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번 경향신문의 무성의 면접과 관련해 한 언론의 취재요청이 있었습니다. 저는 수동적으로 취재에 응하기보다는 기고를 원하니 지면을 달라고 했습니다. 저와 제 동료들이 겪은 부당한 차별에 대해, 남의 입을 한번 거쳐 세상에 알리는 것보다 날 것 그대로의 목소리를 전하고 싶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다 우리가 겪어온 차별을 굳이 특정언론사 지면을 통해 전달할 필요가 있을까 회의하게 됐습니다. 늘 솔깃한 기사거리를 찾아 헤매여야 하는 직종 특성상 이번엔 운 없게도 경향이 그들의 레이더에 걸려 들었지만, 그들 역시 오래도록 여성차별을 관행으로 만들어온 언론계의 일부라는 불신감 때문이었습니다.
1. '전원 면접'의 실체
대부분의 언론사 시험에 응시하는 인원 중 여성비율이 더 높고 필기시험을 통과하는 비율도 높습니다. 객관적인 시험성적으로 당락을 결정하는 다양한 고시 결과에 여성합격자 수가 많은 상황과 일치합니다. 그러나 언론사 시험에는 서류심사, 필기시험 등 비교적 객관적 잣대로 심사하는 과정 외에, 심각한 편견과 차별이 개입 가능한 면접이라는 마지막 과정이 있습니다.
이번 경향신문 취재기자 채용과정에서도 여성지원자들의 필기시험 합격자 비율이 높았습니다. 그리고 바로 이 맥락에서 경향은 참 오묘한 아량을 베푸셨습니다. 필기시험을 통과해 실무전형을 보는 전원이 최종면접을 본다는 것입니다. 실무평가 당시 경향 측은 “실무평가 결과로 누군가를 떨어트리는 게 아니라, 지원자들을 다양하게 평가하기 위한 것”이라고 그 이유를 설명했습니다.
작년 사례를 적용해 보면, 남성지원자들에 비해 월등히 많은 여성지원자들이 필기시험을 통과했고, 실무평가에서 당락을 갈라 최종면접을 봤다면 아마 더 적은 수의 남성지원자들이 생존했을 것입니다. 하지만 경향의 오묘한 아량에 의해 '(남성)지원자들을 다양하게 평가’해 결국 최종 합격자 비율 5:1의 결과를 만든 셈입니다.
2. 지원자의 무능력 탓인가
경향은 올해 합격자 성비를 들며 차별은 없었다고 말할 수 있겠지요. 남녀 비율 3:2(이름으로 추정) 정도면 합격자 6명 중 여성이 1명이었던 작년 상황에 견줘 수치상으로는 설득력 있어 보이니까요. 극심한 차별에도 침묵을 지켰던 작년 여성지원자들과 달리 왜 이리 유난이냐고 발끈할 수도 있겠지요. 그러나 이번 최종면접에 오른 여성비율이 7:3 정도로 높았음에도, 결과는 3:2 비율로 남성이 다수입니다. 여자들은 쓸데없이 수만 많고 대다수가 무능한 존재라 이런 겁니까? 그나마 작년 경우와는 달리, 올해는 면접 직후부터 아랑과 트위터를 통해 여러 사람들이 문제제기를 했던 과정이 미약하게나마 압박으로 받아들여져서 최종합격 비율에 반영이 됐기를 기대합니다. 일례로 현직 경향기자가 자사의 고참기자들의 여러 위선적인 모습들을 내부고발한 글을 링크해 두었었는데 지금은 삭제해 버렸더군요.
아무튼, 이제는 여성차별은 없었다고 강하게 반론하며 지원자들의 능력 탓을 할 근거가 생겼을 겁니다. 실제로 많은 지원자들이 면접관들에게 무례를 겪고 나와서는 외려 자기 실력 탓이 아닌가 깊은 자책들을 하니까요. 최종면접에서 한 여성지원자가 면접장에 들어섰는데 여섯 명의 면접관이 2분 여간 아무 질문을 안 하다가, 자기들도 민망했는지 "누가 질문 좀 하지?”라며 서로 눈치보며 질문을 떠넘기거나, 다른 여성지원자를 앉혀 놓고 두세 명만 질문하는 도중에 어떤 면접관은 턱을 괴고 삐뚤게 앉아 책상만 바라다 본 일 등등. 이런 무성의함은 그들이 여성이어서가 아니라, 경향신문 입사를 꿈꾸기에는 몰염치할 정도로 실력이 부족한 이들이었기 때문이었다고 책임회피를 할 수도 있을 겁니다.
호미로 막을 일을 가래로 막게 되는 상황입니다. 여성차별이 없었다고 주장하기 위해, 취업을 하기 위해 어쩔 수 없이 약자의 위치에 설 수밖에 없는 숱한 젊은이들을 모욕한 반인권적인 언론으로 커밍아웃하게 되는 거죠. 하지만 온-오프라인 추산, 10여명의 여성지원자들이 의문을 제기한 것에 대비, 아직까지 남자 지원자가 무성의한 대우를 받았다는 제보는 없었습니다. 또한 여성지원자 중 한 분이 자신의 면접 분위기는 좋았다고 아랑에 밝혀주셨고, 오프라인에서 남자지원자 한 분이 아주 화기애애했던 분위기를 전해주셨던 바 있으나, 최종결과 여성분은 탈락이고 남성분은 합격하셨고요.
최종결과를 떠나서 일단 경향이 제시한 서류전형 다 통과하고 필기시험까지 통과해서 그 자리에 오른 이들입니다. 워낙 실력이 떨어져서 그랬다고 지원자들에게 덤터기 씌우지 마세요. 그런 자들을 면접에 올린 경향의 채용시스템을 먼저 재점검 하고 담당 책임자들을 문책하세요. 경향의 채용과정은 정말 완벽하지만 어쩌다 보니 실수로 저급한 지원자들이 올라오고, 우연히도 그 중 유독 여성들이 많았더라도 예의만은 지키십시오. 그것은 인간사회의 가장 기초적인 상식이기 때문입니다.
3. 경향은 과연 독자를 무서워 하는가
독자만을 무서워 하는 경향신문의 면접관님들, 갑질도 정도껏 하셨어야지요.
보잘것없는 지원자이지만, 면접장 밖으로 나가는 순간 우리 모두가 독자입니다. 나이 어리고 힘 없고 빽 없고, 생활고에 시달리며 간절히 취업자리를 원하는 약자라고만 생각하는 일에 당신들은 그간 너무나 익숙해 있었나 봅니다.
단단히 착각들 하시는 게, 면접 때 당신들만 지원자를 평가하고 당락을 결정할 수 있는 칼자루를 쥐었다고 생각하는 점입니다. 죄송하지만, 지원자들도 면접관들의 태도를 통해 경향의 됨됨이를 평가하고 입사를 거부할 수 있습니다. 아니, 그 이상으로, 당신들이 무서워 한다는 독자 입장에서 경향의 그릇된 모습을 공개적으로 질책하고 해명을 요구 할 수 있고, 전면적인 불매운동에 돌입할 수도 있는 겁니다.
4. 또 다른 변명거리는 없는가
물론 있을 겁니다. '이번 채용면접 때 명백히 여성차별도 없었고, 지원자들 우위에서 인권유린을 한 적도 없었다, 다만 다수의 지원자를 면접하는 동안 면접관들 연령상 체력적으로 한계가 와서, 불가피하게 오후에 면접 본 인원들에 한해서 전력을 다해 충실할 수 없었던 점 심히 유감스럽게 생각한다…’ 같은 논지로요.
경향 최종면접은 이름 순으로 오전조(9명)와 오후조(12명)로 나뉘었습니다. 최종합격자 다섯명 전원이 오전조인 걸로 추정하고 있습니다. 따라서 당신들의 변명에 일견 일리가 있어 보입니다. 하지만 불행인지 다행인지, 경향의 무관심 면접에 대해 최초로 아랑에 언급한 분은 이번에 합격하셨다고 재차 아랑에 귀띔을 하셨습니다. 면접관들의 무례는 오후에만 집중된 게 아니라 오전부터 이어졌던 것입니다. 즉, 당신들은 늘 그런 겁니다. 무례와 불손함이 일상이거나, 오전 시간 면접도 견디기 힘들만큼 늘 저질체력인 것입니다.
정의구현에 앞장 서온 대표적인 진보언론 면접관들의 인격을 의심하고 싶지 않습니다. 오전시간의 면접도 견디기 힘들만큼 체력적으로 연로할 뿐이라고 제발 믿고 싶습니다. 당신들이 늘 약자에게 무례했던 게 아니라.
5. 과연 채용 때만 문제인가
이번 사태를 계기로 경향면접 시스템의 개혁을 요구합니다.
필기시험 통과자 성비를 면접관 성비에 반영해 주십시오. 여태껏처럼 여성이 7:3의 비율로 월등히 더 많게 필기시험을 통과하고 실무시험을 보게 된다면, 이번처럼 전원 연로한 남성면접관으로 배정하지 말고 7:3의 비율로 성비를 준수해 주십시오. 물론 남성중심적인 언론계 생활을 오래 하며 성별만 여성인 여기자 분들도 많은 걸로 압니다. 남성 이상으로 여성 후배를 차별하는 이들도 있다고 들었습니다. 그럼에도 필기시험 통과자 성비를 면접관 성비에 기계적으로 반영해 주시길 요청하는 건, 면접관의 남성집중 현상을 제도적으로 견제하다보면 자연스럽게 연령집중 현상도 해소되기 때문입니다.
새 제도를 당장 내년부터 시행하려 한들, 임원급만으로는 면접관 성비를 7:3으로 배정하기가 아마 현실적으로 불가능할 겁니다. 단적인 예로 경향신문 논설위원진 중 여성은 한 명 뿐인 걸로 알고 있습니다. 경향에게 있어 여성차별은 입사 때만 있는 게 아니라 채용 이후 승진 때도 지속적으로 있어왔다는 의미입니다. 단기적으로는 필기합격자 성비에 맞춰 여성 평기자들이 면접에 참여해 부족인원을 보완하다가, 장기적으로는 그녀들이 승진에 차별을 받지 않는 사풍을 확립해 여성 면접관 비율을 얼마든지 확충할 수 있는 정상적인 조직이 되길 바랍니다.
6. 우리의 용기는 자소서 용일 뿐인가
명색이 진보언론이라는 경향에게 이런 요청을 공개적으로 해본들 별 변화가 없을 거라는 체념이 들어 몹시 씁쓸합니다.
하지만 경향이 먼저 바뀌기 전까진 절대로 물러서지 않겠습니다. 우리가 다른 직종도 아니고 기자직을 지향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저 뿐 아니라 기자가 꿈인 대부분 여성들이 자기소개서를 통해 반복하는 내용이 있을 겁니다. 늘 약자에 편에 서서 그들의 목소리에 귀 기울이고, 불의에 당당하게 맞서겠다고요.
하지만 그런 거창한 말들이 모두 공염불인 게, 바로 우리를 약자로 생각해서 태연하게 불의를 저지르는 이들에게, 우리가 단 한번이나마 집단적으로 저항해 본 적 있습니까? 우리의 용기와 정의감은 그저 자소서 용이었을 뿐인가요? 언론사 입사시험 과정에서 우리가 봐야하는 것은 면접입니다. 왜 지속적으로 주접을 지켜 보면서도 아무런 저항을 하지 않나요? 직업적으로 사회 부조리를 파헤치고 부당함에 맞서야 할 우리 처지가 이 지경인데, 생계를 위해 다른 직종에서 또는 다른 입장에서 차별을 일상으로 겪고도 참기만 해왔던 분들의 상황은 오죽할까요?
다들 그동안 진심을 다해 자소서들 써서 여기저기 언론사에 보냈을 겁니다. 우리가 쓴만큼만, 그들 앞에서 부끄럽지 않게 삽시다.
여성만큼 차별 받고 소외 받아왔을 한 성소수자의 트윗 내용을 남기며 이만 마무리 하겠습니다.
- 똑똑한 여자일수록 제 주장을 우회적으로 표현하는 현상이 발견된다는 것은, 머리가 좋은 한국인 여성 청년들이 사회의 남녀차별에 굴복하는/야합하는 발화 형식을 체화하고 산다는 뜻. 그렇게 치사하게 살지 맙시다. 똑똑해서 시험 점수 높고, 영어 능력 시험 만점 맞고, 학점 최우수면 뭐하나. 2등 시민의 자세를 버리지 않으면, 전문가로서나 직장인으로서나 잘나가는 남자 개체의 매개 변수 노릇이나 하게 된다. 이건 주류 사회의 눈치를 보는 게이들도 겪게 되는 문제.
- '근데 자기의사 표현하거나 주도적으로 윗사람과 소통하면 안 친하던 남자구성원들이 갑자기 한가족이 되어 다구리해요. 거의 죽을뻔함.'이라는 멘션에 대한 대답 -> 당연히 개인적 손해를 감수하고 싸워야죠. 그리고 동시에 그걸 차별이라고 지적해야 합니다. 쉽지 않지만, 그런 싸움의 순간에 관망 태도를 버리고 싸움에 동참하는 여자 동료나 게이 동료가 있으면, 상황이 달라지기도 합니다. (미술평론가 임근준)
+ 한가지만 더 덧붙이겠습니다. 앞으로도 취재요청은 사양합니다. 괜히 먼 데서 찾지 마시고, 바로 옆자리의 동료 여기자들에게 물어보세요. 모두들 이 과정을 겪은 이들이고, 저보다 생생한 증언을 해주실 수 있을 겁니다. 그리고 진심으로 언론계 여성차별 문제에 대해 관심이 있으시다면, 소속 언론사 내에서 지금도 차별 받고 있을 그녀들과 부디 연대해 주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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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dumu 작성자 본인 여부 작성자 작성시간 14.12.04 근거 논쟁이 길었었는데, 국가인권위원회에 이렇게 정리되어 있네요.
마. 입증책임의 배분(안 제30조 및 제31조)
(1) 차별행위의 피해주장자와 그 상대방이 가지고 있는 정보 및 정보에 대한 접근성의 차이로 차별의 입증이 곤란함을 고려하여 차별행위의 피해주장자의 입증 부담을 완화할 필요가 있음.
(2) 차별행위에 고의 또는 과실이 없었음에 대한 입증책임은 차별행위자가 부담하도록 하고, 재산상 손해 및 손해액의 입증에 관한 특례를 규정함과 아울러 차별이 있었다는 사실의 입증책임은 차별을 받았다고 주장하는 자가, 이 법에서 금지한 차별이 아니라거나 정당한 사유가 있었다는 점의 입증책임은 차별을 받았다고 주장하는 자의 -
작성자dumu 작성자 본인 여부 작성자 작성시간 14.12.04 상대방이 부담하도록 함.
(3) 차별행위의 피해자의 입증 부담을 경감하여 차별피해에 대한 효과적인 구제에 기여할 것으로 기대됨.
그리고 전라도 출신들에게 채용차별을 한 남양공업에 대해 경향신문이 마침 '단독'보도를 터트렸습니다. 그나마 남양공업은 해명을 하고 있지만 경향은 지금까지 회피만 하고 있고요. 감시 역할을 부여받은 곳들은 감시를 받지 않기 때문이라 생각합니다. 먼저 경향의 해명을 듣고 내용에 따라 다음 행동을 하려 했는데, 이제는 국가인권위에 민원을 넣을 수순이 됐다고 생각합니다. 경향 스스로 자정능력이 없음을 인증했다고 판단하니까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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답댓글 작성자냐옴 작성시간 15.09.04 저도 지금 충격받았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