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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독교 가정의 고부관계

작성자둥근달|작성시간24.05.17|조회수1 목록 댓글 0

기독교 가정의 고부관계

- 갈등해소(conflict resolution)의 여성사회학 -

 

                                                                                     김 성 은 교수 / 서울신학대학교, 교육학

 

지금은 세상을 떠나신 나의 시어머니는 학교 근처에도 못 가보신 분이셨다. 그러나 그분의 지혜로운 관계 맺음에 난 늘 존경심을 가졌다. 늘 재미있는 이야기로 주위를 편안하게 하실 줄 아셨고, 늘 남의 도움을 감사하게 받고, 또 자신이 도움이 되시려고 애를 쓰셨다.

여행을 떠나시려면 미리미리 메모를 하고 차곡차곡 준비하실 뿐 아니라 여행 중에 무슨 일이 일어나 다시 집에 못 돌아오실 때를 위해 서랍 속까지 모두 수첩에 정리해 두신다. 돌아가실 때까지 주위 친구 할머니들에게서 매달 5달러씩 거두어서, 신학생, 선교사들을 몇 십 명씩 도우신 것을 장례식날 참석한 분들에게서 들었다. 며느리나 손자들에게 정확한 미국식 영어를 배우려고 노력하셔서, 80나이에도 혼자서 미국 동서부를 여행하시고 급한 한국 친구들 의사소통도 해 주시기까지 하셨다. 며느리들 하고 의견이 달라도 절대로 강변하시지 않고 젊은이가 하는 일에 혹시 배울 게 있겠지 하면서 참을성 있게 대화하셨다.

‘참을성’으로 말하면 정말 지독하신 분이다. 신학하는 막내아들 집에 오시는 도중에 의사 큰 아들집에서 교통 사고로 갈비 두 개가 부러지셨는데 진통제로 다섯 시간 동안을 버티는 여행을 하셨다. 막내 아들 주려고 속바지 주머니 속에 꽁꽁 뭉쳐놓은 돈을, 의사 아들 집에서 죽으면 그집에 남겨두고 가시게 될까봐 죽더라도 막내 아들 집에서 죽겠다고 오셨다는 이야기는 지금도 눈물이 난다. 어머니는 무식하지만 철학자처럼 깊이 생각하셔서 행동하셨다. 기업에만 경영이 필요한 것이 아니라 가까운 사람끼리 사는 데도 경영의 묘가 필요하다며 경영자처럼 사신 분이다. 이윤을 남기기 위해서가 아니라 서로 평화롭게 살기위해서다. 가족들과도 늘 적당한 거리를 두는 여유를 중요하게 생각하셨다.

많은 사람들은 으레 고부간은 사이가 나쁠 거라고 생각한다. 실제로 고부간에 사이가 썩 좋은 집을 찾아보면 별로 많지 않고, 오히려 사이가 나쁜 집은 아주 쉽게 찾아볼 수 있다. 시집살이를 해보지 않은 사람들도 시어머니들이란 대체로 끊임없는 요구사항과 잔소리에 매운 눈초리를 가진 심술궂은 여인들이라고 생각한다. 한편, 며느리를 둘 나이의 여자들은 며느리들이란 살림에 대해 아는 것도 별로 없으면서도, 잘난 체하며 나이든 사람 존경도 안하고, 이십 년 넘도록 잘 키워 놓은 남의 아들 독차지하려는 철없는 것들이라 여기는 것이 보통이다. 연속극 속에서도 사이 좋은 시어머니와 며느리를 보기 힘든 것 같다.

누구에게 문제가 있는 것일까?

요즘 같이 발달된 문명 사회에서도 고부간 사이는 여전히 나빠야 하는 것인가? 인간을 이해하려는 학문인 심리학으로 인간관계를 설명하고 도움을 주려는 상담은 많이 하는데도 왜 여전히 문제는 줄어들지 않는가? 고부간의 갈등은 진정 운명적인 것일까?

결론적으로 말해 고부간의 문제는 단지 고부간이라서 생기는 문제는 아니라고 생각한다. 모든 인간관계에서 일어나는 문제이다. 단지 가족, 가정이라는 작은 울타리 안에서 두 여성들이 가깝게 살아가는 환경이기 때문에 더 많이 부딪치는 것뿐이다. 고부간의 싸움은 당연하다는 생각을 버려야 한다. 남남끼리 남의 영역과 경계선을 존중하는 예의와 두 여성이 서로서로 도우면서 잘살아 갈 수 있다는 연대감이 중요하다.쓸모도 없고 불리하기만 한 고부간 불화설의 고정관념을 버려야 한다. 함께 평화롭게 살기 어려운 이유와, 그럼에도 불구하고 두 여인이 동반자로 평화롭게 살 수 있는 이유를 여성사회학적 시각으로 재조명해 보기로 하자.

 

삶의 세계 공유 - 경계 영역 침입

경계선 침입의 문제는 고부간의 문제만은 아니다. 모든 인간관계에서 일어날 수 있는 현상이다. 전쟁은 바로 국가간에 일어나는 경계선 분쟁이다.

고부간의 문제는 아들의 결혼과 동시에 시어머니 삶의 세계에 외계인(며느리)이 들어오는 영역 침입의 문제라고 생각한다. 여유가 있어서 서로에게 내어줄 심리적, 물리적 영토가 있다면 훨씬 쉬울 것이지만 언제나 여유 공간이 있으리라 기대하기는 힘들다. 적어도 남북의 대치와 같은 비무장지대가 필요하다는 것을 시어머니와 며느리 모두가 인식할 필요가 있다. 같이 살아본 적도 없는 두 여인이 갑자기 한 식구로 잘 살기 쉽지 않은 것이 확실하다면, 두 사람 사이에 적당한 거리를 두는 것은 정당한 일일 것이다.

문제는 어느 한쪽이 아니라 쌍방이 이 사실을 수용해야 한다는 것이다. 낳아주고 길러 주신 친정엄마와는 같을 수가 없다. 이십 여 년간 딸을 고이 키워주신 친정부모에 대한 그리움, 어린 시절 재미있게 보냈던 추억들, 아플 때면 안고 애타하시던 어머니의 모습들이 며느리들 마음속 깊은 곳에 있을 것이다.

그에 비하면 시어머니란 사람은 혼자 할 수 있는 일도 시키고, 그냥 지나칠 정도의 일도 가르쳐서 자기 식으로 하도록 지시하는 군림하고 싶어하는 사람일뿐이다. 더구나 시어머니도 자기를 따뜻하게 수용해 줄 누군가가 필요한 사람이다. 그나마 자기에게 관심을 가져주던 아들의 관심을 뺏는 며느리가 예쁘게 보이기는 쉽지 않다. 자기가 살던 삶의 보금자리를 떠나 낯선 영역으로의 시집살이를 시작한 며느리도 쉬울 수는 없다.

아무리 좋은 시어머니도 갑자기 들어온 며느리와 자기의 삶의 세계를 함께 나누는 일에 익숙해질 시간은 필요하다. 당연한 일 같지만, 사실 두 사람 모두에게 생애 처음 맞는 일이지 않은가? 더구나 앞으로 상당히 오랜 동안 같이 살아야 되는 관계가 아닌가? 한 번의 땅 뺏기로 승부를 가릴 수도 없는 일이지 않은가!

나이든 여성과 젊은 여성간의 인간관계-세대차이

요즘은 쌍둥이도 세대차이가 있다고 하지 않는가! 하물며 이십 년이 넘는 나이 차가 있는 두 여자가 고부간이다. 쉬울 수가 없는 사이다. 어느 젊은 며느리의 이야기를 들어보자. 직장에 나가는 며느리를 위하여 아들 둘을 키워 주시고 살림을 도맡아 해주시는 고마운 시어머니지만 단둘이 식탁에 앉을 기회가 있으면 소화가 되지 않는단다. 아예 밥 먹기를 포기하고 핑계를 대고는 자기 방으로 들어가 한참 후 시어머니가 당신 방으로 들어가신 것 같아 혼자 밥을 먹어보려고 식탁에 앉으면 기척을 듣고 시어머니가 또 밥을 들고 나와 마주 앉으신단다. 하루 종일 집안에서 혼자 계시다가 며느리하고 이야기를 나누고 싶기 때문이라는 것을 잘 알지만 시어머니하고 나눌 이야기가 없단다. 밥 먹을 기분이 싹 사라져 아예 밥 먹기를 포기하게 된다고 한다.

그 반대로 며느리 꼴만 보아도 밥맛이 없다는 시어머니도 있다. 무엇을 기대하겠는가? 큰 기대를 버리고 텔레비전 연속극을 보는 게 나을 것이다. 며느리가 나빠서도 시어머니가 나빠서도 아니고 서로가 나눌 대화가 별로 없다는 것을 생각한다면 같이 대화를 나눌 수 있는 공통의 경험이 필요할 것이다.

성경에 나오는 한 시어머니와 며느리 이야기는 참으로 아름답다. 아들이 죽자 며느리들에게 각자의 고향으로 돌아가라고 권하는 시어머니에게 며느리 룻은 말한다. “나로 어머니를 떠나며 어머니를 따르지 말고 돌아가라 강권하지 마옵소서 어머니께서 가는 곳에 나도 가고 어머니께서 유숙하는 곳에서 나도 유숙하겠나이다...만일 내가 죽는 일 외에 어머니와 떠나면 여호와께서 네게 벌을 내리시고 더 내리시기를 원하나이다”(룻 1:16). 남긴 자식도 없이 남편이 죽은 며느리 룻이 시어머니 나오미와 일생을 동반자로 살게 된 것은 단지 그녀가 혼자였기 때문만은 아닐 것이다.

어머니의 백성이 나의 백성이요, 어머니의 하나님이 나의 하나님이 될 것이라고 강력하게 주장하는 룻의 말과 같이 고부간에 공유할 신앙고백이 절실하다. 세대간의 차이를 극복할 수 있는 신앙고백과 며느리의 미래의 삶을 해결해 주려는 시어머니 나오미의 진심이 두 여인을 하나로 연대하게 한다. 연대할 뿐 아니라 평생의 동반자로 살아가게 된다는 이야기다.

 

한 남자를 사이에 둔 두 여자-- 삼각관계

삼각관계, 이것도 고부간만의 문제는 아니다. 요즘 뉴스에서 정주영 현대 명예회장과 그 두 아들을 둘러싼 분쟁을 볼 수 있다. 그러나 재산 상속과는 다른 것이 아들과 두 여인의 가족 관계이다. 아들이라는 남성 하나를 양쪽에서 둘로 가르려는 것처럼 생각한다는 고정관념은 버려야만 한다. 셋이 따로 가지고 있던 삶의 세계를 결혼이란 협상 과정을 통해 비자 없이 서로 자유로이 드나들 수 있도록 영토를 확장한 것이라고 생각하면 서로가 서로에게 고마울 뿐이다.

우리 나라에 자동차 문화가 덜 발달되었던 시절에는 매일 길에서 때리며, 밀치는 교통사고 현장이 운전 문화가 세련되어지면서 많이 준것을 알 수 있다. 비켜가면서 통행해야 한다. 맞부딪치면 위험한 것은 비행기, 자동차 충돌사고만이 아니다. ‘차선은 생명선’이란 표어가 모든 인간관계에도 절실한 것이다. 함부로 침범하지도 말고 존중해야 한다.

남편은 죽고 당시 유대의 풍속대로 더 이상 결혼해줄 시동생도 없어 불쌍하게 살아가야 할 이방여인 며느리 룻을 자신의 친척 보아스라는 남성에게 결혼시켜서 예수의 족보에 오르도록 하였다. 두 여인이 연대하여 모두 삶의 세계를 확장시키고 고귀하게 만든 것이다.

세상의 모든 시어머니 며느리들이 고부간은 사이가 나쁠 것이란 고정관념을 버리고 서로 연대하는 아름다운 여성연대가 두 사람만이 아니라 온 가족에게 축복이란 것을 잊지 말고 기쁘게 연대하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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