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AFE

◈ 오늘의만평

우표로 본 오늘의 인물과 역사 - 9/22

작성자김 민|작성시간17.05.02|조회수208 목록 댓글 0

 

우표로 본 오늘~ 9/22     차 없는 날         

 

 

"우표에서 얻은 것이 학교에서 배운 것 보다 많다."

- 프랭클린 D. 루스벨트

 

 

 

이미지를 클릭하면 원본을 보실 수 있습니다.

- 2000청주인쇄출판박람회 기념, 2000.9.22 발행


2000 - 2000청주인쇄출판박람회 개막 (9.22~10.22)

2000청주인쇄출판박람회

기 간 : 2000.09.22(금)-2000.10.22(일)

지 역 : 충청북도 청주시

장 소 : 청주예술의 전당 및 청주고 인쇄박물관 일원

작은 내용 : 문자문화의 지난 천년 새 천년이라는 주제로 열리는 이번 박람회는 청주예술의 전당을 중심으로 펼쳐지고 있는 2000청주인쇄출판박람회는 5만 여평 공간 위에 행사장이 꾸며져 있다. 그만큼 행사장이 넓고 이에 따라 볼거리도 많아 사전 준비를 철저히 해야 보다 효율적인...

/www.showkorea.com 

 

 

 

 


1994 - 미국의 만화가 자겐도르프(Sagendorf, Bud) 사망

자겐도르프 [Sagendorf, Bud, 1915.3.22-1994.9.22]

30여년동안 뽀빠이 연재만화를 그린 버드 자겐도르프(79)가 1994년 9월 22일 플로리다주 사라소타 근처 한 작은 마을의 요양원에서 암으로 사망했다.
워싱턴주 웨나치에서 출생, 소년 때 가족과 함께 캘리포니아주 산타모니카로 이주한 자겐도르프는 고교시절 산타모니카 부두에서 낚시를 하다가 만화주인공 뽀빠이를 만들어 낸 만화가 엘지 시거(Segar, Elzie, 1894~1938)를 만나 그의 조수가 됐다. 자겐도르프는 시거와 함께 '스위피' '신병 유진' '깡패 앨리스'와 같은 멋진 만화주인공을 만들어내 전세계 어린이들의 사랑을 받았다.

1938년 시거가 사망한 후 킹사의 만화 편집차장이 되었고 1959년부터 일간지와 일요판의 뽀빠이 만화를 맡아 그리기 시작했다. 그는 '만화예술' (1955년) '뽀빠이 첫 50년' (1979년) 등 2권의 책도 저술했으며 시력악화로 일간지에 연재하던 만화작업을 1986년에 그만두었으나 일요판 신문의 연재만화를 계속 그려왔다. /조선

 

 

 

이미지를 클릭하면 원본을 보실 수 있습니다.


1990 - 베이징 아시안게임 개막(9.22~10.7)
제11회 베이징 아시안게임이 1990년 9월 22일 오후 5시 베이징[京] 공인 스타디움에서 열리는 개막식과 함께 시작됐다. 단결, 우의, 진보를 캐치프레이즈로 내건 이번 대회에는 아시아 35개국 6천여명의 선수단이 출전, 이날부터 10월 7일까지 16일간 경기를 벌였다.

베이징 대회에는 아시아올림픽평의회(OCA) 38개 회원국 중 이틀전 9월 20일 열린 OCA총회에서 회원국 자격을 상실한 이라크와 재정문제를 이유로 불출전을 통보해 온 요르단 예멘 등 3개국을 제외한 35개국이 출전, 1951년 뉴델리 제1회 대회 이후 가장 많은 출전국을 기록했다.

이번 대회에선 육상, 축구 등 27개 정식종목과 야구, 연식정구 등 2개 시범종목에서 총 3백13개(시범종목 5개 포함)의 금메달을 놓고 각국 대표선수가 열전을 벌였다. 27개 종목 3백8개의 금메달을 걸고 싸운 이번 대회의 종합패권은 금 1백83개의 홈팀 중국에 돌아갔으며 한국이 54개로 2위, 일본과 북한은 38개, 12개로 각각 3-4위에 올랐다. /조선

 

 

 

이미지를 클릭하면 원본을 보실 수 있습니다.


1990 - 파이어니어 10호 발사후 18년만에 태양계 밖 도달

1968년 11월에 발사된 우주탐사선 파이어니어 9호는 6호보다 태양에 가까운 공전궤도를 297일을 주기로 돌며 똑같은 관측활동을 했다. 즉 태양광구()에서 발생하는 플레어는 곧 태양풍이 되어 무수한 고에너지입자를 우주공간으로 쏟아내는데 파이어니어탐사기는 지구가 받게 될 그 여파를 수시로 감시하여 각종 정보를 보내온다. 이러한 자료는 미국 콜로라도주에 있는 우주공간이상예측()센터에서 처리되어 민간항공사 ·전기회사 ·전신전화회사 등에 보내져 조속한 대책이 수립되도록 도와주고 있다.

파이어니어 6호는 그 밖에도 코호텍혜성의 꼬리를 관측하였다. 파이어니어 탐사선은 9호까지는 무게 65 kg 전후의 소형이었지만 10호와 11호에 이르러 270 kg의 대형이 된다. 10호와 11호는 각각 1972년 3월과 1973년 4월에 목성 등 행성탐사를 위하여 발사되었다. 초속 14 km를 넘는 빠른 속도로 목성으로 향한 10호는 1973년 12월 3일 목성 상공 13만 km의 거리를 통과하면서 그 표면사진을 지구로 보내왔다. 이어 다음해 12월 2일에는 11호가 목성에 접근하여 10호와 마찬가지로 표면사진을 찍고, 그 밖에 목성의 대기와 방사선 등에 관한 여러 가지 자료를 지구에 보내왔다.

10호는 목성의 강력한 중력()을 이용하여 태양계의 바깥쪽으로 비행경로를 바꾸어 태양계를 탈출한 최초의 인공물이 되었다. 10호에는 혹시 외계인을 만날지도 모른다는 희망 아래 지구인()이 외계인에게 보내는 메시지가 실려 있다. 한편 11호는 목성 접근 후 비행경로를 토성으로 바꾸어 1979년 9월에 토성의 고리 위를 지나며 토성의 고리와, 자기장, 위성 등에 대한 귀중한 관측자료를 지구로 보내왔다. /naver

 

 

 

이미지를 클릭하면 원본을 보실 수 있습니다.


1981 - 초고속열차 TGV 시험운행
1981년 오늘 프랑스의 초고속열차 테제베(TGV)가 시험운행에 나섰다.
파리에서 리용까지 최고 운행속도 시속 300km, 평균 속도 260km로 달렸다.
컵에 담긴 물이 거의 흔들리지 않을 정도로 열차의 흔들림도 적은 것으로 나타났다.
차창 밖의 차들보다 두 배 이상 빠르게 달린 TGV는 예정대로 리용에 2시간 40분 만에 도착한다.
일반 열차의 소요시간보다 1시간 10분이 단축됐다.
이날 시험운행에 성공한 TGV는 닷새 뒤인 9월 27일부터 파리와 리용 구간에서 상업운행을 시작한다. /YTN

 

 

 

이미지를 클릭하면 원본을 보실 수 있습니다.

1980 - 이란-이라크 전쟁 발발

1980년 9월 22일 이라크 군대가 이란의 서부지역을 침공함으로써 이란-이라크 전쟁이 발발했다. 이미 이라크와 이란 사이에는 영토 및 정치 분쟁이 산적해 있었다. 특히 이라크는 이란 국경지역에 위치한 풍부한 석유산출지역인 후제스탄을 장악하려고 했다. 마침내 이란을 급습한 이라크군은 넓은 국경선을 따라 신중히 후제스탄으로 진격해갔다. 그러나 1980년 12월 이란 영내에서 예기치 않은 강력한 저항에 부딪치자 이라크의 공격은 교착상태에 빠졌다. 1981년부터는 혁명의용군(혁명수비대)으로 정규군을 보강한 이란의 반격이 이어졌고 이라크군은 후퇴하기 시작했다. 계속되는 이란의 공세에 1982년말 이라크는 이란의 모든 점령지역으로부터 자발적으로 군대를 철수하고 이란과 평화협상을 추구하기 시작했다. 그러나 루홀라 호메이니가 영도하는 이란은 타협에 불응하고 사담 후세인을 타도하기 위해 전쟁을 계속했다. 이후 몇 년 동안 혼란상태가 이어졌고 산발적인 공습이 계속되어 양국은 경제적으로 어려운 상황에 놓이게 되었다. 1988년 이란의 경제가 심각하게 악화되고 이라크가 다시 전투지역에서 유리한 위치를 점하게 되자 이란은 내내 거부해오던 국제연합(UN)의 휴전중재안을 받아들였다. /브리태니커 

 

 

 

이미지를 클릭하면 원본을 보실 수 있습니다.


1975 - 민방위대 발대식 전국에서 시작

민방위대 조직 연혁

1975년 7월 25일 민방위 기본법이 제정되었으며 동년 8월 22일 민방위 기본법시행령이 제정 공포됨에 따라 동년 8월 26일 중앙과 지방에 민방위기구가 설치되었으며, 동년 8월 26일 부터 9월 15일까지 민방위대를 편성하여 동년 9월 22일 민방위대가 발대되었습니다. /장흥군 민방위소식

www.jangheung.go.kr 

 

 

 

이미지를 클릭하면 원본을 보실 수 있습니다.


1969 - 멕시코 대통령 로페스 마테오스(Lopez Mateos, Adolfo) 사망

마테오스 [Lopez Mateos, Adolfo, 1910.5.26~1969.9.22]

아티사판 출생. 국립대학에서 법학을 배우고 멕시코주 주지사 비서를 거쳐 국민혁명당(PNR) 당수의 비서가 되었다. 1946년 상원의원, 유네스코의 멕시코 대표가 되었고, 1957년 입헌혁명당(PRI)의 대통령후보에 선출되어 1958년 대통령이 되었다. 쿠바혁명의 영향에 의한 국내의 좌우대립 속에서 인플레이션 문제, 토지개혁을 다루어 대통령 카르데나스 이후의 역대 대통령 중에서 정치적으로 가장 성공한 사람으로 알려져 있다. 1963년 미국과의 엘 차미사르 영토문제를 유리하게 해결하였다. /naver 

 

 

 

이미지를 클릭하면 원본을 보실 수 있습니다.

 

이미지를 클릭하면 원본을 보실 수 있습니다.

 

이미지를 클릭하면 원본을 보실 수 있습니다.

 

- Egypt 1 (Banknote)                                      통화 : 이집트 파운드(£E)


1968 - 이집트 <아부심벨 신전> 이전공사 완료

고대 이집트 제19왕조의 람세스 2세(재위 BC 1301∼BC 1235)가 건축한 신전 유적지. 아스완댐의 상류 약 280㎞ 지점인 나일강 기슭에 있다. 신전은 왕 자신을 위한 대신전과, 왕비 네페르타리를 위한 소신전으로 이루어져 있다. 모두 바위 속에 구축한 암굴신전인데 기자(Giza)의 피라미드와 맞먹는 큰 건조물이다. 대신전의 정면은 높이 33m, 너비 38m, 안길이 63m에 달한다. 정면에는 4체(四體)의 왕의 의좌상(椅坐像)이 있는데, 그 높이는 모두 20m이다. 중앙에 태양신 라 호라크티의 상이 안치되어 있고, 상부에는 태양을 예배하는 동물 개코원숭이 무리를 새겼다. 안으로 들어가면 먼저 너비 16.7m, 안길이 18m의 제1실이 있는데, 이곳에는 높이 10m인 오시리스 신을 본뜬 람세스상이 8체 있고, 벽면을 모두 덮는 그림과 문자들은 왕의 카데슈싸움의 경과에 대한 자세한 기록이다. 카데슈는 시리아 땅이며, 람세스 2세 군대와 히타이트군의 결전장이었는데, 기록에는 이집트군의 승리를 자랑스럽게 서술하고 있다. 미국의 이집트학자 J. 브레스테드가 <아르신전은 역사의 보고(寶庫)이다>라고 한 것은 이 기록이 있기 때문이다. 제1실에 연결하여 좌우로 8실의 창고를 만들었다. 제2실은 너비 7.7m, 안길이 11.2m이며, 천장은 신상을 본뜬 4개의 기둥으로 떠받쳐 있다. 벽면 그림은 종교의식을 묘사하였다. 제3실은 너비 7.7m, 안길이 3.2m이며, 화면 내용은 제2실과 같다. 제4실은 지성소(至聖所)이며, 너비 4m, 안길이 7m이며, 제단에 4체 신상이 있는데, 신이 된 람세스 2세 자신과 라호라크티, 아모레, 프타하이다. 1년에 2회, 즉 2월 20일 무렵과 10월 20일 무렵 해돋이빛이 이 지성소를 넓게 비추어서 오른쪽 끝의 1체를 제외하고 3체의 신상을 떠오르게 한다. 소신전은 대신전 북쪽 약 200m 떨어진 곳에 있다. 정면에 높이 10m인 6체의 거상(巨像)이 있는데, 왕비 외에 왕과 여신을 나타낸다. 안길이는 약 20m이며, 방이 3개 있고 벽면에 그려진 것은 종교적인 그림과 글뿐이다. 1958년 구체화된 이집트의 아스완하이댐 건설계획으로 이 신전들 외에 여러 유적이 있는 누비아지방이 수몰될 위기에 놓이자, 유엔교육과학문화기구(UNESCO)는 이집트정부와 수단정부의 요청을 받고 1960년 누비아유적 구제를 위한 세계적 캠페인을 시작하였다. 구제의 최대목표물은 아부심벨 신전이었다. 세계 여러 국가와 민간으로부터 기금이 갹출되고 여러 가지 구제안 가운데 스웨덴기술사단의 해체·이축안(移築案)이 채택되어, 스웨덴·이집트·독일·이탈리아·프랑스의 회사가 공동회사를 조직하여 1963년에 착공하였다. 1968년 두 신전은 원위치에서 63m 높은 120m 서쪽 지점에 옮겨 세웠다. /yahoo

 

 

 

이미지를 클릭하면 원본을 보실 수 있습니다.


1964 - 한국의 월남군사원조단(의료대) 140명 사이공 도착

최초의 한국군 월남파병은 1964년 9월 제1이동외과병원 병력 130명과 태권도 교관 10명의 파견으로 시작되었다. 이후 브라운 주미대사와 베트남 정부의 지원 요청을 받고, 1965년 1월 26일 국회의 동의를 얻어 1965년 2월 비둘기부대로 명명된 2,000여 명의 후방 군사원조지원단의 파병으로 본격화되었다.

전투부대의 파병은 1965년 7월 2일 결정되어 10월 9일 해병 청룡부대가, 10월 22일 육군 맹호부대가 베트남에 상륙하여 미국으로부터 전술책임지역을 인수받았다. 이외에도 군수지원부대인 십자성부대, 군수물자수송을 담당한 백구부대 등이 파병되었다. 1966년 미국의 전투부대 추가파병 요청에 의해 국회의 논의를 거쳐 4월 16일 혜산진부대가, 8월 15일 백마부대가 베트남에 상륙했다. 이로써 한국은 미국 다음으로 많은 병력을 파병하여 월남파병 국군은 4만 8,000여 명에 이르렀다. /naver
 

 

 

이미지를 클릭하면 원본을 보실 수 있습니다.

 

1962 - 네루 인도 총리, 프랑스 방문
1947년 인도가 영국으로부터 독립하면서 초대 총리겸 외무장관이 된 네루!
1962년 오늘 프랑스를 방문한다.
네루는 드골 프랑스 대통령과 엘리제궁에서 두 나라 사이의 현안을 논의하고 우호관계를 재확인한다.
아시아 여러 국가의 연대 강화, 미·소 어느 진영에도 가담하지 않는 비동맹주의와 균형외교는 네루가 인도 독립 이래 변함 없이 편 외교정책이었다. /YTN

 

  

 

이미지를 클릭하면 원본을 보실 수 있습니다.

- First Anniv. of Independence
 

1960 - 말리 독립

4-13세기에는 가나왕국이 지배하였으며 13-15세기에는 회교권의 말리 왕국이 15-16세기에는 송하이 왕국이 각각 이 지역에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었다. 송하이 왕국이 니제를 강 연안의 교역도시 팀북투를 중심으로 번성하였으나, 1591년 모로코에 의해 멸망하면서 17세기 중엽까지 모로코의 지배를 받았다. 그 후 세구와 카르타에서 밤바라족 왕국이 건설 되었으나 19세기중엽, 프랑스의 침략으로 식민화가 시작되었다. 1850~1864년에 투쿨로르 족의 회교도 알마르 우마르가, 1872∼1895년에는 말링케족의 사모리 투레가 프랑스군에 저항했으나 프랑스는 1880-1895년 두 세력을 정복하여 1920년 서아프리카 프랑스 수단으로 합병 식민화하였다. 니제르강 유역과 현재의 부루키나파소는 각각 1911년과 1919년에 프랑스 수단에서 탈퇴, 독자적인 국가를 세웠다. 이 들은 프랑스의 기본법에 의해 자치가 인정되어 1958년 11월 프랑스 식민지에서 공동체 공화국이 되었다. 1960년 8월5일 어퍼볼타로 독립하였으며, 1959년 세네갈과 연방을 구성한 말리는 1960년 9월 22일 연방을 해체하고 독립을 한다. 초대 대통령에선출된 모디보 케이타는 사회주의 일당제의 강력한 지도력을 행사하였으나, 1968년 11월 군사 쿠데타로 추방되어, 트라오레를 위원장으로 하는 군사해방 위원회가 10여 년에 걸쳐 정권을 장악하였다. 1979년 6월 민정이양 후에도 트라오레가 계속 대통령에 유임하였으나 1991년 3월 군부가 트라오레 정부를 몰아내고, 1992년 4월 알파 우나르 코나레가 대통령이 되었다.2000년 5월 초에 말리의 대통령이 양국의 우호 증진 및 경제협력 등의 일환으로 방한 계획을 추진하였으나 말리 국내 사정상 방문을 하지 못하였다. /EXODUS (말리의 역사)

www.koreabound.com 

 

 

 

이미지를 클릭하면 원본을 보실 수 있습니다.


1955 - 충주비료공장 기공

제2차 세계대전 후, 한국에서 질소 비료를 제조하기 위하여 연간 4,000M/T급의 충주비료공장 건설계약을 체결한 것이 1955년 5월이었다. 1958년 4월 준공 예정이었으나 건설을 담당한 맥그로하드로카본사()와의 분규()로 1959년 10월 시운전 단계에 들어가 1961년 4월 준공하였다. 1963년부터는 요소 연산 8만 5000M/T 을 초과생산하는 실적을 기록하고 있다. 두 번째 요소공장은 호남비료공장으로 1954년 10월 건설계약을 체결하고 준공한 것은 1962년 12월이었다. 이 공장의 특색은 충주비료공장이 중유를 사용하는 데 대하여 무연탄을 사용하도록 하였다는 점이다. 그러나 가스화용탄의 공급이 원활하지 못해서 나프타가스화 시설을 추가한 것이 1968년이었다. ... /naver 

 

 

 

이미지를 클릭하면 원본을 보실 수 있습니다.


1941 - 드골, 자유프랑스 국민위원회 조직

1940년 6월 16일 프랑스 정부는 합헌적인 절차에 의해 필리프 페탱 원수에게 인계되었는데, 페탱은 이미 독일과 휴전협정을 맺어야 한다고 결심한 상태였다. 2일 후인 6월 18일 프랑스군의 한 장교인 샤를 드골 장군은 런던에서 라디오 방송으로 프랑스가 계속 싸울 것을 호소했다. 영국측의 조심스러운 지원하에 드골은 영국에 주둔한 프랑스군을 중심으로 전쟁 발발 전부터 영국에 거류하던 프壕?교민 지원자들과 프랑스 해군 부대들을 모아 자유 프랑스군을 단계적으로 증강했다. 1940년 8월 아프리카의 3개 프랑스 영토인 차드·카메룬·무아앵콩고가 드골의 자유 프랑스 편으로 모였으며, 9월에는 인도와 태평양의 프랑스 식민지들이 그뒤를 따랐다. 1940년 9월 자유 프랑스의 다카르 원정군이 자유 프랑스에 대한 세네갈의 즉각적인 지지를 얻는 데 실패했지만, 드골은 그해 10월 제국 국방회의를 신설했다.

조르주 카트루 장군이 지휘하는 자유 프랑스군이 1941년 6~7월에 영국이 주도하는 시리아 작전에 참가했다. 그 작전은 페탱이 비시에서 수립한 정부에 충성하는 프랑스군을 상대로 싸우는 것이었다. 9월에 드골은 망명정부인 프랑스 국민위원회를 창설했다.

자유 프랑스군은 비시 정부에 의해 반군으로 매도되었다. 또한 프랑스의 많은 좌익주의자들은 드골의 권위주의적인 성격을 싫어했으며, 영국은 드골이 프랑스의 위신이나 프랑스 주권의 화신이라는 자신의 지위에 영향을 미치는 문제들에 관해 비타협적인 태도를 취해 골치를 앓았다. 비시 정부와 외교 관계를 지속하고 있던 미국의 프랭클린 D. 루스벨트 대통령은 1941년 12월 자유 프랑스의 해군이 명목상 비시 정부가 통치권을 물려받은 뉴펀들랜드 근해의 생피에르 섬과 미클롱 섬을 점령한 데 기분이 상했다. 그때는 마침 미국이 아직 비시 정부의 프랑스는 적국으로 삼지 않고 추축국들을 상대로 전쟁에 돌입한 달이었다. 영국과 자유 프랑스 사이의 긴장상태는 자유 프랑스가 런던과 프랑스 국내에 있는 애국적인 레지스탕스의 수많은 항독(抗獨) 단체들 사이의 모든 비밀관계를 독점할 권리가 있는 듯한 태도를 취해 고조되었다. 레지스탕스와의 유대를 과시하기 위해서 드골의 운동조직의 명칭이 1942년 7월 14일자로 전투 프랑스군(Forces Françaises Combattantes/FFC)으로 바뀌었다. /naver

 

 

 

이미지를 클릭하면 원본을 보실 수 있습니다.


1937 - 중국 제2차 국공합작 성립
1937년 9월 22일 중국의 국민당과 공산당 간에 제2차 국공합작이 성립되었다. 1924~27년에 이미 제1차 국공합작이 있었다. 그러나 장제스[蔣介石]는 개인 자격으로 입당한 중국공산당원들의 세력 확장을 우려해 홍군을 공격했다. 홍군은 정부군의 공세에 밀려 장정에 나섰다. 산시[陜西] 북부지역으로 옮겨간 공산당은 거국적인 항일 여론에 힘입어 항일을 호소하는 8·1선언(1935)을 발표하고 국민당에 제휴를 제안했다. 1936년에는 시안 사건[西安事件]이 일어나 장제스가 부하인 동북군 사령관 장쉐량[張學良]의 군대에 체포·연금되었다. 장제스는 내전을 중지하고 공산당과의 거국 통일전선을 수립하라는 장쉐량의 요구를 받아들인 후에야 풀려날 수 있었다. 이를 계기로 국·공 간의 내전이 중지되었고, 양당의 담판 끝에 합작이 성립되었다. 제2차 국공합작으로 국민당 정부는 공산당의 합법적 지위를 인정했다. 한편 공산당은 이 기간 동안 기반을 공고히 함으로써 궁극적으로 중화인민공화국을 수립할 수 있게 되었다. /브리태니커

 

 

 

이미지를 클릭하면 원본을 보실 수 있습니다.


1918 - 반나치 저항조직 '백장미'의 한스 숄(Scholl, Hans) 출생

숄 [Scholl, Hans, 1918.9.22~1943.2.22]

나치 독일 시대 뮌헨대학 학생이었던 조피 숄(Scholl, Sophie, 1921~1943)은 오빠 한스 숄(Scholl, Hans, 1918~1943) 및 동료들과 함께  ‘백장미(Die weisse Rose)’라는 반나치 저항조직에서 활동했는데, 1943년 2월18일 오빠와 함께 체포돼 4일 뒤 처형당했다. 조피는 21살, 한스는 24살이었다.

백장미 저항운동이란 제2차 세계대전중이던 1942년 6월 익명의 유인물이 뮌헨지역의 불특정 시민들에게 우송됐다. “무책임한 어두운 충동에 몸을 맡긴 지배자 무리들에게 저항도 하지 않고 통치를 허용할만큼 문화민족에게 어울리지 않는 일은 없다.” 다른 사람이 시작하기를 기다려서는 안된다. “파시즘이나 그와 유사한 모든 절대국가 조직”에 대해 할 수 있는 한 저항을 해야 한다.- <백장미 통신>이라 이름붙인 유인물은 나치의 전쟁수행정책에 대한 ‘소극적 저항’(비폭력불복종)을 촉구했다.

 <백장미 통신> 제1호는 뮌헨대학 의학부 학생 한스 숄과 알렉산더 슈모렐이 썼다. 제4호까지 냈을 때 그들은 동부전선에 동원돼 전장의 무참한 현실과 유대인 학살 등을 직접 체험한 뒤 더욱 저항 신념을 굳혔다. 1942년 11월에 전선에서 돌아온 그들은 동지들을 늘리는 한편 베를린이나 다른 지역 저항그룹들과 서로 연락을 취했다. 1943년 2월 스탈린그라드에서 독일군이 패배한 사실을 안 그들은 <백장미 통신> 제6호를 만들었다. 제6호는 “남녀학생 여러분, 우리 민족은 스탈린그라드 괴멸에 떨고 있다”라는 문장으로 시작해 “우리 민족은 국가사회주의(나치즘)의 유럽 노예화에 저항하고 자유와 명예의 새로운 신념으로 가득찬 진군을 시작하려 한다”고 끝맺고 있다. 학생들과 함께한 쿠르트 후버 교수가 썼다. 최후의 통신이 된 제6호를 조피와 한스는 대학 구내에 배포하다가 대학 직원의 고발로 현장에서 체포됐다. 2월22일 열린 민족재판소는 조피와 한스, 크리스툴 프로프스트 등 3명에게 사형을 선고했다. 그 뒤 관련자 체포가 잇따라 43년 4월의 제2차 재판에서는 후버 교수, 알렉산더 슈모렐, 빌리 그라프 3명에게도 사형이 선고됐다. 백장미 그룹에 대한 재판은 1944년 10월까지 다섯차례에 걸쳐 모두 14명에게 유죄판결을 내렸다. 나치 지배하의 독일에서 게슈타포의 심문을 받은 시민은 100만명을 넘는다. 민족재판소는 ‘국가반역죄’를 처리할 목적으로 1934년에 설립됐는데, 패전까지 5200건의 사형판결을 내렸다. 백장미는 비좌익계 저항운동을 대표하는 사례였다고 할 수 있다. ...

(서경식/도쿄경제대학 교수 I 심야통신/백장미의 기도) /한겨레 2006-02-16

 

 

 

이미지를 클릭하면 원본을 보실 수 있습니다.

- Scene from 'Le Grand

 Meaulnes'

 

1914 - 프랑스의 시인, 소설가 알랭 푸르니에(Alain-Fournier, Henri) 사망

알랭 푸르니에 [Alain-Fournier, Henri, 1886.10.3~1914.9.22]

셰르주() 출생. 시골의 소학교 교사의 아들로 태어나 행복한 소년시절을 보내고 파리의 리세(고등중학교)에 진학하여, 거기서 급우 J.리비에르(후에 평론가)와 사귀어 평생의 친교를 맺었다. 고등사범학교 재학 중에 군에 소집되었고, 제대 후 곧 문필생활을 시작하였다. 1905년에는 한때 런던 근처에서 일하였고, 1910년에는 《Paris Journal》지()의 문예란을 담당하고, 또 여러 잡지에 평론을 기고하며, 시인·평론가인 C.P.페기와도 친교를 맺었다.
1913년 《NRF》지()에 소설 《몬대장 Le Grand Meaulnes》을 발표하여 유명해졌다. 이것은 아름다운 전원을 배경으로, 청년의 사랑과 모험으로의 동경을 추억 속에 그린 청춘문학이다. 1914년 제1차 세계대전에 출정하여, 베르댕 근처의 생 레미 숲의 전투에서 부상하여 행방불명되었다. 시·평론 등의 유고집 《기적 Miracles》(1924), 친구 리비에르와의 1905∼1914년에 걸친 《서신 왕래 Correspondance》(4권, 1926)와 《가족에의 편지》 등을 남겼다. /naver 

 

 

 

이미지를 클릭하면 원본을 보실 수 있습니다.

- German U-Boat

 

1914 - 영국 순양함 3척 독일 잠수함에 피격, 400명 사망

1914년부터 시작된 세계 제1차 세계대전은 1918년 독일이 강화를 조건으로 항복할 때까지 해상에서는 잠수함의 전략, 전술적 운용이 처음으로 적용되어 전쟁의 승패를 결정짓는 핵심 전력으로서 미래 잠수함 전략 전개에 결정적인 단서를 제공하는 계기가 되었다. 잠수함은 그때까지 개발된 디젤/전기추진방식의 확립과 미국-영국의 주 보급로인 대서양을 주 전장으로 하였다.  독일 해군의 우수한 유보트 잠수함의 건조와 전술적 운용 등을 기반으로 독일은 영국의 보급로를 차단하기 위하여 대서양에서의 무제한 잠수함전을 전개하였다.  결과로 영국의 전함 4척(Formidable, Dreadnought, Triumph, Majestic)과 순양함 5척(Pathfinder, Abouker, Cressy, Hogue, Hawke)을 포함하여 민간, 군함정 5,000여척이 침몰되고 15,000여명의 인명 손실이 발생하므로서 막대한 피해를 당하게되었다. 독일측에서도  유보트는 개전 초기에는 20여척의 소규모였으나 전쟁 중 345척이 건조되어 작전에 참여하였으며, 유보트도 178척이 침몰, 파괴되어 13,000여명의 잠수함 관련 요원 등 5,000여명의 인명 손실을 가져왔다. (송광섭/잠수함전의 역사) /월간조선 /Google

 

U보트 [U-boat]

제1 ·2차 세계대전 때 대서양 ·태평양에서 활동한 독일의 중형 잠수함. 대량 생산이 가능하였고, 무음() ·급속 잠항능력이 뛰어났다. 제1차 세계대전 초기 영국 장갑순양함 3척을 격침하여 알려졌고, 또한 군함 ·상선을 구별하지 않고 무차별 공격하여, 한때 영국을 궁지에 몰아넣었다.
독일은 1919년 ‘베르사유조약’으로 잠수함의 건조가 금지되었으나 나치스의 재군비에 따라서 건조를 재개하였다. 두 번의 세계대전을 통해서 1,158척을 건조하여, 연합군의 군함 ·상선 5,150척(총톤수 2157만 726t)을 격침시켰다. 이중에는 전함 ·항공모함 ·구축함도 포함된다. 제1차 세계대전 때는 200∼300t이었으나, 제2차 세계대전 말기에는 1,000t 이상의 것도 출현하였다. 제2차 세계대전 때 주력이었던 U7형은 수상배수량 790t, 속력 17kn, 항속거리 1만 2000km이며, 어뢰발사관 5기를 장비하고 있었다. /naver

 

 
1885 - 오스트레일리아의 정치가, 노동당수 치플리(Chifley, Joseph Benedict) 출생

 

  

1862 - 링컨 미국 대통령 '노예해방 예비선언' 발표

 


1792 - 프랑스 국민공회, 왕정 폐지하고 공화정 선포

 

  

1791 - 영국의 물리학자, 화학자 패러데이(Faraday, Michael) 출생



1515 - 잉글랜드 왕 헨리 8세의 4번째 아내 앤(Anne of Cleves) 출생

 

--------------------------------------------------------------------

 

 

 

- 화상이 창안하여 2004년 4월부터 매일 연재하고 있는 [우표로 본 오늘의 인물과 역사]는 세계최초의 <우표를 이용한 매일역사연재물>입니다. 수집한 우표를 이용하여 오로지 취미와 교육적 목적으로 만들고 있지만, 자료의 충실을 기하느라 본의 아니게 저작권에 저촉되는 일이 생길까 염려하고 있습니다. 혹시 문제가 있으면 미리 알려주셔서 고칠 수 있는 기회를 주시면 고맙겠습니다. ^.@)

 








  











 

 
다음검색
현재 게시글 추가 기능 열기
  • 북마크
  • 공유하기
  • 신고하기

댓글

댓글 리스트
맨위로

카페 검색

카페 검색어 입력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