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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바른 신앙고백을 합시다

작성자둥근달|작성시간24.04.20|조회수4 목록 댓글 0

올바른 신앙고백을 합시다.

 

최근까지 어떤 분은 계속되는 요구에 시달리고 있습니다. 그것은 ‘신학교에 가야만 한다’ 는 신실한 사람들의 충고입니다. 요즘 경제적으로 매우 어렵고 힘든 가운데 있어서 이 말을 무시할 수 없는 비중으로 다가오고 있을 뿐만 아니라 거듭되는 재난에 가까운 어려운 일들은 자신이 하나님의 뜻을 받아들이지 않고 불순종하기 때문이며 계속 이렇게 불순종하는 한 더 심각한 일을 겪게 될 것이며, 결국에는 신학을 가게 될 것이라고 말합니다. 이런 말을 자주 듣게 되어 마음에 상당한 부담을 느끼지만 본인의 마음에는 자신이 하나님의 일꾼이 될 이유를 찾을 수 없고 마음의 감동도 오지 않아 혼란스러워하고 있습니다.

이런 일들은 우리 주변에서 흔하게 듣고 보는 일입니다. 성령이 충만하고 믿음이 세워지기 시작한 사람이라면 어렵지 않게 이런 권면을 한 두 번은 들었을 것입니다. 중도에 직업을 포기하고 목회자가 된 상당수의 사람들이 이와 비슷한 과정을 거쳐 사역자가 되었지만 여전히 갈등 속에 놓여 있습니다. 학벌도 많지 않고 어떤 재능도 없는 평범한 사회인이었던 사람이 소위 예언자라고 하는 사람들의 요구에 이끌려 목회자가 되었지만 제대로 된 목회를 하지 못하고 구멍가게 수준도 못되는 교회를 운영하는 경우가 너무도 많습니다. 그래서 날마다 갈등 속에 살며, 가족들은 극심한 혼란과 경제적 어려움에 시달립니다. 아내가 그 부담을 다 짊어지고 아이들은 풀이 죽어 살아갑니다. 그런 가운데 당사자는 이렇게 지지부진하게 목회를 하게 하실 것이면 도대체 자기 같은 사람을 그렇게도 간절하게 불러내신 하나님이 원망스럽습니다.

개중에는 이런 과정을 통해서 목회자가 되어 훌륭하게 목회를 하는 분들도 있습니다. 전부가 그런 것은 아니지요. 그러나 다수가 어려움을 겪습니다. 그렇다면 어딘가에 문제가 있는 것이 분명합니다. 아무런 준비도 되어있지 못하고 자질 역시 현저하게 모자라는 사람이 목회자가 된다는 것은 처음부터 어려움이 예상되는 일입니다. 그런데 그런 사람들이 목회자의 길로 나가는 배경이 바로 강압적인 ‘압박의 수단’이라는 점입니다. 경제적 곤궁이나 사업실패나 건강에 심각한 위험이 다가와 더 이상 거부할 수 없는 지경에 이르러 모든 것을 포기하고 그 요구를 받아들여 자의적이라기보다는 타의적으로 목회자가 된 것입니다. 그러나 그 요구에 순종했음에도 불구하고 목회는 순탄치 않으며 오랜 동안 어려움을 면할 길이 없어 또 다른 갈등이 생겼습니다. 이제는 목회를 계속해야 할지 말아야 할지 심각하게 고민이 됩니다. 그런데 이때는 아무도 말해주는 사람이 없다는 것입니다.

신학을 하기 전에는 그렇게도 다구치고 위협하던 그 많은 목소리들이 지금에는 모두 침묵하고 있고 자신만 홀로 고민하고 갈등하면서 괴로워합니다. 그러나 이미 모든 것은 결정된 후이고 싫든 좋든 목회의 길을 가지 않을 수 없어 때늦은 후회가 밀려옵니다. 그렇다면 이분들이 과연 어떤 부분을 소홀히 했고 어떤 부분에서 착각을 했을까요? 하나님은 교회를 세우실 때 그 종의 고백 위에 세웁니다. 교회뿐만 아니라 기업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모든 그리스도인은 자신이 행하는 일을 통해서 하나님의 영광이 나타나야 하며 그러기 위해서 하나님은 택한 성도들에게 능력과 재능을 주시며 때로는 물질을 주십니다. 이 모든 자원은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 주어지는 것이며, 그 자원을 가지고 하나님의 역사하심을 드러낼 의무와 책임이 우리에게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를 망각하고 주어진 것으로 자신을 드러내거나 자신에게 유익한 일에만 사용한다면 이는 하나님의 것을 도적질하는 행위이며 하나님의 영광을 훔치는 결과와 같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하나님은 거듭나고 은혜를 경험하여 하나님의 것이 소중한 줄 아는 영적 위치에 놓인 성도들에게 질문을 던지고 있는 것입니다. “네가 지금 무엇을 하고 있느냐?” “내가 준 것으로 지금 무엇을 위해 쓰고 있느냐?” 라는 질문을 던지시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 하나님이 베푸신 은혜를 제대로 파악하고 그 영광을 위해서 기업이나 직장이나 삶을 다시 점검하고 그것을 통해서 하나님에게 영광을 돌릴 마음을 준비하고 자세를 새롭게 할 시기가 되었다는 것입니다. 지금까지 그럴만한 영적 성장이 되지 않았지만 지금은 그럴만하게 충분히 성장했고 성장하고 있기 때문에 이제는 자신에게 주어진 일에서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 일해야 하기 때문에 하나님은 그 사람에게 이 점을 일깨우시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영광 받으실 존재가 되었다는 의미로 주어지는 말씀을 미숙한 조언자는 ‘목회자가 되어야 한다’는 고정 관념으로 이해하게 되어 다그치는 것입니다. 이것이 예언자가 빠지기 쉬운 함정인 “가정”(assumption)이라는 무서운 덫입니다. 하나님이 그 사람을 지목하여 ‘내 종이다’라고 말씀하실 때 예언자는 무조건 ‘목회자’를 생각합니다. 하나님의 종이 목회자뿐이겠습니까? 얼마나 다양한 의미가 있는지 모릅니다. 우리 교회 풍토는 목회자가 아니면 종으로 받아들이지 않으려는 심각한 고정관념이 있습니다. 종이라면 의당 목사를 떠올립니다. 그래서 당연히 목사가 되는 것이라고 판단하고 거기에 초점을 맞추어 모든 것을 이해하려고 합니다. 이미 설정이 그렇게 되었기 때문에 다른 면으로의 가능성을 원천적으로 배제하고 한 방향으로만 몰아갑니다. 경제적 곤궁은 주어진 물질로 하나님이 원하는 수준의 영광을 드러내지 않고 자의적으로 사용하기 때문에 거두어들이고 새롭게 주신 분의 의도를 생각해 보라는 의미일 수 있다는 점을 소홀히 합니다. 우리는 이때 주님에 대한 구체적인 신앙고백을 해야 합니다. 자신에게 주어진 것으로 어떻게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 사용할 것인지를 고백하기를 주님은 원하시는 것입니다. 이것은 욥이 고난당하였을 때 했던 고백입니다.

건강이 나빠진 것 역시 몸으로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야 하는데 그렇지 못하므로 그 몸을 쳐서 몸에 따른 문제를 깊이 생각게 하시는 것일 수 있다는 가정을 배제하는 것입니다. 어려운 문제가 거듭되고 하는 일이 어려움을 만났을 때 그 기회를 타서 독촉을 받게 되는 배경에는 마귀의 시험도 포함됩니다. 욥이 재산과 건강과 가족을 일시에 잃었을 때 그에게 주어진 질문은 “죄 때문이다”였습니다. 이 말은 불순종하기 때문이라는 말이지요. 그러나 욥은 이 말을 수긍할 수 없었습니다. 그는 “주신 분도 주님이시요, 가져가신 분도 주님이시니 주님의 이름을 찬양할 뿐입니다”라는 고백을 합니다(욥 1:21). 욥은 이런 심각한 위기 속에서 올바른 고백을 할 수 있었으며 그 초점은 “하나님의 영광”이었습니다.

하나님은 자신의 영광을 드러내기 위해서 선택한 종에게 그 책임을 묻습니다. “네가 지금 어디에 있고 무엇을 하느냐?”라는 질문이 우리에게는 고난이라는 시험으로 나타나는 것입니다. 욥에 대한 하나님의 질문이 고난과 재앙으로 나타났듯이 우리에게 감당할 수 없을 것 같은 무거운 시험으로 들려지는 것입니다. 이 점을 바르게 이해하지 못하기 때문에 자신의 입장에 맞는 신앙고백을 하지 못하고 엉뚱하게 신학교를 가서 목회자가 되는 어리석음을 범하는 사람이 얼마나 많은지 모릅니다. 물론 그 일을 통해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 헌신할 수도 있지만 그러나 이는 주님이 그 사람에게 맡겨준 분깃과는 다른 것이며, 하나님의 뜻에 대한 최선의 헌신이 아닙니다. 그래서 목사가 된 이후에도 하나님의 영광이 잘 나타나지 않는 것입니다. 이미 자신에게 주어진 고유한 분깃을 망각한 잘못을 범하였기 때문이지요.

목사는 넘쳐나는데 지금도 이렇게 아무런 감동도 없는 사람을 강제로 불러내고 있다고 여기는 사람들이 너무도 많습니다. 하나님이 원하시는 바는 우리에게 주어진 일터에서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 하나님의 말씀대로 경영하고 일할 신실한 종을 찾고 계십니다. 하나님은 강압적이고 위협하고 서두르는 분이 아닙니다. 그 종에게 열정과 사모하는 마음을 주셔서 주의 일을 자원하는 마음으로 하게 하십니다. 때로는 역경을 이용하시지만 그 모든 것은 사랑을 바탕으로 행하십니다. 마음에도 없는 사람을 협박해서 두려움으로 하게 하시는 분이 절대로 아닙니다. 우리는 예레미야가 하나님의 요구를 받아들이는 장면을 기억해야 합니다. 자신은 어리다고 거절하는 예레미야에게 “너는 어리다고 말하지 말라, 내가 너와 함께하고 어디 가는지 함께 가리라”라는 약속을 줍니다(렘 1:7~8). 이것은 감당하지 못할까 해서 두려워하는 그 종에게 베푸시는 하나님의 사랑의 표현입니다.

이사야는 처음에는 자신의 죄악된 모습을 인식하고 탄식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마음을 알게 되자 그는 용기를 내어 “내가 여기 있나이다. 나를 보내소서”라고 고백합니다(사 6:8). 그 험하고 힘든 일을 위해서 하나님은 그 종을 사랑으로 부르십니다. 하나님의 마음을 알게 하시고 그 마음을 안 종은 자원하여 기꺼이 자신의 모든 것을 주를 위해 버릴 각오를 하는 것입니다. 재물은 누구나 아까워합니다. 그래서 말로는 하나님에게 다 드리겠다고 하지만 행동으로는 그렇게 하지 못합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은혜를 경험하게 하여 하나님으로 인한 삶이 그 어떤 것보다 소중하다는 사실을 알게 합니다. 이렇게 되었을 때 주님은 그 종의 입에서 “내 모든 것은 주님의 것입니다”라는 고백을 하기를 원하시고 바라는 것입니다. 이 고백 위에 하나님은 교회를 세우고 기업을 일으키십니다. 그 대답을 들으려고 이런 일들을 하시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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