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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앙 나눔터

이끄심 5화 - ‎ש‎י야샤브: 거류하다 탈북민 수기 김서윤 전도사 23,5

작성자청포묵|작성시간24.03.02|조회수3 목록 댓글 0

이끄심 5화 - ‎ש‎י야샤브: 거류하다 탈북민 수기 김서윤 전도사 23,5

은명이(가명) 이모 덕에 길거리에서 방황하는 생활은 정리할 수 있었지만, 우리의 목적지는 여전히 대한민국이었다. 어머니는 이모에게 길림시에 있다는 대한민국 영사관을 찿고 있다고 알아봐 달라고 부탁하셨다. 그런데 길림시에는 한국 영사관은 없고 베이징에 가야 한다고 했다. 기껏 고생해서 여기까지 왔는데 청천벽력과도 같은 소식이었다. 나중에 알고보니 우리가 길림에 도착했던 99년 초에는 동북 지역에 한국 영사관이 없었고, 그 후로 몇 개월 뒤에야 심양(선양)에 영사관이 개설되었다.

정확한 정보가 없었던 우리는 대한민국 영사관이 길림시에 있는 줄 알고 그곳으로 왔던 것이다. 우리는 한국행을 위해 베이징으로 발길을 돌려야 하는지 고민했다. 그곳에 가면 당연히 한국으로 갈 수 있지 않을까 하는 막연한 생각이 들었다.  우리의 계획과 목적을 다 들으신 은명이 이모는 아무래도 어머니가 먼저 상황을 살펴보고 오는 것이 좋겠다고 하셨다. 그동안의 여정이 너무나 고달프기도 했고, 어떤 상황인지 모르는 상태에서 아이들을 다 데리고 베이징에 가는 것은 분명 위험 할 것이라는 의견이셨다. 그리고는 어머니의 베이징 방문에 필요한 모든 부분에 도움을 주셨다.

그렇게 베이징에 가신 어머니께서는 그 곳 상황이 그리 쉬워 보이지 않다고 느끼셨다. 베이징 대한민국 대사관 근처는 공안 들이 철통같이 지키고 있어 기웃거리거나 어슬렁거리는 모습을 보이면 단번에 그들의 의심을 사게 될 것이었다. 그렇게 며칠간 그 주변을 배회하던 어머니께서는 베이징보다는 제3국, 베트남을 통하면 상대적으로 쉽게 한국으로 갈 수 있다는 정보를 듣게 되셨다. 새로운 희망을 가지고 다음 목적지를 정하신 어머니는 길림으로 돌아온 후 베트남으로 갈 준비를 마치셨다. 가족 모두가 함께한 이번 여정은, 감사하게도 도움의 손길들이 있었고 그 중에는 은명이 이모의 도움이 매우 컸다.

덕분에 우리는 순조롭게 중국 남부의 남녕(난닝)시까지 무사히 도착할 수 있었다. 내가 기억하는 남녕시의 첫 인상은 매우 강렬했다. 찜질방 같은 무더위가 우리를 반겨주었고 모든 사람들이 그 무더위 속에서 더위를 식히기 위해 뜨거운 차를 마시는 것이 매우 인상적이었다. 베트남에 가보니 베트남도 남녕시와 별 다를 게 없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베트남에 입성하기 위해서는 베이룬강 (Beilun River, 北侖河)을 건너야 했다.

또 다시 강을 건너 미지의 세계로 나아가야 하 는 우리의 여정에는 도강(徒江)의 숙명과도 같은 것이 따라다니는 듯 했다. 관광객처럼 위장하고 베이룬강 지역을 관람하는 쪽배를 하나 섭외했다. 그러다 한적하고 외진 곳에 다다랐을 때 배를 운전하는 아저씨에게 우리끼리 구경하고 싶다며 돈을 주고 빠져나왔다. 그렇게 우리는 자연스럽게 아무도 안 보는 틈을 타서 베트남 땅에 발을 내디뎠고, 잘 닦여있는 산길을 따라 걷기 시작했다.

그런데 얼마 지나지 않아 오토바이 소리가 시끄럽게 들리더니 순식간에 총기를 든 베트남 국경 수비대들이 우리를 쫒아왔다. 알고보니 그들은 우리가 중국에서 베트남으로 강을 넘어오는 것을 다 지켜보고 있었던 것이다. 우리는 꼼짝없이 베트남 국경 수비대에서 취조를 받아야 했다. 그들이 우리에게 호통을 치고 윽박질러도 우리는 두렵지 않은 척 해야 했고, 절대 중국인이 아니라고 우겼다.

우리는 끝까지 대한민국 사람이라고 우기며 한국 영사관에 우리를 데려가 달라고 요구했다. 그들은 대한민국 사람이면 여권을 보여 달라고 했지만 우리는 여행 중에 여권을 분실했다고 둘러대었다. 베트남에서의 취조의 과정은 언어적 장벽으로 인해 상당히 진전이 더뎠다. 중국말이나 한국말, 영어 모두 제대로 소통이 되지 않았다. 어쩔 수 없었던 그들은 우리의 사진을 찍고, 우리의 한국 집주소 를 적어내라고 했다.

당연히 한국에 집이 없었던 우리는 은명이 이모가 주셨던 한국 화장품 샘플에 적혀 있는 화장품 제조사 주소 를 적어냈다. 그곳에서 많은 일들이 있었고 위험한 상황도 여러번 있었지만, 오직 대한민국에 가기 위한 일념으로 모든 고통과 수모 그리고 어려움을 견뎌냈다. 그렇게 산속에 있는 국경수비대에서 한 달 넘게 생활을 하고 도시와 가까이 맞닿은 본부에서 약 2개월 동안 생활하였다. 나중에는 자연스럽게 베트남어도 몇 마디 익히게 되었고, 안면을 튼 베트남 군인들도 전보다는 부드러워진 태도로 우리를 대하게 되었다.

오랜 기다림 끝에 드디어 반가운 소식이 들려왔다. 나와 엄마는 그들의 안내에 따라 국경 수비대 대령 집무실로 들어가게 되었고 수화기를 전해 받았다. 나는 단번에 대한민국 대사관에서 온 반가운 소식이라는 것을 알았다. 얼마나 설레고 기뻤던지 쿵쾅대는 가슴을 진정시키느라 힘들었다. 그렇게 조심스레 어머니는 수화기를 넘겨받았다. 그리고 수화기 너머로 익숙한 한국말이 흘러나왔다.

“안녕하십니까, 여기는 대한민국 대사관입니 다. 먼길 오시느라 정말 수고 많으셨습니다. 죄송하지만 저희 사정상 탈북자를 받을 수가 없으니 오시던 길로 되돌아가시기 바랍니다. 정말 죄송합니다.” 나는 제대로 들은 것이 맞는지 내 귀를 의심 했다. 어머니도 마찬가지이셨다. 이게 무슨 소리인가? 도대체 어떻게 된 영문인지 자초지종을 들어보려고 했으나 이미 전화기에서는 “뚜, 뚜, 뚜” 하는 기계음만 흘러나올 따 름이었다.

갑자기 우리를 둘러싼 공기의 흐름이 바뀐 것 같았다. 1분 1초가 영겁의 시간 같았고 하루가 1년 같이 느껴졌다. 한국에 가겠다는 희망을 품고 먼 길을 돌아온 우리에게는 정말 하늘이 무너지는 순간이었다. 대한민국 대사관에서 우리를 거부했으니, 우리는 이제 어떻게 되는 것인가? 설상가상으 로 24시간 안에 북측에서 우리를 잡으러 온 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우리에게는 선택 의 여지가 없었다. 이곳에서 최대한 빨리 탈출해야만 그나마 목숨을 부지할 수 있었다. 우리는 무조건, 우리가 가진 모든 짐들을 버리고서라도, 그날 밤 이곳을 빠져나가기로 결단했다. 모두가 잠든 밤 12시쯤이 기회라고 판단했다. 우리는 일찍부터 방에 불들을 소등하고 보초서고 있는 경비병이 자리를 비우기만 바랬다.

이윽고 둥근달이 환하게 떠오르고 밤이 깊어졌다. 마침 늘 성실히 자신들의 임무를 다 했던 경비병이 그때만큼은 마치 우리에게 도망갈 기회라도 주는 마냥 보이지 않았고, 우리는 이때를 틈 타 시설을 탈출했다. 그리고 처음 강을 건너 왔던 산너머 강변을 향해 무작정 뛰기 시작했다. 몇 시간을 뛰었을까? 저만치 뒤에서 오토바이 소리와 개 짖는 소리가 들리기 시작했다. 우리가 없어진 것을 알고 경비대원들이 추격해 온 것이었다.

동남아의 우거진 숲들과 가시덩굴을 헤집으며 군견들이 우리를 벼랑 끝으로 몰아넣는 듯했다. 온 몸이 가시에 긁혀가며 우여곡절 끝에 처음 출발지점이었던 베이룬 강변에는 도착했지만 우리 눈앞에 펼쳐진 것은 처음 건널 때와는 완전히 다른 강의 모습이었다. 3개월이 다 되도록 그곳 베트남에서 우기를 보냈던 지라 그 사이 강물이 크게 불어나 있었던 것이다. 절체절명의 순간이었다.

이대로 있다가 잡힐 수는 없으니 우리는 결국 넘실거리는 강으로 들어설 결단을 했다. 서로를 잃지않기 위해 평소 가방에 챙겨두었던 밧줄로 황급히 서로의 몸을 묶었다. 어머니는 우리에게 절대로 물을 마시지 말고 발버둥치지 말라고, 가만히 있으면 물에 뜬다고 신신당부하셨다. 마침내 우리 가족은 물속으로 뛰어들었다. 현실적으로 거센 물살 속에서 헤엄을 친다는 것은 불가능했고, 그저 물살에 몸을 맡긴 상태로 반대편으로 떠내려가려고 애썼다.

강물에 삼켜지지는 않을까 두려움이 엄습해 오는데 그 와중에 오토바이 소리와 군견들이 짖는 소리가 가깝게 들려왔다. 우리는 사투 끝에 새벽이 밝아 해가 떠오르기 시작할 무렵에야 건너편 중국 땅에 발을 딛을 수 있었다. 다행히 다치거나 물살에 휩쓸린 사람 없이 모두 안전하게 도착하였다.

무사히 탈출한 것만 해도 감사한 일이겠지만 우리가 느끼는 실망과 절망감은 너무 컸다. 뚜렷한 목적과 희망을 가지고 이곳까지 왔는 데 강을 넘어온 우리는 이제는 돌아갈 곳이 마땅치 않았다. 일단 우리는 길림으로 발길을 돌렸다. 잡히지 않고 안전하게 다시 돌아 왔다는 것 자체는 기적 같은 일이었지만, 한국행을 바라던 우리의 마음은 완전히 꺾여 버렸다. 무엇보다 북한에서부터 목적으로 삼았던 한국행에 대한 소망이 완전히 사그라졌다.

대한민국에서 우리를 거부했다는 사실이 너무나 큰 충격으로 다가왔다. 우리는 이제 북한도, 남한도 갈 수 없으니 중국에서 잘 살아 보기로 결심했다. 아무런 연고도 없고 언어조차 통하지 않는 중국 땅이지만 당장 우리에겐 다른 선택의 여지가 없었다. 이제 우리 힘으로 살아가겠노라 결단하고 길림시로 돌아왔다. 그렇지만 사실 그 도시도 여정 간에 잠시 머물던 곳에 불과했으니, 우리는 집도 없고 갈 곳도 없었다.

그래서 처음 얼마 동안은 길림시 강남과 강북을 가로지르 는 송화강(松花江) 다리 밑에서 생활하기도 했다. 낙심은 컸지만 중국에서 살기로 결심을 한 어머니는 닥치는 대로 일을 하시기 시작했다. 다행히 은명이 이모네 식당에서 일을 하셨던 주방 큰어머니가 우리의 사정을 알고 자신의 집에 와 있으라고 해 주셨다. 어머니는 침과 뜸을 놓을 줄 아셨는데, 평소 관절이 안 좋으셨던 큰어머니가 어머니를 많이 의지하시기도 했고, 오래전 부터 남편과 이혼하고 외로운 삶을 살고 계셨기 때문이기도 했다.

-송화강(松花江) -길이는 약 1,960km, 백두산 천지 비룡폭포에서 시작해 길림성 과 흑룡강성 지역을 흐르는 강

비록 나무로 불을 때는 단칸방의 작은 집이었지만, 당장 이몸 하나 덥혀줄 곳이 있다는 것이 우리 가족에게는 큰 힘이 되었다. 어머니와 주방 큰어머니는 낮에 일하러 나가셨다. 불법체류자인 우리 남매는 혹시나 다른 사람들의 눈에 띌까봐 밖에서 자유롭게 다니지 못했다. 당시 중국은 1가구 1자녀 정책 때문에 가정에 아이들이 2명 이상 되면 중국정부가 단속도 했고, 평생 벌금과 함께 직장을 다니는 사람이라면 월급까지 삭감시키는 어마무시한 정책이 있었다.

이런 상황 에서 다른 사람의 눈에 띄지 않기 위해서 나 와 여동생 그리고 남동생까지 뿔뿔이 흩어져야 할 상황에 놓였다. 우리는 당연히 학교도 다닐 수 없었다. 우리는 주로 뒷산에 가서 사 람들 눈에 띄지 않게 놀다가, 해가 질 때 쯤 땔감으로 쓸 죽은 나무나 떨어진 가지들을 모아서 주워서 내려오곤 했다.

낯선 이국땅에서의 어려운 생활이었지만 우리를 도와주신 여러 은인들이 우리 가족을 생존할 수 있게 해주었다. 그러한 은인 중 팡즈 이모는 어머니가 우연히 버스정류장에서 만 난 조선족 버스운전사였다. 중국말을 못하는 어머니를 보고 시골에서 온 조선족인줄 알고 말을 걸어 오셨던 것이 인연이 되었다고 한다. 팡즈 이모는 처음에는 북한사람을 도왔다 가는 처벌을 받을 수 있다 생각하셔서 어머니를  외면하셨지만, 나중에 나와 동생들을 보시고 마음이 녹으셨는지 우리 가족을 많이 보살 펴 주셨다.

처음 우리 남매들을 보시고는 우리를 붙잡고 하염없이 우시던 팡즈 이모의 모습을 잊을 수가 없다. 제대로 먹지도 못하고 집에만 갖혀 있는 나를 안쓰럽게 생각하셨던 팡즈 이모는 지인이 하는 식당에서 일하면서 지낼수 있도록 알아봐 주셨다. 그곳은 노래방이 딸린 2층짜리 카라오케 식당이었다. 나는 그곳에서 낮에는 주방에서 커다란 접시를 닦았고, 손님들이 다 나간 밤에는 청소를 담당했다. 그리고 손님들이 많은 시간에는 절대로 홀에 나가지 않았다. 식당주인이셨던 아주머니는 그런 나를 안쓰러워 하셨고 늘 맛있는 음식으로 위로해 주셨고 가끔은 방에 가서 쉬라고 편의도 봐 주셨다. 나는 그곳에서 재워주고 음식을 주는 것 만으로 감사했기에 누구보다 고사리 같은 손으로 열심히 일을 했다.

그곳에는 지방에서 올라오셔서 일하는 이모님들이 많았고, 식당 뒷편에 있는 직원들 숙소가 있었는데, 나는 그곳에서 한달을 지냈다. 그곳에서 가장 힘들었던 것 은 엄마가 너무 보고 싶었다는 것이다. 고단한 하루 일과가 끝나면 여전히 엄마의 손길이 필요한 나는 늘 몰래 몰래 눈물을 훔치곤 했다. 어린 나이에 식당에서 일하면서 온갖 고생을 다 하는 나를 대견해 하면서도 늘 위로해주셨던 건 팡즈 이모셨다. 그리고 자유롭게 이모의 집에 드나들 수 있도록 집을 열어주셨다. 팡즈 이모의 집은 내 맘에 안식처 같은 곳이었다. 이런 안식처가 없었다면 하루도 평안할 날이 없던 중국에서의 생활을 어찌 견딜 수 있었을까.

한편 우리 가족은 불법체류자로서 매일 불안한 마음으로 살아갈 수 밖에 없었다. 조선족 이모들은 항상 우리 집이 애들이 많다고 걱정을 하셨다. 앞서 말했다시피 중국은 1가구 1 자녀 정책으로 2~3명의 아이들이 한 집에 있다는 것에서부터 의심을 사게 되고 신고대상 이었다. 그래서 한 명은 기숙학교로 보내야 서로가 안전하다고 판단했고, 여자보다는 남동생이 씩씩하게 혼자서도 잘 지낼 것이니 남동생을 기숙학교로 보내라고 엄마를 재촉하곤 했다.

남동생은 결국 가짜신분을 만들어 다른 도시의 기숙학교로 보내지게 되었다. 여동생도 감사하게도 학교를 갈 수 있는 길이 열렸다. 우리 가족과 함께 지내면서 활력을 되찾으신 주방 큰어머니께서 어머니를 생명의 은인이라고 항상 말씀하셨다. 그리고는 여동생의 총명함을 보고 교직에 종사하고 있는 친척에게 여동생이 학교에 다닐 수 있도록 길을 열어주셨다. 그렇게 여동생은 주방 큰어머니의 친척집에서 지내며 소학교에 입학할 수 있었다.

서로 이해해주고 유일하게 의지하던 여동생이 없으니 이 세상에 나 홀로 남겨 진 것만 같은, 모든 것이 정지된 것 같은 괴롭고 힘든 시간을 보냈다. 실제로 여동생이 없는 1년을 어떻게 지냈는지 기억이 하나도 남아있지 않다. 그렇게 방학이 되어서야 집으로 돌아온 여동생을 보니 너무 반가웠다. 학교에 다니는 동생을 보며 부러움과 약간의 질투심이 없지는 않았지만, 여동생도 나름대로 남의 집에서 눈칫밥을 먹어가며 혼자 공부하며 쓸쓸히 지냈을 것을 생각하니 마음이 아파왔고 여동생과 헤어지기가 더더욱 싫었다.

그래서 하루는 큰어머니와 어머니를 붙잡고 우리를 갈라놓지 말라고 울면서 사정을 했더랬다. 아무래도 어린 동생들에 비해 나이가 있다 보니 나는 학교에 가서 공부할 수 있다는 기대를 가지기 어려웠다. 그런 나의 마음을 아셨는지 어머니는 포기하지 않으셨다. 아는 분을 통해 한 조선족학교 교장선생님을 소개받으셨고, 교장선생님 방으로 찾아가 몇날 며칠을 무릎을 꿇고 여동생과 나를 수업만 듣게 해달라고, 필요한 비용은 어떻게든 감당하겠다고 간청하셨다.

교장선생님은 난색을 표하셨지만, 우리 가족의 딱한 사정과 어머니의 끈질긴 노력 끝에 어쩔 수 없이 승낙해 주셨고 그렇게 나의 최대 소원이었던 여동생과 함께 학교를 갈 수 있었다. 소학교 1학년을 마친 여 동생은 2학년으로, 나는 처음부터 5학년으로 학교에 들어갔다.  당시 나는 중국어를 하나도 못해서 수업만 되면 졸기 일쑤였다. 그나마 예체능 과목은 따라갈 만 했지만 한어(중국어 국어) 수업 시간만 돌아오면 알아들을 수 없는 중국 말에 엎드려있기 십상이었다.

답답했던 담임 선생님은 내 자리를 전교1 등 하던 친구인 환우의 옆자리로 옮겨주셨다. 환우는 선생님께 이야기를 들었는지 내가 숙제를 하도록 옆에서 보채다가, 나중에는 답답 했는지 내 숙제를 대신 해주기 시작했다. 사실 환우는 나에게 여러 가지로 친절하게 대해 주었다. 학교에서 점심시간만 되면 도시락 사 먹을 여건이 안 됐던 나는 늘 운동장 한켠에서 시간을 때우다가 수업 시작하기 전에 교실로 들어오곤 했다.

한 번도 학교에서 점심을 먹은 것을 본 적이 없는 환우는 내가 늘 굶는다는 것을 눈치채고는 하루는 자기 어머니가 싸 주신 3단 도시락을 나에게 통으로 내어 주기도 했는데, 나는 또 그것을 어머니에게 드린다고 가져오다 도시락 국물이 가방에 흘러서 책이 다 젖은 적도 있다. 처음에는 나의 숙제를 대신 해주고 자기 도시락까지 건네주는 환우에 대해 미안함은커녕 고마움도 느끼지 못했지만, 환우가 나 때문에 너무나 힘들어하는 모습을 보면서 내가 잘못하고 있는 것이라 는 생각이 들었다.

그때부터 공부를 진지하게 대하기 시작했다. 알아듣지 못하니 한어 교과서를 통으로 외워야겠다고 생각했고 그렇게 공부를 시작했다. 이런 저런 주변의 도움과 나의 노력까지 더해져 나중에는 중국어를 상당 수준으로 흉내 낼 수 있게 되었다. 그렇게 공부에 힘쓰기 시작하며 학교생활에 재미를 붙이고 있던 어느 날, 어머니가 내일 부터 학교에 가지 말라고 하셨다.

어떤 위험을 감지하셨는지 갑작스럽게 이사를 결정하신 것이다. 우리 가족은 얼마 후 한 시골 조선족 마을로 이사를 갔다. 시골로 옮기면서 어머니는 그간 모아놓은 돈을 털어 가족들의 가짜 호구를 만들었다. 이제 가짜이긴 하지만 호구가 생긴 덕분에 문제없이 학교에 입학할 수 있었다. 여동생은 체계적으로 학교를 꾸준히 다녔지만, 나는 또 월반에 월반을 걸쳐 중학교 1학년으로 입학해야 하는 상황이 되었다. 하지만 학생의 신분에 충실했고 여동생과 나는 최선을 다했다. 나중에 나는 시골학교에서 반장을 했고, 여동생은 전교회장까지 할 정도로 공부나 여러 방면에서 우수했다.

어려운 고비들이 있었지만 은인들의 도움과 어머니의 헌신 덕분에 우리의 중국 정착은 성공적인 것처럼 보였다. 몇 년간의 수고 끝에 이제야 그곳에서의 미래를 조금씩 그려볼 만하게 되었다. 하지만 우리 가족을 혼돈속에 빠뜨릴 어둠의 그림자가 서서히 몰려오고 있음을 그 때는 미처 알지 못했다. (계속)


한국오픈도어선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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