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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희자 작가

사랑법

작성자박희자|작성시간21.04.27|조회수40 목록 댓글 0

사랑법

 

 

 알람이 잠을 깨웠다. 창문 너머로 바람이 바삐 지나가는 소리가 들렸다. 이런 날에는 이불 뒤집어쓰고 늦장을 부리고 싶은 마음 간절했으나 남편은 2주 전부터 오늘을 손꼽아 기다렸다. 어제는 메모지를 체크해가며 배낭을 꾸렸다.

주말 새벽길은 여유로웠다. 바람이 이곳을 지나면서 심술을 부렸다는 것을 융단을 깔아놓은 은행잎을 보면서 알 수 있었다. 오래전에 보았던 영화 ‘뉴욕의 가을’이 연상되었다. 가슴을 설레게 하던 남자 주인공 리챠드기어가 떠오른다.

남편 옆모습을 보았다. 40년 무사고 운전을 했으면서도 운전석에 앉으면 앞 만 본다. 이렇게 아름다운 공간을 지나면서도 남편의 생각은 오로지 운전이다. 한 번쯤은 가을이 다 가고 있음을 아쉬워도 해 보고 우리 인생 여정이 어디쯤일까 함께 헤아려도 보고 싶지만, 오늘도 그런 내 감정에는 무심하기만 하다. 앙다문 턱밑으로 삐져나온 수염에는 밤새 뿜어낸 담배 연기가 하얗게 묻어있다. 피곤이 가득한 얼굴에 깊은 주름이 선명하다. 훔쳐본 모습이 왠지 낯설고 겸연쩍어 혼자 키득거렸다.

 석남 터널 주차장에 주차했다. 차에서 내리니 산바람이 제법 차가웠다. 지팡이 키 높이를 맞춰주며 닫혀있던 남편 말문이 열리기 시작했다. 등산복이 너무 얇다. 등산화 끈은 당겨 묶어라! 장갑은 끼고 출발해라 걸으면서 장갑 끼면 넘어진다. 이제 첫발을 뗐을 뿐인데 일거수일투족에 입을 덴다.

 여기서 6~7백 미터를 올라야 정상이다. 가는 동안 '팔을 크게 흔들어라, 쉬지 말고 천천히 계속 걸어야 운동이 된다. 호흡이 왜 그렇게 가쁘냐? 평소에 운동 안 한 표가 이럴 때 나타난다, 등등 이어질 남편 노파심은 뻔하다. 남편 말에 의하면 잔소리 같지만 모두 나를 위해서 하는 말이란다. 남편이 주장하는 사랑ㅈ법에 얽매어 종일 함께 지낼 것을 생각하니 정상에 오를 일보다 걱정이 더했다.

겨울 초입이고 시간이 일러서인지 사람들의 모습이 뜸했다. 계곡을 따라 천천히 쉬지 않고 올랐다. 식을 줄 모르는 남편 이야기를 소화 시키려면 좀 치닫고 싶지만, 호흡이 힘들어 멈춰 서기라도하면 틀림없이 잔소리에 제동이 걸릴 것이다.

 정상에는 사람들이 가득했다. 가지고 온 도시락으로 식사를 마쳤다. “해가 짧으니 하산 길은 서두르자” 는 남편 말에 제법 속도를 냈다. 중봉 즈음 내려오면 남편이 좋아하는 산장이 있다. 뜨거운 커피로 피로를 풀기도 하고, 때로는 동동주로 반쯤 내려온 여유를 즐기기도 했다. 들어 줘야 할 말이 많은 오늘은 시간을 더 길게 썼다.

 하산해서 석남사 입구 온천에서 몸을 씻었다. 피곤이 한결 가벼워진 남편 모습을 보니 안심이 되었다. 종일 방치해 놓은 휴대폰이 궁금했다. 이리저리 뒤져봐도 휴대폰이 보이지를 않는다. 남편 폰으로 눌러 보았으나 대답이 없다. '중간중간 사진을 찍었었다. 온천에서는 꺼내지 않았었다. 마지막으로 만졌던 것이 중 봉 산장에서였다. 친구와 통화를 마치고 배낭에 넣었다. 그때 주문한 커피가 나왔었고, 커피 가지러 움직이다가 배낭을 바닥으로 떨어뜨렸었다. 주변을 살피지 않고 배낭만 챙겼으니 그곳에서 떨어져 있겠구나’ 하는 생각이 정리되었다. 무음으로 돌려놓았다 해도 산장이 조용해지면 소리가 들리지 않으려나 싶었다. 여러번 재발신을 눌러 보아도 컬러링만이 애닮프게 주인을 찾고 있었다. 난감했다. 휴대폰 값도 값이지만 사업하는 나로서는 폰에 모든 정보가 들어 있다. 혹여 산장 주인이 아닌 다른 사람 손에 넘어가기라도 했다면 내일부터 업무에 문제가 크다.

“내가 그렇게 매사에 조심하라고 했는데 내 말에 신경도 안 쓰더니 잘했다” 남편 목소리 톤이 높아졌다. 나는 개미 기어가는 소리로 “미안해요! 나 그 산장에 찾으러 가야겠어요.”

입술이 바짝 타들어 갔다. 어떤 적절한 표현이 남편 마음을 움직여 잔소리를 덜 듣고 일을 해결할 수 있을까? 하는 조바심이었다. 차를 돌리며 “나는 태워다 주기만 하지 산에는 못 올라간다.” 남편은 입을 굳게 다물어 버렸다. 운전 중이라고는 하지만 화가 많이 났음이다. 차라리 이럴 때는 잔소리를 듣는 것이 편할 듯했다. 차를 세우며 하는 남편 말이 단호했다.

“나 여기 있을 테니 당신 혼자 갔다 와라!”

나는 애꿎은 등산화 끈을 조여 맸다. 대답은 했으나 이미 산 그림자가 반이 덮여있었다. 낮에 가득했던 태양도 희미해져 한 발 내딛지 못하는 내 발걸음을 비웃기라도 하듯 빠르게 산을 넘어가고 있었다.

 배가 고팠다. 온천 후라 한기가 더했다. 가랑잎 떨어지는 소리가 을씨년스럽다. 혼자서는 도저히 산을 오를 수 없다. 그러나 한번 결정하면 번복이라고는 없는 남편의 냉철함을 아니 고집을 알고 있다. 난 차 밖에서 서성이고, 남편은 차 안에서 침묵이 흘렀다. 나는 당황했다. 어떻게든 뭔가는 해야만 했다. 용기 내어 차 문을 열었다.

“당신! 여기 혼자 있다가 호랑이 나타나면 어떻게 할거야?”

눈을 보며 웃음 반 울음 반을 섞어 농담 아닌 농담을 던졌다.

 밤샘 근무한 육십 대 중반을 훨씬 넘긴 사람을 두 번씩 산에 오르게 한다는 것은 내가 생각해도 무리였지만 나로서는 방법이 없었다.

“나 대신 당신 물어가라고 할거다.!”

볼멘소리로 대꾸하며 채비를 하고 나서는 남편의 바지 허리를 움켜쥐고 뒤를 바짝 따라붙었다. 고맙기도 하고 무섭기도 했다.

잡힌 허리에 진도가 나지 않으니 “천천히 따라오라”하고는 평소 별명이 무색하지 않게 산신령이 되어 산등성이로 자취를 감춰버렸다.

 이미 해는 없다. 남편 발자취를 더듬었다. 나뭇가지에 걸려 넘어지고 미끄러지며 올라갔다. 조금이라도 남편과의 거리를 좁히려 안간힘을 썼다. 뒤에서 무언가 나타나 나를 옥죄어 올 것 같아 등골이 오싹했다. 불빛 하나 없는 깊고 깊은 산중에서 나의 모든 촉각은 남편뿐이었다. '이 밤에 누가 나를 위해 이렇게 험한 산을 오르겠는가? 이 순간 만약에 저 위에 남편이 없다면, 하고 생각하니 다리에 힘이 풀리고 남편의 존재가 너무도 크게 느껴졌다. 날마다 듣고 사는 잔소리 스트레스쯤은 아무것도 아니다 싶었다.

  내가 틀린 것이 아니고 다르다는 것을 남편이 인정하지 못하듯 나 역시 그런 남편의 성품을 이해하지 않았다. 미안함과 고마운 감정이 섞여 눈물이 펑펑 쏟아졌다. “여보! 여보!”하고 부르고 싶었지만 메아리가 무서워 망설이고 있는데 멀리 산 위에서 호루라기 소리와 남편 목소리가 들려왔다. 평소에 나를 부르면 “남자 목소리가 묵직하지 못하고 하이톤이라 잔소리를 잘하나 보다”며 듣기 싫어했던 목소리였다. 지금 멀리서 어둠을 가르고 들려오는 남편의 목소리는 거룩한 천상의 소리였다.

 휴대폰 따위는 문제가 아니었다. 죽었던 사람이 살아 돌아온 듯 반가웠다. 언제 호루라기며, 손전등까지 챙겼는지 남편 사전 준비가 결코 지나친 것만은 아님을 알게 되었다.

 신혼 시절부터 남편은 나에게 해 주고 싶은 것이 많았다. 채워주지 못하는 자신의 무능함이 안타까움을 넘어 큰소리라도 치면서 매사에 내 일에 관여하려 했다. 그러면서 자신의 존재를 확인시키는 것이었고. 나를 사랑해 주고 있다는 스스로의 위안인 것을 나는 처음에는 알고 있었다. 시간이 지나면서 고쳐지지 않는다고 쉽게 결론을 내리고 지나쳐 버린 것이 습관으로 굳어져 갔다. 이제는 그것이 일상이 되어 남편의 속마음은 묻혀 버렸고 잔소리로만 해석되어 귀찮아했다.

 내가 좀 더 사려 깊고 사랑이 깊은 아내였다면 바쁘게 산다는 이유로 건성으로 넘기지 않고 마음을 헤아렸어야 했다. 그랬다면 지금보다 더 행복한 부부로 살아오지 않았을까! 지혜롭지 못해 40년의 세월이 흐른 오늘에서야 남편의 사랑법을 헤아려보는 나를 반성했다.

 어서 내려가자며 손전등을 비춰주는 남편 머리 위로 밤하늘에 별들이 빛나고 있었다. 꼭 잡은 허리춤에서 내 손을 풀어 잡으며 능청스럽게 말을 했다.

”산 아래 내려갈 때까지 호랑이가 당신 안 물어간다면 온천 앞 oo식당에서 산장 주인이 맡겨 놓은 당신 폰이 주인을 기다리고 있답니다!”

작은 것까지도 노파심으로 가득 찬 사람이다. 오늘같이 큰 실수에 넉넉한 마음으로 해결해 주는 남편이 멋있고 든든하다. 곧 폰을 만나면 검색해 봐야겠다. 가지산 밤하늘의 별빛이 반짝이는지 내 남편 속 깊은 사랑이 더 반짝이는지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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