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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끄심 3화 - ‎יָלַךְ 얄라크 : 고향을 떠나다 (1) 탈북민 수기 김서윤 전도사 23,3

작성자청포묵|작성시간24.02.25|조회수5 목록 댓글 0

끄심 3화 - ‎יָלַךְ 얄라크 : 고향을 떠나다 (1) 탈북민 수기 김서윤 전도사 23,3

나는 그 긴 여정에서 많은 것을 듣고 보았다. 열차를 타기 위해 몇 날 며칠을 역전에서 온 가 족이 쭈그려 앉아 잠을 청했다. 씻기 위해 돈 을 주고 물을 사면서 참으로 세상이 삭막해졌 구나 하고 느꼈다. 그리고 우리가 메고 있는 가방 속 내용물이 전부 간부들에게 먹일 뇌물 이었다는 것도 알게 되었다. 그렇게 담배 몇 보 루를 들이밀고 간신히 열차에 올라탔지만 기 차는 좀처럼 출발하지 않았다.

당시 북한의 전기 사정은 너무나 열악하여 기차가 제대로 운 행되지 못했다. 출발하지 않는 기차에서 출발 하기만을 간절히 빌었던 것이 여러 날이었다. 그런 와중에 먹고살기 위해 장사 길에 오른 사 람들이 서로 다른 사람 머리 위를 밟고 기차에 올라타야만 살아남을 수 있는 현실에서 기차 는 그야말로 아우성과 구타가 난무하는 생지 옥을 방불케 하였다. 그렇게 더는 사람을 태울 수 없을 즈음에야 기차는 비로소 출발하였다.

미처 열차표를 구하지 못하고 뇌물도 준비하지 못한 사람들은 열차 지붕으로, 기차 밖에 계단으로, 혹은 간신히 창문에 매달리기도 했 다. 그러다가 졸다가 떨어져 죽는 사람들, 추 워서 얼어 죽는 사람, 허리를 펴다가 전기선에 치여서 죽는 사람 등 너무도 많은 사고가 발생 했다.

기차 안 민심도 그다지 좋지 못했다. 화장실만 가려고 해도 다른 사람들을 밟고 지나가야 했고 그러다 보니 어둠 속에서 구타와 쌍욕이 오갔다. 우리는 열차가 큰 도시에 도착할 때마다 내려야 했다. 여관에 들러서 씻고 식사 한 끼 사 먹으려고 장마당으로 갔다. 기차에서 배고픔에 시달린 동생과 나는 김이 모락모락 올라오는 두부밥이 너무나 먹고 싶어 침을 꼴깍꼴깍 삼켰고, 그 모습을 보신 어머니께서 기 꺼이 그 밥을 사주셨다.

너무나 기쁜 그때, 두 부밥을 파시는 아주머니께서 하신 "소매치기한테 조심하세요"라는 말에 "네?" 라고 되묻는 사이, 그만 뒤에서 다가온 꽃제비 소년이 두부밥을 낚아채서 도망갔다.  신기할 정도로 뼈만 앙 상하게 남은 그 아이들은 도망가면서도 훔친 음식을 입에 쑤셔 넣으며 달렸다. 두부밥 맛을 보기도 전에 꽃제비 소년에게 빼앗겼을 땐 너 무 놀라 심장이 밖으로 튀어나오는 줄 알았다.

그러다가 소매치기가 도망간다는 소리를 들은 어떤 아저씨가 여동생의 두부밥을 낚아챈 꽃 제비 소년의 뒷목을 잡고는 때려 주었다. 그 아이가 장사꾼 사람들에게 구타당하는 것이 너무나 무서웠던 우리는 울면서 때리지 말아 달라고 호소하며 장마당에서 엉엉 소리내어 울었다. 그렇게 맞는 와중에도 그 아이는 손에 묻은 밥알이 하나라도 더있나 살피며 손을 핥았다.

그렇게 우리는 가다 서기를 반복하는 기차와 함께 길바닥 생활에도 점차 익숙해질 무렵에야 드디어 양강도 혜산시에 도착할 수 있었다. 어머니와 우리는 여관에 짐을 풀었다. 외지인으로서 괜한 의심을 받을까봐 어머니는 친척을 찾고 있다고 여관 주인에게 둘러대셨다. 그때까지도 나는 정말 친척 집에 가는 줄로만 알았다.

낮에 어머니를 따라 압록강 강변에 나가보니 아주머니들이 압록강에서 빨래를 하고 있었다. 강가 주변에는 군인들이 지키고 있었는데 사 전에 허가를 받은 사람만 강가로 내려갈 수 있 다고 했다. 나는 어렸기에 얼음길을 왔다 갔다 하며 놀아도 별다른 제재가 없었다. 어머니는 나더러 그들이 무엇을 하는지 소상히 보고 오라고 말씀하셨다.

나는 아주 자연스럽게 이쪽과 저쪽에서 빨래하는 아줌마들이 서로 담소를 나누며 빨래 사이에 몰래 무언가를 서로 건네주고 받는 것을 관찰했다. 중국 쪽에서는 대야에 비닐에 싼 돈뭉치와 설탕, 하얀 비누 등을 넣고 빨래로 덮어서 보내면 북한 쪽에서는 슬 쩍 대야를 끌어다가 미리 준비한 구리, 사금 그리고 알수 없는 물건을 싼 봉투 같은 것을 넣어서 자연스럽게 실수로 물에 떠밀려 간 것처럼 보냈다.

그러면서 아주머니들은 나에게 미끄러우니 조심하라며 마치 나를 원래 잘 알고 있었던 것처럼 자연스럽게 연기하였다. 그러고는 대충 빨래를 마무리하고 군인 아저씨들에게 그만 간다고 하면서 주머니에 돈과 담배 한 보루를 찔러 주고 자연스럽게 그 자리를 떴다. 나는 이 재밌는 광경을 어머니에게 신나서 조잘조잘 설명을 해드렸는데 어머니께서는 사뭇 진지하게 그 이야기를 들으셨다. 우리는 매일 밤 압록강으로 나갔다.

어머니께서는 곤히 자는 우리를 깨워서 조용히 옷을 입혀주셨고, 우리는 아무 소리 않고 옷을 입고 엄마를 따라나섰다. 강가에서 우리는 숨죽이며 도강할 기회를 엿보았다. 영하 30도가 넘는 기온과 두 볼과 귀를 째는 듯한 칼바람이 우리를 더욱 얼어붙게 했다. 그렇게 눈 속에 몸을 쭈그 린 채로 밖을 살피고 북한 군인들이 지나가면 숨기를 반복하다 돌아오기가 여러 날이었다. 애들을 주렁주렁 달고 와서 친척 집에 간다는 사람들이 아직도 머물러 있으니 여관 주인이 이상해하는 눈치였다.

어머니는 친척이 이사했는지 집 주소가 잘못되어서 알아보고 있다고 둘러대셨다. 우리도 정말 친척집 주소가 잘못 되어서 그러시는 줄로만 알았다. 하지만 왜 매일 밤 강변에서 모두의 눈을 피해 숨어서 강 건 너편을 바라보는지 도통 이해할 수 없었다.  지 어머니께서 뭔가 큰일을 계획하고 계신다는 사실만 짐작할 뿐이었다.

그날 밤도 어김없이 우리는 강변에 잠복하였다. 총을 맨 군인들이 2인 1조로 순찰을 돌고 있었다. 숨소리 하나 들리지 않은 그 밤, 남동생은 춥고 졸린다며 칭얼거렸고 어머니는 그런 남동생을 달래고 있었다. 그런데 갑자기 저 멀리서 시끄러운 소리가 들리더니 "탕탕" 총소리가 났다. "도강자다!!" 라는 외침과 함께 총을 쏴대는 소리가 들렸다. 생전 처음 들어보는 총 소리에 심장이 미친 듯이 쿵쾅거렸다.

눈을 크게 뜨고 모든 감각을 곤두세워 총소리가 나는 곳을 보니 어떤 젊은 한 여성이 얼어붙은 압록 강을 가로지르며 헐레벌떡 뒤도 돌아보지 않고 뛰고 있었다. 한동안 총소리가 이어지고는 군인들이 화를 내며 욕하는 소리가 들렸다. 놓친 것이었다. 그 광경에 충격을 받은 우리는 여 관으로 돌아와서도 한동안 입을 열지 못했다.

어머니는 그날의 총격을 목격하시고 좌절하셨다. 혼자 강을 건너는 것도 이렇게나 위험한데 애들 셋을 데리고 어떻게 강을 건널 수 있겠는가? 뜬눈으로 밤을 새운 우리는 아침 일찍 짐을 싸 서 여관을 나와 북동쪽을 향해 걷기 시작했다. 우리 삼남매는 드디어 친척을 찾았나보다 하 고 들뜬 마음으로 어머니를 따라나섰다. 그런데 어머니는 압록강 강변을 따라 동북쪽으로 계속 올라가셨고, 보천군의 한적한 시골 마을에 도착해서야 걸음을 멈추셨다.

어머니께서는 혜산에서의 도강은 도저히 가망이 없다고 판단하시고 압록강 상류로, 더 깊은 산악지역으로 이동하셨던 것이었다. 우리가 도착한 그곳 은 한적한 시골 마을로 마을 주민들도 얼마 없고 먹을것도 넉넉지 않았다. 혜산에서는 장마 당에 나가면 먹을 것이 많았고, 돈만 있으면 먹고 싶은 걸 사먹을 수 있었는데 이곳에서는 몇날 며칠을 하루 두 알 감자만 먹었다. 너무 배가 고팠다.

그러는 가운데 날씨는 점점 더 추워지고 해가 바뀔 즈음이 되었다. 여전히 밤마다 강변을 살피기를 반복한 우리 가족에게 드디어 결전의 날이 오고야 말았다. 그날도 아침부터 온종 일 끼니를 거르고 허기진 상태였지만 밤하늘 에 뜬 달은 밝고 환하게 빛났다.

이곳은 시골이라 그런지 혜산만큼 군인들이 많지 않았고 보 초를 서는 군인들도 경계가 조금은 느슨한 편이었다.지금이 아니면 넘어가지 못할 것 같다고 생각하신 어머니는 우리 삼남매를 붙잡고 비장한 얼굴로 말씀하셨다. "서윤이는 지금부 터 엄마 말을 명심해 들어라. 지금부터 네가 먼 저 강둑 밑으로 내려가서 짐을 받고 그다음 동생들을 받으렴. 마지막으로 내가 내려갈게." 여기까지 말씀하시고는 나를 강둑 밑으로 보냈다. 순간 쿵-! 하고 엉덩방아를 찧으며 떨어졌다. 아파할 사이도 없이 동생들이 후드득 내려 오는 걸 받아야 했고 짐도 연달아 떨어졌다. 마지막으로 어머니께서 내려오셨다.

어머니는 몸을 낮추어 주변을 살피시고는 조용히 우리에게 "하나, 둘, 셋 하면 뒤도 돌아보지 말고 저기 보이는 산까지 뛰는 것이야. 그리고 혹시라도 절대 뒤를 돌아봐서는 안 돼!"라고 하셨다. 우 리 남매는 고개를 끄덕였다. 어머니의 구령 소리가 들렸다. 우리는 뒤도 돌아보지 않고 눈길 을 헤치며 달렸다. 뒤에서 누가 내 목덜미를 잡을 것 같은 오싹함에 걸음아 나살려라 하는 마 음으로 앞만 보고 달렸다.

하지만 무릎까지 쌓여 있는 눈을 가로지르다 보니 달린다는 표현이 무색하게 우리는 네 발로 기어가는 꼴이 되었다. 누군가 이 모습을 발견하면 우리 가족은 모두 죽은 목숨이었다. 그 추운 밤 그렇게 매서 운 바람이 부는데도 온몸이 땀으로 범벅이 되 었다. 이마에서 땀이 후드득 떨어졌고 몇 겹씩 껴입은 옷이 젖어 들었다. 그렇게 한참을 기어 가다 누가 볼세라 산 속으로 뛰어들었다. 마침내 강을 건넌 것이다.

가쁜 숨을 몰아쉬는 우리들의 눈썹에는 눈꽃 이 새하얗게 피어있었다.  숨돌릴 사이도 없이 어머니는 우리의 신분을 들킬만한 모든 증거물 을 즉시 태우셨다. 불타는 증서들을 보며 나는 직감적으로 알게 되었다. '이제 우리는 다시는 내 고향으로 돌아갈 수 없겠구나. 다시는 내 단 짝 친구 영희도, 그리운 아버지도 만날 수 없겠구나.' 차가운 눈바람이 칼날처럼 매섭게 불었 지만 내 볼 위로는 뜨거운 눈물이 하염없이 흘러내렸다.

중국으로 넘어온 그날의 기억을 돌이켜보면 쉴 새 없이 터지던 폭죽소리가 지금도 귓가에 생생하다. 중국에서는 풍습에 따라 춘절(음력설) 을 기념하여 폭죽을 밤새 터트렸다. 어느새 집 을 떠난 지 상당한 시간이 지나 해가 바뀌고 음력설을 맞은 것이다. 사방에서 들리는 폭죽소 리는 너무나 공포스러웠다. 더 괴로운 것은 폭 죽이 터지고 난 뒤의 화약 냄새였다. 그 냄새가 어찌나 고약한지 하루 종일 굶은 빈속이었는 데도 구역질이 날 정도였다.

그렇게 폭죽 터지는 소리와 구역질나는 냄새, 여기저기서 들리는 시끄러운 소리와 함께 우리는 중국 땅에 입성하였다. 엉겁결에 중국 땅에 왔지만 앞으로 가야 할 길이 막막했다. 땀으로 범벅되었던 몸은 영하 30도가 넘는 날씨에 금세 동태처럼 얼어붙었고, 피곤함과 배고픔이 더해지면서 생각마저 얼어붙는 것 같았다. 그나마 배고픔은 참는다고 하지만, 이 추운 날씨에 피곤은 이길 수 없었던 우리는 마침 인적이 없는 한 초막을 발견했다.

사람이 살고 있는 흔적이라고는 없는 그 초막에서 우리는 안심하고 스르르 달콤한 잠에 빠졌다. 얼마나 잤을까...
어머니의 다급한 목소리에 눈을 떠 보니 자고 있는 우리 가족을 보고 마을에서 사람들이 떼로 몰려오고 있었다. 어서 도망가야 한다는 어머니의 다급한 목소리에 잠이 싹 달아났다. 멀리서 봐도 좋은 의도로 우리를 쫓는 것은 아닌 듯 보였다. 우리는 잡히지 않으려고 헐레벌떡 도망갔다. 한참을 달렸지만 그들은 고래고래 소리를 지르며 우리를 끝까지 따라 왔다. 우리를 잡으려고 쫓는 것이 확실했다.

우리는 그들을 따돌리기 위해 더 깊은 산 속으로 올라갔다. 그렇게 한참을 도망치고 나서야 우리를 쫓던 인기척이 잦아들었다. 숨차고 놀란 가슴이 쿵쾅쿵쾅 뛰었다. 언제라도 다시 잡혀 갈 수 있다는 두려움이 우리를 엄습했다. 그날 이후 우리는 자연스럽게 사람의 눈을 피 해야 함을 동물적으로 알게 되었다. 낮에는 산 속에 몸을 숨겼다가 밤에만 걸었다. 그렇게 날이 어둑어둑해지면 줄지어 걷다가 멀리서 들려오는 오토바이와 자동차 소리가 들리면 길옆 비탈로 나뭇가지를 붙들고 몸을 피했다. 그리고 모든 소리와 불빛이 사라지면 그제야 다시 길가로 기어 올라오기를 수없이 반복했다. 그 렇게 산을 하나 넘고 또 마을을 지나고 다시 산을 넘었다.

우리의 여정은 만만치 않았다. 먹을 것을 구하기도 마땅치 않았고 추위도 큰 난관이었다. 눈밭을 해치며 걷는 동안 발은 꽁꽁 얼어붙었고 매서운 칼바람까지 휘몰아쳤다. 하필 그 날은 눈이 억수로 내렸다. 매서운 눈보라가 휘몰아쳐 왔다. 눈이 거의 1미터 가량 쌓 였는데 깊은 산속에서 길을 잃었는지 주변에 마을이 하나도 보이지 않았다. 발은 꽁꽁 얼어 붙어 동상에 걸리기 일보직전이었고, 눈보라 때문에 눈이 떠지지도 않는 상황 속에서 이러다가 꼼짝없이 죽겠구나 하던 찰나에 건너편 산 중턱에서 조그마한 불빛이 반짝였다.

그 희미한 불빛은 우리 가족에게 실낱같은 희망이었고, 하나님께서 불쌍하게 죽게 생긴 일가족을 살려주신 구원의 불빛이었다. 우리는 약속이라도 한듯 한마음 한뜻이 되어 죽을힘을 다해 그 불빛을 향해 갔다. 오두 막 안에서는 사람들의 말소리가 들렸는데 차마 문을 두드릴 용기가 나지 않았다. 그렇다고 가만히 있다가는 꼼짝없이 죽게 생겼으니 한 참을 문 하나를 두고 우왕좌왕하면서 밖에서 서성거렸다.

그러던 찰나, 문이 열리면서 러시아식 털옷과 털모자를 쓴 할아버지 세 분이 사 람소리를 듣고 깜짝 놀라 사냥총과 횃불을 들고 나오셨다. 그 모습을 본 우리도 놀라서 소리를 질렀고 살려달라고 애원했다. 한바탕 소동이 끝나고 횃불로 우리를 위아래로 훑어보신 그분들의 눈에 들어온 것은 눈밭을 해매는 엄마와 어린 아이 3명이었다.

오밤중에 눈보라가 휘몰아쳐 오도 가도 못하는 이 기막힌 상황을 본 그분들은 우리를 딱하게 여기시고 오두막 안으로 데리고 들어가셨다. 그 오두막은 산에서 참숯을 만들기 위해 일꾼 들이 쉬는 공간이었다. 자그마한 오두막은 참 포근해서 하룻밤 쉬기에 더할 나위 없이 좋은 공간이었다. 덜덜 떨고 있는 우리에게 그분들 은 자신들이 쓰시던 담요를 덮어주셨다. 우리 가족은 그 담요를 덮고는 기절하듯 잠이 들었다. 그렇게 깊은 단잠을 자고 일어난 우리에게 할아버지들은 중국식 배추절임과 돼지고기를 잘게 다져 넣고 끓인 입쌀 죽을 한 그릇씩 퍼 주셨다.

우리는 오랜만에 보는 따뜻한 음식에 감탄할 새도 없이 그 뜨거운 죽을 게눈 감추듯 후루룩 마셨다. 아직도 그때 먹었던 그 죽을 잊을 수 없다. 다시 찾아보라고 해도 찾을 수 없는 그 오두막집, 그리고 우리에게 하룻밤 쉬 었다가 갈 수 있는 친절을 베푸셨던 할아버지들... 얼마나 감사한지 잊을 수가 없다.

그날 그 곳에서 그분들을 만나지 못했다면 우리는 아마 얼어죽었을 것이다. 여정이 길어지니 점점 요령이 생겼다. 이제는 낮에도 인적이 없으면 길을 따라 걷다가 오토바이나 차 소리가 들리면 다시 눈속이나 비탈로 몸을 숨겼다.
우리에게 숙소는 산 전체였고, 우리의 침대는 눈 덮인 산속이었으며, 목이 말라 마시는 물은 하얀 눈이었다.

그러다 얼어죽을 지경에 놓였다 싶은 최악의 상황을 만날 때 마다 감사하게도 우리의 몸을 녹여줄 비어있는 초막집을 만났고 잠깐씩 몸을 녹일 수 있었다. 그 중 한 과수원의 초막집에 들어갔던 기억이 또렷하다. 그 초막집의 천장에는 주렁주렁 씨앗이 매달려 있었다. 얼마나 배가 고팠던지 그 씨앗이라도 먹고 싶은 마음이 굴뚝같았지만 남의 것을 함부로 먹을 수 없다는 생각에 건드 리지 않았다.

알고 봤더니 그 씨앗들은 봄이 되면 밭에 뿌릴 씨앗으로 약을 쳐놓은 상태들이 었다. 그 때 배고픔에 못 이겨 그 씨앗에 손을 대었다면 큰일 날 뻔했다. 한참을 앉아 쉬고 있는 그 때 문이 열리며 그 과수원 주인과 그 아들이 초막집에 들어왔다. 그 부자는 우리를 보고 깜짝 놀랐다. 집주인은 끝 까지 중국말로 우리에게 나가라고 했지만 옆에 선 이제 막 고등학생 정도 되어 보이는 아들은 더듬더듬 조선말을 써가며 어디서 왔는지, 어디로 가는지 묻기도 하고 아버지를 설득해 우리를 도와주자고 했다.

우리가 허기진 모습을 본 그 집 아들은 가지고 온 도시락을 우리에게 내 주자고 보챘다. 아저씨는 어쩔 수 없이 가지고 온 도시락을 내어주며 빨리 먹고 가라고 손짓하셨다. 우리는 고마워하며 받은 도시락으로 요기를 하고 그들이 안내해 주는 길을 따라 그 곳을 빠져 나왔다.

그 아저씨는 우리가 행여나 그곳을 떠나지 않고 다시올까봐 불안했던지 우리가 멀어질 때까지 지켜보고 계셨다. 종종 마주하는 따뜻한 도움의 손길 덕분에 우 리의 여정은 계속될 수 있었지만, 추위와 배고 픔은 여전히 우리를 괴롭혔다. 어느 날은 우리 가족 모두 배가 너무 고프고 힘들어서 주저앉고 말았다.

잠깐 누우면 눈 속에 파묻히게 되고 그 상태로 깊이 잠들면 동상으로 얼어죽는다며 어머니께서는 우리를 깨우셨다. 여동생과 나는 그래도 이 악물고 걸었지만, 이제 갓 6 살인 남동생은 잘 걷지도 못했다. 춥고 배고프고 발도 아프고 안 아픈 곳이 없다며 남동생은 더 이상 걸을 수 없다고 칭얼거렸다.

이대로는 그 누구도 한 걸음조차 움직일 수 없음을 아셨던 어머니는 뭐라도 먹을 것을 구해야 한다고 결심하셨는지 어린 나를 데리고 마을로 내려 가셨다. 그리고 대문이 열려있는 한 집을 기웃 거리셨다. 마침 개 짖는 소리에 집주인 아저씨가 나오셨다. 아저씨는 깜짝 놀라 중국말로 뭐라고 하셨는데 어머니와 나는 손짓 발짓 다 해 가며 배고픈 시늉을 했다.

그리고 어머니께서 는 숨겨놓으셨던 100위안을 꺼내서 아저씨에 게 주시고는 먹을 것을 좀 달라고 의사표시를 하였다. 한참 돈을 빛에 비춰보다가 우리의 몰 골을 쳐다보시던 아저씨는 곧 부엌에 들어가시더니 만두 두 개를 가지고 오셨다. 따뜻한 김이 모락모락 나는 것이 아마도 본인의 식사를 위 해 준비한 음식인 듯 했다. 아저씨는 그 만두를 우리에게 건네시고는 돈은 받지 않으시고 어서가라고 손을 내저으며 우리를 내보냈다. 처음 보는 만두를 두 눈으로 확인하는 순간 나는 배가 불러왔다. 동생들이 있는 산속에 돌아와서 어머니는 만두를 4등분해서 나누어 주셨다. 나는 한 조각은 입에 넣고 다른 한 조각은 아껴 먹으려고 주머니에 넣어두었다. 그렇게 우리 가족은 그 만두 한 조각의 힘을 빌어 다시 목적지를 향해 걸었다.

우리 가족의 목적지는 처음부터 남조선으로 정해져 있었다. 중국에서 정착해서 살 생각은 전혀 없었고, 남조선에 가기위해 길림성 길림시에 있다고 하는 대한민국 영사관에 대한 소문을 듣고 떠난 것이 전부였다. 요즘에야 내비게 이션이나 스마트폰으로 길을 찾으며 자동차로 이동한다면 하루면 도착할 거리이지만, 아무것도 없었던 24년 전의 우리는 길이 보이면 무 작정 그 길을 따라 걸었고, 그렇게 수많은 밤 을 헤매고 또 헤맸다.

아무리 걸어도 우리들 왼 편에는 압록강과 북한이 계속 보였다. 언제든지 북한의 군인들이 강을 건너와 우리를 붙잡아 갈 것만 같았다. 두려움에 함부로 뒤도 돌아보지 못하고 온 몸을 바들바들 떨며 잠을 자곤 했다. 어머니와 나에게도 어려운 일이었지만 특히 이제 여섯 살 정도 된 어린 막내에게는 너무나 큰 시련이었다. 더 이상 지쳐서 못 걷겠다는 남동생을 어머니께서 등에 업고 발길을 재 촉하기도 하셨다.

그렇지만 어머니도 힘드시기는 마찬가지였고 설상가상으로 험한 길을 걸으며 신발도 다 해어졌다. 어머니 발바닥은 찢어져 이미 피투성이가 되었고 갈라진 밭고랑 마냥 속살이 보였지만 챙겨온 실과 바늘로 찢어진 발바닥을 꾀매는 것이 어머니가 할수있는 조치의 전부였다. 상황은 점점 악화되었고, 남동생은 이제 자기를 그냥 산에 버리고 가라고 울기 시작했다.

나는 그 엄동설한에 변변한 신발 하나 없이 앙상하고 조그마한 발로 험한 길을 걸어온 동생의 마음이 어떤 마음인지 너무나 이해가 되었고 오히려 아무것도 모르는 우리를 이렇게까지 고생시키는 어머니가 원망스럽기까지 했다. 그렇게 몇 시간을 실랑이를 벌인 끝에 어머니는 남동생더러 알아서 오라며 내버려 둔 채 저만치 앞으로 가버리셨다. 나는 진짜 엄마가 남동생을 두고 가시는 줄 알고 그 자리에서 남동생이랑 울었다.

그리고 조금만 힘내보자며 남동생을 달랬다. 그렇게 한 참을 울던 남동생은 나의 다독임에 다시금 몸을 일으켰다. 그리고 앞서가신 엄마를 따라 가려고 부지런히 걸어갔다. 한참을 걸으니 저 앞에 어머니께서 그렇게 멀리가지 못하시고 나무 옆에서 우리를 기다리고 계셨다. 피곤하고 힘든 상황 속에서 마음에도 없는 말들이 오고 갔지만 어찌 그것이 진심일 수 있겠는가? 우리는 서로를 부둥켜안고 한참을 울었다. 어머니는 미안하다며 다시는 모진 말 하지 않고 버리고 가지 않겠다고 약속하시며 우리에게 사과하셨다. 그리고 다시 재정비를 하고 힘을 내어 한 걸음을 내디뎠다.

그런데 갑자기 어머니께서 “아... 아까 먹었던 만두를 하나만 더 먹었으면 힘이 날 텐데...” 하며 중얼거리셨다. 그 말을 듣는데 나도 배가 고파와 침을 꼴깍 삼 켰다. 그리고는 무심결에 주머니에 손을 넣으니 아껴놓은 만두 조각이 손에 잡혔다. 손에 잡힌 그 만두를 1초의 망설임도 없이 "엄마! 만 두!" 하며 꺼내드렸다. 어머니는 내 손에 든 그 만두를 보자마자 누가 뺏어먹을새라 순식간에 삼키셨다.

나는 지금까지도 어머니가 그렇게 빨리 드시는 모습을 본적이 없었다. 어머니 자신도 어찌그리 즉각적으로 반응하셨는지 상상도 못하셨다고 말씀하신다. 잠깐의 정적이 흐르고 어머니는 한참을 나의 빈 손을 보시다가 아껴놓은 만두가 순식간에 사라지는 광경에 놀라 눈물이 글썽하게 고인 나의 눈과 시 선을 마주치셨고, 무안하게 들고 있는 내 손 을 쏙 잡으시고 고마워 하셨다.

여전히 어머니 는 그때 그 만두를 이야기하시며 나에게 미안 하고 고마웠다고 이야기하신다. 그 만두 한 조각이 어머니를 걷게 하는 힘이었으며 어머니로서 자식들을 끝까지 지키며 부모로서의 책임과 의무를 다할 수 있도록 돕는 큰 격려였다고 한 다. 그렇게 우리 가족은 다시금 서로를 격려하 며 꼭꼭 뭉쳐 한 마음 한 뜻으로 걸을 수 있었 다. (계속)


한국오픈도어선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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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세계 이슬람권, 공산권 교회, 성도 국제선교단체, 순교자, 중보기도, 세계기독교뉴스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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