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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오늘의만평

우표로 본 오늘의 인물과 역사 - 12/16

작성자김 민|작성시간17.04.18|조회수151 목록 댓글 0

 

우표로 본 오늘~ 12/16  

 

 

"우표에서 얻은 것이 학교에서 배운 것 보다 많다."

- 프랭클린 D. 루스벨트  

 

 

 

 
1999 - 경부고속철도 시험운행 성공

마침내 1999년 12월 16일 시험 운행일이 다가왔다. 서서히 레일 위에 고속전철이 달리기 시작했다. 그리고 마침내 고속전철은 시속 200㎞를 달리며 레일위를 시원하게 질주했다. 눈물과 절망의 시간들이 환희로 바뀌는 순간! 경부고속철도 건설이 본궤도에 진입했음을 천명하는 역사적인 사건이었다.

이후 주역들은 시험구간 건설의 경험과 노하우를 바탕으로 경부선 건설에 박차를 가했다.

그리고 2003년, 고속철도는 시속 300㎞에도 끄덕없음을 입증하며 서울-대구간의 공사를 마무리 지었다. 마침내 공사 12년만인 오는 4월, 경부선이 개통하게 된다. KBS 신화창조의비밀 2003-04-02 /http://www.kbs.co.kr/1tv/sisa/sinwha/vod/1313469_1035.html /Google

 

 

  

 
1998 - LG화학, 차세대 항생제 미국에 신약승인 신청

LG화학(LG Chemical)은 독자기술로 개발한 퀴놀론계 항생제 ‘팩티브(Factive)’의 임상시험을 모두 마치고 미국 식품의약국(FDA·Food and Drug Administration)에 신약승인 신청(NDA·New Drug Application)을 냈다고 16일 발표했다. 국내 제약사가 미국 FDA에 신약승인을 신청한 것은 이번이 처음이다. LG화학 조명재 사장은 “미국과 유럽 등 전세계 40여 국가에서 8천명 이상의 환자를 대상으로 임상 3상을 마친 결과, 이 항생제가 하루 한차례 복용으로도 폐렴, 기관지염 등 호흡기 감염에 탁월한 효과가 있으며 내성균에 강하고 독성이 없는 것으로 확인돼 신약승인 신청을 냈다”고 밝혔다.

조 사장은 “임상시험 이전부터 미국 FDA로부터 신물질에 대한 질(質)을 평가받아왔고 임상이 성공리에 끝났기 때문에 내년 10월께 신약승인을 얻을 수 있을 것으로 확신한다”고 말했다. 그는 “팩티브의 시장규모는 15억달러에 달할 것”이라며 “LG화학이 향후 20년간 1조5천억원 이상의 수익을 올릴 것으로 기대한다”고 덧붙였다. 팩티브의 신약승인 신청은 임상 2상 때부터 LG화학과 전략적 제휴를 한 미국의 스미스클라인 비챰(SmithKline Beecham)사가 냈다. LG화학은 전략적 제휴의 조건으로 판매권을 스미스클라인 비챰사에 넘기는 대신 앞으로 20년간 판매금액의 6~9%를 로열티로 받기로 했다.

LG화학은 스미스클라인 비참사로부터 이미 계약금조로 3천775만달러를 받았다고 밝혔다. 이 회사는 또 원료 독점공급권과 우리나라를 비롯한 동남아 시장에서의 판매권은 LG화학이 갖기로 했다고 덧붙였다.

[출처 : http://www.lgchem.co.kr/english/index.html : 1998년 12월 16일]

www1.kisti.re.kr  /Google

 

 

  

 
1996 - 서울고법 형사1부, 12.12 및 5.18사건 항소심에서 전두환 전대통령에게 무기징역, 노태우 전대통령에게 징역 17년을 각각 선고

두 前대통령 '세기의 재판' - 全斗煥(전두환) 盧泰愚(노태우) 두 전직 대통령은 12월16일 12.12 및 5.18사건 항소심에서 각각 무기징역과 징역 17년을 선고받았다. 3월11일 1심이 시작된지 9개월5일 만이었다. 전, 노씨는 상고를 포기했으나 검찰이 상고해 형이 확정되지는 않았다. 1심에서는 전, 노씨에게 사형과 징역 22년6월이 선고됐었다. (동아일보선정 96년 10대뉴스/국내) /Google

 

 

  

 
1995 - 축구 응원단 <붉은 악마> 탄생

1995년 12월 16일 오후 대한민국 축구 국가대표 응원단 '붉은 악마(Red Devils)'의 '전설'이 시작됐다. 서울 대학로의 한 카페 '칸타타'에서였다. PC통신 하이텔의 10여개 '축구동호회' 운영자 10여명은 이날 축구 응원문화의 개선을 위한 회의를 갖고 이른바 '칸타타 선언'을 채택했다.

선언 참가자들은 30∼40대 직장인과 교사 등이 주축이었다. 이들은 평균 관중 1만명을 넘기지 못하고 비인기 스포츠로 전락한 프로축구의 '복권(復權)'을 꿈꾸며 모인 동호인 집단에서 활동하고 있었다. 이후 국가대표팀 경기마다 300∼400명 단위로 한국팀 유니폼을 입고 자신들을 '서포터'라고 부르는 '단관'(단체관람:붉은 악마들끼리 사용하는 말임) 모임이 등장했다.

지난 1996년 여름 한국―중국 국가대표팀의 축구경기가 열린 서울 잠실종합운동장. 3만여명의 관중들 틈새에서 300여명이 될까말까한 일단의 '무리'가 붉은 색 국가대표팀 유니폼을 입고 섬처럼 떠있었다. 당시엔 '붉은 악마'란 이름도, '대∼한민국'이라는 구호도 없었다. 수만명 관중들 틈에서 이들의 존재를 알아보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지만, 목놓아 '아리랑'과 '애국가'를 불렀다. 이날이 PC통신에서 한국팀 응원단을 모은다는 공고를 보고 '붉은 악마'가 처음 국가대표팀 경기에 나간 날이었다.

'붉은 악마'라는 이름은 조직 탄생 1년 반만에 지어졌다. 처음 이름은 '그레이트 한국 서포터스'였다. 그러다 1998년 프랑스 월드컵을 한 해 앞둔 1997년 5월 1일 하이텔 축구동호회를 통해 '공식적으로 한국 대표팀을 만들겠다'는 공지와 함께 명칭을 공모했다. '레드 일레븐' '레드 맥스' '꽹과리 부대' '쿨리건' '레드 워리어즈' 등 아이디어가 나왔다. 이름에 '레드'가 들어가는 것이 가장 큰 공통점이었고, 그 중 1983년 멕시코청소년축구대회 이후 우리 대표팀의 별명으로 사용되곤 했던 '붉은 악마'에 대한 호응이 가장 컸다.

1997년 8월 '붉은 악마'가 한국 대표팀 서포터의 공식 이름으로 채택됐다. 붉은 악마를 상징하는 '치우천왕(蚩尤天王)'상은 기원전 2707년부터 109년간 중원의 배달국가를 다스린 인물로 전쟁에서 반드시 이겼다는 전설의 주인공. '붉은 악마'는 2002 한일월드컵을 통해 국제적 브랜드로 떠올라 세계인의 주목을 끌었다. /조선

 

 

  

 
1987 - 제13대 대통령 선거 실시 
1987년 4월 13일 제5공화국은 현행헌법을 고수하겠다는 호헌조치를 발표하였다. 이로 인해 발생한 6월 항쟁은 호헌조치의 철회와 대통령 직선제를 얻어냈으며, 결국 1987년 12월 16일 제13대 대통령선거가 실시되었다. 이는 1971년 대통령선거 이후 16년만에 국민이 직접 대통령을 선출하는 직접선거였다. /Google

 

1987년 12월 16일 국민의 직접투표에 의한 대통령선거가 16년만에 실시되었으며 노태우 후보는 36.6%의 득표율로 28.0%를 얻어 2위를 기록한 김영삼 후보를 8.6% 차이로 누르고 대통령에 당선되었다. (empas) /Google

 

 

  

 
1975 - 중국, 제5호 인공위성 발사

'57년 소련 「스푸트니크1호」의 성공적 발사에 자극을 받는 모택동은 '58년 5월 17일 인공위성개발을 강력히 지시하였고, '60년 2월 19일 중국 최초의 실험용 로켓인 「T-7M」을 쏘아 올리게 된다. 특히 특히 중·소대립이 노골화되면서 '60년대 말 주은래는 대규모의 운반로켓 및 위성개발을 위한 특별위원회를 국무원내에 구성하여 로켓개발을 강력히 추진함으로써, 중국의 우주기술은 새로운 단계로 접어들게 된다. 중국 운반로켓연구소에 과학기술자들을 집결시켜 연구에 박차를 가한 결과, '70년 「長征1호」(CZ-1)가 선보였다. CZ-1은 사정거리 7천 Km급의 초기 ICBM을 전용한 것으로 크기는 직경 2.25m, 중량 3백kg 정도였으며 저고도에 쏘아 올린 성능이 좀 낮은 것이었다. 실질적으로 운반로켓과 미사일은 기술적으로 상당한 유사성을 갖고 있기 때문에 미사일과 위성로켓은 동시에 개발되었다.

1970년 4월 24일, 주천우주기지를 떠난 173kg의 「東方紅1호」는 모택동사상을 찬양하는 '동방홍' 멜로디를 송신하여 전세계를 놀라게 하였다. 그것은 중국의 우주시대를 알리는 서막이었다.

1971년에 두 번째 위성을 발사한 후 문화혁명기의 혼란으로 세 번째 발사까지는 4년 이상의 공백기가 있었다. 1975년 12월 16일 제3호 위성 발사에는 「풍폭(風暴)1호」(FB-1)라는 2단식 신형 로켓이 사용되었는데 이것은 미국의 ICBM, 타이탄Ⅱ와 거의 같은 크기이다. 인공위성의 운반로켓으로 직경, 높이, 중량 등에 따라 '장정'(長征: Long March) 1, 2, 3, 4호와 '풍폭'(風暴: Storm) 1호 등이 사용되었는데 1982년 이후 풍폭1호는 사용되지 않고 있다.

중국의 로켓개발노력은 몇 번의 기술적인 전환점을 이룬다. 1975년 11월 16일, 4번째 위성은 중국 최초로 위성을 회수하였다. ... /Google

 

 

  

 
1950 - 트루먼, 국가비상사태 선언  

트루먼(Truman, Harry S.) 미국 대통령이 1950년 12월 16일 미국 전역에 국가비상사태를 선언하고, 모든 국민들에게 공산제국주의와 맞설 것을 촉구했다.

트루먼은 권리장전으로 보장된 만족스럽고 부유한 생활이 공산주의의 침략으로 위협받고 있다고 경고했다. 트루먼은 방위를 위한 무기생산에 주력할 것이며, 자유를 위해 유럽을 방위하겠다고 약속했다. 미국 정부는 크라이슬러, 포드, GM사들의 가격인상 조치를 취소시켰다. 물가인하정책을 반대해 왔던 자동차 회사들도 정부에 지지를 약속했다. 노동조합 역시 트루먼을 도와 철도파업 노동자들을 직장에 복귀시켰다.

이같은 트루먼의 결정은 북한에서의 맥아더 군대의 패배에 따른 후속조치였다. 6주 전 한국전역이 UN군 통치하에 있어서 승리가 눈앞에 있었지만 중국군의 개입으로 UN군은 평양을 빼앗겼고, 중국군은 전력을 다해 그들을 38도선 이남으로 밀어부쳤다. /조선

 

 

  

 
1944 - 나치 독일, 아르덴(Ardennes) 대반격 
1944년 오늘 벨기에 남부 아르덴! 

나치 독일군이 연합군을 기습공격 한다.
제2차 세계대전 당시 나치 독일군의 마지막 반격으로 기록된 아르덴 전투다!
'벌지 전투 battle of the Bulge'로도 불리는 이 전투에서 독일군은 기상악화로 공습지원을 받지 못한 연합군의 진영 깊숙이 진격해 들어갔다.
그러나 독일군의 승리는 오래 가지 못 했다.
한달 여 뒤인 1945년 1월 중순부터 독일군은 연합군의 공세에 밀려 패배와 철수를 거듭하게 된다. /YTN

 

 

  

 
1941 - 세계최대 일본 전함 '야마토[大和]' 진수

옛 일본해군의 전함. 세계 최대의 초대형 전함으로 2척이 있었다. 공시배수량(公試排水量) 6만 9100t, 만재배수량(滿載排水量) 7만 2809t, 전체길이 263m, 최대나비 38.9m, 공시흘수(公試吃水) 10.4m, 축(軸)마력 15만, 속력 27kn, 주포(主砲)인 46㎝포 9문, 부포(副砲) 15.5㎝포 12문이 장착되었다. 개장(改裝) 후(공시배수량 6만 9594t), 12.7㎝ 고각포 24문, 25㎜기총 150기, 캐터펄트 2대, 수상정찰기(관측기) 7대가 탑재(搭載)되었다. <야마토[大和(대화)]>는 1941년 구레공창[吳口廠(오구창)]에서 준공, 1945년 오키나와[沖繩(충승)] 공격에 항진하던 중, 미군 함재기(艦載機)의 집중공격을 만나 침몰하였다. 야마토형 전함인 <무사시[武藏(무장)]>는 1942년 나가사키[長崎(장기)] 미쓰비시조선소[三菱造船所(삼릉조선소)]에서 준공(공시배수량 6만 9594t), 1944년 필리핀해전에서 미군 함재기의 공격을 받아 시부얀해에서 침몰하였다. /yahoo

 

 

  

 
1917 - 영국의 SF 작가 클라크(Clarke, Arthur) 출생

클라크 [Clarke, Arthur C(harles), 1917.12.16~]

서머싯주 마인헤드 출생. H.G.웰스 이후 영국이 낳은 가장 뛰어난 공상과학소설(SF) 작가로 평가되며, 그의 활동범위도 우주 ·해양 ·전자공학 관계의 전문연구서, 텔레비전의 과학 프로그램, SF 영화의 제작 등 다방면에 이르고 있다. 그의 작품은 크게 2가지로 나눌 수 있다. 21세기 전후를 무대로 한 리얼리스틱한 작품, 즉 《우주의 섬들》 《화성의 모래》 《지광()》(1955) 《해저목장()》 등과, 먼 미래와 무한의 공간을 무대로 인류와 문명의 운명을 사색하는 작품, 즉 《유년기의 마지막》 《도시와 별》 《우주의 오디세이아》(1968) 등이 그것이다. 그러나 그 작품의 공통점은 인류가 지닌 지성의 진화에 대한 확고한 신념이다. /naver

 

 

  

 
1902 - 독립운동가 유관순(順) 출생

유관순 [, 1902.12.16~1920.9.28] 

3.1만세운동의 상징적 인물인 유관순 열사가 1902년 12월 16일 충남 천안에서 출생했다. 이화학당 재학 중 만세운동을 벌이다가 일제가 학교 문을 닫자 고향인 충남 천안으로 내려가 아우내 장터 만세운동을 주도했다. 유열사는 아우내 장터에 모인 군중에게 태극기를 나눠주며 앞장서서 대한 독립 만세를 외치다가 일본 경찰에 체포되었고, 그녀의 아버지와 어머니는 일본 헌병에게 살해되었다. 일제의 가혹한 고문을 받았으나 끝내 굴복하지 않고, 옥중에서도 만세를 부르며 동지들을 격려하다가 서대문 형무소에서 옥사했다. 그때가 1920년 10월 12일(9월 28일로 정정), 그녀의 나이 19세였다. 옥중에서도 굳건한 독립의지를 꺽지 않았기에 지금까지 여성독립운동가로 추앙되고 있다. /조선

 

유관순 열사는 1902년 12월 16일(음력 11월 17일) 충청남도 천안시 병천면 용두리(옛 지명은 충청남도 목천군 이동면 지령리)에서 아버지 유중권의 5남매 중 둘째딸로 태어났으며 어머니는 이소제 여사이다. /Google

 

  

 

 
1901 - 미국의 문화인류학자 미드(Mead, Margaret) 출생

미드 [Mead, Margaret, 1901.12.16~1978.11.15]

필라델피아 출생. 1929년 컬럼비아대학에서 박사학위를 취득하고, 1925∼1939년 사모아섬·애드미럴티제도·뉴기니·발리섬 등의 미개민족을 조사하였다. 특히 여러 부족의 청소년기에 있어서 문제와 성()행동에 관한 조사결과를 보고하였다.
미국 자연사박물관() 인종부문 관리자로 있으면서, 1954년 이후 컬럼비아대학 인류학 조교수를 겸하였다. R.베네딕트와 함께 미국 문화인류학에 심리학적 방법을 도입, 발전시켰다. 특히 인격형성과정에 있어서의 문화영향을 중시한 입장에서 연구를 추진하고, 각국 국민성에 관한 비교연구에서도 업적을 남겼다.

1960년 미국 인류학회장을 맡았으며, 사회·교육평론가로서도 활약하였다. 저서는 미국 각 대학에서 문화인류학·사회심리학·사회학 등의 전공 학생의 교과서로 사용된다.
저서에 《사모아의 성년()》(1928) 《마누스족 생태()연구》(1930) 《세 미개사회의 성()과 기질》(1935) 《남성과 여성》(1949) 《권위에 대한 소비에트인의 태도》(1951) 등이 있다. /naver

 

 

  

 
1882 - 헝가리 작곡가, 민족음악학자, 교육가 코다이(Kodály Zoltán) 출생

코다이 [Kodály Zoltán, 1882.12.16~1967.3.6]

케치케메트 출생. 소년시절부터 가톨릭계 학교에서 음악을 배우고 성가대에도 참여하였다. 1900년 리스트대학에 입학하여 프랑스문화와 라틴 인문주의를 전공한 뒤 1902년 부다페스트음악원에 들어가 한스 케슬러에게 작곡을 배웠다. 그는 헝가리 민요의 수집과 연구에 뛰어난 업적을 남겼으며 민요 연구분야에서 처음으로 과학적 ·조직적인 체계를 확립, 이 연구에 바탕을 둔 혁신적 방법에 따라 헝가리 음악교육의 근본적인 개혁을 수행하였다. 대표작에는 오페라 《하리 야노시》(1926), 칸타타 《헝가리 시편()》(1923) 《무반주 첼로소나타》(1915) 등이 있다. /naver 

 

 

  

- 'Murnau with Rainbow'
 

- 'Abstract'                                                           - 'Untitled Abstract'
 

- 'Study for Composition II'

1866 - 러시아 출신의 프랑스 화가 칸딘스키(Kandinsky, Wassily) 출생

칸딘스키 [Kandinsky, Wassily, 1866.12.16~1944.12.13]

모스크바 출생. 1939년 프랑스에 귀화하였다. 현대 추상미술을 창시한 한 사람이며 처음에는 법률과 경제학을 배웠으나, 1895년 인상파전을 보고 모네의 작품에 감명을 받고 이듬해인 1896년 뮌헨으로 옮겨 아즈베와 F.슈투크에게 사사하여 화가로 전향하고 1905년 살롱 도톤의 회원이 되었다. 그 전후에 이탈리아 ·튀니지 ·프랑스 등지를 여행하고, 1908년 이후 뮌헨 ·무르나우에 살면서, 1910년에 최초의 추상회화를 제작하였다.

또한 표현파인 프란츠 마르크와 함께 뮌헨에서 예술가집단인 ‘청기사()’를 조직하여(1911), 비구상 회화의 선구자가 되었다. 그 후 1914년 제1차 세계대전의 발발로 모스크바로 돌아가, 1918년 미술학교 교수가 되었으나 1921년 다시 베를린으로 가서 이듬해부터 1933년까지 바우하우스의 교수(처음 바이마르, 1925년부터 데사우)로서 후진지도와 신예술 개척에 힘썼다. 만년에는 1933년부터 프랑스에 정주하여, 여행 이외에는 파리 교외의 누이쉴센에 살았으며, 1937년 나치스가 퇴폐예술가라고 지적하여 작품이 몰수당한 적도 있다.

그는 현대 추상회화의 선구자로서, 대상의 구체적인 재현에서 이탈, 선명한 색채로써 교향악적이고도 다이내믹한 추상표현을 관철한 후 점차 기하학적 형태에 의한 구성적 양식으로 들어갔으나 P.C.몬드리안과는 또다른 독자적인 발전의 자취를 남겼다. 주요작품으로는 《푸른 산》 《즉흥 14》 《검은 선들》 《가을》 《콤포지션 7》 등이 있으며, 또 추상미술 이론가로서도 《예술에서의 정신적인 것 Uber das Geistige inder Kunst》(1921) 《점 ·선 ·면 Punkt und Linie zu Flache》(1926) 등의 저술도 남겼다. /naver 

 

 

  

- 'West Point Academy', by Cram
 

1863 - 미국 건축가 크램(Cram, Ralph A.) 출생

크램 [Cram, Ralph Adams, 1863.12.16~1942.9.22]

미국에서 가장 중요한 고딕 복고양식의 건축가로 꼽힌다. 영국의 유력한 비평가 존 러스킨에게 영감을 받아 영국과 프랑스의 고딕 양식을 열렬히 옹호하고 그 방면의 권위자가 되었다. 1888년 보스턴에서 설계사무소를 운영하기 시작했고, B.G. 굿휴와 함께 일하다가 나중에 F.W. 퍼거슨과 손을 잡았다. 이들은 뉴욕 주 웨스트포인트의 미국 육군사관학교 건물 뿐만 아니라 뉴욕 시의 세인트토머스 교회와 클리블랜드 유클리드가(街)의 장로교회, 피츠버그의 제일침례교회 등 중요한 교회 건물을 많이 설계했다. 크램과 퍼거슨은 뉴욕 시에 있는 로마네스크 양식의 세인트존더디바인 교회를 후기 고딕 양식으로 개조하면서 세계에서 가장 큰 성당의 하나로 변모시켰다. 그는 기술문명에 대한 개선책으로 정신적인 가치를 느끼게 해주는 건물을 만들고자 했다. ... /브리태니커

 

 

  

 
1859 - 독일의 형제작가 빌헬름 그림(Grimm, Wilhelm) 사망  

그림 [Grimm, Wilhelm, 1786.2.24~1859.12.16]

형은 야코프(Jacob Grimm:1785∼1863), 동생은 빌헬름(Wilhelm Grimm:1786∼1859)이다. 헤센주 하나우 출생이다. 대학에서는 법률을 배웠고, 도서관에 근무한 후 1830년 괴팅겐대학교의 초청을 받아 교수가 되었으며, 하노버왕의 헌법 위반을 규탄하여 이른바 ‘괴팅겐 7교수사건’에 들어 공국 밖으로 추방당하였다. 1841년 베를린 아카데미 회원으로 추천되었다. 이상의 경력은 연년생인 형제가 똑같다. 경력뿐만 아니라, 전문분야도 똑같이 언어학이며, 《그림동화 Kinder-und Hausmarchen》(1812~1875) 《독일전설 Deutsche Sagen》(1816~1818) 《독일어 사전 Deutsches Worterbuch》(1852~1960) 등 공동 저작도 많다. 특히 《독일어 사전》은 1854년에 제1권을 낸 이후, 여러 학자가 계승하여 1861년에 완성하였다.

이 밖에 게르만 언어학의 창시자로서 형은 《독일어 문법》(1819~1837) 《독일어사》(1848), 동생은 《독일 영웅전설》의 저작이 있다. 그들의 전문분야인 언어학의 영역에서는 형 야코프가 보다 큰 업적을 남겼으나, 그림 형제의 명성을 세계적으로 높인 《그림동화》를 만드는 데는 동생 빌헬름이 더 큰 역할을 하였다. 수집한 옛이야기를 예술적으로 표현하고 다듬은 사람은 주로 동생이다. 그들이 게르만 언어학의 연구, 그리고 독일의 옛이야기와 전설의 수집으로 전환한 계기는 낭만파 문학에 의하여 촉발된 향토적·서민적인 것에 대한 깊은 애정에 기인한다. /naver 

 

 

  

 
1790 -  벨기에 첫번째 왕 레오폴드 1세(Leopold I) 출생


레오폴드 1세 [Leopold I, 1790.12.16~1865.12.10]

독일의 작센 코부르크공()의 4남으로, 1813년의 나폴레옹전쟁에서는 러시아군으로 참가하여 라이프치히전투를 치렀다. 1816년 영국의 공주 샤를로트와 결혼하였으나 이듬해에 죽었으며, 1830년까지 영국에 머물렀다. 1830년 그리스왕으로 추대받았으나 사퇴하고, 이듬해 네덜란드로부터 독립한 벨기에 국왕이 되었다. 즉위 직후 네덜란드의 침략을 받았으나, 프랑스군의 도움으로 이를 물리쳤으며, 프랑스와의 협조를 고려하여 프랑스 왕 루이 필리프의 딸 루이즈 마리와 결혼하였다. 의회에서 다수당을 차지하고 있는 자유당 및 가톨릭당과 협력하면서 영국의 입헌군주제를 도입하여 정국안정을 도모함과 동시에 대외적으로 중립을 유지하였다. 산업의 발전에도 힘썼기 때문에 1848년의 혁명적인 격변기에도 왕정을 안정시킬 수 있었다. /naver 

 

 
1775 - 영국의 여류 소설가 오스틴(Austen, Jane) 출생

 

   

1773 - 보스턴 차(茶)사건(Boston Tea Party) 발발  


  

1742 - 프로이센의 육군 원수 블뤼허(Blucher, Gebhard von) 출생

 

 

1631 - 이탈리아 베수비오 화산 폭발로 4천여명 사망

 

  

1598 - 노량해전에서 충무공 이순신(臣) 전사

 

 

1568 - 이황(), <성학십도(圖)>를 지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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