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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앙 나눔터

이끄심 8화 - 2차 탈북 탈북민 수기 김서윤 전도사 23, 8

작성자청포묵|작성시간24.03.04|조회수11 목록 댓글 0
이끄심 8화 - 2차 탈북 탈북민 수기 김서윤 전도사 23, 8


2002년 12월, 북송된지 약 6개월 만에 우리는 다시 중국으로 넘어갈 결심을 했다. 처음 북송이 될 때에 우리는 다시 중국에 갈 수 있게 되더라도 신분이 없는 상태로 다시 나라 없는 서러움과 온갖 수모를 겪게 될 바에는 내 고향인 이곳, 북한에서 살아보자고 마음도 먹어봤다. 하지만 우리의 다짐을 한 순간에 무너뜨린 것은 장마당에서 마주한 수많은 꽃제비들이었다.


우리가 탈북하기 전에도 꽃제비는 있었만, 2002년 장마당에 있는 어린아이들과 병들고 뼈밖에 없는 노숙자들은 차마 눈 뜨고 볼 수 없는 광경이었다. 우리는 그 곳에서 살 자신이 없었다. 다시 중국에 간다고 해도 방 한 칸도, 떳떳한 신분도 하나 없고 누구 하나 우리를 반겨주지 않겠지만 그래도 우리는 중국으로 가고 싶었다. 그리고 우리의 생사를 기다리고 있을 옥이 이모가 떠올랐다. 그러니 더욱 중국에 가서 이모를 만나 죽다가 살아 돌아온 이야기를 들려주고 싶었다.

하지만 우리의 건강 상태는 최악이었다. 감옥에서 생긴 봉와직염으로 우리 세 모녀의 발목은 고름이 흐르고 퉁퉁 부어서 제대로 걷지도 못했다. 수개 월을 굶으면서 제대로 된 음식 하나 먹지 못해 소화기관도 다 망가졌다. 우리는 오직 정신력 하나로 움직였다. 꺽다리 이모는 나와 동생을 보며 너희들은 꼭 살아야 한다며 어머니를 물심양면으로 도와주셨다. 그렇게 모든 일은 순적하게 빠르게 진행되었고 꺽다리 이모의 도움으로 다시 중국으로 향할 수 있었다. 


99년에 처음 도강을 할 때는 어떻게 해야 하는지 아무것도 알지 못하고 막막하여 생고생을 했지만, 이번에는 처음부터 두만강을 건너 중국 도문(투먼)으로 가기로 하고 함경북도 온성군으로 향했다. 그렇게 온성에 도착했지만 두만강을 건너가기란 생각만큼 쉽지는 않았다. 그 추운 겨울 날씨에도 불구하고 제대로 얼지 않은 두만강이 문제였다. 강물이 얼어야 우리가 그 위로 건너갈 수 있는데 강기슭만 얼어있고 중간은 얼지 않은 상태였다. 왜 물이 얼지 않나 봤더니 강 상류에 있는 펄프 공장에서 뜨거운 물을 흘려보내고 있었다.


그렇다고 이제 와서 다른 곳으로 가자니 우리가 없어진 것을 알고 추적이 이루어지고 있을 텐데 너무 위험했다. 그렇다고 언제 얼지 모르는 강물을 마냥 바라보고 만 있을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하는 수 없이 우리는 얼지 않은 강을 헤엄쳐서라도 건너기로 결심했다. 조금 더 지체한다면 분명 국경수비대들에게 들킬 것이었다. 우리는 다시 잡혀가서 처음부터 그 힘겨운 과정을 견뎌낼 자신도 없고 그럴 수 있는 건강 상태도 아니었다.


무엇보다 어머니께서 그 동안 여러 구금시설을 이동하면서 강제노동에 시달려 오시면서 몸이 많이 쇠약해지셨다. 몸무게는 30킬로를 겨우 넘기는 정도로 삐쩍 마르셨고 피부도 까맣게 타 형편없는 몰골이었다. 그런 상태에서 강을 건너려고 하니 어머니의 눈빛이 흔들리셨다. 몸과 마음이 나약해지신 어머니를 몰아붙인 것은 나였다. “잡혀도 중국 가서 잡히는 게 낫지 않겠어? 밥 한 끼라도 먹을 수 있잖아.”라며 엄마를 설득했다. 그렇게 우리는 깊은 어둠 속에서 강을 건너기 시작했다.


강물은 처음에는 무릎까지 오던 것이 갑자기 가슴까지 훅 올라왔다. 추운 겨울에 흐르는 강물의 온도는 상상을 초월할 정도로 차가워서 마치 수천 개의 바늘이 한꺼번에 온 몸을 찌르는 듯한 아픔이 느껴졌다. 그 와중에 강물에 떠다니는 얼음 조각들이 우리 몸을 툭툭 치며 지나갔는데 너무 쓰리고 아팠다. 결국 강 중간쯤 와서 어머니는 그 고통을 버티지 못하시고 다시 북한 쪽으로 황급히 돌아나가셨다. 추위에 덜덜덜 떠시는 어머니의 이빨이 드드드드 부딪히는데 그 소리가 안타깝다고 생각할 세도 없이 너무 크게 들리는 그 소리 때문에 우리의 도강 시도가 들킬까 걱정이 되었다.


나는 “우리 포기하자.”라는 어머니의 말에 그럴 수 없다며 동생과 엄마를 끌고 다시 강으로 들어갔다. 다행히 고비가 되었던 강의 중턱을 넘으니 강의 수위가 조금씩 낮아지기 시작했고,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수월하게 넘어갈 수 있었다. 저 멀리 논밭이 보이고 반짝이는 집들이 보였다. 다시 중국 땅을 밟게 된 것이다. 물에서 나오자마자 우리의 옷은 순식간에 얼어붙었고, 몸도 얼어있어서 잘 움직 여지 지가가 않았다. 그렇지만 옷을 말리고 어쩌고 할 틈도 없이 우리는 무작정 논으로 뛰어 들어가 마을을 향해 달렸다.


그때는 국경선 주위에 철조망이 없던 때라 앞으로 무작정 달리면 마을로 갈 수 있었다. 그렇게 한 마을 앞에 도착했다. 마을로 들어갈 때는 이상한 사람처럼 보이지 않기 위해 천천히 걸어 들어가며 주변을 살폈다. 한 집을 골라 조심스럽게 문을 두드렸다. “有人在 (계세요)?” 처음 탈북했을 때와는 달리 동생과 나는 중국어를 유창하게 할 수 있었기에 일부러 중국 사람인 척 중국말을 썼다. 그런데 문 안쪽에서 들리는 목소리는 조선말이었다. “아니, 이 밤에 누구지?” 우리는 다시 중국어로 대답했다. “能借一下 (전화기를 한 번만 빌려 쓸 수 있을까요)?” 문을 열고 나온 분은 조선족 할머니였다. “어떡하나…. 중국말을 못하는 데 내가….” 할머니는 중국어를 하지 못하는 조선족이셨던 것이다.


우리는 조선말로 할머니에게 전화를 빌릴 수 있는지 다시 여쭈었다. 조선말을 하는 우리가 신기했는지 놀라신 할머니가 전화를 빌려달라는 말에 “전화? 저기에 있는데….” 라고 하시는데 할머니의 말이 다 끝나기도 전에 우리는 전화를 향해 달려갔다. 그리고 바로 옥이 이모에게 전화를 걸었다. “언니 나야.” 울먹이며 수화기를 붙들고 있는 엄마 옆에 동생과 나는 딱 달라붙어서 이모의 목소리가 들리기를 기다렸다. 벙찐 이모의 목소리가 들렸다. “우리 조카들이 얼마 전에 북한에 가서 죽었을 텐데 이게 무슨 소리야?” 어머니가 “언니~” 하며 울음을 터트리자 그제야 수화기 너머의 이모도 놀라며 진짜 서윤이네구나 하셨다.


옥이 이모는 바로 기차를 타고 도문으로 갈 테니 모레 역에서 만나자고 하셨다. 지금에야 두세 시간이면 갈 수 있는 거리이지만 그때 당시에는 고속철도가 없었고 그 구간에 직행열차도 없었기에 최소 이틀은 기차를 갈아타며 이동해야 하는 여정이었다. 전화를 끊고 우리는 할머니에게 자초지종을 설명했다. 할머니는 매우 난처해하셨다. 당시 북송되는 사람이 많았던 만큼 공안의 단속도 심하던 시 기였다. 중국인이라면 북한 사람을 보면 무조건 공안에 신고를 해야 했고, 돕다가 걸리면 처벌도 받았다.


우리는 할머니를 안심시켰다. 우리가 중국말을 아주 잘하니 큰 문제는 없을 것이고 이틀만 숨겨주시면 얼마간의 돈도 드리겠다고 했다. 고심 끝에 할머니는 알겠다고 승낙해 주셨고 혹시라도 모르는 사람이 수색하러 들어오거든 마루 밑에 숨으라고 당부를 하셨다. 할머니는 노총각 아들과 함께 살고 계셨는데 나중에 귀가해서 우리를 보게 된 그 노총각 아들은 놀라기는 했지만 할머니로부터 자초지종을 듣고는 우리를 내쫓거나 신고하지 않고 친절하게 도와주었다. 조선족 할머니의 집에서 조용히 틀어박혀 있는 가운데 아무 일 없이 이틀이 지났다.

우리는 옥이 이모를 만나러 그 노총각 삼촌과 함께 도문역으로 향했다. 옥이 이모가 아침 일찍 도착한다는 연락을 받고 우리는 전날 밤에 택시를 빌려 출발했다. 우리가 있던 곳은 시골이었기에 도문시내까지 가는데 시간이 많이 소요되었다. 달리는 동안 택시에서 자면서 가면 되겠다고 생각하고 설레는 마음으로 차에 앉아 눈을 감았다.


얼마나 지났을까…. 자고 있던 내 얼굴에 갑자기 환한 빛이 비쳤다. 깜짝 놀라 눈을 뜨고 정신을 차려보니 차 바깥에 키가 훤칠한 변방부대원들이 손전등을 들고 서있었다. 시끌시끌 소리에 정신이 없는 와중에 변방부대원이 신분증을 검사하겠다고 했다. 생각도 못 했던 검문에 심장이 쿵쾅쿵쾅 뛰다 못해 튀어나올 지경이었다.


택시 기사와 삼촌은 당연히 괜찮았다. 우리는 출발 전에 삼촌과 같은 일행이 아니라 중간에 합승한 걸로 하자고 말을 맞췄기 때문에 우리만 문제를 해결하면 되었다. 나와 동생은 아직 어리니 변방부대원은 어머니에게 신분증을 보여 달라고 했지만, 너무 놀라신 어머니는 놀라서 꿀 먹은 벙어리가 되어 버렸다.


순간적으로 내 입에서 중국어로 이런 말이 튀어 나왔다. “아니 요즘 누가 택시 타면서 신분증을 가지고 다녀요.” 그 말을 들은 변방대원들이 “하긴, 이 밤에 누가 신분증을 가지고 나와”라면 서 자기들끼리 웅성거리기 시작했다. 나는 때를 놓치지 않고 덧붙였다. “우리 지금 병원에 가는 중인데 너무 급해서 신분증을 안 가지고 나왔어요.” 불행인지 다행인지 엄마의 얼굴은 그 누구보다 아파 보였다. 점점 설득이 되는 것 같이 보였다.


마침 무서워서 꾹 참고 있던 눈물이 터져 나오기 시작했다. “우리 엄마가 많이 아픈데 자꾸 신분증을 달라고 하시면 어떡해요!” 내가 엉엉 울며 말하자 군인들이 당황하며 빨리 보내주라고 서로 얘기했다. 긴가민가하며 그래도 신분증은 봐야 하지 않나 하는 군인을 다른 군인이 “아프다잖아.”라며 빨리 보내라고 재촉했다. 게다가 우리가 유창하게 중국어를 하니 북한 사람처럼 보이지 않았던 것도 한몫했던 것 같다.


그렇게 다행스럽게 검문소를 지나칠 수 있었다. 이제는 차에서 다음 검문소가 나오면 어떻게 말을 할지 입을 맞추기 시작했다. 이제부터는 당황하지 말고 담대하게 말하자며 엄마는 중국어로 “죽겠다”라고만 반복하고 동생은 울고 나는 우리 엄마가 죽으면 아저씨들이 책임질 거냐고 따지는 역할을 맡았다. 기차역까지 8개 정도 검문을 지나갔던 것 같다. 변방부대원 입장에서도 트렁크를 열어도 텅텅 비었고 가지고 있는 짐도 없으니 딱히 의심할 만한 거리가 없기도 했다. 


그렇지만 마지막 검문소는 상당히 위험했다. 변방부대원들이 강경하게 우리 모두를 차에서 내리라고, 병원에 가더라도 일단 내리라고 요구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나는 더 강경하게 대응했다. 화를 마구 내며 지금 죽을 거 같은데 뭐 하는 짓이냐며 따지니 이기지 못하고 보내주었다. 어찌 그렇게 대담하게 할 수 있었는지 지금 생각하면 죽기 살기의 마음으로 하니 그럴 수 있었던 것 같다는 생각이 든다.  마침내 우리는 도문 시내로 들어와 도문 역에 도착했다.


어머니는 먼저 역으로 들어가겠다며 이모가 오면 부를테니 우리는 밖에서 기다리라고 했다. 자그마한 몸을 이끌고 당당하게 역으로 들어가는 엄마를 지켜보고 있는데 역 안에공안들이 검문하는 것이 눈에 들어왔다. 공안이 출입자들을 대상으로 신분증 확인을 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런데 엄마는 무슨 생각인지 당당하게 부스 안으로 들어가셨다. 그것을 본 우리는 입이 떡 벌어지며 이제 모든 것이 끝났다고 생각했다. 그 많은 시련을 뚫고 여기까지 왔건만 이렇게잡혔구나…. 라고  생각하니 시간이 멈춘 것만 같았다.

그런데 희한한 일이 일어났다. 어머니께서 역으로 성공적으로 들어가신 것이다. 역 안으로 들어가고 나서야 무언가가 잘못 됐다는 것을 깨달은 어머니는 자신의 앞사람이 들어갈 때 꼬리를 물고 미꾸라지처럼 쪼르르 안으로 들어갔는데, 희한하게도 공안이 어머니를 놓친 것이었다. 어떻게 그런 일이 가능했는지 아직도 모르겠다. 그 순간 엄마가 투명 인간이 된 것만 같았다. 우리는 하늘이 도왔다며 감격했다. 


어머니는 들어가셨지만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하나 하며 주위를 둘러보니 역으로 들어가는 정문이 아닌 뒷문이 있는 것을 발견할 수 있었다. 우리는 뒷문으로 몰래 들어가 엄마와 다시 만났고, 그렇게 가슴 졸여 역에 들어간 지 30분도 채 지나지 않아 옥이 이모를 만날 수 있었다. 만나자마자 서로를 얼싸안은 우리는 이모에게 부탁하여 우리를 도와준 삼촌에게 처음 할머니 집에서 약속했던 돈을 쥐어 보내고 이모가 사준 기차표를 받아 기차를 타고 다시 길림으로 향했다. 인간적인 계획으로는 설명할 수 없는 이 여정을 하나님이 도우셨다고 어찌 말하지 않을 수 있을까? 


당시 우리는 임기응변과 운으로 그 땅을 나왔다고 생각했지만, 이제는 분명한 하나님의 이끄심이 있었다는 것을 안다. 아브라함을 갈대아 우르에서 불러내시어 당신의 백성 삼으신 하나님께서 우리 가족으로 자녀 삼으시기 위해 불러내신 것이리라…. 우리의 인생이 여전히 험난하고, 고통스러웠던 그때의 일들을 되짚어 생각해 내는 것이 쉬운 일은 아니지만, 과거를 회상하며 당시에는 깨닫지 못했던 하나님의 함께하심, 섭리하심을 찾아내고 하나님께 감사와 영광 돌릴 수 있게 하신 하나님께 감사드린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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