" 그러면 그쪽에서 알면 난리가

날것인데요?"
정규"열이가 제법이구나! 그랬단다. 그렇게 거만하던 권력자가 지 할애비 유골이 사라지자 참봉 할아버지에게로 와서 사정을 하더란다.
그러면서도 묘 이장은 안해간다고 하더란다. 그러니 돌려주지 않고 뱃장을 부렸더니 관청에 고소를 히더란다. "

열과 채영과 일가들은 숨을 죽이고 다음 대목을 목을 길게 빼들고 정규의 입만을 바라보고 있었습니다.

정규는 침을 꼴딱 삼킨후 " 순천 관청에서 재판이 열렸단다. 재판장은 이쪽 저쪽 주장을 들어보더란다. 그리고나서 참봉 영감 해골이나 돌려주세요. 묘소는 공정승 묘소가 맞네요. 그곳에서 공정승 비석이 나왔다면서요?"


재판장의 그 말에 여수 권력자는 대답을 못하고 우물주물 하더란딘.
결과는 참봉 할아버지가 이겼단다.


재판장은" 묘소는 고려말 충신 공정승 묘소가 분명하니 g씨는 조상 해골을 돌려받아서 다른곳으로 이장하시요. 그리고 공참봉은 g씨 조상 유골을 돌려주세요" 재판후 재판장은 웃으면서 "성인의 후손이시고 공정승의 후손으로서 점잖은 참봉께서 남의 해골을 가져가시다니요? 물론 화가 나셔서 그러시겠지만 해골을 돌려주십시요?"

그러자 참봉 할아버지는 자루에 담아가지고 간 해골을 g권력자에게 휙 던지면서 소리 치셨단다.

"이 해골이 느구 할아버지 해골이요? 우리 할아버지 해골이요? "

그랫더니 김씨는 자기 할아버지 해골이 바닥에 떨어지기전에 넙죽 자빠지면서 자기 할아버지 해골 자루를 받더란다.

하하
열 "우와 멋진 참봉 할아버지시네요? 잉, "

해설: 채영과 태식 그리고 일가들은 희열을 느끼면서 박수를 쳤다.

그리하여서 공정승 묘소를 찾게 되었고 그 산소 앞에 거대한 제각을 세우고 해년마다 공정승 자손들 남한 공가들은
2월에 삼일면 낙포리 제각에 모여서 제사를 지내고 친목을 도모하면서
졔각 앞에는 참봉 할아버지를 위한 공로 비석도 후손들이 세워드렸다.




열이 할아버지의 죽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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