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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오늘의만평

우표로 본 오늘의 인물과 역사 - 2/22

작성자황금통|작성시간17.04.04|조회수49 목록 댓글 0

 우표로 본 오늘의 인물과 역사 - 2/22 | 우표로 본 오늘~

화상 | 조회 61 | 2014/02/21 22:35:30

오늘~ 2/22

 

 

"우표에서 얻은 지식이 학교에서 배운 것보다 많다."

- 프랭클린 루스벨트

 

 

 

    

 

2012 - 미국의 기자 마리 콜빈과 프랑스의 사진 기자 레미 오슐리크 사망

콜빈 [Colvin, Marie, 1956.1.12~2012.2.22]

오슐리크 [Ochlik, Remi, 1983.10.16~2012.2.22]

시리아 사태 점입가경..정부군 폭격에 기자 2명 사망

정부군 폭격에 美·弗 기자 사망
지난해 3월부터 사망자 7600명 이상

유혈사태가 지속되고 있는 시리아에서 정부군 폭격에 외신기자 두 명이 사망했다. 지난해 3월부터 현재까지 사망자는 7600명을 넘은 것으로 추정된다.

22일(현지시간) 뉴욕타임스(NYT) 등 주요 외신에 따르면 시리아 정부군이 이날 오전 시리아 반정부 세력의 거점인 홈스 중심부 바바 아므르를 집중 포격, 이곳에서 취재하던 마리 콜빈 영국 선데이타임스 기자와 레미 오슐리크 프랑스 사진기자가 현장에서 숨졌다.
기자경력 25년차인 콜빈은 지난 20년간 특파원으로 세계 각지의 분쟁지역을 취재해왔다. 지난 2001년 스리랑카 내전 취재 도중 수류탄 파편을 맞아 왼쪽 눈을 잃고 검은색 안대를 하고 다닌 것으로 유명한 인물이다. 리비아에서는 무아마르 카다피 전 국가원수와의 인터뷰에 성공하기도 했다.
미국과 프랑스는 두 기자의 사망 소식에 즉각 시리아 정부를 공격하고 나섰다. 니콜라 사르코지 프랑스 대통령은 "아사드 정권은 이제 사라져야 한다"고 날을 세웠다.
정부군의 폭격으로 이날 하루 홈스에서만 최소 57명이 목숨을 잃었다. 시리아 인권관측소 측은 지난해 3월 시작된 반정부 시위 이후 정부군의 유혈진압으로 인한 사망자 수가 7600명을 넘어섰다고 주장했다.

안혜신 기자 ahnhye@ /이데일리 2012.02.23 08:55

http://www.edaily.co.kr/news/issue/IssueRead.asp?DCD=A00902&hot_gb=

5&hot_cd=2781&newsid=01351366599433472

 

 

 

 

2011 - ‘뽀로로 우표’ 발행

우리나라는 물론 세계 110여 나라에 수출돼 많은 인기를 얻고 있는 만화 캐릭터 ‘뽀로로’를 소재로 한 기념우표가 오는 22일부터 전국 우체국에서 판매된다. 지식경제부 우정사업본부는 한국의 캐릭터 우표시리즈를 매년 1차례씩 4회에 걸쳐 발행하며, 올해 첫 번째로 ‘뽀롱뽀롱 뽀로로 기념우표’를 발행했다고 17일 밝혔다.

우정사업본부 제공 /한겨레 2011-02-17 오후 07:49:21

http://www.hani.co.kr/arti/economy/finance/463964.html

 

 

 

 

2007 - 노무현 대통령 열린우리당 탈당 의사 공식화

노무현(盧武鉉) 대통령은 22일 정세균(丁世均) 의장 등 열린우리당 새 지도부를 초청, 만찬을 함께 하는 자리에서 열린우리당 탈당 의사를 공식화했다. 이달 말까지 탈당 절차를 마무리하겠다고 했다. 이로써 열린우리당 창당(2003년11월11일) 3년3개월 만에 노 대통령은 당을 떠나고, 당은 여당 지위를 잃게 됐다. 그러나 이 자리는 고별의 자리이면서도 ‘결별’의 자리가 아니었다.노 대통령은 당의 성공을 축원했고, 당 지도부는 국정 지원을 강조했다. 탈당하는 대통령이 당 지도부를 불러 식사를 하는 형식부터가 이례적 이었다. 오간 말들도 ‘언젠가 다시 만나리’ 계열이었다. 노 대통령은 “열린우리당 출범 자체가 역사적 의의가 있고, (남은) 역사적 과업이 있다고 생각한다”면서 “열린우리당이 계속해서 성공해 나가고 잘 되길 기원한다”고 했다. 이어 “(2월14일) 전당대회가 무사하게만 치러졌으면 하고 기원했는데 스페인에서 성공적으로 치러졌다는 보고를 받고 기뻤다”고 했다. 정세균 의장은 “전당대회를 통해 앞으로도 대통령이 하시는 일을 잘 뒷받침하겠다는 결의를 다졌다”면서 “대통령이 당적을 갖고 있든 아니든 우리는 참여정부 성공을 책임져야 하는 책무에서 벗어날 수 없다”고 했다. 또 “항상 마음 써주시는 대통령께 감사드리고 앞으로도 격려와 지도 바란다”고 했다. 이날 만찬은 예정시간을 35분 넘겨 2시간5분 동안 포도주를 곁들여 진행됐다. /조선

 

 

 

 

2007 - 제1회 ‘아동성폭력 추방의 날’ 기념식

비명에 간 어린 넋이 지핀 ‘아동성폭력 추방의 날’

안전한 세상 만들기…너를 잊지 못할거야

한 어린 영혼의 희생이 어린이 성폭력에 무심했던 어른들의 경각심을 일깨우게 될까?

22일 오전 11시 서울 ㄱ초등학교 강당에서 제1회 ‘아동성폭력 추방의 날’ 기념식이 여성가족부와 국가청소년위원회, 38개 여성·청소년·학부모 단체의 주선으로 열렸다. 지난해 2월 일어난 용산 어린이 성폭력 살해사건 1주기를 맞아 연 행사였다. 피해 어린이(당시 11살)가 다니던 학교에 모인 부모와 친구, 지역 주민 400여명은 그의 해맑은 옛 모습이 담긴 추모 영상을 보면서 어린 넋을 달랬다.

“네가 없는 세상에서 산다는 게 쉽지가 않구나. 네가 친구와 동생들이 더 이상 무서운 일을 겪지 않도록 보탬이 된 데 위안을 갖는다. 네가 다음 세상에 왔을 때는 정말 안전한 세상이 되길 간절히 기원한단다. 엄마 아빠의 딸로서 10년 동안 같이 해준 걸 정말 고맙게 생각한다. 다음 세상에서도 우리 꼭 만나자.”

피해 어린이의 아버지 허아무개씨는 비명에 보낸 외딸에게 쓴 편지를 눈물로 읽어내려갔다. 행사에 앞선 기자간담회에서 그는 “가해자를 쉽게 용서할 수도, 잊을 수도 없다”며 “피해자가 순진한 어린이라는 걸 감안해 맨 첫 범죄 때부터 가해자에 대한 강력한 처벌과 치료를 함께해야 한다”고 말했다. 이 사건 가해자가 그전에도 5살짜리 여자 아이를 성추행한 뒤 공탁금을 내고 집행유예로 풀려나 범행을 저질렀기 때문이다. 피해 어린이의 어머니인 이아무개씨는 “이제 재판부에 여성 판사들도 많아진다고 하니 (성폭력 범죄에 대한 선고가) 나아지지 않겠느냐”고 기대했다. 또 이들은 국회 계류 중인 청소년 성보호법(<한겨레> 1월31일치 26면)에 △가해자의 취업금지 제한 폭 확대 △가해자 등록정보 열람 지역 확대 △공소시효 폐지 등을 보태 하루빨리 시행해야 한다는 뜻을 밝혔다.

피해 어린이의 친구들도 어른들의 노력을 당부했다. 어린이들은 편지를 쓴 팻말을 든 채 눈물을 펑펑 쏟으며 “어른들이 빨리 대책 마련을 서둘러 주었더라면 이렇게 내 친구를 그리워하지 않아도 좋았을 것”이라고 말했다. 이에 경찰, 교사, 보육단체, 의사 등 각계의 대표 ‘어른’들은 △피해아동과 보호자에 대한 상담과 지원 △피해아동의 권리를 보장하는 수사 △예방 교육 강화 등을 다짐했다.

강당 뒤에서 내내 울며 행사를 지켜보던 피해 어린이의 외할머니 김아무개씨는 “부모가 얼마나 힘들게 낳아 고이 길렀는데 이렇게 일찍 가려고 그랬는지 어려서부터 예쁜 짓만 골라서 했다”며 “진작 대책을 마련했어야 하고, 처음부터 확실히 처벌했으면 이런 일이 없었을 것”이라고 힘주어 말했다. 

글 이유진 기자 frog@hani.co.kr /한겨레 2007-02-22 오후 05:09:57

http://www.hani.co.kr/arti/society/society_general/192207.html 

 

 

 

 

2007 -미 역사상 최대 갑부는 석유재벌 록펠러 

‘포천’ 조사결과…밴더빌트 2위
10위 안 생존자는 빌 게이츠

19세기 석유재벌인 존 록펠러가 미국 역사상 최대 갑부인 것으로 분석됐다고 경제주간지 〈포천〉이 22일 보도했다.

생존자로는 유일하게 빌 게이츠 마이크로소프트 회장이 갑부 서열 10위 안에 올랐다.

미국 국내총생산(GDP)에 대한 개인자산의 비율을 산출한 결과, 록펠러는 사망 당시인 1937년 기준으로 국내총생산의 1.54%에 해당하는 14억달러(약 1조3천억원)를 보유한 것으로 나타났다. 이어 철도 건설과 금융, 해운업까지 다양한 업종을 두루 거친 코넬리어스 밴더빌트(오른쪽)가 지디피의 1.15%인 1억500만달러를 보유해 2위를 차지했다. 모피 무역업자 존 제이콥 애스터와 퍼스트 뱅크의 최대투자자인 은행가 스티븐 지라드는 각각 3위(지디피의 0.93%)와 4위(지디피의 0.67%)를 기록했다.

5위는 게이츠 회장으로 2006년 기준으로 지디피의 0.66%에 해당하는 820억달러(약 76조9천억원)를 보유하고 있는 것으로 추산됐다. 특히 그는 지난해까지 줄곧 5위 자리를 차지해온 ‘강철왕’ 앤드루 카네기를 누루고 갑부 서열에서 한 단계 뛰어오르는 저력을 보였다.

잡지는 평가 방식에 대해 “부는 상대적이고 달러의 가치도 고정된것이 아니기 때문에, 사망 당시 개인의 자산이 지디피에서 차지하는 비율을 기준으로 삼았다”고 설명했다.

연합뉴스 /한겨레 2007-02-22 오후 06:28:52

http://www.hani.co.kr/arti/international/america/192243.html

 

 

 

 

2006 - '열하일기' 한글 필사본 새로 발견

연암 박지원의 <열하일기> 한글 필사본이 새로 발견돼 22일 공개됐다.

권두환 서울대 교수(인문대 학장·국문학)가 이날 공개한 필사본은 <연암열하일긔>라는 제목에 254쪽 분량으로, 유일한 한글 번역본으로 알려져온 명지대 소장본보다 4배쯤 양이 많다. 정본이 없는 가운데 지금까지 최대치로 여겨지는 번역본(이가원 역)의 6분의 1 수준이다. 때문에 당대 서민들의 언어 생활을 잘 보여준다고 권 교수는 설명했다.

이 필사본은 경성제국대학과 도쿄제국대학에 재직했던 한국어 연구의 대가 오구라 신페이(소창진평·1882∼1944) 교수가 소장하고 있던 것으로 상권 150쪽, 하권 104쪽으로 돼 있고 각각의 표지에 ‘熱河記 乾(열하기 건)’, ‘熱河記 坤(열하기 곤)’이라고 적혀 있다.

권 교수는 “현대에 나온 이가원 선생의 <연암일기> 번역본이나 북한 번역본과 비교해도 훨씬 우리 어투에 맞다”며 “번역투를 완전히 버리고, 눈높이를 낮추면서도 이처럼 우아한 언어로 썼다는 것에 감탄할 뿐”이라고 말했다.

임인택 기자 imit@hani.co.kr /한겨레 2006-02-22 오후 07:49:43

http://www.hani.co.kr/arti/culture/culture_general/104228.html

 

 

 

- 이은주(씨네 21) (공중전화카드)

 

2005 - 영화배우 이은주(李恩宙) 자살

이은주 [李恩宙, 1980.11.16~2005.2.22]

드라마 <불새>, 영화 <태극기 휘날리며> <주홍글씨> 등에 출연해 인기를 얻었던 영화배우 겸 탤런트 이은주(25)씨가 22일 오후 1시10분께 성남시 분당구 수내동 자신의 아파트에서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경찰에 따르면, 이씨는 이날 새벽 6시까지 함께 사는 오빠, 어머니와 이야기를 나누고 방에 들어갔으며, 오후 1시가 넘도록 인기척이 없는 것을 이상히 여긴 이씨의 오빠가 옷방에 들어가 보니 이씨가 숨져 있었다는 것이다.

이씨의 유서에는 “엄마 미안해. 일이 너무 하고 싶었다. 살아도 사는 게 아니다. 누구도 원망하고 싶지 않다. 돈이 있음 좋은데, 돈을 벌고 싶었다”는 내용이 담겨 있었으며, 이씨가 쓴 것으로 보이는 “엄마 미안해, 사랑해”라는 혈서도 발견됐다. 또 이씨의 노트에는 “인간사도 이제 지겹습니다. 자존심도 바닥을 쳤고 더이상은 그러고 싶지 않습니다.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이런 모습 더이상 보이고 싶지 않습니다. 벌써 2월이 중순으로 가고 있습니다. 시간에 쫓기고 있습니다”라는 글이 쓰여 있었다.

주변 사람들은 이씨가 지난해 10월 개봉한 <주홍글씨> 이후 연기활동을 쉬고 있었으나 지난해 말 식사를 거의 하지 않고 잠도 잘 못 자는 등 심한 우울증 증세를 앓았다고 한다. 12월 들어 스포츠센터에도 나가고 청룡상 시상식에서 노래를 부르는 등 호전되는 모습을 보였으나 새해 들어 증세가 심해지면서 최근 “연기 활동이 너무 힘들어서 더 못할 것 같다”는 말을 주변 사람에게 해왔다는 것이다.

지난 3일에는 분당 서울대병원 신경정신과에서 상담을 받으며 “만사가 귀찮고 기억력·집중력이 떨어지고 밥맛이 없다. 하루에 1시간밖에 못 잤다”고 호소했으며, 2주일치 우울증 완화제와 함께 치료 권유도 받은 것으로 알려졌다. 영화인추모단 차승재 대표(싸이더스 대표)는 자살 동기와 관련해 “자기 직업에 대한 고민의 강도가 다른 연기자들보다 더 강했던 것 같다”고 말했다. 경찰은 이씨의 정확한 자살 경위와 동기 등을 조사 중이며, 이씨의 주검은 분당 서울대병원에 안치됐다.

이씨는 1997년 텔레비전 드라마 <스타트>로 데뷔했으며 99년 드라마 <카이스트>에서 인기를 얻은 뒤 영화 <송어>(99년)에 출연했다. 그 뒤 <오! 수정> <번지점프를 하다> <태극기 휘날리며> <주홍글씨> 등에 출연하며 인기 여배우로 위치를 굳혔다.

임범 김기성 기자 rpqkfk@hani.co.kr /한겨레 2005.02.22(화) 17:21

http://www.hani.co.kr/section-005000000/2005/02/005000000200502221721282.html

 

 

 

- Peace and Freedom, 1995

1995 - 영국-아일랜드, 25년간의 분쟁 종식을 위한 평화안 공동 발표
‘메이저 총리가 북아일랜드에 영구적인 평화를 정착시킨다면 그것은 영국 정치사에 일대 기적으로 기록될 것이다.기적이 실현될 조짐이 서서히 우리 눈앞에 나타나고 있다.’
2월22일 발표된 영국․아일랜드 정부간 북아일랜드 사태 해결을 위한 공동계획안, 즉 ‘미래를 위한 구상(Frameworks for the Future)’에 대한 <데일리 미러>의 논평이다.영국의 2대 타블로이드 신문 가운데 하나로 친노동당 노선을 표방하면서 메이저 총리의 보수당 정책을 가장 신랄하게 비판해온 <데일리 미러>의 이례적인 찬사는, 영국인들이 북아일랜드 사태를 얼마만큼 부끄럽게 생각하며, 그 해결을 열망하는가를 보여준다.야당인 노동당의 토니 블레어 당수도 의회에서 메이저 총리의 노력에 초당적인 지지를 약속하는 연설을 했다.주요 정책에 이처럼 여야가 조건을 달지 않고 의견을 같이한 것은 포클랜드 사태 이후 13년 만에 처음이다.
메이저 총리와 존 브루턴 아일랜드 공화국 총리 분쟁 현장인 얼스터 지방(아일랜드의 옛 주명으로 현재의 북아일랜드)의 주도 벨파스트 시에서 공동발표 형식으로 공개한 26쪽짜리 ‘미래를 위한 구상’은, 신․구 교도로 갈린 북아일랜드의 두 적대 세력, 즉 연방주의자들과 통일 아일랜드 민족주의자들이 앞으로의 협상에서 상대측에 양보해야 하고 또 반대 급부로 요구할 수 있는 여러 사항을 담고 있다.
지난 2년 동안 영국과 아일랜드 정부가 길고도 어려운 협상과 진통 끝에 출산한 이 기본구상은, 사태 해결을 위한 주요 사항은 현지의 여러 정치단체와 주민들이 합의하는 ‘독립 자결’에 의해서만 이루어져야 함을 강조하고 있다.이같은 대원칙 아래 기본구상은 다음과 같은 주요 제안을 담고 있다.
△비례대표제로 선출한 주민 대표 90명이 단원제 의회를 구성하며, 이 기구는 왕실․외교․국방 업무를 제외하고 교육․보건 업무 등에 제한된 입법권을 갖는다.△새로 구성된 북아일랜드 의회와 남쪽의 아일랜드 공화국 의회가 각각 선출한 대표로 구성하는 공동기구가 양측의 공동 이해 관심사를 논의한다.△아일랜드 공화국의 헌법을 개정하여 북아일랜드 지방에 대한 헌법상 영토 주권을 포기한다.△영국법을 개정해 앞으로 북아일랜드 주민들이 투표에 의해 자기들의 정치적 운명과 미래를 선택할 수 있도록 보장한다. ... /시사저널 [281호] 1995.3.16

http://www.sisapress.com/news/articleView.html?idxno=26470

 

 

 

- Andy Warhol and 'Portrait of Elvis'                          - Andy Warhol and 'the Flower'

 

- 'Marilyn', 1964                        - 'Marilyn', 1967


1987 - 미국의 미술가, 영화제작자 앤디 워홀(Warhol, Andy) 사망

워홀 [Warhol, Andy, 1928.8.6~1987.2.22]

`팝 아트`의 거장 앤디 워홀이 1987년 2월 22일 사망했다. 소수의 `가진 자` 혹은 `고급 대중`의 전유물로 여겨졌던 미술이 `일반대중`에게까지 참여의 문이 넓혀진 것은 전적으로 앤디 워홀의 공로였다. 그의 팝아트가 선보이기 전까지 서양미술은 고급스럽고 난해한 추상표현주의가 지배해왔기 때문이다.

워홀이 이루어 낸 미술의 대중화는 그가 선택한 작품의 소재에서부터 비롯된다. 콜라병, 수프 깡통, 가루비누 통, 마릴린 먼로같은 대중스타 등 그의 작품에 등장하는 대중적 이미지들은 일반인들에게 `낯익은 것들`이라는 인상을 줌으로써 일반인들로 하여금 자신들도 이제는 미술을 감상할 수 있는 문화주체라는 느낌이 들게 한 것이다.

미국의 체코 이민2세로 태어난 워홀은 가난한 어린시절을 보내며 늘 스타를 동경했다. 대학시절에는 교수들로부터 `가장 장래성 없는 학생`이라는 평가를 받았다. 백화점 점원으로 사회에 첫 발을 내디딘 그는 상업예술가로서의 성공을 꿈꾸며 뉴욕으로 진출, 광고그래픽 초상화 삽화 등 닥치는대로 일거리를 맡았다.

고상한 예술가들이 고집하는 전통적 예술관을 뒤집고 상업예술에 집요하게 매달린 끝에 그는 마침내 현대미술사에 한 획을 그으며 자신이 그토록 부러워했던 스타들보다 더 유명한 `대중스타`의 자리에 올라섰다. 워홀에 대한 미술계의 평가는 `미술의 지평을 넓혔다`는 찬사와 `지나친 상업주의` 라는 비난이 동시에 쏟아졌다. /조선 

 

 

 


1982 - 정부, 건국 후 최초로 칼 마르크스의 생애 연구 등 이념서적 출판 허용

1979년 10.26 사태 이후 얼마간은 박정희 정권 18년 동안 짓눌려 있던 언론·출판이 기지개를 펴는 순간이었다. 장기독재에 눌려 사장되었던 여러 종류의 출판물이 간행되거나 출판 준비를 서두르기 시작했다. 그러나 곧 5.17사태가 발생했고, 정국은 다시 경직체제로 이어졌다.
1980년 7월 31일 정부는 '사회정화'의 이름으로 『창작과 비평』,『문학과 지성』등 총 172종의 정기간행물 등록을 취소시켰다. 언론기관의 통폐합과 언론인, 지식인, 문학인들의 구속사태도 발생했다. 연말에는 언론기본법이 제정되어 언론규제의 새로운 작업이 행해졌다.
제5공화국 정부는 정권탄생의 과정에서 이처럼 언론·출판을 제도적으로 규제하고 '정비'시키는 조치를 단행하였다. 때문에 출판계는 크게 위축되어 현상유지에 급급한 상태였다. 그러나 정권이 비교적 안정기에 접어들고 사회 각 부분의 자율화조치를 시책으로 내걸면서부터 지금까지 크게 규제해 왔던 금서들을 해금시키는 유연성을 보이기 시작했다.
정부는 1982년 2월 22일을 기해 칼 마르크스의 생애 연구서적을 비롯하여 이념서나 연구비판서에 대한 출판완화 조치를 취했다. 정부의 이런 완화조치에 따라 각종 이념서적이 제철을 만난 듯 쏟아져 나오고 일부 해금서적은 베스트셀러의 명단에 오르기까지 하였다. 출판계는 모처럼의 활기를 보였으며 이런 상태가 오래 지속되기를 바랐다.
그러나 1985년 2.12총선 후 정국은 다시 경직되고 여야의 격렬한 대립과 정국불안에 따라 정부에서는 이 해 5월초에 이념서적과 각종 유인물에 대한 대대적인 단속·압수에 나섰다. 정부는 이념서적들이 "학문연구만이 아닌 일부 운동세력권의 이론도출과 의식화의 기저로 편식되고 있다"는 이유를 내세워 문공부와 경찰이 합동단속에 나서게 된 것이라고 밝혔다. ..........................
청주대학교 국어국문학과 청문편집부/교수 권희돈
http://www.cheongmun.co.kr/history/cm21.html

 

 

 

 

1980 - 한국-나이지리아 국교수립

나이지리아는 한국과 1980년 2월에 수교하고, 북한과는 1976년 5월에 수교하여 남·북한에 다같이 상주공관을 두고 있다. 1980년 10월에 나이지리아 하원의원단()이 방한하였고, 이후 경제교류·통상관계가 활발하다. 1982년 8월, 대통령 전두환()은 아프리카 4개국 순방 길에 대통령 샤가리와 정상회담을 갖고 양국간 경제협력문제 등을 논의하였다. 2000년 7월에는 대통령 오바산조가 한국을 국빈 방문하였다. 양국은 1982년 경제과학 기술 협력협정, 1989년 해운협정, 1998년 투자보장협정을 체결하였다. 2000년 현재 대()한국 수출 8만 7000달러, 수입 2억 4820만 달러이다. 주요 수출품은 원유이며 수입품은 전자제품, 자동차, 섬유, 기계부품류 등이다. 2001년 3월 현재 교민은 100여 명, 체류자는 250여 명이다. /naver

 

 

 

- 'Swan', Tapestry                 - 'Self-portrait'

 

- 'Self-portrait'                          - 'Konrad Adenauer'


1980 - 오스트리아 화가, 작가 코코슈카(Kokoschka, Oskar) 사망

코코슈카 [Kokoschka, Oskar, 1886.3.1~1980.2.22]

오스트리아의 표현주의 화가·작가.

1886년 푀힐라른에서 출생하여, 빈미술공예학교에서 공부하였다. 1908년 표현주의운동에 참여하였으며, 심리적 초상화에 뛰어난 재능이 있었다. 1915년 제1차 세계대전에 종군하였으나 부상으로 귀환하였다. 1919년에는 드레스덴미술학교의 교수가 되었다. 그 후 유럽 각지를 여행하여 1935∼1938년 프라하에 체류하였으나, 제2차 세계대전 중에는 런던으로 망명하여 대독일항쟁을 하였다.

판화·풍경화(주로 도시의 경치)·우의화()를 바로크적인 표현으로 묘사하였으며, 만년에는 P.보나르의 영향을 받아 화면의 색조가 밝아졌다. 대표적인 회화 작품으로는 《폭풍우》 《빨간 달걀》 《로렐라이》 등이 있으며, 또한 극작가로서도 뛰어나 1907년 발표한 《살인자, 여인들의 희망》은 그 표현주의적 기법으로 대단한 반응을 일으켰다. 이 밖에 희곡으로 《히오프 Hiob》(1917), 《오르페우스에우리디케 Orpheus und Eurydike》(1923), 시집으로 《꿈꾸는 소년들 Die träumenden Knaben》(1918)이 있다. /naver

 

 

 


1979 - 세인트루시아, 영국으로부터 독립

1502년 콜럼버스가 발견하였으며 ‘세인트루시아(Saint Lucia)’라고 명명되었다. 그후 1605년과 1638년 영국인()에 의한 이민이 시도되었으나 모두 실패하고, 이어 프랑스인에 의한 이민이 시작되었다. 그후 두 나라가 서로 영유대립·항쟁을 되풀이하여 40년 동안 14회의 쟁탈전이 벌어진 끝에 1814년 파리조약의 체결에 의해 영국령()으로 결정되어 영국이 직접 통치하였다. 영국 통치가 시작되고 150년 후인 1967년 3월 세인트루시아는 영국으로부터 외교와 방위의 일부를 제외한 내정자치권을 획득하고 영국령 서인도 연합주의 한 주()가 되었다. 그후 1978년 12월 영국의회가 그 독립을 승인하여 이듬해 2월 (22일) 영국연방의 일원으로 정식 독립하였다. /naver

 

 

 

 

1973 - 미·중 연락사무소 개설 합의문 발표

[어제의 오늘]1973년 미·중 연락사무소 개설 합의문 발표

ㆍ20년간 단절됐던 관계에 전환점

그 유명한 ‘핑퐁 외교’를 발판으로 1972년 2월 리처드 닉슨 당시 미국 대통령은 중국을 전격 방문했다. 닉슨의 방중은 20년간 단절됐던 미·중 관계에 새로운 서막을 알리는 상징적 사건이었다. 그로부터 꼭 1년 후인 73년 2월22일 양국 정부는 워싱턴과 베이징에 연락사무소를 개설한다는 내용을 담은 공동합의문을 발표했다. 이날의 발표는 누가 봐도 닉슨 방중 1주년을 의식한 것이었다. 그래서 연락사무소 개설 뉴스는 한층 더 극적으로 비쳤다. 두 나라의 연락사무소 개설 합의는 관계 정상화를 위한 선언이자 수교를 향한 첫 걸음이었다.

연락사무소는 정식으로 국교를 맺지 않은 나라 사이에 외교관계를 맺기 위한 전 단계로, 상호 간에 설치하는 사무소를 일컫는다. 연락사무소의 활동은 공식 외교 행위로 인정되지 않지만 중요한 외교 통로로 활용된 사례가 많다. 하지만 미국과 중국은 연락사무소 직원들에게 외교특권을 부여할 것을 합의문에 명시했는데, 이는 사실상 외교관계 수립을 의미했다. 합의문 발표 직후 미 국무성이 브리핑에서 연락사무소와 대사관의 차이가 무엇이냐는 기자의 질문에 딱 부러지는 답변을 내놓지 못한 것도 이를 뒷받침한다.
닉슨의 방중 이후 미국이 관계 회복을 위해 모종의 액션을 취할 것이라는 점은 충분히 예견됐다. 하지만 미국은 그 전에 네 가지 장애물을 넘어야 했다. 상호 불신, 이데올로기, 베트남전, 미군의 대만 주둔이 그것이었다. 불신의 문제는 닉슨이 중국을 방문함으로써 어느 정도 해소됐으며, 이데올로기는 차츰 경제적 이해관계, 즉 국익에 밀려났다. 베트남전은 73년 1월말 휴전으로 더 이상 큰 난관이 아니었다. 대만 문제를 빼곤 관계 회복에 나설 분위기는 무르익었던 셈이다.
이런 분위기를 업고 닉슨의 안보담당보좌관 헨리 키신저는 73년 2월 중순 중국을 방문, 마오쩌둥 등을 면담했다. 키신저는 극비리에 중국 측과 연락사무소 개설 등을 위한 실무 협의를 진행했다. 이 과정에서 미국 측은 대만 문제에 대해 일종의 양해를 구한 것으로 알려졌다. 키신저가 귀국한 직후 두 나라는 공동합의문을 발표했다. 합의문 발표 2개월여 만에 미국과 중국의 수도에 연락사무소가 개설됐다. 연락사무소는 79년 미·중 수교로 대사관이 들어서기 전까지 두 나라의 핵심적인 대화채널 역할을 했다.

서영찬 기자 /경향신문 2010-02-21 17:47:16

http://news.khan.co.kr/kh_news/khan_art_view.html?artid=

201002211747165&code=100100&s_code=ap005

 

 

 

 

1966 - 소련, 개 두마리 탑승한 인공위성 코스모스 110호 발사

우주비행에 미국은 원숭이·침팬지 등의 영장류를 활용하였고 러시아는 주로 개를 채택했다. 양국의 동물 탑승 우주경쟁은 유인우주선 프로젝트의 대리전인 셈이었다. 결국 유인우주선 프로젝트는 61년 4월 12일 보스토크에 탑승한 유리 가가린이 먼저 우주비행을 함으로써 러시아가 승리했다. 63년에는 프랑스도 베로니크 과학로켓에 고양이를 실어 우주에 발사했다. 고양이는 낙하산으로 하강한 후 성공적으로 돌아왔다.
우주에 장기간 체류하는 우주 동물들도 탄생했다. 러시아의 개 ‘베테로크’와 ‘유고요크’는 66년 2월 코스모스 110호에 탑승하여 발사됐다. 장시간의 우주여행 중 반 알렌대로부터 발생하는 방사선이 개에 미치는 영향을 평가하고자 했다. 이들은 무려 21일간 우주에 체류했다. 이 기록은 74년이 돼서야 스카이랩 2호에 체류했던 우주인에 의해 경신되었다.
[과학칼럼] 유인 우주시대를 연 동물들 /
장영근 한국항공대 교수 한국과학재단 우주단장

사설칼럼 [과학칼럼] /중앙일보 2008.11.01 00:25

http://article.joins.com/article/article.asp?ctg=20&total_id=3361897

 

 

 

- World's 1st Communications Satellite,

Echo 1, placed in orbit by NASA, Aug. 12, 1960

 

 


1964 - 미국-소련, 에코위성중계로 첫 우주교신 성공

위성을 이용한 통신의 시도는 1960년 미국의 에코(Echo) 1호가 최초였으며, 에코 1호가 처음으로 선을 보인지 10년 만에 통신위성은 전 세계 통신에 있어 매우 중요한 부분을 차지하게 되었으며, 현재 위성방송 및 이동통신 등으로 생활에서 가장 많이 쓰이고 있다. 이러한 통신위성은 주로 정지위성으로 지구와 같은 속도로 회전을 하면서 항상 같은 위치에 있으므로 넓은 지역을 계속적으로 통신에 필요한 데이터를 주고받을 수 있다.

한겨레 과학향기 출처 : KISTI의 과학향기

http://www.hani.co.kr/arti/science/kistiscience/336365.html

 

 

 

 


1943 - 반나치 저항조직 '백장미'의 숄(Scholl) 남매 처형

한스 숄 [Scholl, Hans, 1918.9.22~1943.2.22]

조피 숄 [Scholl, Sophie, 1921.5.9~1943.2.22]

‘1943년 2월 18일. 화창한 목요일 아침, 백장미 회원들이 대학의 모든 강의실과 복도에 유인물을 살포하기 시작했다. 한스 숄과 소피 숄은 대담하게 강의실 지붕에 올라가 유인물을 살포했다.
그들은 이미 몇 차례에 걸쳐 거리와 대학에서 반나치 유인물과 히틀러를 모욕하는 전단을 유포시킨 바 있다. 나치의 지방단원인 학교 급사가 곧바로 모든 출입구를 닫고 게슈타포에 신고했다.’
나흘간의 가혹한 고문과 심문 끝에 숄 남매는 ‘반역죄, 전복 음모및 군수산업 파괴를 선동한 예비 대역죄’를 선고받았다. 법정에서 소피 숄은 다음과 같이 말했다. ‘우리는 누구든 결국 시작해야 할 일을 했을 뿐이다.’ 그리고 그들은 단두대에서 의연하게 죽음을 맞았다.
단두대에 목을 올려 놓기 전 한스 숄은 감옥이 떠나가도록 큰 소리로 외쳤다. ‘자유여, 영원하라.’ 이들의 재판과 처형 과정은 말못하는 독일인들의 심금을 울렸다.

[김성호 / 논설위원] /문화일보 2003-12-03 11:44
http://www.munhwa.com/news/view.html?no=2003120301010737195002

 

[심야통신-백장미의 기도]

나치 독일 시대 뮌헨대학 학생이었던 조피 숄(Scholl, Sophie, 1921~1943)은 오빠 한스 숄(Scholl, Hans, 1918~1943) 및 동료들과 함께 ‘백장미(Die weisse Rose)’라는 반나치 저항조직에서 활동했는데, 1943년 2월18일 오빠와 함께 체포돼 4일 뒤 처형당했다. 조피는 21살, 한스는 24살이었다.

백장미 저항운동이란 제2차 세계대전중이던 1942년 6월 익명의 유인물이 뮌헨지역의 불특정 시민들에게 우송됐다. “무책임한 어두운 충동에 몸을 맡긴 지배자 무리들에게 저항도 하지 않고 통치를 허용할만큼 문화민족에게 어울리지 않는 일은 없다.” 다른 사람이 시작하기를 기다려서는 안된다. “파시즘이나 그와 유사한 모든 절대국가 조직”에 대해 할 수 있는 한 저항을 해야 한다.- <백장미 통신>이라 이름붙인 유인물은 나치의 전쟁수행정책에 대한 ‘소극적 저항’(비폭력불복종)을 촉구했다.

<백장미 통신> 제1호는 뮌헨대학 의학부 학생 한스 숄과 알렉산더 슈모렐이 썼다. 제4호까지 냈을 때 그들은 동부전선에 동원돼 전장의 무참한 현실과 유대인 학살 등을 직접 체험한 뒤 더욱 저항 신념을 굳혔다. 1942년 11월에 전선에서 돌아온 그들은 동지들을 늘리는 한편 베를린이나 다른 지역 저항그룹들과 서로 연락을 취했다. 1943년 2월 스탈린그라드에서 독일군이 패배한 사실을 안 그들은 <백장미 통신> 제6호를 만들었다. 제6호는 “남녀학생 여러분, 우리 민족은 스탈린그라드 괴멸에 떨고 있다”라는 문장으로 시작해 “우리 민족은 국가사회주의(나치즘)의 유럽 노예화에 저항하고 자유와 명예의 새로운 신념으로 가득찬 진군을 시작하려 한다”고 끝맺고 있다. 학생들과 함께한 쿠르트 후버 교수가 썼다. 최후의 통신이 된 제6호를 조피와 한스는 대학 구내에 배포하다가 대학 직원의 고발로 현장에서 체포됐다. 2월22일 열린 민족재판소는 조피와 한스, 크리스툴 프로프스트 등 3명에게 사형을 선고했다. 그 뒤 관련자 체포가 잇따라 43년 4월의 제2차 재판에서는 후버 교수, 알렉산더 슈모렐, 빌리 그라프 3명에게도 사형이 선고됐다. 백장미 그룹에 대한 재판은 1944년 10월까지 다섯차례에 걸쳐 모두 14명에게 유죄판결을 내렸다. 나치 지배하의 독일에서 게슈타포의 심문을 받은 시민은 100만명을 넘는다. 민족재판소는 ‘국가반역죄’를 처리할 목적으로 1934년에 설립됐는데, 패전까지 5200건의 사형판결을 내렸다. 백장미는 비좌익계 저항운동을 대표하는 사례였다고 할 수 있다.

서경식/도쿄경제대학 교수 /한겨레 2006-02-16 오후 04:15:00

http://www.hani.co.kr/arti/BOOK/102802.html

 

 

 


1942 - 오스트리아 작가 슈테판 츠바이크(Zweig, Stefan) 사망

츠바이크 [Zweig, Stefan, 1881.11.28~1942.2.22]

빈 출생. 특히 영국의 L.스트레이치, 프랑스의 A.모루아와 함께 20세기의 3대 전기작가로 일컬어진다. 20세에 시집 《은()의 현() Silberne Saiten》(1901)을 발표하여 문단에 데뷔하였고 23세에 철학박사 학위를 받았으며, 소설 ·희곡 ·평론 등을 썼다. 신낭만주의와 빈 인상주의 영향을 받았고, 또 프로이트의 정신분석학에도 심취하였다. 그 기조(調)는 평화주의 ·인도주의적인 생활감정에 있으며, E.베르하렌, R.롤랑과 친교를 맺으면서 그 예술관을 심화시켜 세계적 시야에서 정신적 풍토를 가꾸었다.

1935년 나치스에 쫓겨 영국을 거쳐 미국으로 망명하여 41년에는 브라질로 이주하였으나, 유럽의 전도를 비관하며 그의 젊은 아내와 동반자살하였다. 주요 저작으로 《로맹 롤랑 Romain Rolland》(1920) 《마리 앙투아네트 Marie Antoinette》(1932) 《에라스무스의 승리와 비극 Triumph und Tragik des Erasmus von Rotterdam》(1934) 《메리 스튜어트 Mary Stuart》(1935) 《발자크 Honore de Balzac》(1946) 등 전기작품이 있다.

또 수필가로도 뛰어나 발자크, 디킨스, 도스토예프스키를 다룬 《세 사람의 거장() Drei Meister》1920), 횔덜린, 클라이스트, 니체를 거론한 《악신()과의 싸움 Der Kampf mit dem Damon》(1925), 카사노바, 스탕달, 톨스토이를 다룬 《3인의 자서전 작가》(1932)가 있다. 그 밖에 소설《아모크 Amok》(1922) 《감정의 혼란 Verwirrung der Gefuhle》(1926), 희곡 《폴포네 Volpone》(1927), 자서전 《어제의 세계 Die Welt von Gestern》(1943) 등 다수의 작품을 남겼다. /naver

 

"11월 28일, 그 열망의 곶을 떠나온 이래 수평선상은 점점 어두워져 갔고, 이제는 지도도, 척도도 아무 소용이 없었다. 팔레이루가 고향에서 측정한 거리는 모조리 거짓으로 드러났다. 마젤란은 이미 오래전에 지팡구(일본)를 지나쳤다고 믿었지만 실제로는 이제 겨우 이 낮선 대양의 3분의 1을 지났을 뿐이었다. 마젤란은 그 잔잔한 바람 때문에 이 바다를 '일 파시피코'(태평양)라고 명명하였다. ..."

 

- 슈테판 츠바이크의 '마젤란'에서

 

 

 

    

 

- Mongolia, 50 Tugrik (Banknote)

 

1923 - 몽골의 정치가, 혁명가 수흐바타르(Sükhbaatar, Damdin) 사망

수흐바타르 [Sükhbaatar, Damdin, 1893.2.2~1923.2.22]

Sühbaatar는 Sükhbaatar, Sukebator라고도 씀.

몽골 인민혁명당의 공동 창당인물, 혁명지도자.

몽골 인민공화국을 세우는 데 중요한 역할을 했다. 청년시절 군대에 들어가 기관총 사수 훈련을 받았고, 친일세력들과 싸운 대가로 '바타르'(영웅)라는 명예로운 이름을 얻었다. 제대 후에 식자공(植字工) 훈련을 받았으나 곧 정치에 입문했다. 1919년 '준하라 조직'으로 알려진 혁명단체를 조직해 다음해에 초이발산(1895~1952)이 이끄는 조직과 연합했다. 1920년 러시아를 방문했고, 1921년 인민군을 조직해 운게른 슈테른베르크 남작의 지휘 아래 몽골 북부를 점령하고 있던 반(反)볼셰비키 패잔병들과 대항했다. 1921년 3월 인민군은 중국군을 물리쳤고, 7월 6일에 우르가를 점령했으며, 7월 10일에 영구적인 정부를 세웠다. 그는 새 정부의 초대 국방장관이 되었다. /브리태니커

 

 

 

   

 

- Central African Republic, 10000 Francs (Banknote) (출처 화.여.자.)


1921 - 중앙아프리카 공화국 대통령 보카사(Bokassa, Jean Bedel) 출생

보카사 [Bokassa, Jean Bedel, 1921.2.22~1996.11.3]

보방기 및 브라자빌의 미션스쿨에서 교육을 받은 뒤 1939년 프랑스 육군에 입대하였다. 1960년 8월 13일 중앙아프리카가 프랑스로부터 독립하게 되자 귀국하여 대위()로서 중앙아프리카공화국의 국민군 편성에 힘썼다. 1963년 최고사령관이 되었고, 1965년 12월 31일 쿠데타로 대통령 D.다코를 축출한 뒤 1966년 1월 1일 대통령에 취임하여 총리를 겸하였다.
그 해 다시 국방장관과 사법장관을 겸하였으며, 1967년 12월 소장으로 올랐다. 1970년 정보장관·농업장관·목축장관까지 겸임하였다. 1972년 2월 종신대통령이 되었다, 1976년 12월 유일한 정당인 ‘흑인사회혁신운동’이 채택한 헌법에 따라 국호를 중앙아프리카제국으로 개칭하여 초대 황제가 되어, 군의 최고사령관직까지 겸하였다.
1979년 9월 교복착용의무화 조치에 반대하는 학생들을 학살하는 등 폭정을 펴다가, 다코의 무혈쿠데타로 실각하고, 다코가 대통령에 취임함으로써 중앙아프리카는 다시 공화국으로 복귀하였다. 그 후 프랑스로 망명, 1986년 귀국하였으나 도착 즉시 체포되었다. 1987년 유죄가 입증되어 사형을 구형받았으나 얼마 후 종신독방형으로 감형되었다. /naver

 

 

 

 

- Mexico, 500 Pesos (Banknote)

 

 

1913 - 멕시코의 혁명가 마데로(Madero, Francisco) 사망

마데로 [Madero, Francisco (Indalécio), 1873.10.30~1913.2.22]

멕시코의 혁명가.

1873년 10월 30일 파라스에서 출생하였다. 포르투갈계 이민의 자손으로 매우 부유한 집안에서 태어났다. 프랑스 베르사유, 미국 볼티모어캘리포니아대학교에서 공부하였다. P.디아스의 독재정권 아래서 비참한 상태에 놓여 있던 하층민들의 생활상을 보고 1904년 B.P.후아레스와 함께 정치계에 발을 들여놓았다.
1905년 산페드로 시장선거와 코아우일라주지사 선거에 출마하였으나 권력층의 부정선거로 연이어 실패하였다. 1909년 디아스의 '재선반대 중앙클럽'을 결성하였다. 1910년 4월 반()디아스 연합의 통합전당대회에서 대통령 후보로 선출되었으나, 같은해 6월 위협을 느낀 디아스정권에 의해 반란 혐의로 체포되었다.
7월 가석방되어 산루이스포토시에 연금되었으나, 탈출하여 혁명선언문 '산루이스포토시 계획'을 발표, 대통령 선거가 무효임을 알리고 일제히 궐기할 것을 호소하였다. 이에 북부 치와와주에서 P.오로스코와 P.비야 등이, 모렐로스주에서는 E.사파타가 지휘하는 농민게릴라부대가 봉기하였다.
1911년 5월 디아스가 사임하고 유럽으로 망명하자, 6월 데 라 바라가 이끄는 임시정부를 두었다가 11월 대통령에 취임하였다. 이후 정치적 자유와 입헌정치 확립을 위해 애썼으나, 토지 재분배와 사회구조 개편 등 근본적인 개혁에 대해서는 보수적 입장을 취하여 혁명정부로서 한계를 드러냈고 혁명연합세력들과 갈등을 빚었다.
1913년 2월 9일 M.몬드라곤이 주도한 쿠데타로, 반란군 진압의 책임을 맡았던 우에르타에게 체포되었고 22일 부통령 J.수아레스
와 함께 살해되었다. /네이버

 

 

 

 

1903 - 캐나다의 소설가 몰리 캘러핸(Callaghan, Morley) 출생

캘러핸(캘러헌) [Callaghan, Morley Edward, 1903.2.22~1990.8.25]

아일랜드계 캐나다의 작가.

법률을 전공하였으나 일찍부터 작가로서 활약하여 헤밍웨이 등 ‘잃어버린 세대’ 작가들과 교류하였다. 처녀작 《수상한 도망자 Strange Fugitive》(1928)를 발표한 이후 개인의 모랄을 예리하게 추구, 사회주의와 그리스도교적 사랑에 대한 밀도 높은 작품으로 캐나다 작가 중 독보적인 존재였다. 주요작품에 《내가 사랑하는 것 Such is my Beloved》(1934) 《그들은 대지를 계승한다 They Shall Inherit the Earth》(1935) 《하늘에 기쁨 있다 More Joy in Heaven》(1937) 《사랑받는 것과 잃는 것 The Loved and the Lost》(1951) 등이 있다. /네이버

 

 

 

 

1902 - 독일의 물리 화학자 슈트라스만(Strassmann, Fritz) 출생

슈트라스만 [Strassmann, Fritz, 1902.2.22~1980.4.22]

보파르트 출생. 카이저 빌헬름대학을 졸업한 후 1929년부터 모교에서 화학연구생으로 있다가 카이저 빌헬름연구소의 화학부장 O.한의 조수로서 한과 L.마이트너가 실시하고 있던 중성자선에 의한 물질의 충격에 관한 실험에 협력하였다. 마이트너가 스웨덴으로 간 뒤 그 실험을 이어받아 1938년 우라늄의 핵분열 현상을 발견하였다. 실험의 당사자들은 그 결과의 해석에는 이르지 못했으나 마이트너와 R.프리시가 그것에 대하여 내린 ‘핵분열’이라는 해석이 원자핵시대의 막을 열게 된 계기가 되었다. 또 우라늄과 토륨으로부터 인공방사성동위원소를 만들었다. 1946∼1970년 마인츠대학 화학연구소장을 지냈으며, 1966년 페르미상을 수상하였다. /nave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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