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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앙 나눔터

이끄심 7화 - 그곳에서 만난 천사들 탈북민 수기 김서윤 전도사 23,7

작성자청포묵|작성시간24.03.04|조회수3 목록 댓글 0
이끄심 7화 - 그곳에서 만난 천사들 탈북민 수기 김서윤 전도사 23,7


북한 보위부 수감시설의 상황은 매우 열악했다. 제대로 된 식사가 공급되지 않는데다, 탈북자들을 수용하기 위해 비좁은 공간에 모두가 눕지도 못하고 앉아서 자는 절망적인 상황이었다. 낮에는 벌을 서듯이 서있어야 했고, 그로 인해 길게 느껴지는 시간이 고통스러운 하루를 만들었다. 또한 긴 침묵 속에서 조사실로 불려나가 강도 높은 조사를 받아야 했다. 우리 가족은 그렇게 몇 차례의 모진 조사를 견디고 다행히 단련대로 이동할 수 있게 되었다. 여동생은 어릴때 부터 몸이 약한 탓에 북한까지 끌려오면서 식사를 거의 못했다.

극심한 스트레스와 몸무게가 30킬로에 불과한 여동생은 장티푸스로 인해 상태가 급격히 쇠약해졌고 약 하나 처방되지 않은 상황 속에서 매우 위태로운 상황까지 갔다. 그런 상황 속에서 우리는 보위부 조사를 끝마치고 온성에 있는 노동단련대로 이동해야 했다. 여동생은 나와 어머니에게 시체처럼 이끌려 겨우 목숨만 부지해서 그곳을 나왔다. 단련대에서는 정신교육과 육체노동이 함께 시작되었다.

외워야 하는 규칙은 또 왜 이렇게 많은지... 40가지가 넘는 조항을 다 외우고 조별로 검사를 받아야 했다. 조에서 한 사람도 틀린 사람이 없어야지만 방에 들어가서 잘 수 있었다. 아침에 일어나면 일을 나갔다. 옥수수나 벼를 추수하기도 하고 벽돌을 나르거나 미장을 돕는 등 건설 현장에서도 일을 했다. 그렇게 힘겹게 하루하루를 버티는 가운데 어머니께서 그 곳에서 여성 수감자 총 책임자가 되셨다.

책임자가 되면 단련대 안에서 여성 수감자들을 관리하기도 하지만, 그 외에도 외부로 동원되어 일하는 날에는 이탈자나 도망자가 있으면 그 책임도 져야 하는 부담이 막중한 자리었다. 그럼에도 어머니께서 총 책임자가 되신 것은 여군 출신이셨던 배경과, 고난의 행군시절에도 딸 둘을 버리지 않고 잘 키웠고, 단련대 안에서 혹시나 도망갈 기회가 생기더라도 딸들을 버리고 도망가지 않을 것이라고는 판단이 작용했던 것 같다. 웬일로 그들이 사람을 잘 보았다. 어머니는 항상 모범적이셔서 단련대에서도 인정을 받으셨다.

특히 가을을 맞아 두만강 주변에 밭으로 나가 일하는 날이 많은데 책임자였던 어머니의 임무는 더욱 막중했다. 아침마다 건강상태가 그나마 좋아 보이고 건강해 보이는 사람들을 선출해서 외부로 동원되는데, 일꾼들과 함께 책임자로 나섯던 어머니는 항상 인기가 좋으셨고 모두가 어머니와 함께 가길 바랬다. 이유인즉슨 어머니는 힘겹게 일하면서 옥수수 몇 알로 끼니를 때우는 아저씨들이 항상 담배 한 개비에 대한 목마름을 해소해 주셨던 것이다.

노동자들은 제발 담배 하나만 피우면 소원이 없겠다는 간청을 했고, 어머니는 농장주 간부들에게 사정사정을 해서 풋 배를 받으시면 직접 담배를 말아서 정신적으로나 육체적으로 지쳐있는 노동자들에게 몰래 챙겨주곤 하셨다. 그렇게 해소가 되는 날이면 일의 능률은 오르고 어머니가 책임자로 나가는 날에는 일터에서 도망자가 생기지도 않았고 농장에서도 만족도가 높았다. 옛날에 어머니께서 아버지를 위해 담배를 말곤 하셨는데, 그때의 실력을 발휘해서 아저씨들에게 작은 일탈을 선물했던 것이다.

그렇게 어머니는 신뢰를 쌓으셨고 평판도 좋으셔서 농장주들은 어머니의 작은 요청도 그나마 잘 들어주셨다. 나와 동생은 건강 상태는 나날이 안 좋아져 갔다. 특히 여동생은 단련대에 와서는 정신적으로는 그나마 회복이 되는 듯 싶었으나 하루 한 끼, 그것도 시커먼 고무 그릇에 옥수수 속을 갈아서 넣고 이름 모를 풀과 섞어 주는 음식은 식사가 아닌 소여물 같았기에 우리 둘은 도저히 씹을 수 도 넘길 수도 없어서 늘 굶기가 일수였다.

그런데 언제부터인가 어머니가 일터에 나갔다 저녁에 돌아오시면 늘 무언가를 갖고 오셔서 사람들이 깊이 잠이 들거나 혹은 사람들이 안 볼 때 나와 동생 입에 먹을 것들을 넣어주시곤 했다. 어느 날은 두부를 몰래 숨겨서 들어오는 날도 있었고 또 어떤 날은 불에 구운 옥수수도 몰래 품어서 갖고 오신 날도 있었다. 지금 생각해 보니 어머니가 비굴하게 자존심 같은 것은 버려둔 채 모진 모독과 비참함 가운데도 열심을 다 하셨던 것은 나와 동생을 살리고자 했던 어머니의 헌신 이셨다.

그러니 낮에는 비록 어머니가 안 계시지만 저녁에 돌아오는 어머니가 무언가를 갖고 오진 않을까 하는 기대 속에 하루를 보내는 것이 일과가 되었다. 그중에서도 가장 인상이 깊었던 것은 명절에도 먹기 힘든 귀하디 귀한 삶은 계란을 먹었던 사건이었다. 그날도 배고픔에 배꼽을 잡고 겨우 잠자리에 들었는데 어머니가 자고 있는 나와 여동생 입에 무언가를 쑤셔 넣으시는 것이었다.

잠결에 놀라기도 잠깐 너무나 달콤하고 말랑하여 목이 콱 메는 삶은 계란에 너무나 반가워서 숨도 안 쉬고 먹었던 거 같았다. 어머니는 소리 내지 말고 꼭꼭 씹어 먹으라고 하셨다. 일터에서 웬일로 나눠준 삶은 계란을 몰래 숨겨서 오셔서는, 다들 잘 때를 기다려 조심스럽게 계란 껍질을 까서 우리 입에 넣어주셨던 것이다.

당신이 받는 식사도 혼자 먹기에도 부족한 양의 음식이 었을 텐데... 부실한 감옥 식사를 생각하면 그 계란 한 쪽이 어머니께도 얼마나 귀하셨을까... 또 외부에서 단련대로 복귀하면 몸수색을 하는데 그것을 몰래 들여온다고 얼마나 신경을 곤두세우셨을까... 퍽퍽한 노른자가 목에 걸리지 않게 꼭꼭 씹으라는 어머니의 목소리를 들으며 꿀꺽 삼켰던 그 계란은, 쇠약해진 우리 생명을 연장시키는 어머니의 사랑이요 희생이었다.

고난은 부족한 음식과 배고픔뿐만이 아니었다. 우리는 한여름에 잡혀왔기 때문에 여름옷을 입은 채로 북송이 되었다. 북한에서는 별도의 죄수복을 지급하지 않았고, 심문 과정을 거쳐 단련대 로 옮겨질 때에도 북송 당시의 여름 복장 그대로였다. 북한의 가을 날씨는 아침저녁으로 정말 추웠다. 열악하기 그지없는 북한의 단련대 수용소 는 정말 추웠다. 시간이 더 지나가면 갈수록 반바지와 반팔티만 입고 있던 나와 동생은 얼어 죽게 생겼다.

그러던 어느 날, 한 이모 분이 보위부를 거치지 않은 채 몇 차례의 조사만 거친 후 단련대로 들어왔다. 그 이모는 중국에 친척들이 있어 몇 년 동안 몰래 그곳에 나가 도움을 받곤 했었다고 한다. 그날도 중국 도문으로 넘어가 친척들에게 도움을 받고, 온성으로 돌아와 늘 묵던 브로커 집에 있었는데 누군가의 신고로 이곳까지 오게 되었다. 처음 단련대에 도착한 이모의 모습을 지금도 생생하게 기억한다. 망연자실한 얼굴로 뒤편에 홀로앉아 서럽게 눈물을 훔치던 이모의 모습을 잊을 수 없다. 사람들은 이모가 유난이라며 혼자 불쌍한 척한다며 눈총을 주었지만, 우리 어머니는 이모를 위로해 주시며 강인하게 살아 이곳을 벗어나야 한다고 이끌어 주셨고, 그 덕분에 이모는 다시 용기를 낼 수 있었다.

그 후로 우리 가족과 이모는 서로 의지하며 그곳에서 힘이 되어 주었다. 정신을 차리고 보니 오들오들 떨고 있는 우리 가족을 본 이모는, 자신이 갖고 온 보따리 속에 옷이 많다며 몰래 숨겨온 돈으로 간부를 매수해 옷 보따리를 찾아내셨다. 그리하여 우리 세 모녀는 이모 덕분에 따뜻한 옷을 받아 입게 되었다. 우리는 꼭 이모에게 은혜를 갚겠다고 말했지만, 이모는 나중에 보따리를 찾아 고향에 가더라도 도중에 누군가에게 다 뺏겼을 것이라며, 우리에게 주는 것이 더 좋다 하시고 뿌듯해 하셨다.

이모가 준 옷 덕분에 우리는 얼어죽지 않고 나중에 중국으로 다시 넘어올 때까지 버틸 수 있었다. 이후에도 이모는 보따리에 있던 생필품 등을 빼내어 단련대 안에서 물물교환을 하면서 우리 가족도 함께 챙겨주셨다. 지금 생각하 면, 그 험난한 곳에서 살아남을 수 있도록 하나님께서 보내주신 도움의 손길이라고 생각한다.

단련대에서 약 한 달 이상을 머문 우리는 다시 청진에 있는 함경남도 도집결소로 옮겨지게 되었다. 우리는 단련대에서 노동을 하다가 노동교화 시간이 다 되면 풀려나는 줄 알았는데, 그렇게 간단한 문제가 아니었다. 2002년에는 중국 에서 끊임없이 탈북자들을 색출하여 북한으로 내보내던 시기였기에 북송된 사람들이 넘쳐났다. 이들은 보위부 조사와 단련대를 거쳐 각 주소지에 따라 도집결소로 호송되었다.

우리의 고향은 함경남도이기에 도집결소인 함경남도 청진시로 향했다. 그곳에서 다시 각 시나 도로 옮겨져야 하는데, 우리를 데리러 담당 간부가 와야 만 이동할 수 있는 그런 구조였다. 새벽부터 기차의 몇 개의 칸에 탈북자 죄수들, 그리고 무장한 군인들과 안전원들이 탔다. 훌쩍 다가온 초겨울 북한의 날씨는 매우 추웠다. 새벽부터 우리는 고개도 들지 못하고 기차에 몸을 실어야 했다. 청진 도집결소에서는 노동을 하며 고향 지역의 담당 간부가 자신들을 데리러 오기를 기다린다. 하지만 당시 각 지역 간부들은 죄수들을 데리러 제때 오지 않고 오래도록 방치하는 것이 보통이었다.

이처럼 죄수를 방치하는 이유는 출장비용을 국가에서 지원하는 것이 아니라 간부 개인이 부담해야 했기 때문이다. 그래도 죄수 중에서 자신에게 이득이 될 만한 사람이 있다면 조금 더 일찍 그 죄수를 데리러 왔다. 우리 세모녀 역시 언제 올지 모르는 고향지역 간부를 기다리며 집결소에서 생활을 보냈다. 이곳도 집결소에서 도착해서는 엄마와 함께 지낼 수 없었다. 집결소 규모가 작아서 많은 인원을 다 수용할 수 있는 여건이 아니었고, 모두 한 곳에 있다가는 모두가 극심한 영양실조로 다 죽을게 뻔해 보였다.

앞으로 더 수용할 장소도 지어야 하고 노동도 해야 했기에, 건강한 사람과 아픈 사람들을 분리해서 수용했다. 건장한 성인들은 산속에서 숙식하며 노동을 했고, 집결소에는 노인들, 아픈사람들, 그리고 아이들과 장기수들이 남아 있었다. 이런 상황에서 나와 동생도 예외 없이 엄마와 떨어져야만 했다. 도집결소 남은 사람들은 주로 노약자들과 미 년자들이었는데, 새벽 4시면 기상해야 했고, 운동장 한 바퀴를 구호를 외치며 뺑뺑이를 돌고, 아침에 간단한 정신교육 후에 집결소가 위성사진에 찍히지 않도록 마당에 유리구슬 같은 것을 뿌리고 거두는 일에 동원됐다. 그리고 낮에는 논밭에 나가 벼를 추수하는 일, 볏짚을 나르는 일, 돌멩이 나르는 일 등 노동단련대와는 또 다른 강도 높은 일들을 해야 했다.

그리고 밤이 되면 엄청난 양의 조항들과 다시는 도강하지 않겠다는 선서문을 또박또박 외워야 했고, 매일 밤마다 감옥 안에 인원들이 돌아가면서 불침번을 서야만 했다. 만약 불침번 근무 중에 졸거나 불성실한 태도가 발각되면 심한 벌을 받아야 했다. 나는 몸이 약하고 아픈 여동생을 대신해 매일 2시간씩 불침번을 더 섰다. 깊은 자정이 되면 손바닥 만한 창문 사이로 보이는 달님이나 별들이 나의 친구가 되었다. 반짝이는 별이 빛나는 밤이면 그것들을 반복해서 세어보기도 했다.

그리고 이곳을 빠져나갈 수만 있다면, 혹은 내가 만약 저 별 이 된다면 얼마나 좋을까 하는 생각으로 멍하니 보다 보면 날이 밝아오곤 했다. 배고픔과 추위, 그리고 누릴 수 없는 자유, 보고 싶은 엄마... 살아있다고는 하지만 사방이 캄캄한 암흑 속에서 아픔 없이 이 자리에서 죽으면 얼마나 좋을까 하는 생각을 수도 없이 했었다.

어머니는 도 집결소에서도 여성책임자를 맡으셨다. 감옥에 피 같은 애들을 두고 온 어머니는 절대 혼자 도망갈 수 있는 분이 아니셨다. 그나마 1~2주에 한 번 간부들의 농작물이나 필수품을 가지러 집결소에 내려올 때, 어머니도 간부들과 함께 일꾼으로 파견되어 내려오곤 하셨다. 어머니는 아이들을 만나게 하지 않으면 죽겠다는 마음으로 진심을 보였고, 성실히 일했고, 아픈 두 딸이 항상 엄마가 보고 싶어 울고 있는 것을 감옥에서도 모르는 바가 아니었다. 그래서 어머니는 언제 집결소에 갈지 모르니 배급된 음식의 절반을 안 먹고 따로 싸 놓으시곤 하셨다.

그렇게 컴컴한 밤 우리 모녀는 잠시 생사를 확인하고 다시 헤어져야 했다. 10분도 안 되는 짧은 순간에 어머니는 자신이 배급받았던 음식을 아껴서 가져와 우리 옷속에 넣어주셨다. 그리고는 꼭 정신 차려서 살아 있어야 한다고 말씀하시며 동생을 잘 보살피라고 나에게 당부하시곤 하셨다. 우리는 울면서 엄마와 헤어져야 했고, 훌쩍이며 화장실에 들어가 어머니가 주신 옥수수 한번 베어 물고 또 울었다.

안타깝게도 어머니께서 주신 음식은 대부분 쉬어져 있었지만, 그마저도 우리에게는 너무나 소중한 음식이었다. 다 쉬어버린 옥수수를 먹으며 나는 눈물을 뚝뚝 흘렸다. 우리를 위해 먹지 않고 아껴서 건네주신 어머니의 사랑과 그런 사랑에도 불구하고 야속하게 쉬어버린 옥수수, 그리고 그것마저 먹지 못해 배를 곪고 있는 감옥 안의 사람들... 만감이 교차하는 비참하고 슬픈 현실 앞에 내가 할 수 있는 것은 독하게 그 옥수수를 먹는 것이었다. 그리고 동생에게 억지로든 그 음식을 다 먹이는 것이 나의 책임이었다.

그렇게 나날이 살아있는 지옥을 경험하던 어느 날 우리 거주 지역에서 간부가 오셨다는 것이다. 우리 모녀를 데리러 온 담당자는 은퇴를 앞두신 할아버지 보위지도원 동지였다. 이분도 원래는 우리를 데리러 가는 것이 현실적으로 불가능한 일이라 고민을 하고 있었는데 마침 평양으로 출장을 갔다 돌아오는 길에 기차가 연착이 되어 딱 우리가 있는 청진에 멈춰섰다고 한다. 북한에서 기차는 한번 멈추면 언제 다시 출발할지 모르기 때문에, 집결소에 있다는 모녀들을 확인만 하고 데리고 가는 것은 나중에 결정하고자 생각하시고 이곳을 방문하셨다고 나중에 말씀하셨다.

그런데 그 할아버지 간부는 감사하게도 우리의 이야기나 사정이 하도 안타까우셨는지 그 자리에서 우리를 데리고 가야겠다는 마음이 들었다고 했다. 비록 넉넉한 차비도 없이 온 길이지만 마음을 돌이켜 우리 세모녀가 다 여기 있는지 물으셨다. 그런데 늘 저녁에나 물건을 부리고 싣고 가던 일정이 그날은 점심시간이 안 되어서 어머니도 함께 내려오셨다. 기적같은 일이다. 평소에는 한번도 낮에 내려오신 적이 없었는데 말이다. 이렇게 집결소에 세모녀가 다 모여 있었던 덕분에, 타이밍이 너무나 알맞게 우리 세모녀는 얼떨결에 할아버지 간부를 따라 너무나 순조롭게 드디어 집결소 커다란 철문 밖으로 나오게 되었다.

이제 고향으로 가게 된다는 사실에 너무나 들떴고 간만에 만난 엄마도 너무 반가웠다. 여동생도 그날따라 기운을 차리고 희망이 가득찬 눈망울을 하고 있었다. 우리 세 모녀는 할아버지 간부가 있는데도 아랑곳 하지 않고 신이 나서 웃음이 절로 나왔고, 우리끼리 속닥속닥 했다. 그러자 보위지도원 할아버지는 말하지 말고 일렬로 걸으라고 혼을 내셨다. 순간 얼어붙었지만 당당하지 못한 우리의 신분에 그저 아무 말 못하고 앞만 보고 따라갔다.

그 간부는 엄마의 손목을 채우기 위한 녹슨 수갑을 가지고 있었지만, 아이들을 봐서 지금 채우지 않고 시에 도착하면 수갑을 채우겠다고 배려해주었다. 중국에서부터 머리를 길러 긴 머리를 하고 있었던 나와 동생의 모습이 북한의 보통 여자아이들이 하는 단발머리와 달리 우리는 등장만으로도 모든 이목에 띄었고 인솔간부 입장에서는 수갑까지 채워서 더 이목을 집중시키고 싶지 않았던 듯 싶다. 덕분에 어머니는 수갑을 차지 않고 열차를 탈 수 있었다. 언제나 처럼 북한열차는 계속해서 연착이 되었다. 여행이 길어지자 간부가 휴대한 여비도 부족 해졌다. 다행히 이 간부는 우리에게 나쁘지 않게 대해주고 부족한 여비에도 우리를 굶기거나 하지 않았지만, 상황이 좋지 않은 것은 사실이었다.

그러다 열차가 단천에 멈추게 되었다. 단천에는 나의 큰아버지, 즉 어머니의 오빠가 살고 있었다. 탈북을 하기 전, 어머니는 큰아버지가 외할머니를 모시고 있다는 것을 들어 알고 있었다. 마침 단천에서 열차가 연착이 되자 어머니 는 외할머니가 너무 보고 싶으셔서 인솔 간부를 설득하기 시작했다. 큰오빠네 집에 가면 잘 곳도 있을 것이고 먹을 것도 있을 것이니 하룻밤 쉬어 가자는 제안이었다.

마침 여비도 부족한 터라 인솔 간부는 못 이기는 척 어머니를 따라 큰아버지 집으로 방문했다. 마침 큰아버지는 출장 가셨는지 집에 계시지 않았고 사촌오빠도 군대에 가 있어 집에는 큰어머니와 사촌언니만 있었다. 큰 어머니는 우리들을 보자 반가워하기는커녕, 어떻게 우리 가문에 도강자가 나올 수 있냐며 너무나도 수치스러워 하고 모진 말들을 뱉어댔다.

어머니는 오직 외할머니의 생사와 어떻게 돌아가셨는지 너무 궁금해하셨다. 그래서 큰어머니께 예의를 갖춰 외할머니의 생전 이야기를 듣기 위해 참고 견뎌내셨다. 외할머니께서는 이미 몇 년 전 돌아가셨고 큰어머니는 할머니의 살아생전이 본인에게는 너무 힘든 일이었다며 오히려 분을 내셨다. 그립고 보고 싶은 외할머니를 볼 수 있겠다 는 기대를 가지고 찾아간 우리에게 청천벽력과 같은 소식이었다. 충격을 받으신 어머니는 외할머니가 어쩌다 돌아가셨는지 계속 물었다. 큰어머니는 아무렇지도 않게 “어떻게 죽긴 어떻게 죽어. 노망났으면 곱게 날 것이지. 벽에 똥칠하고 맨날 밖에 나가 길래 묶어뒀지.”라고 태연하게 말했다.

어머니는 “그럼 당신이 우리 엄마를 묶어두고 밥 안줘서 굶어 죽였다는 거야?”라고 추궁하셨고, 그 말에 큰어머니는 아무 대답도 하지 않았다. 어머니는 너무 기가차서 말문이 막히셨다. 자신에게 도강자라고 타박하는 것은 이해할 수 있지만, 외할머니의 죽음은 어머니를 분노와 충격으 로 뒤덮었다. 못난 딸 때문에 어머니께서 그런 처우를 받고 돌아가셨다며, 내가 잘 돼서 어머니를 모셨어야 했는데 하며 죄책감을 가지셨다. 지금도 어머니는 외할머니께서 살아 계시다면 무슨 수를 써서라도 구출해 왔을 것이라며 후회와 자책으로 사신다.

큰어머니는 그 외에도 한끼 밥과 하룻밤의 잠자리를 제공하는 일에도 심하게 꺼려하며 눈치를 주었고, 우리는 다음날 일어나자마자 일찍 그 집을 나올 수밖에 없었다. 우울한 마음으로 우리 모녀는 고향으로 돌아왔다. 이제부터는 지역 안전부(경찰)의 조사가 이어진다. 원래라면 안전부 수감시설에 갇혀서 조사를 받아야 했지만, 당시에 고향에서는 우리  모녀가 첫 송환자였기 때문에, 지역 안전부에서는 도강자들에게 호의를 베풀어 장군님의 은혜로 조국에 돌아와서 더 잘살고 행복해 한다고 우리를 이용해 선전을 하려는 생각이 있었다.

그들은 우리가 중국에서 배반당했으니 여기서 잘 살아보지 않겠냐고 했다. 그들의 의도를 눈치챈 어머니는 다신 중국에 가지 않겠다고 그들 앞에서 다짐을 했다. 덕분에 우리는 감옥에 가지 않고 집에서 왕래하며 안전부로 조사를 받으러 갈 수 있도록 배려를 받았다. 하지만 우리는 집이 없었다. 벌써 도강을 한지가 오래됐기 때문에 우리 집이 남아 있을 리 없었다. 안전부 사람들이 어디 지낼 곳이 있느냐고 어머니께 물었을 때, 어머니는 과거 우리와 같은 아파트에 살며 친하게 지냈던 인민반장네 집으로 가겠다고 했다. 안전부 사람들도 아무래도 인민반장의 집이라면 감시와 통제가 용이하겠다 생각했는지 우리를 인민 반장네로 보내주었다.

우리를 본 인민반장은 너무 놀라했다. 조용히 이사를 간 줄로 알고 있던 우리가 외국인이 다 돼서 나타났다는 것이다. 처음에는 이것저것 무슨 일이 있었는지 물으며 귀한 이팝에 계란후라이도 주고 그랬다. 그렇지만 딱 3일이 지나니 우리를 대하는 얼굴 표정이 싹 바뀌는 것이 느껴졌다. 언제까지 우리 집에서 신세질 것이냐는 무언의 압박이었다.

사실 어머니는 처음부터 재탈북을 생각하고 계셨다. 아무리 호의를 베풀어 준다고 해도 북조선은 북조선이다. 어머니는 인민반장네서 계속 지내게 되면 탈북을 할 수 없을 것이라 판단하고 계셨다. 인민반장의 불편한 심기를 확인하신 어머니는 이때다 싶어서 인민반장에게 우리가 살 곳을 다른 이웃집으로 옮기겠다고, 그곳에 인민 반장이 왔다 갔다 하며 우리가 잘 있는 지를 확인하면 되지 않겠냐며 제안하셨다. 그 얘기를 들은 인민반장은 환한 얼굴로 갈 곳이 있냐며, 너무 좋은 생각이라고 동의했다.

우리 가족은 꺽다리 이모네로 거처를 옮기기로 했다. 마르고 키가 커서 우리가 꺽다리 이모라고 불렀던 그 이모는, 과거 고난의 행군 때 우리 어머니의 도움을 많이 받았었다. 당시 성실하기로 유명했던 꺽다리 이모는 당원으로서 누구보다 국가와 당에 충성하던 분이셨다. 그러나 고난의 행군 기간 동안 꺽다리 이모의 가정은 큰 풍파를 겪었다. 이모의 남편은 굶주림과 병으로 인해 많이 아프셨고, 이모는 오랫동안 남편의 병수발을 들었다. 하지만 국가에서는 배급도 주지 않고 아픈 남편도 진료를 받거나 약을 구하지 못했고, 결국 이모의 남편은 숨을 거두고 말았다.

이모가 그런 힘든 시간을 보낼 때 어머니께서 식량이나 의복을 건네주고 격려하며 도움을 주셨었다. 꺽다리 이모가 홀몸이라는 것을 기억한 어머니는 꺽다리 이모네 집으로 거처를 옮기기로 하셨다. 우리를 본 이모는 그 동안 어디 있었냐며 여느 사람들처럼 너무나 놀래셨다. 그리고 우리를 기쁘게 반겨주셨다. 이모의 모습은 많이 바뀌어 있었다. 과거 당이 죽으라면 껌뻑 죽을 것만 같 았던 충성분자의 모습은 온데간데 없어졌다. 또 어머니께서 걱정을 할 정도로 순박하신 분 이었는데 지금은 돈버는 일에 혈안이 된 사람으로 변해있었다. 듣고 보니 남편 뿐 아니라 군대에 있었던 이모의 아들도 영양실조에 걸려 집에 돌아왔고, 한 달이 못되어 세상을 떠났다고 한다.

그 후로 꺽다리 이모는 국가와 당에 철저하게 배신당했다고 느끼며 스스로 살길을 찾아야겠다는 굳은 결의를 쫓아 살아오셨던 것이다. 이모의 집은 다 쓰러져가는 허름한 곳이었지만, 식사만큼은 누구보다 잘하고 계셨다. 집안 부엌에 가보니 발 디딜 틈도 없이 나무가 쌓여있었다. 나무 장사를 하고 있었던 이모가 누가 훔쳐 갈 새라 판매할 나무를 부엌에 쌓아두고 열쇠로 잠가두고 다니신다고 했다.

장사라는 것은 자본주의를 뜻한다. 한마디로 공산주의의 신념에 반하는 것이다. 하지만 그렇게 자기의 살길을 스스로 찾지 않고는 살아남을 수 없는 것이 북한의 모순된 실상이었다. 꺽다리 이모 댁은 맘이 편했다. 혼자 살고 계셨기에 우리가 있는 것이 적적한 삶에 오히려 힘이 되셨던 듯 싶다. 이모는 중국에 대해 이것저것 물어 보시며 호기심을 가지기도 했다. 우리의 자초지종을 다 들으신 이모는 우리 손을 꼭 맞잡고 너희만은 이 나라를 떠나서 살아남으라고, 우리를 도와주시겠다고 약속하셨다. 한편, 인민반장은 이사 후 처음 얼마간은 우리가 잘 있는지 점검하러 종종 찾아왔지만, 그 횟수가 점점 줄어 들었고 나중에는 신경쓰지 않게 되었다.

어머니는 주기적으로 안전부로 출석하며 성실하게 조사를 받으러 다녔다. 하지만 어머니는 조사에서는 다시 국가에 충성하겠다는 의지를 보여 주시면서도, 뒤로는 다시 탈북을 준비하셨다. 그리고 마침내, 감시가 느슨해진 틈을 이용해 우리는 다시 중국으로 가기 위해 또 다시 고향을 떠나기로 마음먹었다.

지금 돌아보면, 하나님은 쉬지도 않으시고 모든 곳에서, 특히 북한에서도 계속 역사하고 계셨다. 많은 사람들이 북한에는 하나님이 없다고 말하기도 하지만, 하나님은 분명 북한에 있는 그의 백성들을 기억하고 사랑하신다.

그래서 나는 분명히 말할 수 있다. 그 당시에는 죽을 것만 같았던 과정들이 시간이 지나고 나서야 알게 되지만 하나님께서는 곳곳에 사람들을 보내시고 일하고 계신다는 것을... 비록 이 짧은 글에 그 모든 사건들과 이야기를 다 담을 수는 없지만, 우리 가족은 분명히 값으로 매길 수 없는 체험들을 했고, 그것이 앞으로의 삶의 원동력이 되었다.

지금 중국 정부는 코로나기간 동안 수감한 탈북자 2000여명을 곧 강제 북송한다고 한다. 글을 쓰는 내내 우리가 이송되어 북한으로 나갔 던 때가 떠올라 수감된 그들에게 감정이입이 된다. ‘중국 정부가 그들을 난민으로 인정하고 받아들일 수만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하는 생각을 수도 없이 한다.

하지만 이는 우리의 생각일 뿐, 하나님은 더 큰 계획을 가지고 계실 수도 있다. 만약 우리도 탈북 하는 과정에서 사람들의 도움을 받아 중국에서 구출이 되었다면, 우리는 북한에서 일어난 일들을 경험하지도 못했을 뿐더러 감히 이야기 할 수도 없다.

하나님의 마음에서 하나님의 뜻을 안다면, 그래서 그 뜻대로 기도할 수만 있다면... 하나님께서 일하시고 천사들이 일사분란하게 일하고 있다는 것을 알고 있기에, 내가 지금 할수있는 일은 오직 아버지의 마음으로 기도할 수 있길 기도할 뿐이다.
(계속)



한국오픈도어선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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