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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끄심 1화 -ρχ아르케 : 시작은 어머니로부터 (1) 탈북민 수기 김서윤 전도사 23,1

작성자청포묵|작성시간24.02.25|조회수4 목록 댓글 0

이끄심 1화 -ρχ아르케 : 시작은 어머니로부터 (1) 탈북민 수기 김서윤 전도사 23,1

나는 함경남도의 한 도시에서 태어나고 자랐다. 부모님은 출신 성분이 좋으셨고 당원이셨고 흔히 말하는 충성 분자였다. 아버지는 DMZ 군사분계선 최전방에서 특수부대원으로 10년간 군 복무를 하셨고, 제대 후에는 고향으로 돌아와 동약관리소에서 간부로 일 하셨다. 어머니도 8년간 성실하게 군 복무를 하셨고, 제대 후 친지들의 중매로 아버지와 결혼하셨다. 나는 양가의 관심 속에서 2남 2녀 중 장녀로 태어났다. 어머니는 대를 이을 남아를 낳지 못한다는 이유로 시집살이를 많이 하셨다.

어린 기억에 친할머니 댁은 큰 기와집이었고 할머니께서도 항상 고풍스럽게 한복을 차려입고 지내셨다. 소위 말하는 뼈대 있는 집안 이었다. 그러다 보니 대를 이을 손주의 존재가 중요했고, 아들을 낳지 못했던 어머니를 향한 타박도 적지 않았던 것 같다. 우리 가족은 결국 아들을 입양했다. 그 친구가 우리집 셋째이다. 나는 어린 나이에 집안 돌아가는 사정을 잘 알지는 못했지만 셋째의 생김새가 우리와는 좀 다르다는 생각은 했었다. 그래도 우리는 형제자매로서 서로 차별하지 않고 한 가족으로 잘 지냈다. 그리고 마침내 어머니는 막내 남동생을 출산하셨다.

내가 9살쯤 되었을 때였다. 그날도 여느 때와 마찬가지로 평화로운 저녁 시간이었다. 갑자기 여러 명의 장정들이 우리 집을 찾아와서는 눈 깜짝할 사이에 온 집안을 헤집어놓았다. 어머니는 바깥 볼일을 보시다가 길에서 붙잡히셨다고 했다. 너무나도 순식간에 벌어진 일에 나는 이것이 꿈인지 생시인지 분간하기조차 어려웠다. 당시 어머니는 출산 후 몸조리를 막 끝내신 지 얼마 되지 않아서였다. 나는 어머니의 행방에 대해 몹시도 궁금했다. 그렇지만 우리 가족, 또 친척들 모두 어머니에 대한 언급을 쉬쉬하는 것이 느껴졌다. 무엇과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궁금한 어머니의 행방이 입 밖으로 꺼내서는 안 되는 그 무언가가 되어버렸다.

어머니 이야기만 하면 아버지도 침묵하시고 가족 분위기가 싸해졌다. 어떤 친척들은 뒤에서 우리 어머니는 끝장났다는 식으로 이야기하기도 했다. 어느새 부턴가 나의 하루 일과는 “엄마 기다리기”가 되었다. 아침에 눈을 뜨면 오늘은 엄마가 오실까 하는 생각으로 하루를 시작했고, 잠자리에 들면서도 작은 문소리에도 혹시 어머니께서 돌아오신 것인가 하고 벌떡 일어났다. 공교롭게도 어머니의 부재 속에서 우리는 고난의 행군이라는 최악의 기근과 마주하게 되었다. 그 무시무시한 굶주림은 우리 가족을 극한의 상황으로 몰고 갔다. 

나라의 경제가 무너지는 와중에도 아버지는 꼬박꼬박 일터로 출근하셨지만, 제대로 된 배급이 나오지 않으니, 집에 남아있는 우리는 하루에 한 끼도 제대로 먹지 못하는 날이 점점 늘어났다. 가장 딱한 것은 아직은 너무 어린, 젖을 먹어야 할 시기에 엄마를 빼앗긴 막둥이였다. 먹일 젖도 없고, 젖을 담아 먹일 젖병도 없었다. 아버지는 강냉이 국수를 푹 삶아서 죽으로 만들어 아이에게 숟가락으로 떠먹여 보기도 했지만, 너무 투박하고 거친 그 음식을 아이는 제대로 삼키지 못하고 울었다.

일주일을 굶으니 문자 그대로 하늘이 노랗게 보였다. 기운이 없어 벽에 몸을 기대고 있는데 막둥이가 배고프다고 막 울면서 나한테 칭얼댔다. 그래도 어머니 없는 동안에는 장녀로서 동생들을 돌보아야겠다는 생각이 없어서  달래기도 하고 물이라도 먹여보기도 하고했지만, 일주일 정도  지나니까 그럴 기운이 남아 있지 않았다. 막내가 보채는데 내가 줄 수 있는 것이 없었다. 지칠 대로 지친 나는 칭얼대는 동생을 안아주기는커녕 외면했다. 그리고 울다 지친 아이는 쓰러져 잠들었다. 그렇게 쓰러진 아이가 잠들었다고 착각하고 담요를 덮어주는 것이 내가 할 수 있는 전부였다.

그날따라 막내는 한번 울고 난 이후로는 쭉 잠을 잤다. 밤이 되어 퇴근하고 들어오신 아버지는 오늘 하루도 잘 버텼는지 물으셨다. 나는 아버지에게 막내가 너무 오래 자는 것 같다고 말씀드렸다. 아버지는 화들짝 놀라시면서 막내가 덮고 있던 이불을 걷으셨다. 그러고는 아이의 상태를 이리저리 확인하시더니 이내 한숨을 푹 쉬셨다. 나는 설마 하는 생각에 순간 가슴이 철렁했다. 아버지는 담요째로 아이를 둘둘 싸시더니 곧장 밖으로 나가셨다. 나는 동생이 죽었다는 생각은 못 하고 당연히 병원에 데려간 것으로 생각했다. 현실을 받아들일 수가 없었다. 그러나 밤늦게 들어오신 아버지의 손에는 아이가 들려있지 않았다.

그렇게 막내는 이 세상 공기를 얼마 맛보지도 못하고, 어머니의 부재 속에서 고생하다가 깊은 땅속에 묻힌 것이다. 그날따라 나에게 웬일로 크게 울며 칭얼대던 것이 막내에게는 마지막 안간힘이었을까? 나는 그렇게 남동생을 죽였다는 죄책감에 꽤 오랜 시간 동안 괴로워하고 힘들었었다. 그 생각만 하면 나는 그저 죄인이라는 생각밖에 안 든다. 동생이 세상을 떠난 후에도 우리의 굶주림은 계속되었다. 우리를 보실 마땅한 수가 없으셨던 아버지는 우리를 외가댁으로 보내셨다.

같은 방향으로 가시는 분에게 맡겨서 아이들만 기차를 태워 보냈는데 다행히도 우리는 길을 잃지 않고 외가댁에 무사히 도착할 수 있었다. 외가댁에 도착한 우리를 보고 외할머니는 깜짝 놀라셨다. 미리 연락도 드리지 않고 아이들만 덩그러니 보내졌으니, 누군들 당연히 놀랐을 것이다. 나라 전체가 굶주림으로 신음하는 가운데 외가댁 사정도 어렵기는 마찬가지였으나 노부부만 사시는 집인지라 적은 식량이나마 조금씩 아껴가며 그래도 살아가고 계셨다. 그런데 뱃속에 거지가 사는 것 같은 손주 셋이 찾아왔으니 얼마 지나지 않아 외할아버지네 식량은 거덜 나버렸다.

그래도 외할머니께서는 손주들 먹이시겠다고 산에 서 아직 설 여문 감자를 캐다가 먹이시는 등 갖은 애를 다 쓰셨다. 그렇게 여름을 그 집에서 보냈다. 이런 어려운 시간을 보내면서 내 안에는 어머니에 대한 원망이 점점 커졌다. 어떻게 우리를 내버려두고 사라질 수 있는지? 어머니만 계셨다면 막내도 죽지 않았을 텐데…. 우리가 무슨 잘못을 저질렀기에 이토록 혹독하게 벌을 주시는 걸까? 그리고 어머니의 도움이 가장 필요할 때 우리를 내버려두었는지 이해할 수 없었다. 그러면서도 어머니께서 혹시 돌아가신 것은 아닌지 걱정이 되었고, 그런 것이 아니라면 하루빨리 돌아오시면 좋겠다고 밤마다 달님에게 간절히 빌었다.

그런데 기적과도 같은 일이 일어났다. 이른 아침, 어머니께서 마침내 집으로 돌아오신 것이다. 오랫동안 바라왔던 어머니와의 상봉이었지만 아쉽게도 그 순간은 기쁨과 반가움보다 씁쓸하고 서먹서먹한 시간이었다. 어머니께서는 오시자마자 막내를 찾으셨고, 막내가 세상을 떠났다는 사실을 들으시고는 큰 충격을 받으셨기 때문이다. 오열하는 어머니를 앞에 두고 반갑게 달려가 안기지도 못하고 어리둥절한 가운데 다들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더 나이를 먹고 나서야 그 당시 어머니께서 갑작스럽게 잡혀가신 이유를 알게 되었다.

그 이유는 공교롭게도 외삼촌이 건네준 성경책 때문이었다. 외삼촌은 중국을 왕래하시면서 선교사 또는 기독교인과 관계가 있었던 모양이다. 외삼촌은 그분을 통해서 외부로부터 달러를 지원받고 성경책도 받아오셨다. 그렇게 받은 지원금과 성경책을 어머니에게도 건넨 것이다. 사실 고난의 행군은 어머니가 잡혀가 시기 전부터 본격적으로 진행되고 있었다. 어린 나이의 나는 잘 몰랐지만, 주변에는 이미 굶는 사람이 나오고 있었다.

그렇지만 어머니께서 지원받으신 달러가 있었기에 우리 집은 먹는 걱정 없이 지냈다. 하지만 공교롭게도 외삼촌은 외숙모와 사이가 좋지 않았고, 그날도 외삼촌과 크게 다투던 외숙모는 외삼촌이 수상한 물건을 가지고 있다고 당국에 고발해 버리고 말았다. 외삼촌은 붙잡혀 심문받았고 가택 수색을 당했다. 그리고 결국 가지고 있던 성경책을 발각당하고 말았다.

그리고 그 수상한 책이 우리 어머니에게도 전달되었다는 것이 드러나면서 어머니도 붙잡혀 가신 것이다. 어머니는 혐의를 완강히 부인했다. 어머니는 성경책을 돌돌 싸매어서 외진 곳 벽 귀퉁이 틈 사이에 꼭꼭 숨겨 놓으셨는데 그 덕분인지 철저한 가택수색에도 발각당하지 않으셨다. 그렇지만 보위부의 수사와 고문은 지독했다. 성경책의 실물이 발견되지도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어머니에게 혐의를 인정하라고 거의 2년에 가까운 기간을 괴롭히고 고문했다. 만약 어머니께서 숨겨놓으셨던 그 책이 발견되었었더라면 본인뿐 아니라 아버지를 포함한 온 가족이 말로 다할 수 없는 고초를 겪었을 것이다.

아니 고문에 못 이겨 없는 죄라도 억지로 자백했다면, 혹은 그 책의 내용을 조금이라도 알고 있어서 유도 질문에 걸려들었다면 어머니는 꼼짝없이 정치범 수용소에 수감되시거나 사형당하셨을 것이고 우리 가족도 연좌제에서 벗어나지 못했을 것이 분명하다. 차라리 죽는 것이 나을 정도의 고문 속에서도 어머니가 끝까지 혐의를 부인하셨던 이유는 본인의 목숨보다는 남아있는 우리에게는 그 피해가 미치게 해서는 안 된다는 마음 때문이었을 것이다.

당시 대부분의 북한 사람은 성경책이라는 것에 대해 보거나 들어볼 일이 없었다. 다만 기독교에 대한 부정적인 사상교육은 철저하게 이루어졌다. 학교에서는 선교사들이 미군과 합세해 주민들을 죽이고 빼앗았다고 배웠다. 교회는 사람 잡아먹는 집단이고 교회와 관련된 어떤 것이든 나쁜 것이라고 배웠다. 그만큼 북한의 기독교에 대한 적개심은 상상을 초월한다.

그 책을 전달받았다는 혐의가 씌워진 순간 어머니의 그간의 모든 충성과 헌신은 철저하게 부정당하고 말았다. 죄를 자백하라는 보위부의 압박은 상상 이상이었다. 원래 당원이었고 성분이 좋았던 어머니였지만 그 혐의에서 쉽게 벗어나지 못하셨다. 고문이 동반된 심문은 물론이고 제대로 누워서 잠을 이룰 수 없을 만큼 좁은 독방에 수감되어 있으셨다.

이렇게 오랜 기간 심문을 진행했지만, 어머니로부터 더 이상의 혐의점은 찾지 못했고, 원래 성분도 괜찮은 편이셨던 데다가 외갓집에서 온갖 방면으로 손을 쓰셔서 어머니는 겨우 살아서 출소하실 수 있었다. 그렇지만 어머니는 몸 상태가 너무나 악화하여 매우 허약한 상태였기에 친척 집에 서 한 달가량 요양하시고서야 겨우 집으로 돌아오실 수 있었다. 막내의 이름을 목 놓아 부르시면서 우셨던 어머니는 한참 후에 정신을 추스르시고 우리를 앞에 앉히셨다.

그러고는 “그동안 너희들이 너무 고생했다. 앞으로는 절대로 고생시키지 않겠다. 엄마가 꼭 고생한 만큼 갚아주겠다”라고 비장한 얼굴로 말씀하셨다. 그 말씀을 하시는 어머니의 퀭한 얼굴이 딱하기도 했지만, 한편으로는 왜 우리가 가장 힘들고 어려울 때 우리 곁을 지키지 못했는지, 무슨 사정이 있어서 우리를 버려두었는지 원망스럽기도 했다. 그래도 어머니가 돌아오시고 우리 가정이 다시금 평화를 되찾았다면 좋았었겠지만 현실은 냉혹했다.

어머니는 당원으로 충성 분자였던 아버지와 뼈대 있는 집안의 시댁이 겨우 어린 아기 하나 돌보지 못하고 죽음에 이르게 했다는 사실에 충격을 넘어 큰 분노를 느끼셨다. 아버지께서 우리를 버리시거나 노력하지 않은 것은 아니었다. 그렇지만 막내의 죽음 앞에서 어머니에게는 그 어떤 변명도 말이 되지 않는 것이었다. 결국 아버지와 어머니는 이혼이라는 안타까운 결과로 치닫게 되었고 그에 따라 우리 가족은 깨어지고 말았다.

당시에는 몇 년 사이에 우리에게 닥친 어려움의 이유를 찾을 수 없어 방황했지만, 여러 세월의 질곡을 겪고 그 당시 부모님의 나이가 된 지금은 그 아픔이 어머니나 아버지의 탓이 아님을 안다. 바로 우리 부모님께서 충성하셨던 북한과 그 체제가 우리 가족을 덮친 절망의 주요 원인이었다. 성경책 한 권 때문에, 그것도 실물이 발견되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이를 빌미로 아무런 정당한 절차 없이 어머니를 체포하고 고문했던 그 악랄한 인권 유린과 박해, 그리고 가장들을 직장에 매어놓고 통제하는 시스템 속에서 먹을 것을 구하러 다니지 못하시고 제대로 배급도 나오지 않는 직장에 꼬박꼬박 출근하실 수밖에 없으셨던 아버지….막내의 죽음과 가족의 깨어짐은 그로 인한 결과라고 할 수 있다.

북한은 그렇게 충성 분자로 살아온 우리 부모님의 믿음을 철저하게 배신하였다. 사실 우리 가족뿐만이 아니다. 고난의 행군은 모든 북한 사람이 자신들이 믿어왔던 지도자와 당에 배신을 당한 사건일지도 모른다. 외삼촌이 왜 우리 어머니에게 그 성경책을 건네주었는지 아직 잘 모르겠다. 어쩌면 외삼촌은 복음을 받아들이고 신자가 되었고, 어머니에게도 그 복음을 전하고 싶었을지도 모른다. 그런 이유가 아니라면 그 위험한 책을 굳이 어머니에게 건네진 않았을 것 같다.

돌이켜 보면 이후에도 고난은 끊임없이 우리를 찾아왔고 그 속에서 많은 상처와 아픔도 있었지만 그 고난 중에서 우리를 건져내시고 하나님의 자녀로 살게 하신 주님의 인도하심이 있었다. 어릴 적 어머니에게 건네진 성경책도 단순한 비극과 고통의 원인이 아닌 하나님의 택하심과 인도하심의 표지였을지도 모른다. 선하신 주님의 인도하심은 그렇게 고통과 아픔 속에서도 우리를 찾아오셨다. (계속)


한국오픈도어선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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