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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회와 신학> 원고, '변증설교, 기독교의 유일성 드러낼 핵심병기... 무관심이 전도의 최대 걸림돌인 시대, 일상 속 접촉점 찾기'

작성자Stephan|작성시간24.02.27|조회수32 목록 댓글 0

<목회와 신학> 특집 원고, '변증설교, 기독교의 유일성 드러낼 핵심 병기... 무관심이 전도의 최대 걸림돌이 된 시대, 일상 속의 접촉점 찾기가 관건이다'


“이 세상 그 어디에도 네가 찾는 정답은 없어. 그러니까 답 같은 거 찾지 말고 네가 하고 싶은 걸 찾아. 네가 정말 좋아서 행복하게 할 수 있는 일, 그게 바로 가장 너답게 사는 너의 답이 될 거야!” 한때 큰 인기를 모았던 SBS 드라마 <낭만닥터 김사부>에서 김사부가 후배 의사에게 전한 조언이다. 짧지만 요즘 사람들의 생각이 한데 집약되어 있는 듯한 말이다.

변증설교, 왜 지금 꼭 필요한가?

지금은 어쩌면 무신론보다 더 교묘하게 진리를 따돌리는 불가지론의 시대다. 불가지론자들은 인생에서는 어차피 ‘왜?’에 대한 답을 못 찾는다고 확신한다. 그래서 일찌감치 어떻게 살 것인가에만 매달린다. ‘소확행’이니 ‘욜로’니 하는 말들이 다 이런 시대정신에서 나왔다. 사람이 세상에 왜 태어났고 왜 살고 왜 죽는지에 대해 정말 모른 채 살아도 아무런 뒤탈이 없는 것일까.

그래도 요즘 사람들은 굳이 답을 찾으려 하지 않는다. 진지한 탐색은 구시대의 유물처럼 취급당한다. 자신이 하고 싶은 걸 찾으면 그것이 인생의 정답이다. 각 사람의 수만큼 인생의 정답이 따로 있는 셈이다. 그러니까 모든 사람의 삶과 죽음에 대한 절대진리를 전하겠다는 기독교가 그들의 눈에 얼마나 뻣뻣한 꼰대처럼 보이겠는가. 적대감이나 혐오감, 요즘 세대 말로 ‘핵노잼’이나 ‘노답’은 그나마 일말의 관심은 있다는 표명이다. 지금은 그마저도 없이 그저 무관심으로 일관한다. 물론 행복하고 유의미한 삶을 살려면 신이 존재해야 한다고 믿을 마음도 더는 없다.

무관심이 전도의 최대 걸림돌이 된 요즘 세태에서 교회가 어느 때보다 더 필요로 하는 것은 변증전도다. 솔직히 말해 요즘 세상사람들이 기독교에 무관심한 이유는 따로 있다. 기독교를 제대로 알아서거나 몰라서가 아니라 기독교를 오해해서다. 변증전도는 세상사람들이 기독교에 대해 갖는 오해나 선입견에서 비롯된 의문이나 질문에 대답해주려는 전도다.

변증설교의 정의와 유형

변증설교 역시 한마디로 정의하면 기독교에 대해 사람들이 갖는 의문이나 질문에 대답해주려는 설교다. 이러한 정의의 성경적 근거는 사도 베드로의 권면에 담겨 있다. “너희 마음에 그리스도를 주로 삼아 거룩하게 하고 너희 속에 있는 소망에 관한 이유를 묻는 자에게는 대답할 것을 항상 준비하되 온유와 두려움으로 하고”(벧전 3:15). 여기서 ‘대답’이란 말이 헬라어로 ‘아폴로기아’(apologia)인데, 1세기 당시 법정에서 ‘변호’라는 의미로 사용되었던 말이다. ‘변증학’을 뜻하는 영어 ‘apologetics’의 어원이기도 하다.

기독교에 대해 사람들이 갖는 의문이나 질문에는 기독교 신앙에 대한 비판이나 도전도 포함된다. 초대교회가 당시 이방 사상들의 도전에 응답하며 기독교 교리를 정립해온 배경에는 그러한 공격 가운데서 기독교 신앙을 지키려는 동기가 강했다. 다양한 사상과 종교가 혼재하는 다원화 사회인 지금도 초대교회 못지않은 도전에 직면해 있다. 이런 상황에서 세상사람들의 의문과 질문에 답해주려는 변증설교는 시대적으로 아주 유용하다. 교회 밖의 비신자들에게 기독교 신앙의 진정성을 알릴 뿐 아니라 교회 내 신자들의 신앙을 지키는 데도 중요한 재교육의 역할을 감당한다.

물론 변증설교도 성경 말씀을 텍스트로 각각의 특정 본문을 강해하고 적용하는 큰 틀은 비슷하다. 그러나 주제설교여서 사람들이 궁금해할 만한 기독교 신앙의 주제를 먼저 정하고, 그 의문에 답이 될 만한 성경 본문을 택한다. 그러고 나서는 본문을 강해하면서 선택한 주제에 대해 일차적으로 성경은 어떤 가르침을 제공하는지 제시하면서 동시에 사람들의 의문에 구체적인 답을 전해주는 데 가장 큰 비중을 두고 적용점을 찾는다. 이 과정에서 기독교변증의 주력 분야인 종교와 철학, 과학의 영역에 대한 전문 지식을 성경의 내용과 적절히 융합하는 작업이 더해지기도 한다.

변증설교가 사람들의 질문에 대답해주는 강해적 주제설교이기 때문에 필자의 경우 주일 변증설교의 제목을 항상 질문 형태로 잡았다. ‘만물을 통일하시는 예수님, 과학자들의 비인격적인 신과 어떻게 다른가?’ 하는 식이다. 설교 제목을 성경 본문의 핵심 주제가 요약된 질문 형태의 한 문장으로 정해두면, 본문을 읽어놓고 딴 소리 하는 설교로 빗나갈 수 없다. 설교의 모든 구조나 내용이 그 하나의 질문에 대답해주는 데 기여한다.

비신자들은 주로 기독교 진리의 절대성 여부에 의문을 갖고, 신자들은 신앙생활 가운데 고난이나 기도 응답의 문제 등에서 하나님이 어떻게 일하시는지에 질문이 많다. 이 두 영역을 놓고 변증적 접근 방법으로 성경의 진리를 전해야 하는 변증설교자는 대상에 따라 주제와 내용, 적용점을 조금씩 달리하며 때마다 강단에서 변증설교를 목회적으로 융통성 있게 활용할 수 있어야 한다.

지금은 많은 신자들 또한 일상에서 절대진리를 인정치 않는 포스트모던 시대의 온갖 세속적 사고방식과 문화의 공격에 무방비로 노출되어 있다. 그들에게도 비신자 대상의 변증설교가 신선한 깨달음을 주고 기독교 신앙에 견고한 확신을 더해준다. 그로 인해 매너리즘에 빠지기 쉬운 신앙생활을 새로이 돌아보며 이 땅에서 하나님의 통치에 늘 깨어 있어야 할 하나님 나라 백성의 정체성을 거듭 확고히 다지게 된다.

변증설교의 유형 역시 베드로전서 3장 15절이 가진 구조로부터 내용상 크게 두 가지로 나뉜다. 첫째, 기존 신자들의 신앙을 성숙시키는 데 초점을 둔 변증설교가 있다. “너희 마음에 그리스도를 주로 삼아 거룩하게 하고.” 이 말씀은 로마제국의 황제를 주인이요 신으로 숭배하던 1세기 당시 그리스도인들이 로마 황제 대신 예수님을 주로 삼아 그분을 거룩한 분으로 인정하라고 권면한다. 예수님의 주권을 인정하고 주인이신 그분을 닮아 신자들 역시 거룩한 삶을 살라는 것이다.

이 유형에서는 예수님이 신자들뿐만 아니라 모든 사람의 주가 되시며, 기독교 역시 여느 종교의 하나가 아니라 모든 사람이 예속되어 있는 창조질서 그 자체라는 관점이 중시된다. 새신자뿐만 아니라 교회 안에 점점 더 늘어가는 명목상의 기독교인들이 이 기독교의 유일성을 분명하게 깨우치고 내면화할 수 있다면, 믿음이 흔들리는 상황을 만나도 쉽게 교회를 떠나지 않는다.

둘째, 비신자들에게 그리스도인들이 가진 소망에 관한 이유를 제시하는 데 초점을 둔 변증설교가 있다. “너희 속에 있는 소망에 관한 이유를 묻는 자에게는 대답할 것을 항상 준비하되 온유와 두려움으로 하고.” 이 말씀에서 소망은 세상에 속하지 않은 위엣것, 천국 영생에 대한 소망이다. 이 종말론적 소망에 관한 이유가 바로 기독교다.

이 소망을 갖게 하려면 예수님을 만나게 해야 하고, 예수님을 만나게 하려면 하나님을 떠나 독립적으로 살아가던 근원적인 죄에서 돌이켜 하나님께로 향해야 하는 회개와 주 예수께 대한 믿음(행 20:21), 곧 진정한 회심에 대해 전해야 한다. 그 안에 심판과 천국, 지옥과 같은 종말에 대한 선포가 들어간다. 이 모든 소망에 관한 이유가 진실하다는 것을 강조하기 위해 기독교 진리의 역사성, 사실성에 대한 객관적인 증거들을 소개할 수 있다.

일상 속의 접촉점 찾기가 관건이다

변증설교자는 끊임없는 독서를 통해 요즘 사람들이 기독교에 대해 어떤 생각을 갖고 있는지, 그 생각의 모태인 세속 가치관과 시대정신은 무엇인지를 민감하게 잘 파악하고 있어야 한다. 삶과 죽음의 근본적인 문제에 무관심한 비신자들의 눈높이에 맞춰 그들이 이해하기 쉬운 언어와 개념으로 그들이 듣기 원하는 답보다 꼭 들어야 할 답을 변증설교로 전하려면 그들도 공감할 수 있는 접촉점, 곧 세상사람들이 공통적으로 경험하는 기독교적 요소들을 잘 활용하는 것 또한 필수적이다.

알리스터 맥그래스는 자신의 책 <생명으로 인도하는 다리>(서로사랑)에서 기독교변증의 가장 중요한 기능 가운데 하나를 ‘접촉점 활용을 통한 장애물 제거’라고 보았다. 그러면서 하나님의 형상을 가진 사람들이 지닌 접촉점의 예들로 우주의 질서, 인간의 합리성, 윤리, 채워지지 않는 욕구, 실존적 불안과 소외감, 유한성과 죽음에 대한 의식 등을 들었다.

변증설교의 교과서라 할 만한 책 <팀 켈러의 설교>(두란노)에서 팀 켈러는 변증설교에서 요즘 세상사람들의 공감을 얻어낼 만한 접촉점을 찾기 위한 몇 가지 방법을 제시한 바 있다. 변증설교에서 설교자는 상투적인 기독교 전문 용어들 대신 비신자들에게 친숙한 언어를 사용하고, 그들이 신뢰하는 자료를 인용하며, 그들이 가진 기독교에 대한 반대와 의심을 이해하고 있음을 보여줘야 한다.

또한 비신자들이 별 생각이나 합당한 검토 없이 막연히 품고 살아가는 왜곡된 세속의 가치관을 바로잡아줘야 한다. 이때 비신자들의 생각이나 진심을 일단 존중해주되 세상이 권위를 인정하는 명사들의 말을 예로 들어 그들의 생각이 왜 온전한 답이 될 수 없는지를 보여주는 ‘공감적 고발’의 접근이 필요하다.

변증설교에서는 합리적 논증도 중시하지만 일상생활에서 접촉점을 찾아 감성적인 이야기로 친근하게 다가가는 것이 복음을 머리만이 아닌 마음에 파고들게 해 진지한 관심을 유발시키는 데 좋다. 요즘 사람들은 기독교 진리의 절대성을 입증하기 위한 합리적, 역사적 증거들만 갖고는 잘 설득되지 않는다. 실컷 설명해줘도 “그게 나와 뭔 상관인가?”라는 말 한마디로 거절하면 그만이다. 먼저 그들이 ‘기독교는 정말 다른 그 누구도 아닌 바로 나의 이야기구나’라고 실감하게 해줘야 한다. “예수는 유일한 절대진리다”라는 명제가 구체적으로 그들 각자에게 어떤 의미가 있고, 그래서 그들 자신의 삶을 어떻게 변화시켜줄 수 있는가가 관건이다.

바로 여기서 이야기의 필요성이 대두된다. 이야기의 특성 자체가 인간의 삶의 실제적인 경험과 관련되기 때문이다. 변증설교의 흐름을 이야기로 잡아나가려면, 일상생활과 기독교 진리 간의 접촉점을 이끌어내기 위해 복음의 모든 요소들을 일상용어로 풀어내려는 노력이 필요하다. 특히 칭의나 구원, 죄와 같이 추상적으로 느껴지는 기독교 신앙의 용어들을 상상력을 활용한 이야기나 친숙한 일상 속의 이미지로 표현할 수 있어야 한다.

필자는 주일 변증설교를 전할 때 항상 그날 설교 주제와 관련된 5분 이내의 짤막한 영상을 유튜브에서 골라 설교 직전에 먼저 함께 나누었다. 너덜트나 숏박스 같은 유튜브 채널에서는 주제별 스킷 드라마를 선별할 수 있고, EBS 채널에서는 우리 사회나 문화의 문제들을 다룬 다큐 영상, 내셔널 지오그래픽 채널에서는 자연세계와 과학, 역사 분야를 조명한 양질의 영상 등을 얻을 수 있다. 설교의 내용 중에는 일상에서 접촉점으로 삼을 만한 실마리가 반드시 한 두 개는 있다. 그것을 테마 영상의 검색어로 잡고 찾아보면 어렵잖게 적합한 영상들을 구할 수 있다.

설교 서두의 테마 영상이 그날 변증설교 전체의 방향과 내용, 적용점까지 결정짓는 경우가 많았다. 청중들은 자신들의 삶에서 흔하게 접하는 일상의 이야기나 문제들을 접촉점으로 삼아 성경 본문으로 직접 걸어 들어가는 과정을 경험하면서 설교의 내용을 훨씬 더 실제적인 삶의 교훈으로 받아들였다. 전통적인 설교에서처럼 성경 본문에서 일상의 적용을 곧바로 끄집어내려 하기보다 일상의 필요나 문제를 앞서 제시한 후 그 이슈에 대한 반응이나 해결책으로 성경의 답을 적용해줄 때 각자 자기 삶의 답으로 받아들이기가 더 수월해서다.

마지막때 목회자들의 시대적 책무

“변증전도에 대해 깊게 생각해본 적이 없었는데, 실생활에 유용한 새로운 전도의 패러다임과 방법에 대해 배울 수 있어 굉장히 만족스러웠다”, “강의를 통해 멈춰 있던 생각이 열리는 느낌이 들었다.” 필자가 총신대 교회 봉사자 페스티벌에서 전한 변증전도 강의에 대한 참석자들의 소감이다.

최근에 필자는 변증전도 사역에만 집중하려고 그동안 담임목회로 섬겨오던 교회를 후임자에게 물려주고 사임했다. 지역교회나 수련회 현장에서 청소년이나 청장년을 대상으로 변증설교를 전할 때마다 지금은 교회 안에 있는 이들의 이탈을 막는 전도가 더 시급한 때라는 위기의식이 들곤 했다. 미력하나마 이제라도 국내외 교회나 선교지 어디든 직접 가서 변증설교를 전하고, 참석자들이 던지는 다양한 질문에 일일이 답해주는 것으로 각자의 삶에 막혀 있던 복음의 물꼬를 터나갈 수 있도록 돕고자 한다.

하이데거의 말대로 세상에 던져짐을 당한 ‘피투성’(被投性)의 존재는 반드시 던진 분이 다시 데려간다. 지식 정보가 아무리 폭발적으로 증가한다 하더라도 창조주를 무시하면 아무도 자신이 누구인지, 삶과 죽음의 의미가 무엇인지를 끝내 알 수 없다. 노아의 때와 같이 사람들이 영적인 데는 무관심한 채 온통 세속적인 일들에만 몰두하는 이 마지막때에 지역교회 목회자들이 변증설교에 무관심한 것은 일종의 시대적 직무 유기다. 이제라도 변증설교의 가치에 눈을 크게 뜨는 것으로 한 영혼 구원과 회복의 가치를 중시하는 하나님 나라의 의를 먼저 구해야 한다.

- 안환균, <목회와 신학>(두란노) 2024년 2월호 특집 원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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