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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앙 나눔터

이끄심 9화 - 하나님의 열심 / 탈북민 수기 김서윤 전도사 23, 9

작성자청포묵|작성시간24.03.04|조회수4 목록 댓글 0
이끄심 9화 - 하나님의 열심 / 탈북민 수기 김서윤 전도사 23, 9


우여곡절 끝에 다시 중국 길림(吉林 市)으로 돌아왔지만 우리의 여정이 끝난 것은 아니었다. 우리는 한편으로는 그저 살아 있다는 것에 감사했지만 여전히 중국은 우리를 반겨주지 않을뿐더러 그들에게 우리는 난민이 아닌 불법체류자들 이었다. 옥이 이모는 우리를 위해 오래되었지만 조용하게 지낼만한 아파트를 구해주셨다. 그 집에 들어서니 모든 긴장이 풀리며 정신력으로 간신히 버티고 있던 몸이 무너지기 시작했다. 온갖 병들이 속수무책으로 찾아오는데도 우리는 병원에 갈 수 없는 신분이었기에 집에서 몇 달 동안 링거만 맞아야 했다.


세 명 다 아파서 몸도 제대로 가누지 못하고 밥도 넘기지 못해 다 토해내는 심각한 상황이었다. 침을 놓을 줄 아셨던 어머니가 우리에게 수액을 놔주셨고 어머니는 내가 놔 주는 수액을 맞으셔야 했다. 무식해서 용감했다. 팔이 붓고 멍들고 했지만 살아야 한다는 일념으로 우리는 필사적으로 버텼다. 추운 겨울, 변변한 이불 한 조각 없는 집에서 링거만 꽂고 기어다니는 신세였지만 그래도 북조선이 아닌 중국이어서 감사했다.


한 번의 북송을 경험한 우리 가족은 더 이상 중국에 눌러앉아 살 생각이 눈곱만큼도 남지 않았다. 언제 잡혀갈지 모르는 중국은 더 이상 안식처가 될 수 없었다. 이제 우리 가족은 어떻게든 한국으로 가야만 했다. 하지만 자칫 서툴고 조급한 남한행을 기도했다가 잡히기라도 하여 북송이 된다면 틀림없이 정치범 수용소에 잡혀가든지 총살을 당할 것이다. 우리는 백방으로 한국으로 가는 방법을 찾기 시작했다.


북송되었을 때 감옥에서 “한국을 가기 위해서는 몽골로 가는 길이 가장 유력하다”고 들었다. 중국의 국경을 무사히 넘어, 몽골 사막을 지나, 안전하게 몽골 군인들에게 발견되기만 하면 한국으로 갈 수 있다는 말을 들은 적이 있다. 하지만 어디가 국경이고 사막인지 몰라 자칫 중국 국경 경비대원들에게 붙잡히게 되면 남한행으로 간주하여 북송된다. 어머니는 준비만 잘 해서 가면 사막을 넘을 수 있다고 확신하셨고, 이제는 중국에 더 이상 살고 싶지 않았던 우리도 몽골을 통한 한국행이라도 가려고 마음먹었지만, 내가 아픈 탓에 사막을 넘는 것은 무리라고 판단이 되어 결국 몽골로 가는 길은 포기해야 했다.

우리 가족은 선택의 여지가 별로 없었다. 그렇게 밤낮으로 오로지 한국으로 가는 방법을 찾던 우리에게 베이징에 브로커가 있다는 소식을 듣게 되었다. 그런데 일인당 천만 원씩 모두 3천만원이라는 너무나도 큰돈이 든다고 우리를 떠보는 것이었다. 우리는 1초의 망설임도 없이 한국에 가면 갚겠다고 했다. 그러자 정착금이라는 걸 준다고 넌지시 던지는 말에 어머니는 정착금을 받게 되면 즉시 주겠다고 약속했다. 그리고 그 약속의 담보도 필요했다. 옥이 이모는 흔쾌히 자신의 집을 담보로 잡아 주셨다. 죽음의 문턱에서 살아서 돌아온 조카들을 다시 북한으로 보낼 수 없다며 말이다.


그렇게 우리는 한국으로 가기 위해 베이징에 브로커의 집으로 갔다. 그 브로커의 집에는 이미 한국으로 가고 싶어 하는 고향 사람들이 모여 있었다. 우리를 포함해 총 20명의 사람들이 한곳에 모였다. 그중에는 대부분이 건장한 어른들이었는데 그 어른들이 우리 모녀를 보자 반기기는커녕 얼굴을 찌푸렸다. 안 그래도 어려운 길에 애들을 어떻게 데려가냐며 말이다. 그들이 반기지 않았던 이들 중에는 나와 동생뿐 아니라 그곳에 있던 80세가 다 되는 노부부도 있었다. 그 부부는 국군포로였는데, 북한에서 살다가 한국에 먼저 간 딸이 부모를 한국으로 빼내고자 브로커에게 돈을 주고 노부부를 부탁한 것이었다.

사람들은 노부부와 아이들은 데리고 갈 수 없다며 브로커에게 항의하기 시작했다. 어머니도 가만 계시지 않았다. “어떻게 당신들만 살 생각을 할 수 있느냐. 우리도 살아야 한다. 핏덩이 같은 애들을 데리고 다시 북한으로 갈 수 없다”며 싸우셨다. 어른들은 그러면 엄마만 가고 애들은 나중에 데려 오라며 버텼다. 밤새 그러고 싸우고 있으니 노부부는 그냥 방에 들어가 주무시고 나는 엄마 옆에서 그들이 하는 얘기를 듣고 있었다.


듣다 보니 나도 답답해서 한마디 하게 된 것이 더 근본적인 문제로 사람들의 초점을 바꿀 수 있었다. “그럼 아줌마 아저씨 들끼리 가면 되지 왜 아직도 안 가고 여기 있는 겁니까? 우리 빼고 북경 대사관으로 가면 되죠.” 어머니는 어른들 얘기하는데 왜 끼어드냐며 면박을 주셨지만 싸우던 아저씨는 제대로 말을 못하며 “위험하니까”라는 말만 했다. 그때 브로커 아저씨가 입을 열었다. “대사관 주변 경비가 너무 삼엄해서 신분이 노출될까 봐 얼씬도 못하고 있단다.” 알고 보니 그들 중에는 중국어를 할 수 있는 사람이 없어서 잡히면 대처를 할 방법이 없어 대사관 근처도 가보지 못한 상황이었다.


나는 너무 어이가 없어서 다시 물었다. “그럼 여태까지 한국 대사관 위치만 파악해 놓고 근처도 못 가봤단 말이에요?” 그 당시는 남북 관계나 정치적 문제로 해외 탈북자 수 대비 많은 이들이 한국에 오지 못했다. 더구나 2000년대 초반 북한은 김정일의 방침으로 중국에 있는 탈북자들을 송환하는 작업을 대대적으로 벌였다. 자칫 실수하면 단체로 북한으로 북송이 될 수 있었기에 안전에 안전을 기울일 수밖에 없었다.


그 얘기를 듣고 나는 겁도 없이 말했다. “우리가 대사관 앞을 가볼게요!” 중국어를 할 수 있는 우리의 등장으로 브로커 아저씨는 다시 판을 짜기 시작했다. 나와 동생은 아이들이기 때문에 의심을 덜 받을 것이고, 의심을 받는다고 하더라도 빠져나갈 수 있는 중국어를 할 수 있으니 그나마 다행이다. 더구나 우리 가족은 죽기 아니면 뭐가 더 있겠냐는 각오가 되었기에 전혀 두렵지 않았다. 그렇게 우리는 총 세 팀으로 나뉘어졌다. 중국어를 할 수 있는 나와 동생이 행동팀이 되었다. 1팀인 나는 갓 제대한 군인 삼촌과 팀을 먹었다. 10년 동안 군인으로 있다가 나왔기 때문에 키도 크고 싸움도 잘하는 삼촌이었다.


그리고 내 동생과 엄마, 노부부가 2팀으로 택시에 타서 대사관 철문 옆 도로에 대기하고 있기로 했다. 아무도 노부부 할머니 할아버지와 팀이 되고 싶어 하지 않아 동생과 엄마가 그들과 함께 하기로 한 것이다. 그리고 나머지 건장한 어른들은 대사관 근처에 숨어서 상황을 보는 3팀이었다.

그래도 며칠 동안 대사관 주변만 알짱대던 아저씨들이 직원들의 출퇴근 시간을 확보해 놓았기 때문에 쉽게 일을 진행 할 수 있었다. 8시 반쯤 직원들이 출근을 하기 때 문에 그 시간쯤에 대사관으로 가기로 했다. 삼촌과 나는 1팀으로서 대사관 대문 앞에 가 있기로 했다. 준비를 하며 삼촌은 조그마한 망치를 사서 뒷주머니에 찼다.


드디어 그날이 되었다. 우리는 초조한 마음으로 직원들이 출근하기를 기다리며 하염없이 건물 안을 쳐다보고 있었다. 그러고 있는데 갑자기 웬 남자 한 명이 쓱 곁에 와서는 우리가 무엇을 하고 있는지 중국어로 물어보는 것이었다. 나는 사전에 말을 맞춘 대로 옆에 있는 사촌오빠와 내가 대학생인데 한국으로 유학을 가고 싶어서 비자를 알아보려고 북경에 왔다고 했다. 그 남자는 자기 가 유학원이랑 여행사 사장인데 자신이 많은 사람들을 유학 보냈다며 여러 가지 유학에 대한 내용을 술술 알려주기 시작했다.


나는 열심히 듣는 척을 하였고, 중국어를 알아듣지 못하는 삼촌은 듣는 둥 마는 둥 하며 지나가는 차들을 유심히 보고 있었다. 그때 한 봉고차가 대문 앞으로 다가오자, 입구에  경비가 무슨 차인지 묻지도 않고 철문을 열기 시작했다. 그리고 바퀴가 달린 자동문이 쓱 열리자, 봉고차가 들어갔다.


그때 급작스럽게 삼촌이 사장님과 얘기하고 있던 나를 끌고 봉고차가 들어가고 미쳐 닫히지 않은 문으로 뛰어 들어갔다. 나는 얼떨결에 삼촌의 손에 이끌려 대사관 안으로 들어갔고 경비실에서는 보초를 서던 사람들이 놀라 소리를 질렀다. 그때를 놓칠 새라 택시에서 대기 하고 있던 엄마와 동생이 보따리를 든 노부부의 손을 잡고 뒤뚱뒤뚱 하며 자동문 안으로 들어왔다. 하지만 대사관 건물 안으로 들어가려면 셔터와 유리문을 지나야 했다.


봉고차가 문 안으로 들어와 마당에 서자 당직을 서던 직원이 셔터를 열었다. 그러나 뒤를 이어 뛰어 들어오는 우리의 모습을 본 직원이 놀라서 셔터를 다시 닫기 시작했다. 때를 놓칠 새라 삼촌이 “셔터 잡아!”라고 외쳤고 나와 삼촌은 셔터 밑으로 들어가 문이 더 이상 내려오지 못하도록 탁 잡았다. 내려오는 셔터를 잡고 있으니 문이 삐뚤어지며 셔터가 고장이 나고 우리는 셔터를 잡고 건물 안을 바라보며 제발 문을 열어달라고 소리쳤다.


유리문 안에서 직원이 놀란 눈을 하고 안된다며 문을 열어줄 수 없다며 돌아가라고 손짓을 했지만 나는 목 놓아 울면서 간절하게 문을 열어달라고 애걸했다. 그 사이에 할머니 할아버지 그리고 동생과 엄마도 우리 옆으로 와서 문을 열어주길 애원하였다. 어깨로 문을 받치고 있던 나는 어깨가 너무 아파서 잠깐 뒤를 돌아 우리가 들어온 방향을 바라봤다. 어느새 공안들이 쫙 깔려 우리를 잡으러 오고 있었다.


유학 상담을 해주던 사장님도 눈에 띄었는데 한 손에는 유학브로슈어를 들고 입이 떡 벌어져 넋이 나간 표정을 하고 있었다. 지금 잡히면 진짜 죽는구나 싶어지자 나는 더욱 소리를 지르며 살려달라고 울기 시작했다. 더 이상 안 되겠다고 생각한 삼촌도 뒷주머니에 넣어두었던 망치를 꺼내 들었다. 유리문을 부수겠다고 손짓 하자 대사관 직원이 드디어 알았다며 문을 열겠다고 했다. 마침내 문이 열렸다.


우리는 모두 쓰러지듯 건물 안으로 들어갔다. 손에 상처가 난지도 모르고 다들 잘 들어왔는지 주변을 살폈다. 대사관 직원들은 안심하라며 약통을 가져다주었다. 그런데 나머지 어른들이 보이지 않았다. 우리 모녀와 군인 삼촌, 그리고 할머니 할아버지는 들어 왔는데 다른 사람들이 보이지 않았다. 우리 여섯 명은 대사관 직원에게 어떻게 우리만 들어오게 하고 다른 사람들은 내쫓을 수 있냐며 울면서 호소하니 그들은 당황한 눈빛이 역력했다. 우리가 울면서 얘기하니까 진정시키며 들어올 때 우리 6명 외에 다른 사람들은 없었다고 했다.


대사 관 안으로 들어왔지만 여전히 불안했다. 진짜 한국 대사관에 들어온 건지, 진짜 기다리면 한국에 갈 수 있는지 직원들은 말해주지 않았다. 그저 식사하며 점심을 챙겨주신 고마우신 분들이었다. 하지만 물 한 모금도 넘어가지 않았다. 다른 14명은 어디에 있는지, 혹시나 공안들에게 잡힌 건 아닌지, 왜 또 우리만 들어 왔는지 내내 마음에 걸렸다. 그렇게 시간은 지나 간단하게 조사도 받고 긴장이 풀려 서로가 아무 말도 하지 않고 벽에 기대어 졸고 있었다.


세시 쯤 되었을까 밖에는 시끌벅적한 소리가 들렸다. 무슨 일인가 싶었지만, 방에서서 한 발짝도 나갈 수 없으니 안에 서 기다릴 수밖에 없었다. 그러더니 잠시 후 14명의 어른들이 우리가 있는 방으로 우르르 들어 왔다. 우리 20명은 확인하자마자 서로를 부둥켜안고 펑펑 울음을 터트렸다. 이는 분명 아침에 흘렸던 살기 위한 처절한 몸부림의 서러움과 공포의 눈물과는 다른 기쁨과 감격의 눈물이었다.


그들은 어떻게 들어오게 되었는가? 내용인즉슨, 그들은 우리 6명이 들어올 때에 타이밍을 놓쳤고 순식간에 공안들이 깔리는 바람에 우물쭈물하다가 결국 들어오지 못했고, 브로커 아저씨는 낙심한 그들을 조용히 태워 그 곳을 빠져나갔다고 한다. 그들은 낙심하여 서로 자책하며 “어떻게 저 노인네랑 애들은 들어갔는데 우리는 못 들어 갈 수 있냐”며 호상 비판을 했다고 한다. 그러다가 혹시나 하는 마음으로 지푸라기라도 잡는 심정으로 다시 그곳으로 가보자고 하는 의견과, 안 된다 위험하다는 의견이 분분하다가 그래도 다시 한번 가보자고 결정이 되어 다시 대사관 앞으로 왔다고 한다.


소망없이 왔지만, 그들에게 놀라운 광경이 펼쳐졌는데 바로 우리가 들어오면서 고장을 낸 셔터를 수리하기 위해 수리공들이 문을 다 활짝 열어놓고 수리를 하고 있었던 것이다. 누가 지나가는지 관심도 없이 어수선하게 수리하며 들락날락하는 사람들을 지나 차들 뒤로 숨어 건물 안까지 쉽게 들어올 수 있었다고 한다.


하나님은 참 약한 자들을 좋아하신다. 그때는 나의 힘으로 그것을 해냈다고 생각했지만 지금 돌이켜보니 세상의 약하고 미련한 것들을 택하여 사용하시는 하나님의 인도하심을 느낀다. 그렇기에 여전히 주님 앞에서 약해지고 싶고 여전히 약한 자들을 들어 쓰시는 하나님을 경험하고 싶다. 우리 모녀는 두 달 정도 대사관에 있다 가 드디어 한국 땅을 밟게 된다.


하지만 그토록 가고자 열망했던 곳에서조차 우리는 너무나 약하고 멸시받는 자들이었다. 그 사실이 너무나 견디기 힘든 시간도 있었지만 그런 나를 하나님은 끝까지 찾아오셨고 결국은 나를 통하여 하나님의 이름이 높임 받으시기 원하셨다.  이런 낮은 나를 찾아오시고 택하여 불러주신 주님을 찬양 한다. 그리고 지금 멸시받고 있는 북한을 언젠가 주님께서 구원하시고 들어 쓰실 것을 기대하며 오늘도 나의 고향 북조선을 위해 기도한다. 모든 영광을 주님께. (계속)




한국오픈도어선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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