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육사의 시 <절정>의 올바른 해석 ................ 마광수
교과서에 실린 작품들은 더욱 조심해서 감상할 필요가 있다. 왜냐하면 교과서에 실려 있으면 으레 학교에서 가르친대로만 이해하는 경향이 있기 때문이다. 학교에서 가르친 것이 잘못됐다는 것이 아니라 그것은 단지 다양한 해석 가운데 하나일 뿐이라는 것이다. 이를테면 일제시대 저항 시인의 작품의 주제나 제재를 꼭 광복이나 독립과 연관시킬 필요는 없다는 것이다. 이육사의 <절정>에서 무지개에 대한 해석을 통해 생각해 보자.
매운 계절의 채찍에 갈겨
마침내 북방으로 휩쓸려 오다.
하늘도 그만 지쳐 끝난 고원
서릿발 칼날진 그 위에 서다.
어데다 무릎을 꿇어야 하나
한 발 재겨 디딜 곳조차 없다.
이러매 눈 감아 생각해 볼밖에
겨울은 강철로 된 무지갠가 보다.
1940년 1월 <문장>에 발표된 이 작품에서 문제가 되는 것은 '겨울은 강철로 된 무지갠가 보다'라는 구절이다. 보통 희망에 대한 역설적 표현으로 본다. '겨울(원관념)'을 '강철로 된 무지개(보조관념)'로 비유한 것으로, 다시 어떠한 겨울(일제 치하의 고난)도 민족의 무지개(희망)를 꺾지 못할 것임을 상징적으로 드러내고 있다고 해석한다. 이렇게 보는 근거는 시인이면서 지사요 투사였던 육사가, 22세가 되던 1925년 의열단에 입단한 후 줄곧 지하 저항활동을 벌이면서, 17회나 항일 민족운동에 연루되어 옥고를 치루는 등 그야말로 잠시도 쉴 수 없는 극한적인 삶을 살았기 때문이다. 따라서 '매운 계절', '채찍', '서릿발 칼날진', '강철' 등의 시어는 강인한 남성적 언어(성차별?)로서 육사의 역사인식이 적극적이며 냉철하였음을 보여 준다는 것이다.
그래서 제1연은 '매운 계절의 채찍(일제 시대에 민족이 겪어야 했던 수난)'에 쫓겨 조국으로부터 황량한 북만주로 내몰리고 만 시인의 모습을 통해 방황하는 민족 전체의 모습을 그린 것이고, 제2연은 본의 아니게 북방으로 쫓겨난 시인이 마주하게 된 극한상황이 ‘하늘도 그만 지쳐 끝난 고원’이라는 감정이입 표현으로, 하늘까지도 지쳐 버릴 정도의 광막한 극한 지점을 나타낸다고 해석되곤 한다. 제 3연에서 시인이 어딘가를 향해 기도할 여유마저 허락하지 않는 절망적 상황을 얘기하고 있다는 판단에 따른 해석이다. 그러나 분명 이런 해석도 가능하지만, 다음과 같은 정반대의 해석도 가능하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이 작품은 육사의 시 가운데서도 가장 우울한 시다. <청포도>에서는 ‘청포를 입고 찾아올 반가운 손님’을 기다리고 있고, <광야>에서도 언젠가 ‘백마를 타고 오는 초인’을 기대한다. 그런데 <절정>에서는 동사(凍死) 직전의 극한 상항에서 느껴지는 한없는 절망과 낙담을 노래하고 있는 것이다. 1연과 2연에서 우리는 만주의 허허벌판에서 영하 수십도를 넘는 강추위에 떨며 방황하고 있는 고독한 시인의 모습을 읽을 수 있다. 3연에 가면 그러한 절망이 애타는 호소로 변하여 누군가에게 ‘무릎이라도 꿇고’ 하소연하여 추위와 굶주림의 육체적 고통으로부터 모면되기를 바라는 시인의 절박한 심정이 드러난다. 이러한 시적(詩的) 문맥이 약간 다른 톤으로 바뀌어지는 것이 바로 4연인데, 그 까닭은 ‘강철로 된 무지개’라는 구절이 있기 때문이다.
일반적으로 ‘무지개’라는 말이 언제나 ‘희망’의 상징으로 쓰이고 있기 때문인지 이제까지 대부분의 비평가들은 4연을 해석할 때 극한적 ‘절망속에서도 희망을 잃지 않는 시인의 불굴의 의지’로 보는 것이 보통이었다. 말하자면 사회주의적 리얼리즘 문학 이론에서 말하는 ‘낙관적 전망(展望)’의 이론을 수용한 셈이다. 그래서 가장 많이 통용되고 있는 해석이 ‘비극적 황홀경’이라는 애매모호하기 짝이 없는 개념이다. 이육사가 수없이 옥고를 치르다가 옥사한 저항시인으로 알려져 있기 때문에 그러한 해석을 더욱 정당화시켜 주었을 것 같다. 그러니까 시인은 아사(餓死)와 동사(凍死) 직전의 비극적 한계상황 속에서도 끝까지 희망을 버리지 않고 눈을 감고서 강철 같은 희망을 품어본다는 의미로 해석하는 것이다.
그렇지만 내 생각에 이러한 식의 해석은 무리가 따른다. 아무리 기개가 드높은 독립운동가라 하더라도 육체적 고통의 극한 상태가 되면 지칠 수 밖에 없다. 그러니까 4연 첫줄과 ‘눈감는’ 행위는 기가 막혀서 눈을 감는 것이지 황홀경을 꿈꾸려고 눈감는 것은 아니다. 인간은 어떤 극한상황에 처하게 되면 눈을 감음으로써 일시적으로나마 현실에서 도피하려고 한다. 폭격이 있든가 천둥 번개가 칠때 머리부터 이불속으로 쳐박는 행위가 바로 좋은 예인데, 그것은 이불속이 안전해서가 아니라 캄캄해서 아무것도 안 보이기 때문인 것이다.
시인은 하도 기가 막혀서 눈을 감았다. 그러니까 이제까지의 노력이 물거품처럼 여겨지고 추운 겨울이 가면 반드시 봄이 올 것이라는 기대감조차 생겨나지 않는다. 그는 ‘겨울’(고난의 상징이다)이 ‘무지개’와 같은 것이라고 믿었었다. 여기서 무지개가 뜻하는 것은 ‘잠깐 떴다가 덧없이 사라지는 것’으로서의 의미이다. 그런데 아무리 노력해 봤자 무지개는 사라질 기미가 보이지 않는다. 그러니까 시인 또는 이 민족이 처하고 있는 고난의 상징으로서의 무지개는 보통 무지개가 아니라 ‘강철로 된 무지개’인 것이다. 강철로 무지개 모양을 만들어 놓고 거기다가 빨주노초파남보로 페인트칠을 해 놓은 무지개 -그런 무지개가 사라질리가 없다. 그러므로 이 구절은 ‘고난(겨울)은 영원’하다는 의미가 되고, <절정>이라는 제목이 뜻하는 것은 ‘절망의 절정’이 된다.
시를 해석할때 가장 중요한 것은 모든 선입견을 버리고 ‘문맥의 순리’를 쫓아가는 태도이다. 그런데도 지금껏 많은 비평가들은 작가의 생애에 맞춰서 시의 문맥을 억지로 조작하려고 했다. 인생도 마찬가지다. 절망이든 희망이든 우리가 처한 상황을 직시하려는 노력이 중요하다. 막연한 낙관주의는 필요치 않다.
(마광수 문학론집 <삐딱하게 보기>에서 발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