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AFE

하나님은 내 모든 사정을 다 아시는데도 왜 내가 구체적으로 내 필요를 아뢰야 할까?... 전무후무할 환난에 비하면 백신패스는 약과다

작성자Stephan|작성시간23.12.22|조회수56 목록 댓글 0

하나님은 내 모든 사정을 다 아시는데도 왜 내가 구체적으로 내 필요를 아뢰야 할까?... 전무후무할 환난에 비하면 백신패스는 약과다

1
현재 유럽과 미국, 호주 등이 백신패스를 적용하지만, 극소수를 제외하고 지금 한국처럼 전국적으로 일사불란하게 시행하는 나라는 없다. "대를 위해 소를 희생시킨다"는 게 전체주의적 발상인데, 적그리스도 체제가 등장하면 이것조차도 약과다. 창세 이후 전무후무한 환난(마 24:21)은 아직 시작도 안 했다.

2
헌법 제37조 2항은 "국민의 모든 자유와 권리는 국가안전보장ㆍ질서 유지 또는 공공복리를 위하여 필요한 경우에 한하여 법률로써 제한할 수 있으며, 제한하는 경우에도 자유와 권리의 본질적인 내용을 침해할 수 없다"고 명시한다. 지금이라도 일부 고위험군 중점 관리 방역으로 위헌행위를 멈춰야 한다.

3
가끔 식당 같은 데서 자신이 맡은 작은 일에 최선을 다하면서 각 손님마다 친절하게 응대하는 사람을 보며 감동받곤 한다. 그런 사람은 자기 일을 하찮은 일로 하지 않고 그 일로 사람을 존중하는 법이 뭔지 아는 것 같다. 모든 일, 모든 사람을 그렇게 대하는 것이 신자의 삶에도 최선이다.

4
하나님은 내 모든 사정을 다 아시는데도 왜 내가 구체적으로 내 필요를 아뢰야 할까. 하나님 앞에서 내게 정말 필요한 것이 무엇인지를 내가 알기 위해서다. 기도는 어쩌면 나를 깊이 돌아보게 해주는 거울이다. 세상에서만이 아니라 주 앞에서 어떤 존재로 살아야 하는지에 세세히 깨어 있게 해준다.

5
"인자가 올 때에 세상에서 믿음을 보겠느냐"(눅18:8). 지금은 많은 신자들마저 "해봐도 안 되더라"는 패배주의에 젖어 있다. 세상은 사람들이 보기엔 고만고만해도 하나님이 보시기엔 더 악하다. 지금 어떻게든 하나님께 더 가까이 나아가겠다는 결심이 든다면 그 자체가 아주 유별난 축복이다.

6
주님이 곧 다시 오신다고 해도 무덤덤한 이들이 많다. 이런 경우를 여러 번 접하고 나서 이제야 느끼는 것은 그런 반응조차도 그 자신들의 복이라는 것이다. 깨어 있는 것도 복이지만 잠들어 있는 것도 각자가 받은 복이다. 그것을 복인 줄로만 알고 사는 이들에게는 아무리 말해봐야 안 들린다.

7
"바알들을 위하여 제단을 쌓으며"(대하 33:3). 하나님을 믿는 유대인들이 성전에도 출입하면서 바알들을 위해 제단도 쌓는 해괴한 일들이 지금도 버젓이 일어난다. 하나님 외의 것에 의탁하는 삶으로 세상에서 크고 강해지고 부요해지고자 하는 이들은 천국의 문을 스스로 부지런히 좁히고 있다.

8
교회에 신뢰를 잃고 회의적인 마음을 갖게 되는 건 그 교회를 떠날 때라는 사인일 수 있다. 한 사람의 신앙에는 하나님과의 관계가 가장 중요하지 한 교회나 목회자가 절대시될 순 없다. 마음으로부터 진짜 은혜는 못 받는데도 그 관계 외의 다른 것에 매여 교회에 매이는 것은 교회 우상숭배다.

9
교리가 달라 도저히 불가능해 보일 것 같은 종교 통합이 가능할 수 있는 이유는 사회적 약자를 섬기겠다는 공통점이 있어서다. 그래서 사회복음이 분명한 구원의 교리로 특정화되지 못하면 어느 종교와도 대화나 통합이 가능한 연대의 고리가 된다. 귀한 가치인데도 사탄적일 수 있는 한 예다.

10
실은 섬김이야말로 큰 행복이다. 혼자 움츠려 있으면 진짜 행복이 뭔지가 더 감감해진다. 주님이 이 복은 아무나한테 안 주시는데 극심한 이기주의 세태 가운데 이 복을 바라지 않는 이들이 많아 점점 더 희귀해진다. 섬김은 마중물과도 같아서 내가 먼저 안 떠넣으면 점점 더 어렵기만 하다.

11
주님은 내가 이땅에서 마치 이미 천국에 들어와 사는 것처럼 말하고 행동하고 예배하길 원하시는 것 같다. '이땅에서는 그래도 좀 봐주시겠지' 하는 마음을 오래, 많이 가질수록 성화에 큰 손해가 난다. 이땅에서 천국의 삶의 방식에 익숙해지는 훈련이 곧 예수님의 제자훈련이다.

12
나의 주된 사역이 전도를 위한 말씀 사역이 아니었다면 SNS 공간에 들어서지 않았을 듯싶다. SNS의 순기능과 역기능을 잘 조화시키지 못하면 고전적인 묵상과 침묵과 기도의 영성에 방해받기 쉽다. 이웃과의 정보 공유는 돕지만 하나님과는 자주 불통시키는 불상사가 날 수 있다.

13
"모든 무거운 것과 얽매이기 쉬운 죄를 벗어 버리고"(히 12:1). 경주자에게는 짐이 가벼울수록 좋다. 죄짐을 내려놓으면 천국 길이 쉽다. 이것저것 포기하지 않고 붙들고 있으면 천국 길이 고역이다. 천국 문은 넓고 누구든 침노하는 자가 빼앗는다. 내 죄와 탐욕이 자꾸 좁힌다.

14
"아빠, *23# 누르고 상대방 번호를 치면 발신자 표시 제한 되는 거 알아요?" 딸이 어디서 알았는지 나도 모르는 폰의 비밀을 알려준다. 나를 숨길 거면 애당초 통화는 왜 할까? 그러고보니 단 한 통의 전화도 정체 불명의 외계인과는 해본 적이 없다.

15
과학자들은 온 우주 공간의 에너지 밀도, 곧 우주 상수가 작디작은 지구상에 생명체가 생존할 환경을 유지시키는 데 기여하도록 미세조정되어 있다고 말한다. 이렇게 너무도 비효율적인 우주 경영은 한 생명의 가치가 천하보다 크다는 진리를 웅변적으로 보여준다.

16
우주를 놀랍도록 정교하게 조율하신 하나님이 인생들은 아무렇게나 되는 대로 놔두실 리가 있을까. 그러나 자유의지를 가진 인간은 은혜로 온전히 붙들린 바 되거나 아니면 우주의 미아가 되거나 둘 중 하나를 선택한다. 지구에만 허용된 한시적인 자유의 기회다.

17
온 우주에서 보면 인간이 지구에 산다는 게 얼마나 눈부신 일인가. 물 한 모금 마시고 과일 한 쪽 먹는 것이 얼마나 기적 같은 큰 은혜인가. 이 희소성을 부인하면 하나님도 안 보인다. 눈에 보이는 대로만 보고 살면 보이는 것이 끝날 때 함께 끝난다.

18
하나님은 무한해 보이는 우주를 만드실 만큼 크신 분이다. 지구상에 사람이 아무리 많아도 그분은 각자의 모든 죄를 한 건도 빠짐없이 다 기록하신다. '신이 이건 모르겠지' 하는 사람은 개미 뒷다리에 붙은 잔털의 길이를 정하시는 분의 신상을 모르는 자다.

20
무릎꿇고 기도하다가 허리가 얼얼하거나 발이 저리다 싶을 때 사용할 만한 새로운 기도 체형을 우연히 발견했다. 무릎꿇은 채 그대로 옆으로 누워 기도하는 것이다. 그 모습은 흡사 엄마 뱃속의 태아 같다. 그래서 기도자의 정체성과도 얼추 들어맞는 듯...

21
하나님의 존전 앞에서 어린아이와 같이 마음이 낮아지지 않고는 매일매일 회개하는 기도를 못 드린다. 자신이 꽤 괜찮다거나 지혜 있다 여기는 자는 삶의 부족함을 발견하기도, 연약함을 고백하기도 쉽지 않다. 그래서 천국은 어린아이처럼 받드는 자만 들어간다.

22
하나님 앞에서 깊이 회개해보지 않은 사람은 자신이 얼마나 교만한 존재인지 잘 모른다. 회개하라는 명령은 결국 하나님 앞에서 끊임없이 겸손하라는 것, 자기 주제를 제대로 파악하며 살라는 것이다. 날마다 죄를 싫어하지 않으면 용서 받은 죄인이 아니다.

- 안환균 목사의 SNS에 수 년 전 어제 나눈 단상 모음

다음검색
현재 게시글 추가 기능 열기
  • 북마크
  • 신고하기

댓글

댓글 리스트
맨위로

카페 검색

카페 검색어 입력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