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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크랩] 박정희가 독립운동가에게 무슨존재였는지 보이는 사진

작성자로뎅21c|작성시간14.01.09|조회수13,615 목록 댓글 2

 

 

 

고 김창숙 선생은 독립운동을 하다 체포된 후 일본 경찰의 고문으로 앉은뱅이가 되신 분이다.

그 분이 아무에게도 보살핌도 받지 못한채 병원 골방에서 쓸쓸히 생을 마감하는 자리에


5.16 쿠데타 직후 독립운동가들의 지지를 얻으려했던일본 관동군 출신 박정희가 나타났다.


그러자 당시 김창숙 선생은 박정희를 쳐다보지도 않고 돌아누웠다고한다.





+ 추가


사진 한장에 대한 설명이 필요하다는 의견이 있어서 기사로도 가지고옴



http://www.ohmynews.com/NWS_Web/View/at_pg.aspx?CNTN_CD=A0000323553


심산 김창숙은 박정희 보고 돌아누웠는데...

박근혜 대표의 성대 특강은 '모욕'
심산 김창숙은 모든 성균관대 구성원들의 존경을 받는 인물이므로, 과연 김창숙이라면 박근혜 한나라당 대표의 성균관대 특강을 어떻게 바라보았을지 한번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

김창숙이라면 박근혜 대표 초청했을까

양반지주 출신의 유학자인 김창숙(1879~1962년)은 명문가의 안락한 삶을 스스로 저버리고 항일투사로 나서 일평생을 기구하게 살다간 '지조파 선비'다. 그는 을사늑약 당시에는 청참오적소(請斬五賊疏, 을사오적을 참형에 처할 것을 청원하는 상소)를 올린 바 있고, 1925·1926년에는 2차례의 '유림단 사건'과 '나석주 폭탄 투척 사건' 등을 주도한 바 있다. 그리고 쑨원(손문) 등이 한국독립후원회·중한호조회 등을 설립하도록 하는 데도 영향력을 행사했다.

1927년 일경(日警)에 체포되어 고문과 심문의 후유증으로 두 다리가 마비되어 형집행정지로 풀려났다가, 일제 패망 직전 다시 체포되어 고향인 성주에서 서울로 압송되던 중에 8·15를 맞이하게 되었다. 해방 후에는 이승만에 맞서 남한 단독선거 반대운동을 벌였지만, 지조와 절개를 중시하는 선비 출신인지라 정계에 적응하지 못하고 곧 은퇴하고 말았다.

정치에서 손을 뗀 후로는 전국 유림(儒林)을 재조직하고 성균관 및 성균관대학교를 중흥하는 등 교육 사업에 매진했다. 한때 성균관대 총장도 지냈지만, 학교에서 물러난 후에는 집 한 칸 없는 궁핍한 생활 속에 여관과 병원을 전전하는 신세로 전락하고 말았다.

김창숙을 찾아온 '아주 특별한 손님'

그런데 김창숙이 병원 침상에 누워 있던 어느 날, '아주 특별한 손님' 하나가 병문안을 왔다. 그 얼마 전에 쿠데타에 성공한 박정희가 사회 지도층들의 지지를 얻기 위하여 직접 병문안을 온 것이다.

최고권력자가 찾아왔으니 아무리 몸이 아프더라도 일어나는 흉내라도 내야 할 텐데, 심산은 그렇게 하지 않았다. 박정희가 병실 문을 열고 들어오자, 김창숙은 벽을 향해 몸을 홱 돌리며 박정희를 외면했다.

그가 박정희를 냉대한 이유는 아주 간단하다. 일본군 장교 출신과 마주앉아 이야기를 나눌 수 없었기 때문이다. 옳지 않은 것 앞에서는 한 치의 타협도 할 수 없다는 꼿꼿한 선비 정신의 표현이었던 것이다. 그에게는 박정희 허리춤에 있던 권총보다도 민족과 양심이 더 두려웠던 것이다.



+

추가 2


이런걸 데자뷰라고 하는건가? 아님 부전자전이라고 하는건가?

 

 

 

출처:다음카페 돌무치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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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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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작성자정진빈 작성시간 14.01.09 잘 보았읍니다. 고맙습니다.
  • 작성자냉 정 작성시간 14.01.10 잘 읽었습니다.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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