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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오늘의만평

우표로 본 오늘의 인물과 역사 - 8/10

작성자홍선옥|작성시간17.05.01|조회수202 목록 댓글 0

 

우표로 본 오늘~ 8/10

 

 

"우표에서 얻은 것이 학교에서 배운 것 보다 많다."

- 프랭클린 D. 루스벨트

 

 

 

 

2008 - 박태환, 올림픽 사상 첫 수영 금메달

해맑은 미소의 19살 청년이 마침내 해냈다. 예상은 했지만, 한국 스포츠 사상 최고의 쾌거였다.

박태환(19·단국대1)이 10일 중국 베이징 국가아쿠아틱센터(워터큐브)에서 열린 2008 베이징올림픽 수영 남자자유형 400m 결선에서 3분41초86의 기록으로 감격의 금메달을 목에 걸었다. 이로써 한국 수영은 1964년 도쿄올림픽 때 첫 출전한 이래, 44년 만에 서양인들의 전유물로 여겨지던 자유형에서 금자탑을 쌓았다. 한국 수영의 역대올림픽 최고성적은 2004 아테네올림픽 여자 개인혼영400m 남유선(23·강원도청)이 기록한 7위다.

박태환의 이날 기록은 지난 4월18일 울산에서 열린 동아수영대회에서 수립했던 아시아기록(3분43초59)을 넘어선 것이다. 이 기록은 전날 예선에서 중국의 장린(3분43초32)가 갈아치웠으나, 하루만에 박태환이 찾아왔다. 지난해 3월 멜버른 세계선수권대회에서 금메달을 목에 걸며 ‘월드챔피언’에 오른 박태환은 올림픽 우승으로 다시한번 세계를 놀라게 했다. 하지만, 인간어뢰 이언 소프(호주)의 세계기록(3분40초08·이언 소프·호주)에는 못미쳤다.

박태환은 이날 출발 반응시각 0.69초로 8명 중 가장 빨랐으나, 50m를 4위로 찍었다. 그러나 100m 2위로 피치를 올리더니 150m 턴 때 1위로 치고나서며 경쟁자들을 따돌렸다. 그랜트 해킷(호주)은 초반 1위로 나섰으나 후반 체력이 달린 탓인지 6위(3분43초84)로 처졌다. 2위는 장린(중국)이 차지했다.

박태환은 이날 오후 남자 자유형 200m 예선을 거쳐, 12일 오전 결승에서, 세계기록 보유자인 ‘수영황제’ 마이클 펠프스(미국)와 금메달을 다툴 예정이다. 17일에는 남자자유형 1500m에 출전해 3번째 금에 도전한다.

베이징/김경무 선임기자 kkm100@hani.co.kr /한겨레 2008-08-10

http://www.hani.co.kr/arti/ISSUE/39/303309.html

 

 

 

 

- 가봉공화국 봉고 대통령 방한, 1975         - 전두환 대통령 가봉 방문, 1982 


2007 - 오마르 봉고 가봉공화국 대통령 방한, 청와대에서 노무현 대통령과 환담

오마르 봉고 온딤바(Omar Bongo Ondimba, El Hadj, 1935~ ) 가봉공화국 대통령이 10일 청와대에서 노무현 대통령과 환담하고 오찬을 함께 했다.

9일 한국을 찾은 봉고 대통령의 방문 목적은 12일로 예정된 만해평화상 특별상 수상 때문이다. 노 대통령은 아프간 인질사태 해결과 남북정상회담 준비로 눈코뜰새 없지만, ‘환담’과 ‘오찬’이라는 형식으로 2시간 가까이 봉고 대통령을 환대했다. 봉고 대통령이 한국과 인연이 남다른 때문이다. 봉고 대통령의 방한은 이번이 네 번째다.

그는 1975년 당시 박정희 대통령의 초청으로 처음 방한했다. 아프리카 서부 적도 남단에 위치한 가봉공화국은 1960년 프랑스로부터 독립했지만, 신생독립국들이 비동맹 친북노선을 강화하는 냉전시대에 가봉은 한국에 남다른 가치가 있었다. 62년 아프리카 국가 중 한국과 최초로 수교했다.

75년 첫 방한 당시 정부는 김종필 국무총리를 위원장으로한 ‘국빈영접 방한 준비위원회’를 구성하고, 수십만명을 길가에 동원하는 등 극진한 대접을 했다. 당시 기아 자동차는 신형 승합차를 출시하면서 ‘봉고’라는 이름을 붙여 봉고 대통령의 존재를 전 국민에게 인식시켰다. 환대에 감동받은 봉고 대통령은 3박4일 순방일정을 마치고 일본으로 떠났다가, 다시 한국에 돌아와 몇 시간을 더 머물렀다.

봉고 대통령은 이후 10년 주기로 한국을 찾았다. 1982년 전두환 대통령의 가봉 방문에 대한 답방 형식으로 84년9월 방한했고, 김영삼 대통령 시절인 96년8월 한 차례 더 방문했다. 그는 67년 가봉 대통령에 오른 뒤 40년째 가봉의 국가원수로 지위를 유지하고 있다. 72살인 그는 이미 2012년 대선 재출마를 선언한 상태다.

이번에 봉고 대통령이 받게 된 만해대상은 만해대상실천선양회가 1997년부터 매년 8월 백담사에서 여는 만해축전 때 주는 상이다. 지금까지 정주영 현대그룹 창업자, 강원용 목사, 김대중 전 대통령, 넬슨 만델라 전 남아공 대통령, 티베트 망명정부 지도자 달라이 라마, 김지하 시인 등이 받았다.

주최 쪽은 “봉고 대통령이 차드 중앙아프리카공화국, 콩고-브라자빌, 앙골와 자이르 분쟁의 조정 역할을 원만히 수행함으로써 중앙아프리카의 평화를 유지하는 데 중심적인 구실을 했다”고 시상 이유를 밝혔다.

신승근 조연현 기자 /한겨레 2007-08-10 오후 06:41:45

http://www.hani.co.kr/arti/society/society_general/228188.html 

 

 

 

 

2005 - 독립신문 창간호 원본 국내서 발견

상하이 임시정부가 발간한 독립신문 창간호의 원본이 최근 국내에서 처음으로 발견됐습니다.

상하이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기관지였던 독립신문의 창간호 원본입니다. 임시정부가 수립된 1919년을 대한민국 원년으로 표기하고 1면에는 당시 사장 겸 주필이었던 춘원 이광수가 쓴 것으로 추정되는 창간사가 한글과 한문 혼용으로 기록돼 있습니다.

특히 창간사에서는 민족의 대단결이 재력이나 군사력보다도 더 중요한 독립의 기반이라고 역설하고 있습니다. 또 프랑스 파리 강화회의에 참석했던 김규식이 제출한 독립청원서의 내용도 기록돼 있습니다.

독립신문 창간호는 지금껏 4면짜리 신문 하단이 모두 찢겨진 원본이 보관돼 왔지만 이번에 독립기념관이 완전한 원본을 한 개인 소장자로부터 입수하게 됐습니다.

독립신문은 당시 독립운동에 앞장섰던 활동가들에게는 정세분석 전문지의 역할을 했고 국내의 국민들에게는 비밀조직을 통해서 목숨을 걸고 구해 봐야 했던 한줄기 빛이었습니다.

조직을 통해서 미주라든지 세계 각지 또 특히 국내에도 독립신문을 배포해서 전국민에게 독립사상을 고취하고 독립에 대한 의지를 확고히 하고자 하였습니다.

독립기념관은 모두 189호로 발간된 독립신문 가운데 2개 호만 아직 찾아내지 못했다며 이들이 발견되는 대로 독립신문 영인본을 찍어낼 수 있을 것으로 기대하고 있습니다. /KBS

 

 

 

- 카터 미국대통령 방한 기념, 1979

 

1999 - 지미 카터 전 미국대통령 미국최고영예훈장 `자유의 메달` 수상

필라델피아 자유메달(Philadelphia 自由 Medal)

김대중 대통령이 1999년 7월4일 수상한 메달로 88년 필라델피아 시민지도자 2000여명이 미국 독립 200주년을 기념하기 위해 제정한 상.

매년 양심의 자유와 억압, 무지, 빈곤으로부터의 자유 신장을 위해 비전과 리더십을 발휘한 세계적 지도자나 단체에 수여된다.

역대 수상자는 넬슨 만델라 전 남아공 대통령, 하벨 체코 대통령 등 노벨 평화상 수상자도 5명이나 된다.

http://www.donga.com/fbin/dict?n=sisa&a=v&l=8527

 

 

 


1993 - 국립중앙박물관, 서울 용산의 가족공원에 신축 이전키로 확정

국립중앙박물관의 건립이 국책사업으로 추진계획이 수립된 것은 1993년 8월15일이다. 박물관 건립 부지를 용산가족공원으로 결정 후, 11월에는 박물관이 사용하고 있던 조선총독부 건물을 철거하고 나서 박물관의 이전과 신축에 관한 계획을 발표한다. 이듬해 4월 박물관 건립 기본계획수립 시작되고 국제현상설계공모(95.10)로 진행된다. 그리고 당선안 결정(95.10) 이후 1년(96.9) 만에 기본설계가 완료되고 전시부문을 제외한 실시설계는 당선이후 1년 7개월(97.8.)여 만에 완성된다. 그리고 동부건설(주), (주)대우건설, 현대건설(주), LG건설(주), SK건설(주)로 이루어진 국립중앙박물관 J/V팀이 10월에 박물관 공사를 착공되고, 그리고 나서 1998년 12월에 전시실시설계가 완료된다.
국립중앙박물관의 완공까지 박물관 건립위원회는 7기를 맞았으며, 시공현장 소장은 5번 교체되었고 감리단장은 4회 교체되었다. 시공현장 하루 최다출력인원은 1000여 명, 설계투입인원 100여 명으로 진행되었다.

강권정예 기자, 건축문화 2005년 11월호

http://www.archious.com/contents/anc/2005/11/03.htm
 

 

 

 

1993 - 박은식 선생 등 대한민국 임시정부 선열5위, 국립묘지에 안장

1993년 국립묘지에 조국의 광복을 위해 멀리 상하이에서 투쟁을 했던 임시정부 선열 다섯 분의 위패를 애국 지사의 묘지가 있는 뒤편에 모셨고, 얼마전 이분들의 유해를 국립묘지에 안장하게 되었다. 이번에 국립묘지에 안장된 임시정부의 선열들은 박은식(2대 대통령), 김인전(의정원 위원장), 신규식(국무총리), 안태국, 노백린 등 5명이다. 이들은 모두 3.1운동 후에 중국땅에 망명해 조국을 위해 투쟁하다가 1920~1926년 사이에 사망하였으니, 70년이 훨씬 지난 뒤에야 꿈에도 그리던 고향땅에 묻히게 되었다.

http://ask.nate.com/knowhow/view.html?num=112072
 

 

 

 

1988 - 울진 원전1호기(발전용량 95만Kw) 준공

국내 원자력발전소 상업운전일

고리 1호기 - 1978. 04. 29

고리 2호기 - 1983. 07. 25
고리 3호기 - 1985. 09. 30
고리 4호기 - 1986. 04. 29

월성 1호기 - 1983. 04. 22
월성 2호기 - 1997. 07. 01
월성 3호기 - 1998. 07. 01
월성 4호기 - 1999. 10. 01

영광 1호기 - 1986. 08. 25
영광 2호기 - 1987. 06. 10
영광 3호기 - 1995. 03. 31
영광 4호기 - 1996. 01. 01
영광 5호기 - 2002. 05. 21
영광 6호기 - 2002. 12. 24

울진 1호기 - 1988. 09. 10
울진 2호기 - 1989. 09. 30
울진 3호기 - 1998. 08. 11
울진 4호기 - 1999. 12. 31
울진 5호기 - 2004. 07. 29
울진 6호기 - 2005. 04. 22

 

 

 

 

1966 - 미국의 무인 달탐사선 루너오비터(Lunar Orbiter) 1호 발사

루나 오비터 1호

미국의 달 탐사선, 386 kg
발사: 1966년 8월 10일
달 궤도에 진입하여 달의 반대 쪽을 탐사하고 달에 충돌하였다.

http://www.yushin.or.kr/astro/craft/moon.htm

 

 

 

 

1961 - 한국-카메룬 국교 수립

카메룬은 1961년 8월 10일 한국과 수교 이후 표면적으로는 남북한 등거리 외교정책을 표방하나, 실질적으로는 친서방 정책에 따라 친한적 입장을 취하며 UN(United Nations:국제연합) 등 국제무대에서 한국을 지지해왔다. 한국은 1969년 1월 카메룬에 상주 대사관을 개설하였다가 1998년 8월 철수하였다. (나이지리아 대한민국대사관) /naver

 

 

 

- View from Apollo 11                - Greenwich Obserbatory                 

1961 - 한국 표준시간 변경 - 표준자오선 127도 30분에서 135도로 변경 

1961년 8월 10일 0시를 기해 우리나라 표준시간이 30분 앞서게 돼 일본의 표준시간과 같아졌다. 정부가 7월 28일 각료회의를 열어 우리나라 표준시간을 규정하던 표준 자오선 동경 127도 30분선을 이날부터 135도로 변경키로 의결한데 따른 것이다. 이로써 한국의 표준시는 그리니치보다 9시간 빠르게 됐고, 한국은 태양의 남중(南中)시각이 정오를 조금 넘기게 됐다.

세계각국은 영국의 그리니치 천문대를 통과하는 자오선을 기준으로 경도 15도마다 한시간씩의 차이를 둔 표준시간을 정하고 있다. 정부가 표준 자오선을 변경한 이유는 그전의 표준자오선이 항공, 항해 또는 천문, 기상 등 관측에서 불합리했고, 우리나라의 시간을 세계 각국의 시간으로 환산할 때 불편했기 때문이다.

1908년 4월 1일 한국에 표준시가 처음 도입될 당시의 표준시 자오선은 127도 30분이었지만 1912년 1월 1일 한일합방의 영향으로 일본과 같은 135도로 바뀌었다. 하지만 해방후인 1954년 3월 21일 127도 30분으로 다시 바뀌었다가, 이날 135도로 다시 확정됐다. /조선

 

 

 

 

1961 - 박정희 최고회의 의장, 중장 승진
5·16군사쿠데타의 주역으로 국가재건최고회의 의장인 박정희 소장!
1961년 오늘 육군 중장으로 승진한다.
청와대에서 열린 계급장 수여식에서 윤보선 대통령과 송요찬 내각수반이 박정희 의장의 어깨에 중장 계급장을 달아 준다.
이와 함께 5·16쿠데타에 적극 가담했던 대령 37명도 준장으로 진급된다.
박정희 국가재건최고회의 의장은 이듬해 3월 윤보선 대통령이 사임하자 대통령 권한대행에 취임한다.
이어 박정희 의장은 1963년 8월 육군대장으로 예편한 뒤 같은 해 12월 제5대 대통령에 취임한다. /YTN

 

 

 


1945 - 미국의 물리학자, 로켓 기술자 고더드(Goddard, Robert H.) 사망

고더드 [Goddard, Robert Hutchings, 1882.10.5~1945.8.10]

미국의 물리학자, 로켓 기술자.

매사추세츠주() 우스터 출생. 1908년 우스터 공과대학 졸업, 1911년 우스터의 클라크대학교에서 학위를 받고, 1914년 클라크대학교에서 강의를 맡아 1919∼1943년까지 물리학 교수로 있었다. 1909년 다단식() 로켓, 액체추진제에 의한 연속로켓추진, 지구와 다른 행성 사이를 왕복하는 유인·무인 탐사로켓 등을 구상하였다.
1914∼1916년 로켓 비행 기초이론을 세우고 조그마한 고체연료 로켓으로 실험을 하였으며, 1926년 그의 첫 액체연료 로켓을 발사하였다. 1930년대에는 뉴멕시코주() 로스웰에서 액체연료로 로켓 실험을 계속하고 자이로스코프(gyroscope)에 의한 제어실험을 하였다. 제2차 세계대전 때 해군에서 미사일 등의 연구에 종사하였으며, 로켓을 무기가 아닌 우주에 관한 인류의 지식을 넓히는 수단으로 사용해야 한다고 하였다. 저서에 《초고공()에 도달하는 방법》(1919) 《로켓》(1946) 등이 있다. /naver

 

 

 


1944 - 건국동맹 결성

1944년 8월 10일 여운형의 지도 아래 사회주의자와 민족주의자들이 모여 건국동맹을 결성했다. 당시 사회주의자들은 일제의 통제 아래에서 침묵을 지키거나 소그룹으로 명맥을 유지하는 형편이었고, 민족주의자들도 1942년 조선어학회사건 이후 활동이 미미한 상황이었다. 이런 현실을 타개하고자 뭉친 건국동맹은 "각인각파(各人各派)를 대동단결하여 거국일치로 일본제국주의 제세력을 구축(驅逐)하고 조선민족의 자유와 독립을 회복할 일, 반추축(反樞軸) 제국과 협력하여 대일 연합전선을 형성하고 조선의 완전한 독립을 저해하는 일체 반동세력을 박멸할 일, 건설부면에 있어 일체 시위를 민주주의적 원칙에 의거하고 특히 노농대중의 해방에 치중한다"는 강령에 따라 활동했다. 또한 좌익·우익을 묻지 않았으며 불문(不問)·불어(不語)·불명(不明)을 철칙으로 삼았다. 1944년 10월경 여운형을 중심으로 조직을 정비하고 책임자를 내정했으며, 자주적인 독립쟁취를 이루기 위한 준비로서 군사위원회·식량대책준비위원회·치안대 등을 결성했다. 다른 한편으로 결정적 시기에 해외 동포들의 힘을 결집시키기 위해 해외에서 활동하는 반일단체와의 협력을 도모했다. 건국동맹은 8·15해방 이후 건국준비위원회를 결성할 수 있는 모체가 되었다. /브리태니커

 

 

 

  


1925 - '찰스턴 춤' 경연대회
1925년 오늘 찰스턴 춤의 발상지인 미국 사우스캐롤라이나주 남동부의 항만도시 찰스턴에서 경연대회가 열린다.
1920년대 미국을 휩쓸었던 사교 재즈댄스 '찰스턴(Charleston)'춤!
독특한 당김음 리듬과 4박자의 빠른 템포에 맞춰 양 무릎을 붙인 채 발을 번갈아 차올리며 추는 춤이다. 1923년 10월 29일 초연된 브로드웨이의 뮤지컬 코메디 '러닝 와일드 Running Wild'에서 피아노 연주자 제임스 존슨이 작곡한 작품 '찰스턴'을 작사자인 세실 매크가 노래하고 춤춘 데서 큰 인기를 끌기 시작해 곧장 미국 전역에 보급됐다.
1925년 미국 보스톤의 피크위크 클럽(Pickwick club)에서는 찰스턴 무희들이 워낙 요란스럽게 요동치며 춤을 추는 바람에 클럽 건물이 무너져 50명이 사망하는 사고가 나기도 했다.
1927년에는 찰스턴이 세계적으로 퍼졌다.
1920년대 미국 금주법 시대를 상징하는 춤으로 지금도 여러 공연에서 쓰인다. /YTN

 

 

 

 

1916 - 다호메(베냉)의 초대 대통령 마가(Maga, Hubert) 출생

마가 [Maga, Hubert, 1916.8.10~2000.5.8]

Hubert Maga (August 10, 1916–May 8, 2000) became the first president of Dahomey, now Benin, when the country gained independence from France on August 1, 1960.

Maga represented the Dahomey Democratic Rally party (Rassemblement Démocratique du Dahomé). Prior to his presidency, he served as Prime Minister of Dahomey during the country's last year under French rule. He had also served as representative in the French national assembly. In October 1963, unrest led to a coup that put Maga out of office. After years in exile, he returned to the country and served as head of a rotating three-man presidential council from 1970, together with Sourou Migan Apithy and Justin Ahomadegbé-Tomêtin. The latter took over the chairmanship for a few months in 1972, until a new coup took place October 26 the same year, installing Major Mathieu Kérékou as the new President of the Republic. Maga was imprisoned and not released until 1981. He died on May 8, 2000.

http://en.wikipedia.org/wiki/Hubert_Maga

 

 

 

 


1909 - 모로코 국왕 무하마드 5세(Muhammad V) 출생

무하마드 5세 [Muhammad V, 1909.8.10~1961.2.26]

본명은 Sidi Muhammad Ben Yusuf.

모로코의 술탄(1927~57 재위).

프랑스의 식민통치로부터 독립을 열망한 모로코 민족주의자들의 중심인물이었고 독립을 쟁취한 뒤 왕으로서 나라를 통치했다(1957~61).

무하마드는 물레이 유수프 술탄의 셋째 아들로, 1927년 아버지가 죽자 두 형들보다 더 자신들에게 협력할 것으로 기대한 프랑스 당국에 의해 선택되어 술탄이 되었다. 그는 1930년에 제정된 베르베르 다히르 법을 폐기할 것을 프랑스 당국에 촉구함으로써 자신의 민족주의 감정을 처음으로 드러냈다(1934). 이 법은 모로코 내에 거주하는 두 종족, 즉 베르베르족과 아랍족에 각기 다른 법률체계를 적용하도록 한 것으로 두 종족 모두에게 반발을 사고 있었다. 그것은 명분상 보호국인 모로코를 지원하기 위해 공표된 것이었지만 오히려 모로코를 분열시키고 민족주의를 촉진시키는 결과를 가져왔다. 무하마드를 민족의 상징으로 삼기 위해 모로코의 민족주의자들은 그의 권력계승을 기념하는 연례 축제인 '즉위 축제'(Fête du Trône)를 준비했다. 이 행사 때마다 그는 연설을 했는데, 그 어조는 온건했지만 민족감정을 북돋우는 것이었다. 프랑스 당국은 어쩔 수 없이 이 축제일을 공식 휴일로 지정하는 데 동의했다. 그뒤 10년 동안 무하마드는 민족주의자들의 저항운동에 직접 가담하지는 않았지만 그것을 은밀히 지원했다.

제2차 세계대전중에 무하마드는 연합국을 지지했고 1943년에는 미국 대통령 프랭클린 D. 루스벨트를 만나 독립추구에 대한 격려를 받았다. 무하마드의 독립 결심은 1944년 1월 프랑스 당국이 수많은 민족주의자들을 체포했을 때 더욱 굳어졌다. 1947년 그는 탕헤르를 방문해 프랑스를 전혀 언급하지 않고 모로코와 아랍 세계의 연계를 강조하는 연설을 했다. 또한 모로코에 있는 프랑스 총독의 포고령에 대한 서명을 거부함으로써 그것을 법적으로 무력화시키는 방법을 사용했는데 이것은 효과적인 저항수단이었다. 1951년 프랑스는 한 종족을 부추겨 무하마드에 대한 반란을 일으키게 했고, 그를 보호한다는 구실로 군대를 동원해 왕궁을 포위했다. 이런 상황 속에서 그는 민족주의 운동을 철회하지 않을 수 없었다. 1953년 8월 프랑스 당국은 그를 코르시카 섬으로, 그뒤 마다가스카르 섬으로 추방했다. 그러나 무하마드가 모로코에 없는 동안 테러 행위가 증대했고 그의 명성은 급상승했다. 이미 알제리의 반란에 직면하고 있던 프랑스 정부는 1955년 11월 무하마드의 귀환을 허용했다. 그는 1956년 3월 완전독립을 보장하는 협정을 프랑스와 체결했다. 그뒤 그는 온건한 통치로 권위를 얻었고 1957년에는 왕의 칭호를 가지게 되었다. 모로코 정부의 미온적 정책에 불만을 가졌던 그의 아들 무하마드 하산(뒤에 하산 2세)은 1960년 5월 아버지에 의해 총리 대리로 임명됨으로써 모로코의 실질적 통치권을 넘겨받았다. /브리태니커 

 

 

 

 

1902 - 스웨덴의 생화학자 티셀리우스(Tiselius, Arne) 출생

티셀리우스 [Tiselius, Arne (Wilhelm Kaurin), 1902.8.10~1971.10.29]

스웨덴의 생화학자.

1948년 전기영동과 흡착분석에 관해 연구한 공로로 노벨 화학상을 받았다. 1925~32년 웁살라대학교에서 테오도르 스베드베리의 조교로 있으면서 단백질의 전하를 이용해 현탁액 내에 있는 단백질을 분리하는 전기영동법을 개발해 1930년 박사학위를 받았다. 그는 웁살라대학교에서 학생들을 가르친 후 프린스턴의 고등연구소에서 연구했다. 1937년 웁살라로 돌아와 생화학교수가 되었으며, 그의 학과가 사용할 새로 지어진 연구소를 제공받았다. 그는 노벨상에서 특별히 언급된 업적인 화학적으로 유사한 혈청 단백질의 분리에 전기영동법을 사용했다. 1940년 그는 단백질을 비롯한 여러 물질들을 흡착 크로마토그래피로 분리하는 연구를 시작했다. 1946~50년 스웨덴 자연과학연구소회의 회장이었던 그는 1947~60년 노벨 재단의 부이사장을 거쳐 1960~64년 이사장이 되었다. /브리태니커 

 

 

1900 - 독립운동가 이봉창(李奉昌) 출생



1896 - 독일 항공의 개척자 릴리엔탈(Lilienthal, Otto) 사망


 

1878 - 독일의 소설가, 수필가 되블린(Döblin, Alfred) 출생



1874 - 미국의 제31대 대통령 후버(Hoover, Herbert) 출생


 

1868 - 독일의 항공기술자 에케너(Eckener, Hugo) 출생


 

1848 - 미국의 정물화가 하넷(Harnett, William) 출생 

 

 

1846 - 미국 의회에서 스미스소니언 협회의 설립안이 통과되다


 

1823 - 브라질의 낭만주의 시인 곤살베스 디아스(Gonçalves Dias, Antônio) 출생

 

 
1793 - 프랑스 루브르 박물관 혁명정부에 의해 일반 개관

 

  
1782 - 멕시코의 독립운동가, 혁명군 지도자 게레로(Guerrero, Vicente) 출생

 

     

1675 - 영국 그리니치 천문대 건립


 

1645 - 스페인의 예수회 전도사, 탐험가 키노(Kino, Eusebio Francisco) 출생

 

 

1519 - 항해가 마젤란, 최초의 세계일주 출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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