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e:세부해양대>탈북자 이창국 영어

작성자세부사랑|작성시간16.03.03|조회수70 목록 댓글 0

<약간 각색하여 소설처럼 써 보았습니다. 재밌게 읽어 보시길>

 

이 선생은 정년 퇴직을 조금 일찍 했지만, 하는 일도 별로 없이 조금 할 줄 아는 영어로 영어 학원선생이나 과외 선생 영어 가르쳐 주는게 유일한 소일꺼리이다.


이 선생이 영어 재능기부를 한지 3년이 넘었으니 제법 알려저셔 일주일에 서너명은 찾아 온다.


그날도 일요일에 할일도 없고 소파에 앉아 꾸벅꾸벅 졸고 있는데 전화가 걸려 왔다.

모르는 전화이길래 끊어 버릴까 하고 놔두었는데 전화벨이 계속 울려 댄다.


전화기를 집어 들고 켜니 여보세요, 거기가 혹시 영어 공짜로 가르쳐 주는뎁니까? 하고 대뜸 묻는다.

예, 그랬더니 거기를 찾으려면 어떻게 가야 되요? 하고 말한다.


사직동 야구장 앞입니다. 하니 야구장이 어디죠? 하며 되묻는다.

이 선생은 그럼 전화하시는 분은 어디에 사세요? 하니 반송에 삽니다라고 한다.


건데 사직 야구장을 몰라요? 물으니 사실은 저가 탈북자인데, 오자마자 배를 타서 부산지리를 모릅니다.라는 대답을 듣는다.


이선생은 탈북자라는 생각에, 몸은 늙었지만 야릇한 호기심이 생긴다. 그래서 이름이 이창국이고 나이는 40대 중반이고 어머니도 같이 탈북하여 서울에 살고, 애는 11살인데 어머니가 기르고 자신은 배를 타서 돈을 벌어 어머니께 보낸다는 것까지 20분 남짓한 시간에 다 알아낸다. 


이 선생은 재능기부를 하면서 이색적인 경력을 가진 사람을 만나는 것이 어느새 취미가 되었다.


그가 만난 사람은 영어 좀 배워서 애를 가르치겠다는 40대 열정엄마, 영어 공부 하려는데 도저히 안되는 대학생, 외국대학에서 실패하고 한국 돌아온 학생, 인서울 대학에서 공부하다 자퇴한 학생, 학원하다가 망한 영어학원 원장, 외국에서 어학원을 운영하는 원장 참으로 다양하다. 그 중에서 가장 이색적인 경력을 가진 사람이 이창국씨였다.


이창국씨는 배를 타는데 기관부 조기수이다. 그는 6-7개월 배를 타고 육지에서 한달간 쉬는 형태여서, 쉬는 한달 기간을 이용하여 거의 매일 오다시피 했다. 육지 사람들은 한달애 휴가를 8일 쉬지만 배를 타는 사람들은 그 휴가를 모아서 6-7개월뒤에 한꺼번에 쉴수 있다.  그래서 어떤 사람은 휴가를 2달 이상 가지는 사람도 있는데, 이 휴가를 이용해서 가족과 여행,동아리 활동, 등산, 외국어학연수, 영어공부, 운동, 텃밭 가꾸기 등 배에서 못하는 것을 맘껏 즐긴다. 창국씨는 영어 공부를 선택한 것이다.


이 선생도 젊을 때는 배를 타고 29개국을 누볐으니 항상 배사람을 존경하고 친구처럼 대한다. 그리고, 영어 재능기부를 하면서도 배를 타는 사람들은 항상 1순위로 해 준다. 배들 탈 때는 영어가 실무에서 얼마나 중요한지 알기 때문이다.


창국씨는 배는 15년이상 탔지만, 북한에서 영어를 거의 배우지 않았고 북한 배에서는 영어를 거의 써지 않기 때문에 어려움이 전혀 없었는데 한국배에 오니 외국인과 같이 생활해야 하고, 자격증 따는 데 영어 시험도 치고, 모든 기관 정비 매뉴얼이 영어로 되어 있어 영어를 모르니 무슨 말인지 알아 들을 수가 없었다.


자격증도 거의 외우다시피해서 겨우 땄는데, 기관용어까지 몰라서 작은 실수를 여러번 해서 영어를 독하게 공부해야겠다고 마음먹었다. 앞으로 20년 이상 배를 타야 하니 꼭 배워야 한다고 생각한다.


이 선생의 관심은 실험인데, 자신이 개발한 영어 공부법을 창국씨와 같이 영어를 거의 모르는 사람한테 적용했을 때 어느정도 효과가 나타나는지 알고 싶었다. 이선생은 차라리 한국 영어 교육을 모르는 사람이 더 빨리 받아들일지 모른다고 은근히 기대를 해 본다. 
 

이 선생의 실험 정신, 창국씨의 필사적으로 영어 배우겠다는 마음이 뭉쳐져서 두 사람의 영어 수업은 아주 재밌게 흘러가고 있다.

두사람은 거의 매일 만나서 창국씨가 한글을 보고 읽고 이선생은 영문책만 보고 틀린지 맞는지만 체크해준다. 창국씨는 진보가 처음에는 발음도 다 틀리고, 읽는 속도도 거의 유치원생 동화책읽기 수준이었는데 점차 정확해지고 속도도 빨라져간다.

이선생의 강의는 정말 단순했다. 100개의 문장을 외우기인데, 외우기가 너무 쉬웠다. 서툴러 보이는데 효과는 엄청 좋다.


한달간 수업이 빠르게 지나가고 창국 씨는 배를 타러 갔다. 이 선생은 마지막 수업을 마치고, 저녁 겸 소주를 한잔 먹으면서 신신당부를 했다.

"창국씨, 배에 가거든 100개 문장을 여기서 하듯이 매일 그렇게 해야 되요. 내가 재능기부를 하는 만큼 창국씨도 내한테 무엇을 해주어야 될 것이요. 6-7개월 후에 내려오거든 내한테 얼마나 진보가 되었는지 반드시 보여줘야 해요. 그 결과를 가지고 내가 할일이 있으니 말이오."

 " 이 선생님은 저를 아직 모르시군요. 이 영어 방법이 저에게 맞는지 안 맞는지 모르지만 저는 영어 아니면 애를 먹여 살리지도, 어머니를 부양하지도 못합니다. 영어를 해야 제가 먹고 삽니다. 그게 제가 한국에서 성공할 수 있는 유일한 길입니다. 제꿈이 한국에서 기관장 해보는 게 꿈인데, 영어 못하고 이렇게 조기수하는 것과 기관장은 연봉이 거의 세배까지 차이나는데 제가 조기수로 늙을 수는 없죠. 이제 영어 배우는 길을 찾았으니 하루에 백번이상 읽을 것입니다. 두고 보십시요, 선생님과 사모님이 보고 계신데 제가 이 은혜를 잊으면 안되죠"


옆에 있는 이 선생의 아내도 처음에는 창국씨가 영어를 이렇게 배우리라고는 전혀 예상치 못했다. 옆에서 보면 영어 단어도 모르고 스펠링도 쓸줄 모르는 사람이 순전히 외워서 하는데, 워낙 기초가 없어 영어가 안되리라고 보았다. 그런데 매일 매일 오면서 읽기 숙제를 내주면 다음날 하는 것을 보면 제법 외워오고 일주일이면 몇문장은 제법 크게 읽을 줄 알았다. 그만두겠지 했는데 한달이 지나다니 대단한 정신력이었다.


그래서 한마디 거들어 준다

" 창국씨는 정말 진지해요, 뭔가 죽음을 넘어서 온 결단이 조용히 흐르고 있어요. 성공할 수 밖에 없을 거예요"    


창국씨는 무심한 듯 하지만 마음으로 지원해주는 김여사에게 늘 감사함을 표하고 싶었다.

" 제한테 그런게 보입니까? 저는 되도록 그런 거 안 보이려고 하는데, 잘 봐 주셔서 감사합니다"


그렇게 배를 탄지 6-7개월 지나고, 1개월 공부하고, 다시 6-7개월 공부하고 1개월을 공부하기를 두세번 반복하니 어느새 창국씨의 영어는 거의 대학생 수준이 되었고 자기소개서나 작문 같은 것은 도리어 훨씬 능가했다.


3년이 지나서 창국씨는 큰 배를 타는 해기사 모집에서 당돌하게 면접관에게 제안을 했다.

" 자기 소개를 영어로 할 테니 5분간만 줄 수 있겠습니까?" 하고 물으니, 면접관은 당돌한 사람이라고 생각했지만 영어로 자기소개를 하겠다는데 마다할 사람은 없다.


면접이 끝나고 전체 회의를 하는데, 창국님은 2등기관사 지원자 10명중에 승선경력은 제일 많지만, 배의 크기가 작았고, 경력도 해기사가 아닌 일반선원이 많았고 3등기관사 경력은 2년 밖에 되지 않았다.


창국씨는 이 선생이 시켜서 영어로 자기소개를 했지만 합격은 힘들것이라 생각했다. 이번이 안되면 다시 또 도전하겠다는 마음이 있으니 면접 기회를 준 것만 해도 고맙게 생각하고 최선을 다했다.


면접 본 하루 뒤 2등기관사에 합격했다는 통보가 왔고, 인사 담당자로 몇가지 조건이 있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2등기관사이지만 나이가 제일 많으니 혹시 불미스러운 일이 생기면 즉각 하선한다는 조건이었다. 인사담당자는 부당해고를 시키면 선원법상 해고 수당을 줘야 한다는 부담 때문에 그렇게 다짐을 해 두었다. 다음날 회사에서 요구하지도 않았지만, 창국씨는 자발적으로 서약서를 써서 제출했다. 목숨을 걸면서 사선을 넘어 왔는데 그정도는 얼마든지 극복하고, 배의 기관장, 1기사나 다른 직원들을 위해서라면 한 몸 부서져도 좋다고 생각하고 실천해 왔기 때문이다.


창국씨는 배를 타기전에 이 선생님에게 인사를 하러 갔다. 이 선생님 덕분에 면접도 합격했고, 배를 탄다는 소식을 전하러 간것이다.


이 선생은 항상 소탈해서 친구처럼 대하고 부적까지 챙겨 줄 정도로 배려가 깊다. 배를 탄 사람이라서 그런지 일종의 미신도 믿는 듯 했다.   창국씨는 항상 이 선생을 만나면 고마운 마음에 눈물이 앞서지만 절대로 내색은 안했다. 그날도 집에 와서 실컷 울고 조용히 아버님 앞에 절을 하고 배로 떠났다.


큰 배에 2기사로 가니 연봉이 천만원이 더 늘었다. 북한에서는 10년을 벌어도 못 볼 거금이었다. 올해만 배를 타면 그간에 조금씩 모아둔 돈과 합쳐서 집을 사서 어머니와 아이를 부산으로 이사시킬 작정이다. 나이 47살에 2기사로, 탈북자 중에서는 최초이다. 2-3년 지나면 1기사, 또 2-3년 지나면 기관장도 하면 70살까지는 배를 탈 계획이다.  늦게 위치에 올라갔으니 더 오래도록 타면 된다는 생각이 든다. 한국에서 배를 타서 최초로 성공한 탈북자로 기억하는 그날, 선원들의 명예의 전당에도 올라갈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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