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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희자 작가

vip고객

작성자박희자자희|작성시간22.04.13|조회수64 목록 댓글 0
vip 고객 


1. 주거래은행 지점장이 퇴직 후, 처음 찾아간 은행은 허전했다. 오늘도 여느 때처럼 스스럼없이 창구 앞에 앉았다. 살갑게 맞아주던 담당직원의 얼굴이 아니었다. 타 은행으로 발령되었다는 말에 커닝하다 들킨 듯 나는 민망해졌다.
2. 은행 입구로 나와서 대기표를 뽑고 내 순서를 기다렸다. 그동안 나는 은행에 오면 시간에 쫓기는 일 없이 일 처리를 할 수 있어 편리했었다. 이제는 예외일 수 없다는 아쉬움에 마른침을 삼켰다.
3. 사람들이 쉼 없이 오고 가고, 업무 중인 직원들은 저마다 활기찬데, 나는 왠지 텅 빈 듯 헛헛하여 허공을 응시했다. 순간, 환하게 웃으며 위, 아래층을 동분서주하던 지점장이 오버랩되었다.
4. 사업을 하면서도 경제관념이 부족했던 나였다. 은행에 신용을 쌓으면 자금 운용이 유리하다는 개념이 없었다. 사무실에서 가까운 제2 금융권에서 거래를 해왔다.
5. 몇 년 전, 사업 확장이 불가피해졌다. 충당해야 할 자금이 원활하지 않아 발을 굴렀다. 지켜보던 동료는 이곳 은행의 지점장을 소개해 주었다. 지점장과 첫 대화에서 사업자 편의를 돌보려는 의지를 엿볼 수 있었다. 신용도 담보도 없던 나는 천군만마를 얻은 듯 든든했다. 감사해 하는 나에게 그는 윈윈임을 설명했다.
6. 누구에게 선뜻 내놓지 못할 재무제표를 그에게 활짝 열어 보였다. 사업 이력과 신용이 나쁘지 않다며 현금 흐름을 분석했다. 불필요한 것은 없애고, 부족한 것은 보충했다. 사업 자금은 물론 세금 혜택에서 노후 자금까지 정비해 주었고, 은행 사용설명서를 가르쳐 주었다.
7. 특히, 건물 매입 때 무리해서 대출을 받았었다. 제2 금융의 높은 금리로 속앓이 하면서도 이자율이 낮은 시중 은행으로 갈아탈 엄두를 못 내고 있던 터였다. 은행 활용법을 알게 되면서 가정 경제를 조율해 이곳 은행으로 옮겨 올 수 있었다. 정신적, 경제적으로 안정되니 큰 도움이 되었다.
8. 내 발 등에 불을 끄고 나니 마음에 여유가 생겼다. 한때 나처럼 기댈 곳 없어 다람쥐 쳇바퀴 돌듯 제자리를 맴돌고 있는 동료가 눈에 들어왔다. 그에게도 누군가가 지렛대 역할을 해 준다면 조금은 쉽게 헤쳐나갈 수 있지 않을까 싶었다.
9. 동료가 나를 지점장에게 소개했듯이 나 역시, 어려움에 처한 동료를 지점장에게 소개했다. 지점장은 그들의 사업 자금을 안정시켜주었고, 신용관리와 은행 활용 방법도 안내해 주었다. 백문백답에 희망의 메시지도 빠지지 않았다. 금융인 그 이상의 모습에 감동받아 나는 동료들의 손을 잡고 지점장실을 넘나들었었다.
10. 내 번호가 호출되었다. 과장 직급을 달고 있는 직원이 내 업무를 담당했다. 계좌거래내역을 열어본 얼굴에 화색이 돌았다. “우리 은행 vip 고객님이셨군요!” 과장은 새로 부임한 지점장실로 나를 안내하겠다며 친절을 베풀었다.
11. 인사를 하는 것이 옳겠다 싶어 동의했다. 지점장실에 전화를 돌리고 과장은 앞장섰다. 이층 지점장실로 오르려는데, 어느새 지점장이 일층까지 단숨에 달려와 나를 맞았다.
12. 인사를 마치고 일어서는데 지점장이 일층 로비까지 내려와 배웅했다. 일면식도 없던 사람이었다. 그런 사람이 초면에 나를 은행 vip 고객으로 환영하는 것은 거래내역보다는 대출 때문이 아니었을까 싶었다. 아무튼 뜻밖에 환대에 비로소 내가 이 은행에 우수고객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13. 전 지점장에게 “내 인생 은인 중 다섯 손가락에 꼽을 수 있다” 며 내가 진담 반 농담 반으로 고마운 마음을 전할 때 그는 늘 손사래를 쳤었다.
14. 내가 소개시켰던 동료들은 대출 요건이 충족하지 않았었다. 그런 그들을 위해 지점장은 많은 노고를 아끼지 않았으면서 결과를 두고는 나에게 고마움을 돌렸었다. 내 무거운 짐을 덜어 준 지점장에 무한 신뢰와 감사함이 깊이 새겨져 있던 나는 그런 인사말을 흘려들었었다.
15. 오늘, 바뀐 분위기에서 내 입지가 실추되어 의기소침했던 마음은, 새로온 지점장을 만나고는 온데간데 없다. vip 고객으로 대접받는 분위기에 순간 우쭐해 본다. “ 빚도 능력이라더니 맞다! 맞네! ” 언젠가 친구가 나를 위로해주며 했던 말을 내 방식대로 해석해 보지만 입가에는 자조적 미소가 베어 나왔다.
16. 은행 문을 박차고 나서며 강다짐을 했다 “ 그래! 그딴 능력! 두 번 다시 인정받지 말자! 하루라도 빨리 이 은행의 vip 명단에서 탈퇴해 버리자!”  그날이 언제일까 아득하여 올려본 하늘에는 해가 중천에서 기울고 있었다. 가슴을 활짝펴고, 두 주먹 불끈 쥔다. 내딛는 내 발걸음이 바빠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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