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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오늘의만평

우표로 본 오늘의 인물과 역사 - 6/27

작성자김 민|작성시간17.04.30|조회수154 목록 댓글 0

 

우표로 본 오늘~ 6/27

 

 

"우표에서 얻은 것이 학교에서 배운 것 보다 많다."

- 프랭클린 D. 루스벨트  

 

 

 

 

2005 - 경기도 수원시 영통구 망포동에서 `박지성길` 개통식 

박지성길 개통

6월 27일 오후 4시 경기도 수원시 영통구 망포동에서는 길이 1.38Km, 폭 35m의 왕복 6차선 도로인 「박지성 길」이 주인공인 박지성 선수와 손학규 경기도지사, 김용서 수원시장 등의 내빈과 지역주민들이 모인 가운데 정식 개통식을 갖았다.
이 도로는 손학규 지사가 도지사 당선 직후 2002년 6월 17일 포르투갈 전에서 한일 월드컵 16강 진출을 결정하는 골을 넣은 박지성 선수의 수원 자택을 방문한 자리에서 주민들과 대화 중 영통구 신동부터 망포동까지 도로를 개설해 달라는 건의를 듣고 “박지성 도로”라고 이름을 붙인다면 개설을 하겠다고 약속을 한 후 「박지성 길」에 대한 도비를 지원하여 이날 개통하게 되었다.
박지성 선수는 지난 6월 14일 맨체스터 유나이티드 이적과 관련하여 많은 고민이 있던 중에도 경기도청을 방문하여 손학규 경기도지사를 만나 네델란드리그 챔피언 넥타이를 선물하며 특별한 감사의 뜻을 전한 바 있다.
총 315억(국비 10억,도비 175억, 시비 130억)원이 투입된 이 도로에는 느티나무, 넝쿨장미 등 1만여 그루의 가로수가 식재되어있고, 박지성 캐릭터(3.5m×2.0m)로 장식된 163평(540㎡) 규모의 쌈지공원과 메타세콰이어와 사철나무가 식재된 90평 규모의 박지성 숲, 지성쉼터와 방죽쉼터로 이름 붙여진 각각 35평규모의 쉼터가 있다.
또한, 박지성 선수의 어제와 오늘을 그려 넣은 86m의 방음벽에는 박선수의 경기사진과 족상이 전시된다. 이외에도 수원월드컵경기장관리재단(이사장 손학규)은 경기장 1층에 위치한 월드컵기념관 안에 '박지성 기념코너'를 별도로 만들어 이날 오후 2시 30분에 박지성이 직접 참석한 가운데 오픈 행사를 가졌다.
이날 행사는 박지성의 유니폼·축구화·각종 기념품 등을 전시하고 있는 기념코너 제막식과 한국선수 최초로 유럽축구연맹(UEFA) 챔피언스리그 본선에서 골을 터트릴 때 신었던 축구화 전달식 등으로 이뤄질 예정이며 박 선수가 세계적 축구선수로 인정받아 빅리그에 진출하게된 것을 축하했다.
경기도 관계자는 “「박지성 길」이 이미 전국민적 관심의 대상이 된 만큼 축구를 사랑하는 국민들과 박지성 선수의 팬 뿐만 아니라 전국민의 사랑받는 명소가 되고, 박선수 개인에게도 고향을 생각하면서 더 열심히 뛸 수 있는 계기가 될 것으로 확신한다.”고 밝혔다. /2005-06-27

http://www.openchronicle.com/stories/89/posts/1657?lang=en

 

수원시 ‘박지성길’→‘동탄지성로’로 변경

경기도 수원시 망포동과 화성시 반송동을 잇는 도로 명칭 '박지성길'이 '동탄지성로'로 변경된다.
수원시는 "도로명 주소 재정비 정책에 따른 도로명 통합과정에서 지난달 화성시가 이같은 명칭을 대안으로 제시해 받아들이기로 했다"며 "올 하반기 도로명판 및 건물번호판 일제 정비작업 때 기존의 '박지성길' 표지판을 '동탄지성로'로 교체할 계획"이라고 22일 밝혔다.
시는 다만 '박지성길'을 완전히 없애지 않고 명예도로명으로 새 도로명에 병기해 사용할 방침이다.
'박지성길'은 2개 이상 시군구에 걸쳐 있는 도로는 명칭을 통일해야 하고 생존인물 이름을 딴 도로명은 각종 공적장부에 기재되는 주소로 사용할 수 없다는 정부 지침에 따라 명칭변경 대상에 올랐다.
총연장 4.7㎞ 중 1.3㎞ 구간은 수원시, 3.4㎞ 구간은 화성시에 걸쳐 있는 이 도로의 명칭을 두고 수원시는 '박'을 빼고 '지성로'로, 화성시는 동탄신도시 공원 이름에서 따온 '센트럴파크로'로 변경하겠다는 의견을 고수해 진통을 겪었다.
수원시 토지정보과 관계자는 "도로가 두 시에 연결돼 한 쪽의 일방적인 주장을 펼 수 없는 상황에서 화성시가 공감대를 가질만한 제3의 도로명을 제시해 받아들인 것"이라며 "'지성' 명칭은 생존인물 이름을 떠나 도로 주변지역에 이미 '지성공원', '지성숲', '지성유치원' 등으로 널리 사용되고 있어 새 도로명 사용에 문제가 없을 것"이라고 말했다.
아울러 시는 도로명 주소가 2012년부터 법적 주소로 전면 사용됨에 따라 올해 건물번호판 및 도로명판 교체작업을 마치고 내년에 주민등록등본, 건축물대장, 등기부등본 등 355가지 공적장부를 정비하기로 했다.
도로명 주소 재정비에 따라 작은 길 이름이 큰 길 이름에 통합되면서 현재 2천200여개의 도로명이 150개 이내로 줄어든다.
(수원=연합뉴스) /동아닷컴 2009-04-22 16:36  

http://www.donga.com/fbin/output?n=200904220450

 

 

 


1984 - 88올림픽고속도로 개통

영남과 호남을 잇는 88올림픽고속도로가 1984년 6월 27일 개통됐다. 건설부는 이날 전두환 대통령을 비롯, 건설부장관 등 관계인사와 주민들이 참석한 가운데 88고속도로의 양쪽 시발점인 전남 담양 인터체인지와 경북 옥포 인터체인지에서 개통테이프를 끊고 중간지점인 지리산휴게소에서 준공식을 가졌다.

착공 33개월 만에 이날 준공, 개통된 88올림픽고속도로는 전남 담양군과 경북 달성군을 연결하는 175.3km의 2차선도로로 전구간이 국내처음으로 시멘트콘크리트로 포장됐다.

88올림픽고속도로의 개통으로 대구에서 광주까지의 거리는 기존 국도망을 통한 195km보다 20km가 단축됐고 주행시간은 종전의 5시간대에서 2시간30분대로 크게 줄어들었다. 88올림픽고속도로의 통행은 개통식이 끝난 직후부터 허용되었으며 1984년말까지 통행료가 면제되기도 했다. /조선
 

 

 

 

1977 - 지부티(Djibouti), 프랑스로부터 독립

1977년 6월 27일 동아프리카의 지부티 공화국이 독립했다. BC 3세기경에 아블레 이민들이 아라비아로부터 들어와 정착하기 시작했다. 그러나 소말리계의 이사족이 아블레 이민들의 후손인 아파르족을 축출하고 해안지방에 새로이 정착했다. 16세기까지 아랍인들이 상권을 장악하고 있다가 1862년 프랑스가 오보크를 획득하고, 1888년에 프랑스 소말리 해안령을 창설했다. 지부티 시는 1892년에 이 프랑스령의 공식 수도가 되었다. 1946년 프랑스령 소말릴란드는 해외 준주(準州)의 자격을 얻었고, 1958년 해안령은 제5공화국하의 프랑스 공동체에 해외 준주의 일원으로 가입하기로 가결했다. 1977년 프랑스령 아파르족과 이사족 준주는 지부티 공화국으로 독립했으나, 두 종족 사이에 긴장상태가 조성되어 에리트레아와 오가덴의 교전지대 난민들로 인해 새로운 문제가 발생했다. /브리태니커

 

 

 

       
1970 - 피아니스트 루빈스타인, 오스카상 수상
세계적인 피아니스트 아서 루빈스타인(Arthur Rubinstein)!
1970년 오늘, 영화배우 그레고리 펙으로부터 오스카상을 받는다.
루빈스타인은 자신의 전기영화에 출연해 피아니스트로서는 이례적으로 오스카상까지 받게 됐다.
쇼팽 해석의 대가로 이름난 루빈스타인은 1982년 12월 20일 아흔세 살을 일기로 세상을 떠났다. /YTN

 

 

 

 

 

1969 - 축구전쟁의 실마리가 된 온두라스와 엘살바도르의 월드컵 예선전(예선 최종전) 

멕시코월드컵 예선전과 축구전쟁 (정리)

1차 예선전 (1969.6.08) (온두라스 테구시갈파) 온두라스 1:0 승리

2차 예선전 (1969.6.15) (엘살바도르 산살바도르) 엘살바도르 3:0 승리

3차 최종전 (1969.6.27) (멕시코 멕시코시티) 2:2 무승부, 연장전에서 엘살바도르 3:2 승리

축구전쟁 시작 (1969.7.14) 엘살바도르 국군(공군, 육군) 온두라스 침공 

 


축구전쟁 - 월드컵역사에서 가장 비극적인 사건이라면 엘살바도르와 온두라스의 축구전쟁을 꼽는다.
지난 69년 엘살바도르와 온두라스는 이듬해 열릴 제9회 멕시코월드컵대회 본선출전 티켓을 놓고 북중미 최종예선 A조에서 맞붙는다. 결과는 엘살바도르의 승리.
그러나 양국은 2천명이 넘는 희생자를 낸 5일전쟁이 불가피했다. 전쟁의 싹은 2차전이 끝난 뒤 움텄다.
69년 6월 8일 온두라스의 수도 테구시 갈파에서 열린 1차전에서 0-1로 패한 엘살바도르는 1주일 뒤 자국의 수도 산살바도르로 옮겨 열린 2차전에서는 3-0으로 크게 이긴다. 그러나 2차전에서 비극의 서곡이 울린다.
원정응원을 온 온두라스인들이 엘살바도르의 텃세판정에 항의하다 두들겨맞고 쫓겨나고 만 것.
구타 소식은 단숨에 온두라스 전역으로 퍼졌고, 흥분한 온두라스 국민은 그날밤 보복에 나선다.
수도 테구시갈파에 있는 엘살바도르인의 집을 습격해 방화와 약탈을 저질렀고 거리를 휩쓸고 다니며 엘살바도르사람만 만나면 무자비한 린치를 가했다.
사태는 걷잡을 수 없이 확산돼 희생자가 속출했고 엘살바도르는 세계인권위원회에 온두라스를 고발했다.
온두라스는 엘살바도르 상품의 수입금지로 맞대응했고 감정의 골이 깊어진 양국은 마침내 국교를 단절하고 만다.
긴장이 한껏 고조된 가운데 두 팀은 6월27일 멕시코시티에서 마지막 승부인 3차전을 치른다.
관중보다 경찰이 더 많을 만큼 살벌한 분위기에서 펼쳐진 이 경기서 두팀은 전·후반을 2-2로 비겼으나 연장전에서 엘살바도르의 로드리게스가 결승골을 터뜨린다.
엘살바도르는 승리의 환희에 젖었지만 온두라스에서 희생된 자국국민을 결코 잊을 수 없다며 7월13일 온두라스에 선전포고를 한다.
야포와 전차·전투기를 총동원한 전면전은 5일만에 엘살바도르가 온두라스의 항복을 받아내 막을 내리지만 양국에서 2천명이 넘는 귀중한 생명을 앗아가고 말았다.
http://www.soccerline.co.kr/slboard/view.php?code=totalboard&page=1&uid=1997310263&keyfield=&key=&period=

 

 

 

- Alexander Dubcek
 

1968 - 체코 지식인들, 언론자유를 호소하는 `2000어 선언` 발표 

1968년 6월 27일 작가동맹 기관지 등 체코슬로바키아 4개 신문에 자유화를 촉구하는 `2000어 선언`이 발표됐다. 작가 바츠리크가 기초한 선언에는 마라톤 영웅 자토펙과 체조 선수 차프라후스카 등 유명 스포츠 선수를 포함, 70여명의 지식인이 서명했다.
`자유민주화 노선을 줄기차게 추진해 보수세력을 몰아내라`는 호소를 담고 있는 이 선언으로, 공산당 독재의 완화와 기업경영의 민주화 등 개혁을 추진해 온 두브체크와 당원들은 큰 힘을 얻을 수 있었다.
1946년 총선에서 공산당이 승리하면서 체코슬로바키아는 본격적인 공산화로 들어섰다. 하지만 1960년대 들어오면서 사회주의 경제체제의 구조적 모순으로 인한 경제 정책 실패로 사회 전반에 비판이 일어나면서 ‘프라하의 봄’이 시작됐다. 이러한 자유화 운동을 대담하게 표현한 서명문서가 바로 `2000어 선언`이다.
1968년 1월 노보트니 제1서기가 물러나고 개혁파인 두브체크가 그 자리를 이으면서 시작된 프라하의 봄은 그해 4월 공산당이 `인간의 얼굴을 한 사회주의`라는 이름으로 자유화 노선을 천명하면서부터 불붙기 시작했으나 8월 20일 소련군을 비롯한 바르샤바 조약기구 5개국 군대가 체코를 침공하면서 막을 내렸다. /조선

 

 

 

 

1951 - 이승만 대통령, 한국전 휴전반대 성명 발표

이승만-1·4 후퇴와 휴전

그러나 1951년 1월 4일중화인민공화국이 궁지에 몰린 북조선을 도와주자 예상치 못한 반격에 국군과 유엔군은 50만 중국군을 상대로 후퇴하였다. 이 때 중국군이 다시 서울을 점령함에 따라 전쟁은 원점으로 돌아왔고 유엔군과 이승만 대통령은 북쪽 땅인 원산 등 기타 지역에 폭격을 하였다. 1월 12일 일본군의 참전설이 나오자 이승만은 이에 대해 강력히 반대하였다. 2월 38선은 공산군의 남침으로 이미 없어진 것이므로 북진 정지는 부당하다고 선언하였으며 2월 15일 한반도 통일을 전쟁 목표로 분명히 밝히고 미국에도 통보하였다. 3월 24일 한만국경까지 진격하기 전에 정전은 안 된다고 담화문을 발표하였다. 6월 9일 38선 정전의 결사반대를 선언하였고 6월 27일 소련의 정전안을 거부하였다. 9월 20일 휴전수락의 전제조건으로 중공군 철수, 북한 무장해제, 유엔감시 하 총선거를 요청하였다.

2년 동만 이렇다 한 성과를 올리지 못하고 1953년 7월 27일판문점에서 휴전 협정이 조인됨으로써 3년 1개월 만에 한국 전쟁 휴전으로 매듭지어졌고 이승만 대통령은 다시 서울에 올라왔다. /위키백과

 

한국의 이승만 대통령은 휴전협정을 반대하며 남북통일이 이루어질 때까지 싸우겠다는 것이다. 따라서 미국은 아이젠하워 대통령의 선거공약을 지키기 위해 이승만 대통령을 설득하는 수 밖에 다른 길이 없었다. 이대통령은 미국에게 한국군을 50만으로 증강시키는 국방예산과 최신무기를 제공해 줄 뿐만아니라 한미간의 방위조약을 체결하겠다는 약속을 하지 않으면 휴전협정에 반대하겠다는 것이다. 릿지웨이 극동군사령관은 오랜 협상 끝에 한국전쟁의 휴전협정을 북한의 김일성 수상, 중국의용군총사령관 펑더화이(후에 국방장관역임)과 함께 1953년 7월 27일 판문점에서 서명했다. 그러나 한국측은 협정에 서명하지 않았다. 따라서 미국은  이대통령의 휴전협정 반대를 무마하기 위해 미국에 초빙하기로 했다. 이대통령은 1954년7월27일 워싱톤에 도착하여 미국국회에서 연설한 후 7월31일 아이젠하원 대통령과 정상회담을 개최한 것이다.
김일평 (커네티컷대 명예교수) /보스톤코리아  2008/05/05, 21:26:21 
http://www.bostonkorea.com/news.php?code=&mode=view&num=5376&page=1&wr=eunkim

 

 

 

 

1950 - 유엔 안보리, 한국 원조를 결의 

1950년 6월 24일 밤 10시(한국시각 25일 낮 11시), 장면 주미 대사에게 급보가 날아들었다. 북한이 남침했으니 대책을 세우라는 이승만 대통령의 다급한 전화였다. 비슷한 시각, 무초 주한 미 대사도 미 국무부에 이 사실을 알리고 있었다. 애치슨 국무장관은 토요일이라 고향에서 휴식을 취하고 있던 트루먼 대통령에게 즉시 보고하고 이 문제를 유엔에 상정해야 한다는 동의를 얻어냈다.

전쟁 발발 7시간 만이었다. 국무부로 달려간 장면 대사는 딘 러스크 아태담당 차관보와 미국의 지원문제에 관해 협의했다. 국무부 유엔담당도 취침 중인 유엔 사무총장에게 전화로 안보리 소집을 요구했다.

25일 오후 3시, 유엔 안보리가 긴급 소집됐다. 전례없는 일요일 긴급회의였다. 공산군의 침략행위 중지와 38선 이북으로 철퇴하라는 미국의 결의안이 9대0으로 채택됐다. 소련대표가 불참한 것이 그나마 다행이었다.

북한으로부터 반응이 없자 27일 다시 474차 유엔 안보리가 소집됐다. 밤 11시30분, 북한의 무력공격을 격퇴하고 이에 필요한 원조를 한국에 제공할 것을 내용으로 하는 결의안이 7대1로 채택됐다. 그리고 6월 30일 미 지상군의 투입이 결정됐다. /조선

 

 

 


1950 - 트루먼, 미국 해.공군 한국전 출동 명령

한편 대한민국(남한) 정부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북한)의 남침으로 전쟁이 일어나자 주미 한국대사에게 긴급 훈령을 내려 미국 국무부에 사태의 긴급성을 알렸고, 미국유엔 안보리를 열어 한국 문제를 건의했다. 이에 따라 UN 안전보장이사회6월 26일 오전 4시에 소집되었고, 미국의 제안을 받아들여 "북한군의 즉각적인 전투 행위 중지와 38도선 이북으로의 철수"를 요청하는 결의안을 9대 0으로 가결하였다.(유고슬라비아는 기권) 이러한 결의를 북한 측에 통고했으나, 이에 응하지 않아 6월 27일 다시 안전 보장 이사회를 열어 "회원국들에게 군사 공격을 격퇴하고, 그 지역의 국제평화와 안전을 회복하는데 필요한 원조를 남한에 제공할 것"을 7대 1(기권2)로 결의했으며, 이 날 해리 S. 트루먼더글러스 맥아더에게 "남한에 대한 해,공군의 지원을 즉각 개시하라"고 명령했다. 결국 미국을 비롯하여 영국, 프랑스, 콜롬비아, 터키 등 16개국의 회원국이 유엔군을 조직하여 한국전에 참전하기에 이르렀다. /위키백과

 

 

 

- Scenes from Film 'Potemkin' by Eisenstein

 

- Eisenstein and Potemkin
 

1905 - 러시아 전함 포템킨호 수병 반란
1905년 6월 27일 러시아 전함 포템킨호에서 수병들이 폭동을 일으켰다. 러일전쟁 이후 러시아 제국에서는 구정치·사회 체제에 대한 불만이 다양한 양상의 시위로 터져나왔다. 이러한 시위는 동궁 앞 광장의 군중을 무차별 살상한 '피의 일요일' 사건을 기점으로 절정에 달했다. 폭동은 비러시아 지역, 특히 폴란드, 핀란드, 발트 해 연안지방, 그루지야 등으로 확산되었다. 시베리아 횡단철도변에 주둔한 부대들이 차르 체제에 반발하면서 반기를 들었고, 오데사 항에 정박 중이던 전함 포템킨호에서도 수병들이 폭동을 일으켰다. 또한 10월에 시작된 철도파업이 총파업으로 발전되면서 러시아의 여러 도시에 소비에트가 급속히 파급되자 니콜라이 2세는 '10월선언'을 발표했다. 후에 소련 공산당 중앙위원회는 1905년의 혁명을 기념하는 영화를 만들도록 했는데, 세르게이 M. 에이젠슈테인이 포템킨호 폭동을 다룬 영화 <전함 포템킨 Bronenosets Potyomkin>을 만들었다. /브리태니커

 

 

 

 

1884 - 프랑스의 철학자, 시인 바슐라르(Bachelard, Gaston) 출생

바슐라르 [Bachelard, Gaston, 1884.6.27~1962.10.16] 

프랑스의 철학자, 시인. 구조주의()의 선구자이며 시론() ·이미지론()으로도 유명하다. 1927년 《근사적 인식()에 관한 시론》으로 학위를 취득한 후 디종대학의 강사·교수를 거쳐 1940년 소르본(파리대학)에 초빙되어 과학사·과학철학을 강의하는 한편, 동 대학 부속인 과학사 ·기술사연구소장을 지냈으며, 1954년 명예교수가 되었다.

20세기 초두, 약 4분의 1세기에 걸친 ‘물리학의 혁명’을 목격하면서 과학을 그 동적()인 변화발전의 위상()에서 파악하는 가운데, 이 변혁기의 과학활동에 맞는 의미를 종래의 철학이나 일상적 인식 또는 과학자 자신에게 투영시키는 데에서 ‘과학의 철학’의 위치를 구하였다. 초기의 대표적인 저작 《새로운 과학적 정신》(1934)은 상대성이론의 비()뉴턴 역학적()인 성격이나 양자역학()의 비결정론()에 대한 세밀한 검토를 통하여 현대과학에서의 인식의 양식()을 ‘비()데카르트적 인식론’으로서 제시한 것인데, 이러한 파악이 《부정()의 철학》(1940)에서 ‘비()의 철학’으로서 결실되었다.

이상의 저작에서 과학이 초래하는 새로운 인식에 대하여 개방된 정신, 나아가서는 과학의 발전을 촉구하는 정신의 추구와 같은 자세를 볼 수 있다면 《과학적 정신의 형성》(1938)의 목표는, 그것을 방해하는 ‘인식론적 장해’의 정신분석에 의한 배제였다. 이러한 방향은 앞서 말한 과학의 진전을 촉구하는 정신의 추구와 근저()에서 교착되면서 시와 이미지의 자유분방한 역동성() 자체를 구하는 ‘4원소()’에 매개된 심층심리의 분석으로 발전하였다. 이 양자를 끊임없이 ‘상보적()’으로 전개시킨 바슐라르의 사상적인 영위는 프랑스의 과학사와 과학철학의 현대적인 의미 확립에 기여한 동시에 J.피아제와 L.알튀세르 또는 G.캉길램을 통하여 M.푸코에게로 다채로운 영향을 끼쳤다. /naver

 

 

 

 


1880 - 미국의 교육자, 저술가 헬렌 켈러(Keller, Helen) 출생

켈러 [Keller, Helen (Adams), 1880.6.27~1968.6.1]

켈러는 중증의 신체적 장애를 극복함으로써 장애인들에게 희망을 준 미국의 교육자이자 저술가이다. 그녀는 19개월 되던 때 심한 병을 앓고 난 뒤 시각과 청각을 잃고 벙어리가 되었다. 7세에 스승 앤 맨스필드 설리번을 만나 특수교육을 받으면서부터 점자를 읽고 쓰게 되었고, 9세에는 음성기관의 촉지를 통해 말하기를 익혔다. 놀라운 학습력 덕분에 '기적의 아이'로 불리면서 유명해졌다. 1904년에는 래드클리프대학을 우등생으로 졸업했다. 1921년부터 88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나기까지 평생 동안 미국맹인재단을 위해 일했고, 세계 각처의 순회강연을 통한 장애자 교육에 힘썼다. <내 삶의 이야기 The Story of My Life>(1902)·<나의 선생님 앤 설리번 메이시 Teacher : Anne Sullivan Macy>(1955) 등 많은 책을 썼으며, 그녀의 어린 시절은 연극과 영화로도 만들어졌다. /브리태니커

 

"행복의 문이 하나 닫히면 다른 문이 열린다.

그러나 흔히 우리는 닫힌 문을 너무나 오래 바라보느라고

우리를 위해 열린 다른 문을 보지 못한다."

 

- 헬렌 켈러 

 

 

 

 

1872 - 미국의 시인, 소설가 던바(Dunbar, Paul Laurence) 출생

던바 [Dunbar, Paul Laurence, 1872.6.27~1906.2.9] 

미국의 작가.


흑인 사투리로 시와 단편소설을 써서 명성을 얻었다.

그는 전문적으로 글만 쓰고자 노력한 첫번째 미국 흑인 작가이자 전국적으로 명성을 얻은 주요한 흑인 작가들 중 한 사람이다. 부모는 노예 출신이었으며, 아버지는 자유를 찾아 캐나다로 도망쳤다가 남북전쟁에 참전하기 위해 미국으로 돌아왔다. 던바는 데이턴 고등학교에서 유일한 흑인 학생이었고 학교 신문의 인기있는 편집자였다. 엘리베이터 조정사로 일하면서 첫 시집 〈떡갈나무와 담쟁이덩굴 Oak and Ivy〉(1893)을 자비로 출판했는데, 인쇄 대금을 지불하기 위해 엘리베이터 승객들에게 시집을 팔기도 했다. 2번째 시집 〈장조와 단조 Majors and Minors〉(1895)는 소설가이자 평론가인 윌리엄 딘 하우얼스의 눈에 띄어 호의적인 평을 받았고, 두 시집에 있는 좋은 시들을 모아 실은 〈하층생활의 서정시 Lyrics of Lowly Life〉(1896)에는 하우얼스가 서문을 썼다. 그의 시들은 곧 큰 인기를 얻게 되었고 그는 미국과 영국의 청중들에게 자신의 시를 직접 낭송했다.

해외에서 돌아와서는 워싱턴 D. C.의 국회도서관 열람실에서 일하게 되었다. 시뿐 아니라 소설에도 눈을 돌려 짧은 생애 동안 단편집 4권과 소설 4편을 발표했다. 주로 백인 독자들을 겨냥했으며, 당시의 대농장 생활을 소재로 다루어 남북전쟁 전의 남부를 전원적·목가적으로 묘사했다. 그러나 인종차별에 대한 견해는 후기 소설 몇 편에서만 언급했다.

자신의 정신적 문제를 다룬 〈부름받지 못한 자 The Uncalled〉(1898)를 비롯해 처음 3편의 소설에서는 등장인물들이 백인이다. 마지막 작품이며 최고작으로 평가받기도 하는 〈신들의 놀이 The Sport of the Gods〉(1902)는 미국 북부 도시를 배경으로, 사회적 기반이 없는 한 흑인 가족의 이야기를 다룬 소설이다. /브리태니커 

 

 

 

 

1850 - 불가리아의 시인, 소설가 바조프(Vazov, Ivan) 출생

바조프 [Vazov, Ivan (Minchov), 1850.6.27~1921.9.22]


불가리아의 문학가.


그의 시·단편소설·장편소설·희곡에는 불가리아의 농촌에 대한 사랑과 애국심이 깃들어 있으며 불가리아 역사에서 중요한 사건들을 다루고 있다. 스테판 스탐볼로프가 불가리아에서 반러시아 정책을 폈을 때 오데사로 망명해(1886~89) 오스만 제국의 지배를 받던 불가리아인들의 시련을 그린 연대기 형식의 걸작 장편소설 〈멍에 Pod igoto〉(1894)를 쓰기 시작했다. 스탐볼로프가 실각한 뒤에 의회의원으로 선출되었고, 1898~99년에 교육장관을 지냈다.

그밖에 연작 서사시 〈잊혀진 자들에게 바치는 서사시 Epopeya na zabravenite〉(1881~84), 중편 〈사랑받지 못하는 자 Nemilinedragi〉(1883), 장편 〈신세계 Nova Zemya〉(1896)와 〈카잘라르의 여제 Kazalarskata Tsaritsa〉(1903)·〈스베토슬라프 테르테르 Svetoslav Terter〉(1907), 희곡 〈하쇼베 Hashove〉(1894)·〈심연을 향해 Kam propast〉(1910)·〈보리슬라프 Borislav〉(1910) 등이 있다. /브리태니커 

 

 

 

 

1846 - 아일랜드의 정치가, 독립운동가 파넬(Parnell, Charles Stewart) 출생

파넬 [Parnell, Charles Stewart, 1846.6.27~1891.10.6] 

찰스 스튜어트 파넬(Charles Stewart Parnell, 1846~1891)은 아일랜드의 정치인이자 독립운동가였다. 10년 가까이 내연의 관계를 지속해오던 캐서린 오세이 부인의 이혼이 확정된 후 정치적 생명을 잃었고, 그가 추구한 아일랜드의 독립에도 차질을 빚게 되었다.

아이작 버트가 창당한 국민당에 입당하였으며 이후 그는 당내 과격파의 지도자가 되었다. 버트의 죽음 이후 당은 곧 찰스 스튜어트 파넬의 과격파와 윌리엄 쇼휘그당 당원들로 갈렸다. 윌리엄 쇼는 1879년부터 1년간 국민당 총재직을 맡았으나 1881년 당총재 선출에서 승리함으로서 당권을 쥐게 되었다. 1882년에 파넬은 당을 아일랜드 의회당으로 개명하여 당을 재정비하였다. 휘그당원들은 1885년에는 결국 모든 의석을 상실하고 말았다.

그러나 영국출신 여성이자 당원의 아내 캐서린 오세이를 보자마자 반해버렸다. 당시 여러 차례 불륜을 저지른 남편과 별거하던 캐서린과 내연관계를 가졌고, 5년 동안 캐서린은 파넬의 아이 셋을 나았다.

부인의 부정을 안 오세이 대위는 파넬에게 정치적 보상과 돈을 보장받고 두 사람의 관계를 묵인하였다. 10여년 가까이 유지되던 이 관계는 돈 많은 캐서린의 숙모가 죽으면서 오셰이 대위에게 유산을 남겨주지 않으면서 문제가 되었다. 오세이가 이혼 소송을 제기해 공론화되었다. 파넬과 캐서린이 침묵하였고, 오세이는 자신을 철저하게 희생자라 주장하며 결국 재판에서 승소하였다. 19세기 후반 영국에서 이혼 소송은 가장 인기 있는 뉴스거리였고, 파넬은 가정파괴범으로 매도당했다. 이 사건은 일차적으로 가족과 도덕성에 관한 문제로 인식되었지만, 결국 파넬은 이 사건에 연루되면서 정치적으로 몰락하고 말았다. 21세기의 한 기자는 그는 사랑을 얻는 대신 권력을 잃었다고 평하였다. /위키백과

 

 

1771 - 스위스의 교육개혁가 펠렌베르크(Fellenberg, philipp Emanuel von) 출생


    

1462 - 프랑스 왕 루이 12세(Louis XII) 출생

 

 

1040 - 헝가리 왕 라슬로 1세(Laszlo I) 출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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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화상이 창안하여 2004년 4월부터 매일 연재하고 있는 [우표로 본 오늘의 인물과 역사]는 세계최초의 <우표를 이용한 매일역사연재물>입니다. 수집한 우표를 이용하여 오로지 취미와 교육적 목적으로 만들고 있지만, 자료의 충실을 기하느라 본의 아니게 저작권에 저촉되는 일이 생길까 염려하고 있습니다. 혹시 문제가 있으면 미리 알려주셔서 고칠 수 있는 기회를 주시면 고맙겠습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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