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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태욱의 원고

루소와 프랑스 혁명

작성자정태욱|작성시간11.02.13|조회수2,207 목록 댓글 0

앞의 로크에 대한 글과 마찬가지로, 안산지청, 법철학연구 검사 모임에서 발표하였던 원고를 조금 수정한 글입니다. 


루소와 프랑스 혁명

정태욱(인하대)

I. 머리말


로크와 루소, 영국과 프랑스를 대표하는 Liberalism과 민주주의의 사상가, 오늘날 세계의 자유민주적 헌정질서는 그들의 사상에 큰 빚을 지고 있습니다. 실제로 로크와 루소는 근대를 여는 시민혁명의 주요 인물들이었습니다. 지난 시간에 보았듯이, 로크는 영국 명예혁명에 직접 참여하였고, 루소는 혁명의 사상적 기초를 닦았다고 할 수 있습니다. 프랑스 혁명의 여러 주역들은 루소를 혁명의 선지자로, 그들의 멘토로 삼았습니다. 하지만, 루소는 혁명 전에 이미 죽었고, 따라서 그가 프랑스 혁명에 어떤 영향을 끼쳤는지 정확히 알기는 어렵습니다.

루소는 생전에는 체제 비판의 계몽주의 그룹에 속하였지만, 계몽주의의 주류였던 볼테르 등과 불화(不和)하였으며, 사후에는 프랑스 혁명기의 사상가 콩도르세에게 깊은 영향을 주었고, 콩도르세를 처형시킨 공포정치의 지도자 로베스피에르에 의하여도 숭배되었으며, 이후 로베스피에르가 단두대에서 죽임을 당한 후(‘테르미도르의 반동’)에도 여전히 혁명의 위인으로 추앙되어 그 유해가 ‘팡테옹’에 안장되었습니다. 같이 팡테옹에 안장된 볼테르와는 거의 구제불능의 갈등관계에 있었고, 또 혁명기에 서로 적대하며 죽고 죽임을 당하였던 혁명의 주역들이 서로 루소를 숭앙하였던 것입니다. 이를 어떻게 설명할 수 있을까요?

루소 이해의 어려움 혹은 상반되는 평가는 어쩌면 프랑스 혁명의 성격 자체에서 연유하는지도 모릅니다. 영국 명예혁명이 단순 명료하였던 데 반하여 프랑스 혁명은 그 진폭이 마치 롤러코스터와 같이 변화무쌍하였으며, 그 우여곡절의 여진은 거의 100년 가까이 진행되었다고 할 수 있습니다. 마찬가지로 루소의 사상도 매우 급진적이면서도 모호한 부분들이 많이 있습니다.


II. 루소와 프랑스 혁명


1.혁명 전야의 루소


우선적으로 지적할 부분은 루소가 프랑스 혁명정부로부터 추앙을 받았다고 하여, 루소가 직접적으로 혁명의 이념을 전파한 것은 아니라는 점입니다. 루소는 혁명 발발 10년 전에 이미 사망하였고, 혁명을 예감하지도 못하였습니다. 루소는 어떤 정파, 조직에도 속하지 않고 혼자 ‘고독한 산책자’로 남았으며, 그의 저서에 혁명에 대한 선전선동의 구절은 찾을 수 없습니다.

루소는 군주제를 좋지 않게 생각했고, 실제로 유럽에서 군주제가 오래 지속하리라고 보지도 않았습니다. 그리고 당대 전제주의와 사회의 부정의에 대한 가장 통렬한 비판자였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어떤 정치적 혁명을 촉구하는 것이라기보다 보다 넓은 의미의 문명비판, 인간적 덕성의 타락에 대한 개탄에 가까웠다고 할 수 있습니다. 루소의 문장이 특권계급에 대한 깊은 불신과 민중계급에 대한 깊은 연민으로 점철되어 있지만, 루소 생전에 그의 주적이라고 한다면, 그것은 바로 볼테르, 달랑베르 등 오히려, 루소 자신도 포함되는 체제 비판의 계몽주의 지식인들이었습니다.

또한 루소는 그의 작품들이 금서로 지정되고 체포령이 떨어져 이리저리 전전하면서 자신에 대한 핍박의 국제적 음모가 진행되고 있다는 피해망상에 시달렸지만, 그가 예컨대 마르크스나 레닌과 같은 체제 전복의 정치 전략을 도모한 바는 전혀 없습니다. 실제 혁명을 촉발한 것은 루소의 <사회계약론> 같은 계몽주의 체제 비판가들의 저서들이 아니라 당시 민중들 사이에서 퍼져나간 황색잡지들, 특히 루이 16세와 왕비 마리 앙투아네트에 대한 신랄한 외설적 표현들이었다고 합니다.

루소의 저작 가운데 혁명의 성전(聖典)으로 상찬된 <사회계약론>의 판매는 미미하였는데 반하여, <쥘리, 혹은 신(新)엘로이즈>라는 낭만, 애정 소설은 자그마치 70판을 거듭하면서 당시 유럽 전체에서 공전의 베스트셀러가 되었습니다. 혁명 전까지 루소는 소설가, 문필가, 그리고 교육사상가, 음악가, 식물애호가였지 혁명의 사상가라고 하기는 어려웠던 것입니다.

그리하여 ‘루소가 프랑스 혁명을 초대한 것이 아니라 프랑스 혁명이 루소를 찾아갔다’고 말할 수 있을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러나 혁명이 아무나 찾아가지는 않을 것입니다. 혁명이 루소를 찾은 이유, 루소가 혁명의 위인으로, 루소의 저서들이 혁명의 고전으로 상찬되는 이유가 있을 것이며, 그것이 바로 오늘 발표의 주제입니다. 그를 위해서 먼저 프랑스 혁명 당시 루소의 사상이 어떻게 반영되었으며, 또 어떻게 추앙되었는지 구체적으로 알아보고, 이어서 루소의 법/정치 사상에 대한 논란에 대하여도 언급해 보고자 합니다.


2.혁명의 전개과정


본론에 들어가기 전에 먼저 프랑스 혁명의 전개과정을 간단히 보겠습니다. 주지하듯이 프랑스 혁명은 당시 국가 재정상황을 어떻게 해결할 도리가 없었던 루이 16세가 어떤 도움을 보고자 3부회를 소집한 데에서 발단하였습니다. 1789년 3부회가 소집되면서 콩도르세, 로베스피에르 등 루소를 숭앙하며, 혁명기의 주요한 인물로 부상하는 이들이 각 지역에서 평민(제3신분) 대표로 정계에 진출하게 됩니다.

3부회는 순조롭게 진행되지 못하였고, 마침내 구체제의 모순에 격앙된 제3신분 대표들, 그리고 일부 성직자, 귀족 대표들까지 합세하여 ‘제3신분이 프랑스 전체 인민을 대표한다’는 선언을 합니다. 그리고 바로 이어 민중봉기가 일어났고, 바스티유 감옥이 습격을 받게 됩니다. 프랑스 혁명이 발발한 것입니다. 이후 혁명세력, 즉 국민의회(제헌의회)는 혁명의 대의를 천명하는 ‘인권 선언’을 발표하고, 봉건제(귀족의 특권, 평민의 부담)의 폐지를 선언하고, 가톨릭을 ‘시민 종교’(국법에 의하여 통제되는)로 변화시킵니다.

그러나 새로 소집된 입법의회의 구성에 있어 선거권은 이른바 ‘수동적 시민’에게는 부여되지 않게 됩니다. 피선거권은 더욱 제한적이었습니다. 이러한 유산자 중심의 온건한 혁명, 인민의 자유와 평등을 말하되 자유권적 기본권에 치중하고, 전제주의에 반대하지만 입헌군주제로 만족하려는 시기를 혁명의 제1단계로 말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혁명은 그에 머물지 않게 됩니다. 한편으로 왕과 귀족계급의 상실감과 적개심은 점점 커지고, 성직자들 그리고 근왕(勤王)적이고 가톨릭에 충실한 인민들의 혁명에 대한 거부감도 심화됩니다. 다른 한편으로 구체제의 권력자들이 대대적인 복수를 할 것이라는 공포감, 유언비어가 만연하게 됩니다. 그에 따라 전국적으로 인민들의 저항의지도 강화되고 파리에서는 혁명을 수호하려는 급진적 정치세력(자코뱅 클럽도 그 중의 하나임.)들이 생겨나게 됩니다. 게다가 물가는 폭등하고 생필품은 매점매석 등으로 부족하게 되는 등 사회경제가 불안정 속으로 빠져듭니다. 때마침 왕과 왕비는 주위의 군주국과 내통하여 탈주를 시도하다 잡혀오게 되고(‘군주제의 장송행렬’), 오스트리아와 프로이센은 프랑스 인민들에게 군주를 위해할 경우 좌시하지 않겠다는 협박을 합니다(‘필니츠 선언’).

이렇게 하여 프랑스 혁명은 내란과 외환이라는 비극적 폭풍우 속으로 들어가게 됩니다. 프랑스 인민들은 ‘조국의 위기’를 선언하고, ‘공화국’을 외쳤으며, 혁명 지도부는 총동원령을 내리고 안팎의 혁명전쟁에 나서게 됩니다. 마침내 1792년 의회는 ‘왕권의 정지’를 선언하고, 보통선거에 의한 새로운 의회의 소집을 결의합니다. ‘공화국’이 탄생한 것입니다. 그리고 ‘라 마르세이즈’(현재까지 프랑스의 국가임.)를 부르며 전장에 나간 프랑스 국민군은 ‘발미전투’에서 프로이센의 군대를 막아냅니다(괴테는 이를 ‘세계사의 전환점’이라고 표현하였습니다.). 혁명 제1단계를 지도하였던 라파예트 장군은 오스트리아로 망명을 떠나고, 루이 16세와 왕비 마리 앙투아네트는 공화국의 적으로 규정되어 처형됩니다.

이렇게 혁명은 전혀 새로운 제2단계로 나아갔고, 로베스피에르 지도하에 내란과 외환의 위기를 극복해 냅니다. 이 제2단계 혁명의 성격은 로베스피에르가 1793년에 제안한 새로운 인권선언, 즉 1789년의 인권선언을 보충하는 인권선언에 잘 표현되어 있습니다. 이 선언은 의회 중심의 국민주권에서 모든 국민의 인민주권으로, 제한민주주의에서 보통민주주의로 나아가는 것이었고, 자유권만이 아니라 사회권도 동등하게 중시하는, 소유권의 신성불가침에서 소유권의 사회적 제약을 강조하는 것이었습니다. 나아가 로베스피에르는 인류사의 새로운 이상국가의 건설이라는 사명감을 가지고, 인민들의 도덕성이 함양되고 풍속이 순화되는 ‘덕의 공화국’과 ‘시민종교’를 추진합니다.

그러나 혁명을 구하고 조국을 지키는 일은 쉽지 않았습니다. 혁명의 제2단계는 동시에 ‘공포의 시대’였습니다. 파리의 혁명재판소에서는 매일 수많은 사람들이 단두대에서 목이 잘렸고, 지방에 파견된 방자한 공안위원들에 의한 학살은 더욱 끔찍한 것이었습니다. 민심은 이반하였고, 최고존재의 숭배 의식으로 국민정신을 고양하려던 로베스피에르는 그 자신이 ‘최고존재’가 되려 한다는 공격을 받으며 단두대에서 처형당하게 됩니다(테르미도르 반동).

이렇게 하여 혁명에 대한 인민들의 열정과 자발적 의지는 희석되고 잦아들면서 프랑스 혁명은 더 이상 진전되지 못하고, 오히려 제1단계에서 이룬 성과를 지키는 것조차 벅차게 됩니다. 그리하여 결국 테르미도르 파는 장군, 곧 나폴레옹에 의지하게 됩니다. 프랑스 혁명은 군주제를 폐지하고 공화국을 건설하였지만, 결국 군주제보다 더 강력한 권력인 ‘제정’을 통해서 혁명의 기본 성과를 보존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나폴레옹 법전, 즉 프랑스 시민법이 그 중요한 예가 될 것입니다).


3.혁명에 대한 루소의 영향


루소는 특히 혁명 제2단계의 공화주의와 민주주의에 큰 영향을 미친 것으로 이해됩니다. 반면에 루소의 사상은 그 혁명이 빠져든 비극, 즉 공포정치의 원천으로 비판되기도 합니다. 그러나 루소가 혁명의 은인으로 ‘팡테옹’에 안치된 것은 공포정치가 끝난 후의 일입니다. 루소가 혁명기에 어떤 영향을 끼쳤고, 어떻게 추앙받았는지는 당시 혁명의 주역들과의 관계를 통하여 보다 구체적으로 알아볼 수 있을 것입니다.

먼저 콩도르세(Marquis de Condorcet)로부터 시작하겠습니다. 콩도르세는 파리지역에서 선출된 의원으로 당대 가장 명석한 지식인 중의 한 명이었으며, 초기 국민의회의 서기역을 맡게 됩니다. 콩도르세는 프랑스 혁명의 인권선언, 즉 1789년의 ‘인간과 시민의 권리선언’, 즉 제1단계 프랑스 혁명의 막이 오르면서 혁명의 상징으로 제창된 인권선언의 채택에 큰 기여를 하였습니다. 콩도르세는 3부회가 소집되자마자 혁명, 즉 새로운 시대 원리로서 인권을 명확히 규정하고 또 선언해야 한다고 주장하였던 것입니다.

이후 콩도르세는 자코뱅에 속하지는 않았지만, 공화국, 보통선거, 재산과 교육의 불평등 해소에 찬성하며 프랑스 혁명의 제2단계를 같이 합니다. 하지만, 루이 16세의 처형에 반대하였으며, 결국 급진 자코뱅에 의하여 단두대로 보내지게 됩니다.

콩도르세에서 루소의 영향력은 분명한 것이었습니다. 콩도르세는 ‘볼테르가 시작한 해방의 작업을 루소가 완수한 것’이라고 평가하였으며, 혁명의 핵심 원리를 인권에서 찾았습니다. 그리고 그 인권은 곧 ‘자연적 평등’이라는 루소의 명제였던 것입니다.

“권리의 평등과 자유가 동의어라는 시각을 잃지 말자. ... 모든 불평등은 원초적이자 자연적인 평등에 대한 직접적 침해이자 인간의 권리에 대한 진정한 공격이다”.

다음으로는 로베스피에르(Maximilien Robespierre)입니다. 로베스피에르는 루소의 제자, 아니 그의 교도임을 자처할 정도로 루소에 대한 숭배의 염이 깊었습니다. 루소와 같이 어렸을 적 고아가 되었으며 소년 가장으로서 자신의 인생과 가족의 생계까지 책임졌던 로베스피에르는 일찍이 루소의 저작에 감명을 받아 루소가 최후에 은거하였던 에르농빌에까지 직접 찾아가기도 하였습니다(루소 생전에 만났는지는 미확인임.). 그리고 마침내 3부회가 소집되어 아라스(Arras) 지역의 대표로 파리에 입성하기 전 날 로베스피에르는 ‘루소의 망혼(亡魂)’ 앞에서 그의 대의를 실현시킬 것을 다짐합니다. 다음은 그 헌사의 일부분입니다.

“... 숭고하신 분! 당신께서는 나에게 나를 알게 해 주었습니다. 일찍이 당신께서는 나에게 나의 본질의 존엄성을 알게 했고, 사회질서의 대원리를 생각하게 했습니다. 낡은 건물은 무너졌고, 그 잔해 위에 새로운 건물의 주랑이 세워졌습니다. ... 나의 헌사를 받으시오. ... 온갖 고난으로 인하여 나의 생애가 조숙한 운명으로 희생이 되더라도 나는 당신과 마찬가지로 인민의 권익을 위하여 일하고 싶습니다. ...”

일개 지방의 평민 변호사로서 로베스피에르는 초기 혁명 의회에서 전혀 눈에 띄지 않는 존재였습니다. 그러나 곧 그의 결의와 책임감 그리고 순수함은 혁명의 동력이 되었으며, 인민들의 신뢰의 중심에 서게 되었습니다. 혁명의 전위를 자칭하면서 수많은 사기꾼과 야심가, 비열한들이 발호하던 혁명의 시장에서 로베스피에르의 고결한 덕성은 희귀한 것이었고, 파리 시민들은 그에게 ‘타락할 수 없는 이’라는 영예로운 애칭을 붙여줍니다.

로베스피에르는 프랑스 혁명이 건설하는 새로운 국가, 새로운 문명이 바로 그와 같은 순수한 인민의 덕성으로 충만할 것을 염원하였습니다. 그리고 그것은 바로 루소가 희구하던 바이기도 합니다. 건강한 노동으로 정직하게 살아가는 순박한 인민들, 영혼의 불멸을 믿으며 이웃을 연민하며 조국을 사랑하는 인간들의 공화국, 로베스피에르는 프랑스를 인류의 새로운 문명, 즉 루소의 이상국가로 만들고자 하였던 것입니다.

다음은 로베스피에르가 실각한 후 루소가 팡테옹에 이장되는 과정입니다. 로베스피에르가 실각한 후에도 루소는 여전히 혁명의 위인으로 추앙받고 그 유해가 팡테옹에 안장됩니다. 1794년 팡테옹에 유해가 안장되는 기념식은 혁명정부가 그리고 프랑스 인민들이 루소를 어떻게 생각하였는지, 또 루소가 그들로부터 어떻게 사랑받았는지 잘 보여주는 장면이라고 생각합니다.

유해를 옮기는 행렬에서 먼저 눈에 띄는 사람들은 식물학자들이었다고 합니다. 루소는 말년에 혼자 고독하게 지내면서 식물연구에 몰두하였으며 그로부터 인간의 자연적 본성, 자연친화성을 더욱 깊이 깨달았던 것입니다.

다음으로는 음악가들이 뒤를 이었다고 합니다. 루소가 처음에 지식인 사회에 명함을 내민 것은 음악도의 자격이었고, 실제로 그는 당시 당당한 오페라 작곡가였습니다(이에 관한 유명한 일화 하나를 소개합니다. 루소 작곡의 오페라 <마을의 점쟁이>는 루이 15세와 그의 반려이자 당시 실세였던 퐁파두르 부인 앞에서 상연되어 갈채를 받았고, 왕은 다음날 루소에게 연금을 하사하기로 하였습니다. 하지만, 루소는 그날 궁정에 가지 않습니다. 한편으로는 군주, 궁정 인사들 앞에 초라한 모습으로 게다가 오줌 마려워 전전긍긍하면서-루소는 요절박(尿切迫)으로 고생하였습니다- 서 있을 자신의 모습을 견딜 수 없었던 것이고, 다른 한편으로는 군주가 주는 연금에 의존하여 사는 삶을 용인할 수 없었던 것입니다). 루소 유해의 운구 행렬에서도 그가 작곡한 곡이 연주되었다고 합니다.

음악가들과 함께 수공업자들도 행렬에 참여하였다고 합니다. 수공업자들에도 주목해야 합니다. 어렸을 적 루소가 사고무친(四顧無親)으로 방랑하던 시절 시작한 일이 바로 동판 새기는 일이었습니다. 루소의 부친도 시계공이었고, 모친의 집안도 시계공이 주업이었습니다(루소는 <고백록>에서 모친이 목사의 딸이라고 얘기하였는데, 정확하게는 목사의 조카딸이었다고 합니다). 루소는 자신이 노동자 집안의 자제이며, 또 그 자신 노동자로 살고 있음에 대한 자의식이 뚜렷하였습니다. 그리고 사람됨과 교육에 있어 공작(工作)과 노동의 중요성을 강조하였습니다. 무위도식하고 호의호식하는 상류 기생계급에 대한 루소의 분노는 그의 글 곳곳에서 볼 수 있습니다.

이어서 어머니들이 아이들을 품에 안고, 손을 잡고 행렬을 이었다고 합니다. 루소하면 우리는 <사회계약론>을 떠올리지만, 사람들에게 제일 널리 알려진 저서는 아마도 <에밀>이 아닌가 합니다. 실제로 루소 자신이 가장 정성을 들이고 깊이 생각하여 쓴 저서가 바로 <에밀>입니다. 루소 자신이 ‘20년의 숙고와 3년의 쓰기 작업’의 결실이었다고 말합니다. 주지하듯이 <에밀>은 당시 교육방법에 혁신을 가져다 준 것으로, 아이들의 자연적 개화, 자연적 능력의 개발, 주체성의 함양, 말하자면 현대 아이중심적, 자기주도적 교육학의 원조라고 할 수 있습니다.

끝으로 행사의 주최자들, 즉 국민공회의 요원들이 3색 리본을 달고, 루소의 저서 <사회계약론>을 앞에 들고 행렬을 마감하였다고 합니다. 혁명의 곡절 속에서도, 공포정치가 끝난 후에도 루소의 사상은 자유, 평등, 박애의 혁명 사상과 동일시되었고, 루소의 사회계약론은 새로운 헌정질서의 이념과 원리로 공인된 것입니다.

더 중요한 것은 국민공회 측이 밝힌 공개 사은(謝恩)의 변(辯)입니다. 다음과 같습니다.

“첫째, 인간의 영원한 권리를 과감하게 주장하였고, 둘째, 인간의 예속을 거부하며 불관용의 광신과 무신론의 황량함을 혐오하였으며, 셋째, 본연의 진실한 인간이라고 불릴 가치가 있는 위인이었다.”

저는 위의 평가가 루소의 사상과 그 인간됨을 잘 요약하였다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그것은 루소에 대한 거의 최상의 평가를 담고 있는 것이며, 또 이후 리버럴리즘의 헌정질서를 희구하는 모든 사람들에게 영감을 불러일으키는 감동적인 내용들이라고 생각합니다.


III. 프랑스 혁명의 급진성과 루소 사상


1.루소 사상에 대한 비판


하지만, 루소에 대한 철학, 사상계의 분위기는 결코 우호적이라고만 할 수는 없습니다. 루소의 이름에는 바로 혁명의 제2단계를 지도한 자코뱅 혹은 산악당(자코뱅은 시민들의 정치 조직이며, 산악당은 의회에 진출한 원내의 정파를 말합니다.), 특히 로베스피에르의 공포정치가 짙은 그림자를 드리우고 있기 때문입니다. 이미 말한 대로 루소는 로베스피에르의 정신적 지주였고, 로베스피에르 만들고자 하였던 덕의 공화국, 최고존재에 대한 숭배라는 시민종교의 창시자도 또한 루소였기 때문입니다.

이미 프랑스 내에서 혁명 직후 방자맹 콩스탕(Benjamin Constant)은 ‘고대인의 자유’와 ‘근대인의 자유’를 구분하면서 루소 사상의 국가주의적 전제(專制)의 위험을 지적하였고, 20세기에 들어서 나치와 스탈린의 전체주의를 겪으면서 많은 자유주의 지식인들이 루소를 그 사상적 원흉으로 꼽았습니다. 버트란드 러셀은 히틀러가 루소 사상에서 나왔다고 하였으며, 현대 옥스퍼드 대학의 정치철학 교수였던 이사야 벌린(Isaiah Berlin)은 루소를 가장 위험하고 치명적인 전제주의의 사상으로 매도하였으며, 또 현대 리버럴리즘적 공동체주의를 대표하는 캐나다의 철학자 찰스 테일러(Charles Taylor)도 루소로부터 받은 영감을 인정하면서도 루소 사상의 전체주의적 경향을 비판하고 있습니다.

그러면 과연 루소 사상에서 무엇이 그와 같은 혐의를 샀던 것일까요?


2.자유의 개념


먼저 ‘자유의 개념’에서 시작해 보겠습니다. 앞서 방자맹 콩스탕의 자유의 두 개념에 대한 구분을 보았습니다. 마찬가지로 이사야 벌린도 ‘적극적 자유’와 ‘소극적 자유’라는 구분을 내세워 루소를 비판하였습니다. 콩스탕의 ‘고대인의 자유’는 벌린의 ‘적극적 자유’와 한 편이 될 수 있고, ‘근대인의 자유’는 ‘소극적 자유’와 한 편이 될 수 있습니다.

콩스탕에 따르면 고대인의 자유는 사회적 권력의 행사에 ‘시민의 최대한의 참여’를 보장하는 것이며, 근대인의 자유는 정부로부터 ‘시민의 독립성’을 보장하는 것입니다. 전자는 집단적 자유이며, 직접적으로 공공복지와 전쟁과 평화에 대해서 심의하고 법률에 대해서 투표하며 판결을 내리는 주권행사를 의미합니다. 반면에 후자는 개인적 자유로서, 법에 의하지 않고는 체포, 구금, 또는 처형되지 않으며, 어떤 개인(들)의 자의적 의지가 권위적 지배하에 방해받지 않는 것을 뜻합니다.

달리 말하자면, ‘고대인의 자유’는, 고대 희랍과 로마의 예에서와 같이, 국가의 주인이 되는 자유이며, 정치에 참여하고 국가의 운명에 책임지는 자유라고 볼 수 있습니다. 따라서 여기서 국가권력은 자유의 요람이 되고, 국정에 참여하지 못하는 인간, 국가의 일에 헌신하지 않는 인간은 진정 자유로운 인간이 아니며, 따라서 공동체에 의하여 무시되거나 차별받는 것이 당연한 일이 됩니다. 반대로 ‘근대인의 자유’는 근대 국가권력으로부터의 자유를 의미하는 것으로서, 국가 이전에 개인의 존재를 긍정하며, 국가질서와 다른 개인적 삶의 가능성을 존중하는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러한 구분 하에 만약에 ‘근대인의 자유’가 상실되고 오직 ‘고대인의 자유’만 남는다면, 이는 국가질서에 순응하지 못하는 사람들은 ‘국민’의 범주에서 제외되고 국가의 이름으로 가해지는 폭력의 희생양이 될 수 있는 위험이 생기게 됩니다. 콩스탕은 프랑스 혁명의 제2단계 자코뱅의 공포정치를 그렇게 해석하였고, 그 사상적 원천으로 루소를 꼽았던 것입니다.

이어서 이사야 벌린의 ‘적극적 자유’와 ‘소극적 자유’의 구분도 그와 유사합니다. 벌린의 ‘소극적 자유’는 ‘타인들에 의한 간섭의 부재’, 즉 ‘어떤 사람들이 타인들의 방해 없이 행위할 수 있는 영역’을 의미합니다. 반대로 ‘적극적 자유’는 ‘자기 지배’를 핵심으로 하는 것으로, ‘자기 자신의 주인이 되고자 하는 소망, 즉 결정되는 것이 아니라 결정하는, 스스로 방향을 찾아가는, 자신의 목표와 정책을 인식하고 실현시키고자 하는 소망’을 의미합니다.

풀어서 말하자면, 벌린의 ‘소극적 자유’는 한 개인이 그 자신의 현재의 고유한 상태를 유지하고 또 자신의 본성에 따라 삶을 영위하는 자유를 말하고, ‘적극적 자유’는 현상의 자아와 본질적 자아를 구분하여 현상으로부터 본질로 나아가는 인격의 승화를 의미한다고 할 수 있습니다. 이러한 적극적 자유는 현실의 개인을 지양(止揚)하는 것으로서 벌린에 따르면 종종 금욕주의 혹은 사회적 이상주의로 나타날 수 있습니다.

이러한 두 자유의 개념에서 소극적 자유가 부정되고 적극적 자유가 지배하게 되면, 즉 ‘윤리적 국가’에 의한 인격 승화가 강제된다면, 이는 개인의 자유에는 끔찍한 전제와 공포를 낳을 수 있게 됩니다. 벌린은 콩스탕과 마찬가지로 프랑스 혁명의 제2단계를 그러한 상황으로 해석하였고, 루소를 “근대 사상의 역사에서 가장 해롭고 심각한 자유의 적”으로 평가하였습니다.

그러나 루소의 <사회계약론> 그리고 다른 저작들에서 루소가 과연 ‘고대인의 자유’ 그리고 ‘적극적 자유’만을 얘기하였을까요? 루소가 어린 시절부터 고대 로마 공화국의 시민들, 그들의 애국심과 시민적 주체성에 감명받고, 로마 공화정과 같은 나라를 이상국가로 생각하였다는 점은 사실입니다. 또 그는 검열과 박해 위험에도 불구하고, 그의 저서에 항상 ‘제네바 공화국의 시민’임을 밝힐 정도로 그의 가계가 ‘제네바 공화국’ 출신이라는 자부심을 평생 갖고 있었던 것도 사실입니다.

하지만, 즉 모든 인간의 자연적 본성이 평등하다는 그의 세계관은 ‘고대의 차별적 세계관’(고대의 노예제와 신분제를 생각하면 좋을 것입니다.)과는 근본적으로 다른 것이었습니다. 또한 ‘인간은 자연적으로는 선하지만, 정치제도에 따라 불행하게 된다’ 또는 ‘인간은 자유롭게 태어났지만, 도처에서 사슬에 묶여 있다’고 외쳤던, 루소는 기본적으로 ‘근대인’이었으며, 또 ‘소극적 자유’ 속에서 인간 본연의 자유를 보았던 사람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루소를 ‘적극적 자유’ 그리고 ‘고대인의 자유’의 사상가 그리고 국가지상주의 사상가라고 보는 사람들이 즐겨 인용하는 구절이 있습니다. <사회계약론>에서의 “자유롭게 되기 위하여 강제된다”는 문장은 그런 차원에서 ‘악명’이 높습니다. 그리고 “사회의 각 구성원들은 자기의 모든 권리와 함께 자신을 공동체 전체에 양도한다”는 문구도 거론됩니다. 사실 그러한 구절을 그 자체로 떼어 놓고 보면 이는 정말 개인성이 상실된 국가주의, 즉 국가가 정한 목표에 전적으로 복종하고 국가의 질서에 따르는 것이 삶만이 진정 자유에 합당하며, 가치로운 것으로 읽히기도 합니다.

하지만 “자유롭게 되기 위하여 강제된다”는 구절은 사회 상태의 성립, 그리고 그 기초로서의 ‘주권’ 그리고 ‘일반의지’에 대하여 설명하는 부분이며, 그 맥락 하에서 이해되어야 합니다. 그 내용은 하나의 국가사회가 성립하기 위하여 주권의 최고성이 긍정되어야 하고, 또 각 개인은 자신의 특수 의지를 국가의 공공성(일반의지)에 맞게 조정해야 함을 약속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간단히 말하자면, 하나의 국가 공동체의 구성원이 되기 위하여 그 주권적 질서를 승인하지 않으면 안된다는 논리적인 설명인 셈입니다. 따라서 이 단계에서 국가가 개인의 자유를 자의적으로 침해할 수 있다는 우려를 제기하는 것은 논점을 잘못 짚은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자신의 모든 것을 공동체에 양도한다’는 것도 초기의 사회계약에 대한 논리적 설명입니다. 루소는 “각 개인은 전체에 결합되어 있지만, 자기 자신에게밖에는 복종하지 않고, 이전과 같이 자유로울 수 있는 하나의 결합형태”를 찾고자 하였던 것입니다. 이러한 루소의 얘기는 개인이 자신의 존재를 상실하고 국가 혹은 전체에 흡수됨을 뜻하기보다, ‘통치자와 피치자의 동일성’이라는 민주주의의 근본원리를 말하는 것이라고 봄이 옳을 것입니다.

그리하여 루소가 생각하는 사회계약은 “각자는 전체에게 자기를 양도하기 때문에 그 누구에게도 자기를 양도하지 않는 것이 되고, 모든 구성원들은 자기가 양도하는 것과 똑같은 권리를 다른 구성원으로부터 받기 때문에 각자는 자기가 상실한 모든 것도 동등한 가치의 것을 얻고 나아가 자기가 가지고 있는 것을 보존하기 위한 더 많은 힘을 얻는” 계약이 되는 것입니다.

루소의 <사회계약론>에서 자유에 대한 설명은 많지 않습니다. 다만, 루소는 사회계약을 통하여 인간이 참으로 자유로워진다고 말합니다.

“도덕적 자유만이 인간을 진실로 자기의 주인이 되게 만드는 것이다. 왜냐하면 단순한 욕망의 충동에 따르는 것은 노예적인 굴종이지만, 자기가 스스로 만든 법률에 복종하는 것은 자유이기 때문이다.”

어쩌면 벌린은 위의 구절에서 이른바 ‘적극적 자유’의 발상을 얻고, 또 그로부터 소위 ‘유토피아에 대한 열망’이 빚는 독재의 혐의를 읽었는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그보다는 칸트의 자율성의 명제를 찾는 것이 보다 설득력이 있다고 생각합니다. 이는 우리 법철학계의 원로 중의 한 분인 심재우 교수도 일찍이 지적한 부분입니다. 심재우 교수는 칸트에 앞서 또 한 사람의 위대한 계몽주의 철학자를 찾은 것입니다.

요컨대 자유의 문제에서 콩스탕이나 벌린의 루소 비판보다는 루소가 칸트와 괴테에 이르는 길을 예비하였다는 카시러(Ernst Cassirer)의 명제가 더욱 타당해 보입니다. 실제로 칸트는 루소를 존경하였고, 칸트가 그의 산책 시간을 유일하게 놓친 것이 루소의 <에밀>을 읽다가 그랬다는 에피소드를 떠올려 보는 것도 나쁘지 않을 것 같습니다.


3.주권론-통치구조론


다음은 주권론-통치구조론에 관한 것입니다. 루소 사상을 권위주의의 원천으로 보는 많은 사람들이 지적하는 것은 루소의 주권론-통치구조론의 문제점입니다. 미국의 보수주의 학자 니스벳(Robert A. Nisbet)은 루소는 민주주의 사상가이긴 하지만 리버럴리즘이 결여되어 있다고 비판합니다. 그리하여 그의 민주주의는 ‘플레비지터리 독재(plebiscitary dictatorship)’로서 히틀러의 그것과 다르지 않게 되었다고 지적합니다. 탈몽(J. L. Talmon)과 크로커(Lester C. Crocker)도 루소의 주권론-민주주의론은 권력에 대한 견제가 결여된 전체주의의 이론이라고 비판합니다.

그것을 알아보기 위하여는 우선 루소의 주권론을 상세히 보아야 합니다. 루소의 추상 능력은 대단하다고 할 수 있습니다. 루소는 오늘날 우리가 헌법학에서 배우는 주권의 속성을 거의 그대로 말합니다. 즉 주권의 최고성, 불가분성, 불가양도성을 명료하게 제시합니다. 이러한 주권의 속성들은 하나의 독립된 공동체로서, 타국에 예속되지 않고, 또 내란의 분열에 빠지지 않고 유지되어야 하는 통일성과 평화의 당위를 말하는 것으로 나무랄 데가 없는 것입니다.

이에 대하여 주권의 불가분성을 두고 권력분립에 어긋난다는 말을 하는 것은 주권과 통치권을 구별하지 못하는 소치에 지나지 않는 것으로 크게 다룰 만한 것은 아닙니다. 그러나 그런 비판의 진짜 이유는 루소의 주권론에서 권력분립론이 결여되어 있음을 지적하는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사실 루소의 <사회계약론>에서도 입법권, 집행권, 재판권의 구분이 발견되지만, 그러한 구분은 오늘날의 권력분립론과 연결되지 못하고, 단지 주권의 다양한 발현 형태로 이해될 뿐입니다.

이러한 혐의는 루소가 주권은 대표(代表)될 수 없다고 하는 주장, 즉 대표민주주의(대의제 민주주의)를 부정하는 듯한 주장을 한 것에서 더욱 강해집니다.

“인민이 주권을 가진 단체로서 합법적으로 집회를 하는 순간부터, 정부의 재판권은 모두 정지되고 집행권도 중지되며, 가장 비천한 시민의 인격이라도 최고 행정관의 인격과 마찬가지로 신성불가침의 것이 된다. 왜냐하면 대표자를 세운 본인이 직접 출석하고 있는 곳에서는 이미 대표자라는 것은 없기 때문이다”

“주권은 양도될 수 없는 것과 같은 이유로, 주권은 대표될 수 없다. 주권은 본질적으로 일반의지 속에 존재한다. 그리고 일반의지는 결코 대표될 수 없는 것이다. ... 그러므로 대의원은 인민의 대표자가 아니며 대표자가 될 수도 없다. 그들은 인민의 사용인에 불과하며 따라서 무슨 일이든 최종적으로 결정할 수는 없는 것이다. 인민이 직접 승인하지 않는 법률은 모두가 무효이며, 결코 법률이라고 할 수 없다.”

그러나 이렇게 대표자, 즉 분권 주체들의 고유성과 자율성을 부정하는 것은, 동일한 주체가 3권을 다 행사할 수 있는 가능성을 열어주는 것이며, 결국 각 분권 주체들의 책임성을 명확하게 하지 못하고, 상호 감시를 어렵게 하는 단점이 있습니다. 권력분립이 형해화할 수도 있는 것입니다.

실제로 루소는 오늘날의 3권 분립, 몽테스키외와 같은 사법권의 독립에 큰 비중을 두지 않았다고 생각됩니다. 하지만, 그가 견제와 균형의 원리에 대하여 모르는 것은 아니었습니다. 루소가 경애해 마지않던 로마의 공화정의 자랑이 바로 통치기구들 사이의 견제와 균형의 원리였음도 상기될 필요가 있습니다. 루소의 <사회계약론>의 실제적 적용이라고 할 수 있는 <폴란드 헌법론>에서는 여러 통치기구들, 즉 대표기구들 사이의 중층적인 견제와 균형의 원리가 제시되어 있기도 합니다. 즉 아쉬운 대로 루소의 헌정질서에서도 ‘대표성의 원리’, ‘권력분립-견제와 균형의 원리’가 살아 있다고 말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리고 주권이 대표될 수 없다는 말을, ‘대표자가 있어도 주권자의 지위가 상실되는 것이 아니다’라는 차원으로 이해한다면, 이는 오늘날 주권과 대표의 원리에 비추어 큰 손색이 없을 것입니다. 오히려 현대 몇몇 학자들이 주장하듯이 간접민주주의의 폐해를 극복할 수 있는 ‘참여민주주의’를 뒷받침하는 이론이 될 수도 있습니다.

아울러 루소가 일반의지의 ‘무오류성’을 주장한 것이 문제로 지적되기도 합니다. ‘무오류성’,이는 리버럴리즘에서 가장 금기시되는 악덕입니다. 국가의 무오류성은 곧 진실의 국가 독점을 낳고 그것은 다시 국가권력의 무한한 확장을 낳습니다. ‘진실이 우리 편이면 거리낄 것이 없는 법’입니다. 그리하여 리버럴리즘의 모든 철학은 무오류성 대신 인간의 오류가능성을 전제로 하게 되며, 리버럴리즘의 국가철학의 요체는 바로 ‘권력의 제한’과 ‘권력에 대한 의심의 제도화’에 있다고 할 수 있습니다.

만약에 루소가 그와 같은 무오류성을 주장한 것이라면, 루소의 사상은 논리적으로 공포정치와 전체주의로 이행해 갈 것입니다. 하지만, 주의할 것은 루소가 무오류성을 말한 것은 ‘일반의지’이지 ‘주권자’가 아니라는 점입니다. 루소의 <사회계약론>은 아주 치밀하게 쓰여진 저서라고 보아야 할 것입니다. 루소는 ‘주권’의 불가양도성, ‘주권’의 불가분성을 얘기하고는 이어서 ‘일반의지’의 무오류성을 얘기합니다. 그리고는 인민은 오류를 범할 수 있다는 설명을 바로 덧붙입니다.

그러면 일반의지가 무엇인가 알아보아야 합니다. 일반의지(la volonte generale)는 각 개인들 혹은 분파의 특수의지(la volonte particuliere)와 구분되는 공동체의 공공의 의지입니다. 그러나 더욱 주의할 것은 이 일반의지는 ‘전체의지(la volonte de tous)’와 다르다는 점입니다. 루소는 이렇게 일반의지-특수의지-전체의지라는 정교한 구분을 통하여 주권 및 민주주의의 이념과 현실의 변증법적 조화를 꾀하였던 것입니다. 일반의지는 단순히 현실 인민의 다수의 의지가 아니라 그 의지를 초월하는 규제적 이념으로서의 공공성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물론 그 일반의지라는 이념은 항상 ‘전체의지’를 통해서 구현될 것입니다. 모든 개인들이 자주적으로 자신의 양심에 따라 의견을 모으면, 그 특수의지들이 서로 상쇄되어 결국은 일반의지를 낳을 것이라고 ‘상정’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현실적으로 그와 같이 일반의지가 순수하게 현실화되기는 불가능할 것이고, 결국 실질적으로 남는 것은 전체의지뿐일 것입니다. 그리고 일반의지는 그러한 전체의지를 인도하고 교정하는 당위적 기능을 하게 될 것입니다. 그렇다면, 그러한 당위적 기준, 규제적 이념으로서의 일반의지는 항상 ‘선’한 것이 되지 않으면 안되는 것입니다. 비록 현실에서 완벽하게 구현되지는 않지만, 선의 이데아가 없이는 어떤 지향성도 존재할 수 없으며, 반대로 그 지향성은 항상 선의 이데아를 향한 것이어야 될 것입니다.

이처럼 주권자, 즉 인민이 아니라 ‘일반의지가 무오류하다는 주장은 민주주의의 이상과 현실의 관계에 대한 선험적 전제라고 할 수 있는 것으로 역시 리버럴리즘의 대원칙에 반하는 것도 아니고, 국가폭력과 직결되는 것은 아니라고 할 수 있습니다.


4.시민종교론


끝으로 국가와 종교의 관계, 그리고 국가의 도덕적 기능에 대하여 살펴보겠습니다. 우리는 이미 로베스피에르가 ‘최고존재의 숭배’라는 시민종교를 수립하고 ‘덕의 공화국’을 관철하기 위하여 노력하다가 실각하였음을 보았고, 그러한 시도는 바로 루소의 프로젝트였음을 얘기한 바 있습니다.

리버럴리즘의 대원칙 가운데 또 하나는 ‘정교분리’이고, ‘후견적 국가’ 혹은 ‘교육적 국가’에 대한 거부입니다. 종교는 절대적 가치, 인간의 영혼에 대한 것이고, 따라서 종교와 국가권력이 결합할 경우 이는 공사(公私)의 구분이 사라지고 국가권력이 인간의 모든 영역을 지배하는 근본주의가 횡행할 우려가 있는 것입니다. 또 그와 유사하게 국가가 국민들에게 후견인적 지위에서 국가적 도덕을 강제할 수 있게 되면 그 법질서도 또한 권위주의적 모습을 피하기 어렵고, 국가권력의 과도한 확대를 야기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루소 <사회계약론>의 “시민종교” 부분은 그에 대한 우려를 품게하는 명백한 구절을 포함하고 있습니다. 좀 길지만 모두 인용해 보겠습니다.

“... 그러므로 주권자가 그 항목을 스스로 결정할 수 있는 순수한 시민적인 신앙고백이 필요하다. 이때 주권자가 결정하는 항목이란 종교의 교의로서가 아니라 선량한 시민이 되기 위해서나 충실한 신민이 되기 위해서 필요불가결한 사회적 감정으로서 요구되는 항목인 것이다. 주권자는 이런 항목을 믿도록 누구에게도 강요할 수는 없지만, 그것을 믿지 않는 자는 누구든지 추방할 수 있다. 여기서 주권자가 그를 추방하는 것은 불신자(不信者)로서가 아니라 반사회적(反社會的)인 인간으로서이다. 그런 인간은 법률과 정의를 진심으로 사랑할 수가 없고, 긴급할 때에는 의무를 위하여 생명을 바칠 수가 없는 인간으로 인정되어 추방되는 것이다. 그래서 누군가가 겉으로는 이 교의를 인정하면서도 실제로는 그것을 믿지 않는 사람처럼 행동한다면, 죽음으로 그를 처벌해야 한다. 왜냐하면 그는 모든 범죄 중에서 가장 나쁜 범죄, 즉 법률 앞에서 거짓말을 했다는 죄를 저질렀기 때문이다.”

이러한 구절은 루소를 ‘인간 본연의 자유’의 사상가로 생각하는 사람들을 당혹스럽게 합니다. 반대로 루소를 전체주의 사상가로 보는 사람들은 중세 이단심문, 스탈린 체제에서의 정치재판, 크메르 루즈의 ‘킬링필드’를 연상할지도 모릅니다. 그리하여 루소의 ‘시민종교’와 ‘윤리적 국가’가 지향하는 ‘덕의 공화국’은 결국 공포정치로 갈수밖에 없는 것일까요? 혹시 루소가 영혼불멸을 의심하는 볼테르와 다른 백과전서파 계몽철학자들을 매도하고, 로베스피에르가 영혼불멸을 부정하는 유물론자들을 숙청한 것은 서로 통하는 것이 아닐까요? 그러나 그 시민종교의 내용은 무엇일까요? 루소는 바로 이어서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습니다.

“시민종교의 교의는 그 항목의 수가 적고 단순해야 한다. 정확히 표현되어 설명이나 주석이 필요 없도록 되어야 한다. 전지전능하고 자비로우며 선견지명과 섭리를 가진 신의 존재, 내세의 생활, 정의는 축복받고 죄악은 처벌받는다는 것, 사회계약과 법률의 신성함, 이러한 긍정적 교의여야 한다. 나는 부정적 교의에 대해서는 단 한 가지로 한정시킨다. 그것은 불관용이다. 불관용은 이미 우리가 배척해 버린 종교의 부류에 속하는 것이다.”

루소의 시민종교는 신의 존재와 영혼불멸에 대한 믿음과 기본적인 도덕률 그리고 관용의 원리라고 할 수 있습니다. 루소는 불관용의 종교를 배척합니다. 관용을 수용하는 종교라면 무엇이든 환영받습니다. 루소의 사상은 기본적으로 ‘자유’에 있습니다. 그런데 루소는 종교와 신의 존재 자체는 절대적인 것으로 봅니다. 이를 어떻게 해석해야 좋을까요? 결국 새로운 불관용의 종교를 창설하고 국가권력으로 강제하는 것으로 보아야 할까요? 아니면 로크의 경우처럼 루소도 무신론만은 허용하지 않는 것으로 보아야 할까요?

이처럼 시민종교의 부분은, 우리가 루소와 전체주의 그리고 공포정치의 연결성을 찾을 경우, 가장 유력한 부분이 됩니다.

그러나 달리 해석할 여지는 없을까요? 루소는 <에밀>의 “사부아 보좌신부의 신앙고백”의 부분(그로 인하여 루소의 저서가 금서가 되고 체포령이 내려진)에서 그의 종교론을 보다 자세히 피력합니다. 거기서 루소는 그의 종교를 ‘자연종교’라고 칭하면서, 더욱 광범위한 관용을 말합니다.

“신이 내 정신에 주는 빛에 따라, 그리고 신이 내 마음 속에 불러일으키는 감정에 따라 신을 섬기는데 무슨 죄가 있을 수 있을까? ... 신의 영광을 위해, 사회의 행복을 위해, 그리고 나 자신의 이익을 위해 자연법칙의 의무에 무엇을 더 추가할 수 있을지. ... 신의 가장 위대한 사상들은 오로지 이성을 통해서만 우리에게 다다르지. 자연의 광경을 바라보게. 그 내면의 소리에 귀를 기울여보게. 신은 우리의 눈에, 우리의 양심에, 우리의 판단에 모든 것을 이야기해주지 않았는가?”

“인류의 3분의 2는 유대교도 마호메트교도도 기독교도도 아니라네. 모세와 예수 그리스도 그리고 마호메트에 대해 이야기하는 것을 전혀 듣지 못한 사람들이 얼마나 많은가?”

루소의 자연종교란 밖에서 강제로 주입하는 것이 아니라 모든 사람들, 어느 지역이든 어떤 인종이든, 그 영혼 속에 내재적인 빛으로 살아있는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루소의 시민종교는 결국 인간의 필연적 속성, 인간이 인간답게 살기 위해 필연적으로 전제해야 하는 규범적 요청일 수도 있을 것 같습니다. 유신론자이든 무신론자이든 관계없이 서로의 신념을 존중하지 않으면 자신의 신념도 인정될 수 없다는 그러한 상위의 공존의 원칙 말입니다.

비유를 하자면 이는 마치 ‘크레타섬 사람들은 모두 거짓말쟁이야!’라는 말이 의미가 있으려면 그 사람의 말 자체는 거짓말이 아니라는 것을 전제할 수밖에 없는, 이른바 ‘참’의 ‘선험적 효력’과 같은 것이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그리하여 그것을 부정하는 것은 결국 자기 존재를 스스로 부정하는 결과가 되는 것이고, 그에 따라 그러한 인간적 자기배반에 대하여 ‘죽음의 처벌’이라는 비유적 표현도 쓸 수 있었던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도 해 보게 됩니다.


IV. 루소의 인정투쟁-인간성의 회복


지금까지 루소가 프랑스 혁명에 끼친 영향을 알아보았는데, 긍정적 영향을 얘기하는 것보다 오히려 부정적 영향을 부정하는 쪽으로 많이 서술되었습니다. 그 때문에 루소 사상의 핵심, 루소 사상의 역사적 의의의 핵심은 오히려 모호해져 버린 것 같습니다.

이제 끝으로 프랑스 혁명 그리고 이후 리버럴리즘 헌정질서의 역사에서 루소가 핵심적으로 기여한 부분을 얘기해 보고자 합니다. 저는 그것을 ‘인간성의 회복’, ‘인간의 동류(同類)성’, ‘인권’이라고 얘기하고 싶습니다. 이는 앞서 언급한 콩도르세의 명제와 같은 것이며, 국민공회에서 루소를 팡테옹에 안장하면서 밝힌 이유와도 같은 것입니다. 여기서 새롭게 추가할 부분은 바로 루소 자신의 인생역정, 루소의 자아 회복의 과정입니다. 그리고 그것이 어떻게 프랑스 혁명 전야에 프랑스 인민들의 인간 회복 과정으로 연결될 수 있었는지를 생각해 보겠습니다.

먼저 루소는 그 사상은 위대하고 그의 재능은 천재적이었지만, 그의 사람됨은 만족스럽지 못하였다는 점에서 시작해 보겠습니다. 루소에 대한 많은 비판 가운데, 가장 뼈아픈 비판은 아마도 ‘아이들을 버린 아버지’라는 비판일 것입니다. 아이들을, 그것도 다섯 아이들을 모두 고아원에 갖다 버리다니요... 첫 아이에게는 그마나 표식을 남기기라고 하였지만, 다른 아이들의 경우에는 아무런 징표도 없이 그냥 버렸습니다.

그런 무정한 아빠, 루소가 <에밀>이라는 놀라운 교육철학서를 썼다니, 그 역설을 어떻게 설명할 수 있을까요? 그리하여 루소는 희대의 위선자, 비열한 지식인의 상징으로 매도되기도 합니다. 루소는 <고백록>에서 자식들의 유기에 대한 변명과 회한을 여러 차례 표명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볼테르가 바로 그점, 루소의 가장 수치스러운 비밀을 공개적으로 폭로함으로써 루소와 볼테르의 관계는 회복할 수 없는 파탄을 맞이하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사실 루소 자신도 고아처럼 자랐습니다. 루소의 모친은 루소를 낳고는 바로 사망하였고, 루소의 부친은 경솔하게 타인에게 상해를 입힌 후 어린 루소를 두고 도주하고 말았습니다. 그렇게 다른 나라로 가서 재혼을 하고는 루소의 안위에 대하여는 전혀 관심을 보이지 않았습니다. 그리하여 루소는 어린 시절, 청소년기를 방랑의 세월로 보냈습니다.

물론 루소의 아동기가 고통스럽고 비참했던 것만은 아니었습니다. 어린 시절 루소는 아버지와 친구처럼 정답게 지냈습니다. 그 아버지도 루소처럼 ‘철부지’였던 것 같습니다. 같이 밤을 새워 소설책을 읽고 얘기를 나누고는, ‘이제 그만 자자. 내가 너보다 더 어린애 같구나.’라고 말했다고 합니다. 또 부친이 떠나간 후에는 외삼촌과 고모들이 돌봐주기도 하였습니다.

그러나, 곧 루소는 떠돌이 고아가 되어 여기저기 전전하고 방황을 하게 됩니다. 그 때의 외로움과 박탈감, 그것은 어쩌면 루소의 영혼에 각인되었고, 자신의 아이들에게 ‘고아’의 운명을 지우는 것을 ‘가계의 숙명’처럼, 대수롭지 않게 생각하였을지도 모릅니다.

하여튼 이처럼 ‘버려진 아이’ 루소, 그리고 ‘자기의 아이를 버린’ 루소에게 더 이상 감출 일도 없고, 또 더 이상 남의 눈치를 볼 일도 없게 된 것이 아닌가 생각합니다. 이렇게 인생의 가장 밑바닥까지 가 보았던, 아니 그 인생 자체가 그런 처지에 놓여 있다고 생각한 루소는 그로 인하여 가장 솔직한 인간이 될 수 있었던 것이 아닌가 생각합니다.

그의 <고백록>에는 ‘역사적 위인’의 경우에 상상하기 어려운, 루소의 수많은 성적 (일탈)행위들이 그대로 나타나 있습니다. 어렸을 적 주인 집 딸에게 매맞으면서 성적 마조히즘과 같은 묘한 감정을 느낀 것, 동네 처녀들 앞에서 성기를 노출하는, 지금으로 말하자면 ‘바바리 맨’과 같은 행동을 한 것, 시시 때때로 했던 자위행위, 그의 후견인이자 엄마와 같았던 바랑 부인과의 관계(물론 이것은 바랑 부인의 주도 하에 이루어진 것입니다.), 이후 다른 부인과의 관계, 그리고 몇 번에 창부와의 경험들 등등...

그의 <고백록>은 인간 루소의 적나라한 모습을 보여줍니다. 그러나 그 책이 단순히 속물적, 엽기적 호사(豪奢)를 위한 3류 자전 소설로 끝나지 않은 이유는 그 속에 인간의 고통과 기쁨, 인간의 추함과 아름다움, 무엇보다 나약한 인간의 놀라운 진실성이 들어있기 때문이라고 생각합니다. 루소는 자신의 비루한, 외로운 삶 속에서 인간의 모든 가능성, 특히 인간 존엄의 가능성을 실증해 보였던 것입니다.

그래서 그의 <고백록>은 단순히 부끄러운 삶에 대한 참회가 아니라, 그럼에도 불구하고 자신의 인간성과 자신의 인생에 대한 떳떳한 외침이기도 한 것입니다. 나아가 그것은 한 약한 인간이 온 힘을 다해, 부족하나마 인간으로서의 명예를 걸고, 진실을 추구해 온 고투(苦鬪)의 기록이기도 한 것입니다. 그리고 그런 가운데 루소는 자기만이 아니라 모든 평범한 인간들, 흠이 많고 또 역경 속에 살고 있지만, 스스로의 힘으로 인생을 세우고, 인간으로서의 떳떳함을 잃지 않는 모든 사람들의 대변자가 될 수 있었다고 생각합니다.

루소의 전 저작에는 사회의 특권계급, 부당한 불로소득으로 편하게 살아가는 유한계급들의 알량한 사치와 으스대는 허영에 대한 신랄한 비판이 가득합니다. 그 자신의 모든 내면과 비밀들을 속속들이 드러내는 루소는 바로 시대의 진실에도 가장 용감하게 대면하는 가장 강력하고, 가장 순수한 고발자가 될 수 있었던 것이라고 봅니다.

그는 동 시대의 다른 비판자들, 소위 ‘철학자들(philosophes)’이라고 불렸던 볼테르와 다른 백과전서파 계몽주의 사상가들과 같지 않았습니다. 물론 볼테르의 책을 통하여 문체를 단련시켰고, 디드로와는 더할 나위 없이 절친하기도 하였지만, 그는 궁극적으로 그러한 ‘이성적’ 사상가들과 같을 수 없었던 것입니다. 민중들의 영혼에 들어가지 못하고 그 위에서 다만 세계의 질서를 구상하려 하였던 부르주아 지식인들에 대하여 루소는 괴리감을 느꼈습니다.

아니 박탈감, 열패감이라는 표현이 더 어울릴지 모르겠습니다. 루소는 그 자신의 재능에 대한 확신이 있었고, 그를 통해 끊임없이 상류사회에, 중앙으로의 진출을 꿈꾸었지만, 결국 좌절을 맛보고는 그런 허영을 포기하고(그러나 어쩌면 죽을 때까지 루소는 그 허영에서 벗어나지 못했는지도 모릅니다. 프랑스 혁명을 비판하였던 영국 휘그 보수주의자 에드먼드 버크는 루소가 가진 것은 오직 ‘허영’ 뿐이라고 매도하기도 하였습니다.) 자신을 찾는 길로 선회합니다.

“마침내 결심이 서고 굳은 각오가 서자... 그들이 뭐라고 말하든 나는 내 길을 갔다. 자기 개혁은 우선 신변부터 시작했다. 금테 두른 복장과 희고 긴 양말을 버리고 가발도 둥근 것으로 하고, 칼도 차지 않았다. ‘그렇다, 다행히도 이제는 시간을 알 필요도 없다.’ 이렇게 생각하자 즐거운 기분이 되어 시계도 팔아 버렸다.”

그러한 루소에서 당시 프랑스 인민들은 자신들의 친구, 아니 바로 자신들의 모습을 발견할 수 있었을 것이며, 루소가 창출한 인물들에서 희노애락을 함께 하며 인간 존엄의 보편적 가치를 공유할 수 있었던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서두에서 얘기한 대로 루소의 베스트셀러 소설 <쥘리, 혹은 신 엘로이즈>는 사랑에 기뻐하고 고통받는 순수한 남녀들의 만남과 이별, 애정과 인륜을 생생하게 그렸으며, 당시 프랑스 아니, 유럽 전역에서 수많은 사람들은 그 주인공들과 함께 인간 본연의 감정과 애처로운 운명에 같이 울고 웃었습니다. 그리고 그럼으로써 그들 자신의 인간성, 신분과 종교의 차이에 의하여 구속될 수 없는, ‘자연적’ 인간으로서의 본질을 확인하게 되었던 것입니다.

이와 같은 같은 인간으로서의 동류(同類)성의 확인 속에서 프랑스 인민들의 삶은 잿빛 무채색에서 환한 유채색으로 바뀌었던 것입니다. 모든 평범한 인간들의 자기신뢰 그리고 인간선언, 그것이 바로 프랑스 혁명이 프랑스 전 인민들에게 퍼진 근본적 배경이며, 혁명 이후 지금까지 자유, 평등, 박애를 사람들 마음에 계속 살아 있게 한 근본 원인이라고 생각합니다.


V. 맺음말


현대 리버럴리즘의 대가였으며, 하버드대 정치학부에서 정치철학과 법철학을 가르쳤던 슈클라(Judith Shklar)는 루소에게 깊은 감화를 받았습니다. 그는 루소를 플라톤 이래로 가장 예리한 문명비판가로 꼽았고, ‘천재적인 부정의의 수집가’, 그리고 ‘패자(loser)들을 호머’라고 불렀습니다.

그는 ‘로크의 개인주의’와 ‘루소의 개인주의’를 구분하였습니다. 전자는 강자의 개인주의이고 후자는 약자의 개인주의라는 것입니다. 말하자면 로크의 리버럴리즘은 사회 엘리트의 입장에서 합리적 국가 원리를 구성하려는 시도였다면, 루소의 리버럴리즘은 없는 자들, 고통받는 자들의 입장에서 새로운 사회에 대한 염원을 표출하는 것이었다고 생각합니다.

이러한 루소의 사상이 프랑스 혁명, 구체제의 전복과 연결되는 것은 오히려 당연한 것인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그것은 체제의 변혁 이전에 인간성의 변화, 인간 동류(同類)성의 회복을 뜻하는 것이었다고 생각합니다. 탁월한 작품은 훌륭한 인격에서만 나오는 것은 아닐 것이며, 인권은 도덕적 인격에게만 인정되는 것은 아닐 것입니다. ‘루소는 우리와 같은 인간, 우리가 좋아하고 또 미워하는 우리 곁에 있는 인간이었다’는 얘기는 참으로 루소 사상의 역사적 의의에 대하여 적확한 해명이라고 생각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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