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제교환학생> 난민 소녀 나시바의 꿈

작성자세부사랑|작성시간16.03.15|조회수29 목록 댓글 0

나시바는 아프가니스탄에서 미국으로 망명을 하였다.

미국 북부 일리노이즈에서 정착을 했다가 루이지아나로 이사하여 살고 있다.


아프가니스탄에서 내전이 일어나자 난민 캠퍼에서 3년을 넘게 살면서 학교도 가지 못하고 미국으로  이주하여 10살 넘어 초등학교에 들어갔다. 다행히 아버지가 미국에서 유학을 한적이 있어 모자라는 영어도 가르치고 나시바도 열심히 해서 중학교 때 월반 한번, 고등학교 때 월반 한번해서 19살에 고등학교를 마쳤다.


미국은 공부를 일정한 비율 이상으로 잘하면 월반 제도가 잘 되어 있다. 우리처럼 고등학교를 꼭 3년 다녀야 졸업하는 게 아니라 어느정도 잘하면 월반으로 인정하여 대학으로 바로 보내는 것이다. 개인별 평가를 중시하며 우수한 학생에게는  더 높은 기회를 항상 열어둔다.


나시바는 초등학교 때 학교를 늦게가서 영어로 말도 못하고, 쓰지도 못해서, 읽지도 못해서 항상 컴플렉스를 가졌다. 이 세상에서 가장 좋은 곳이 학교이며,항상 천국같고, 항상 오래 머물고 싶었다. 하지만 가족들이 많아서 영어를 모르는 엄마를 대신해서 시장을 보아야 하고 동생들 뒷바라지를 해야 하니 공부시간이 부족해서 밤늦게까지 공부했다.

전쟁속에서 가족이 목숨걸고 탈출을하고 캠퍼 단체 생활속에서 개인적인 자유가 없는 삶을 살아서 그런지 나시바에게 자유가 한없이 보장되고, 학습의 기회가 주어지는 미국은 구세주였다.

그런 기회를 준 미국에서 자신은 공부를 열심히 해서 유명한 의사가 되어 성공하고, 다시 고향에 한번 가보는 것이 꿈이었다.


나시바는 얼굴을 그렸는데 반쪽은 지옥의 얼굴, 반쪽의 천국의 얼굴을 그렸고 지옥은 아프가니스탄의 삶이었고, 미국은 천국의 삶이었다. 나시바는 가족에 항상 친숙했다. 아내와 나시바, 둘이는 친어머니, 친딸 같았다. 늘상 같이 있었고, 같이 무슨 이야기인지 수다를 많이 떨었다. 나시바는 그렇게 가족을 존중하고 부모에게 충실한 얘였다. 미국에서 살림이 어려웠을 텐데, 어떻게 해서 한국까지 올수 있었는지 궁금했다, 자신이 한국에 오고 싶어서 아르바이트를 해서 조금씩 벌어서 비행기 삯을 마련했다고 한다.한국 학교에서도 항상 낙천적인 성격에, 학교에서도 남학생과 같이 축구를 할 정도로 활달했다.


나시바는 우리 집에 많는 것을 남겨 주고 갔다.

전쟁속에서도 밝은 웃음을 잃지 않는 법을 가르쳐 주었고, 희망, 가족간의 정을 듬뿍 주고 갔다.

애는 지금 루이지애나 주립대학에 예비과정을 마치고 마취과 의사로서의 길을 준비하고 있다.


아프가니스탄 공주로서 언젠가 마취과 의사가 되어 성공해서 고향으로 돌아간다는 소식을 듣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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