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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조론과 진화론

성경 창세기의 내용은 고대 신화의 세계관에서나 어울리는 방식으로 서술된 우화적 기록일 뿐인가?... 안환균 목사의 SNS 댓글

작성자Stephan|작성시간24.05.06|조회수33 목록 댓글 0

유신진화론을 비판하는 아래 기사를 놓고 유신진화론과 창조과학, 과학주의의 문제 등에 대해 한 페친이 제게 댓글로 주신 질문에 댓글로 답하다 보니 너무 길어져 따로 포스팅해놓습니다~

Q: 말씀하신 과학주의의 문제가 정말 심각한 게 창조과학입니다. 왜 창조과학은 비판하지 않을까요? 사람들을 교회로 이끈 공로가 중요하다면 천동설이 진리이겠지요.

A 1

창조과학은 복잡하지 않습니다. 현 시대에 미국이나 한국처럼 과학자를 포함한 지식인 그룹까지 진실한 기독교인이 된 후 자기 전공 분야를 살려 성경이 창조주 하나님이 저자이신 특별한 책이라고 알려주려는 사람들이 많은 나라가 없다고 믿습니다. 이것 자체가 눈을 좀더 크게 뜨고 보면 엄청난 영적 복이라고 생각합니다.

창조과학은 바로 그 미국과 한국의 보수적인 그리스도인 과학자들이 자기 전공 분야의 지식으로 성경을 구석구석 깊이 들여다봐도 여러 대목에서 창조주 하나님만이 알 수 있고 또 말할 수 있는 창조세계의 지식 또는 진리가 기록되어 있는 것들을 보고, 그 사실을 비록 부족하고 뚜렷한 한계도 있지만 최대한 현실 세계에 맞게, 그리고 과학적 사고에 익숙한 현대인들이 이해하기 쉽게 묘사하고 설명하려 한 시도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라고 봅니다.

창조과학은 이렇게 믿을 만한 근거를 가진 성경을 기초로 하는 기독교만은 사람들이 고안해낸 다른 여느 종교들과는 완전히 차원이 다른 믿을 만한 종교라는 사실을 전도의 맥락에서도 설득력있게 제시하고자 했던 듯합니다. 그래서 치우친 진화론적 과학주의에 물든 현대인들에게 의미 있게 복음을 전하려는 순수한 동기를 가진 일종의 지성적 복음전도 운동이라고도 생각해왔습니다.

저는 창조과학과는 아무런 직접적인 관련도 없는 사람입니다. 개인적으로 성경 기록의 사실성을 이해하는 데 창조과학의 접근을 통해 유익한 도움을 많이 받았습니다. 그래서 지금도 달리 더 나은 뾰족한 대안이 없는 한 호의적이고도 긍정적으로 받아들이고 있는 1인일 뿐입니다.

"성경을 (또는 성경 속의 창조를) 과학적으로 설명하려는 것 자체가 모순이고 비과학"이라고 비판하는 세속적 과학주의자들은 무신론적 진화론을 기초로 삼는 자신들의 과학적 노력은 철저히 합리적으로 정당한 과학적 전제에서 진행하는 작업이라고 생각하는 모양인데, 전혀 그렇지 않습니다.

무신론적 진화론 또는 무신론적 진화주의라는 방법론을 대세로 삼지 않는 과학적 연구 결과는 다 사이비 과학이라고 치부해버리는 현 시대의 과학주의 풍조는 과학적으로 증명될 수 없는 것은 믿을 수 없고 비논리적이라고 주장합니다. 그러나 이미 우리가 무심코 진리라 믿고 살아가는 많은 사실들이 과학적으로 증명될 수 없는 것들입니다. 예를 들어, 논리와 수학은 과학의 전제가 될 수는 있어도 과학이 증명할 수 있는 대상은 아닙니다. 무엇이 선하고 아름다운가에 관한 가치의 문제도 과학적으로 증명될 수는 없지요.

무신론적 과학주의는 과학이 진리로 가는 유일한 길이고 적어도 원리적으로는 모든 것을 설명할 수 있다는 가치관으로 다분히 이데올로기적입니다. 그래서 신이나 종교, 종교적 경험에 대한 모든 논의가 과학의 바깥에 있다고 여겨 객관적인 참이라고 보지 않습니다. 그러나 과학만 진리를 전달할 수 있다는 주장은 참이 아닙니다.

과학은 자연현상의 원인을 검증할 수 있는 유일한 도구지만, 검증된 원인들 외에 다른 요인은 일체 존재할 수 없다는 것까지 입증해낸 건 아닙니다. 초자연적인 원인에 따른 자연현상은 애초에 불가능하다는 주장은 실험모델이 없어 과학적 소견이 아니라 철학적 가설이라고 봅니다. 초월적인 하나님이라는 존재에 의한 창조는 일어날 수 없다는 확신은 하나님이 없다는 확신을 토대로 삼는데, 이것은 논증을 통해 증명하거나 부정할 수 없는 일종의 신앙이라고 봐야 합니다.

보통 신의 존재를 인정치 않는 현대인들이 과학적 사고로 믿을 수 없다고 말할 때의 과학적 사고라는 건 사실 순수한 의미에서의 과학적 사고는 아닙니다. 자연주의라는 철학적 사고에 바탕을 둔 과학적 사고일 뿐입니다. 그러나 원래 플라톤 당시부터 과학적 사고란 신의 섭리와 활동을 인정하는 것과 병행되었습니다. 신의 설계와 초자연적 이성의 개입 가능성을 인정하는 유신론적 과학은 오랜 과학의 역사에서 거의 항상 과학으로 간주되어왔습니다.

그런데 다윈의 진화론과 자연주의 철학이 결합되면서부터 사람들은 ‘방법론적 자연주의’만을 과학적 사고로 인정하려 했습니다. 그래서 방법론적 자연주의를 배제하면 과학이 아니라고까지 주장하기에 이르렀지요. 방법론적 자연주의란 이 세상에 하나님은 존재하지 않기 때문에 이 세상의 현상들을 실험하고 설명할 때 반드시 자연현상 안에서 자연적 요인으로 설명될 수 있는 것만 과학으로 받아들인다는 입장입니다.

이러한 방법론적 자연주의에 매몰되어 성경 창세기의 역사성을 무차별적으로 공격하는 가운데 종교 중립적인 학교 수업이라는 명목으로 학생들을 반창조론적인 사고로 몰아갈 때 창조과학의 시대적 역할이 컸습니다. 세속적인 과학주의자들이 볼 때는 당연히 사이비 과학이라고 매도할 게 뻔한 그 접근 방법론을 갖고, 새롭게 거듭난 이성을 갖게 된, 사고가 멀쩡한 현역 그리스도인 과학자들은 성경이 자연세계의 어떤 측면을 기록하고 있을 경우에는 과학자들의 지식과 안목으로 볼 때도 하자라고 할 만한 게 없고 오히려 현실에 적합한 표현과 사실 기록을 보여준다고 알리고자 했습니다.

이러한 창조과학의 노력은 천동설과 단순비교하기 어려운, 지적으로 축적된 합리적 체계 또한 갖고 있다고 믿습니다. 과학의 발전이 교회가 천동설 같은 잘못된 가정을 근거로 이해했던 성경의 텍스트를 재조명하게 해주는 건 사실입니다. 그러나 그 과학 자체가 정설로 검증되지 못한 진화론이라면, 이런 전제를 정당화시키지 못합니다. 아직도 진화론은 중력 법칙이나 지동설처럼 반복적으로 확인되는 참된 과학의 범주는 아니기 때문입니다.

성경 자체가 의도적으로 창조주 하나님이 아니라면 감히 언급할 수조차 없는 창조세계의 여러 지식을 실제적이고도 공개적인 기록으로 드러내고 있고, 이러한 차원의 연장선상에서 역사적으로 정확하게 성취된 여러 예언들 또한 독보적으로 기록해놓고 있습니다.

그동안 창조과학이 이렇게 성경이 창조세계에서뿐만 아니라 인류역사의 실제적인 사실 기록의 측면에서도 창조주 하나님만 드러낼 수 있는 사실들만을 담고 있는 믿을 만한 책이라는 측면을 강조하다보니 이런 부분을 특히 강조해온 세대주의와의 연관성이 지적되곤 했습니다. 그러나 이 또한 논점을 흐리는 가운데 창조과학을 부당하게 비판 또는 매도하려는, 평소 신사적으로 보이는 지성주의자들의 면모로 볼 때는 다소 질이 떨어지는 프레임 걸기의 일종이라고 느낍니다.

본래의 순수 과학이 탐구 대상으로 삼는 창조 세계는 성경과 기독교 신앙의 무대이기도 하고, 기독교의 하나님은 자연의 저자인 동시에 성경의 저자이십니다. 그 성경은 문맥에 따라 문자적으로나 상징적으로 해석될 수 있습니다. 다만 성경에서 적어도 역사적 내러티브라는 큰 맥락 가운데 기술된 모든 내용들은 일단 문자적으로 먼저 읽고 해석해야 할 필요가 있습니다. 성경은 타종교의 경전들처럼 단순히 창시자의 교훈만이 담긴 도덕서의 하나가 아니라, 창조의 사건을 포함해 인류 각자의 실제적인 구원에 중대한 의미를 가진 역사적 사실들이 담긴 책이기도 하기 때문입니다.

창조 사건에 대한 성경 창세기의 내용을 고대 신화의 세계관에서나 어울리는 방식으로 서술된 우화적 기록일 뿐인 듯 취급하려는 유신진화론의 발상은 성경만의 독특한 특성을 무시하고 성경 또한 여느 종교들의 도덕윤리적인 경전의 하나인 것처럼 폄하시키려 했던 자유주의 신학의 기조가 교묘하게 스며든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진화적 창조론'이니 뭐니 하면서 과학적 진리로 확정되지도 않은 진화'론'을 적어도 기독교 진리 체계의 유일무이한 근거로서는 확고하게 확정된 성경의 창조 사건과 섣불리 혼합시키려는 시도는 유신론적 과학자들이 미처 고려치 못한 아주 까다롭고 복잡한 신학적 문제들을 일파만파로 야기할 수 있는데, 처음부터 거기까지는 생각이 미치지 못했던 것 같기도 합니다. 유신진화론이 거짓으로 밝혀지기 전까지 이 주장이 교회 안팎의 많은 신자와 비신자들에게 이미 참된 진리로 거듭 밝혀진 성경의 창조 사건의 진실성을 의심하게 만들 해악을 방치해두기에는 이 시대가 이미 너무도 어수선합니다.

무신론적 자연주의를 기조로 하는 과학주의와 과학은 다릅니다. 창조과학은 합리적인 지식체계로서의 과학을 배척하려는 것이 아닙니다. 방법론적 자연주의에 경도된 과학주의는 무신론적 철학이지 진정한 과학이 아닙니다. 창조과학은 우주의 기원에 대해서까지 방법론적 자연주의를 기반으로 한 무신론적 진화론으로만 다 뭉뚱그려 설명하려는 과학주의의 횡포에 성경적 신앙으로 맞서려는 여러 합리적 대안들 중 하나 정도로는 봐줄 만하다고 봅니다.

지성주의에 과도하게 경도된 유신진화론의 근거는 무엇일까요? 저는 그 근거가 성경에 있다기보다 자신들이 소속되어 있는 세속적인 과학계가 핵심적인 방법론의 근거로 삼아온 진화론에 있다고 봅니다.

유신진화론은 그리스도인이면서도 진화론을 인정하지 않으면 세속 과학계에서 보란듯이 번듯하게 활동하거나 인정받기가 쉽지 않은 현실을 진화론을 성경의 창조론과 조화 또는 타협시키는 것으로 모면해보려는 작업이었던 측면이 분명히 있다고 봅니다. 개인적인 생존의 차원에서 소화하고 지혜롭게 처신했어야 할 일을 공적인 학문의 장으로까지 연결지어 그것의 총화로 유신진화론을 형성시킨 일면이 있다고 봅니다. 결국 교회 안에까지 들어와 여러 신학적 문제들을 불러일으키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일례로, 돌연변이와 자연도태, 적자생존의 과정을 거쳐 생물의 진화가 이뤄졌다는 전제 자체가 성경 속의 창조주 하나님의 선하신 성품에 맞지 않습니다. 또한 유신진화론의 주장대로, 그 하나님께서 오랫동안 수많은 생물들의 죽음을 거쳐 사람을 빚어내셨다면, 그러니까 첫사람 아담의 역사성을 부정함으로써 죽음이 첫사람 아담의 영적, 도덕적 범죄로 인류사에 찾아든 것이 아니라 생명체의 진화 과정에서 자연스럽게 생겨난 생물학적 현상의 일종이라 주장하게 된다면, 예수님이 죄로 인해 사망에 이른 인류를 대속하시려고 구원자로 성육신하셔야 할 신학적 근거 또한 무색해집니다. 더 나아가 유신진화론의 구도를 받아들인다면, 창조, 타락, 구속이라는 기독교 세계관의 큰 틀도 어그러지고 맙니다. 이로써 기독교 구원론의 핵심을 무너뜨리려 하는 현재의 형국은 결코 바람직하지 않다고 느낍니다.

창조과학이 현대의 세속적인 과학주의의 입장에서 볼 때는 한계와 단점들을 지닌다고 볼 수 있을지 몰라도 적어도 성경의 내용을 근거로 그 성경의 진실성을 변증하려는 노력의 일환으로 과학자 자신들의 전문지식을 활용하고자 했던 시도를 사이비과학이라고까지 매도할 이유는 없다고 믿습니다. 어차피 그들이 그렇게 진단하는 근거로 삼는 자신들의 전제 또한 과학적으로나 합리적으로 온전치 않기 때문입니다. 그런데도 이러한 매도가 성경을 동일하게 진리로 믿고 받아들이는 그리스도인 진영 안에서 버젓이 일어나고 있다는 건 정말 안타까운 일이라고 생각합니다.

경험상 제가 이렇게 말한다고 해서 일부 지성주의자들을 비롯한 유신진화론자들이 자신들이 이미 깊숙하게 발을 들여놓고 있는 그 세계의 카르텔을 과감히 깨뜨리고 그렇게 한 대가로 그 세계에서 일종의 지적, 사회적 왕따를 감수하면서까지 뭔가 새로운 행보나 모험을 시도할 거라고 기대하진 않습니다.

다만 창조과학이 성경에 무게중심을 두고 무신론적 진화론에 물든 과학을 어떻게든 성경의 창조세계 안으로 끌어들이려 했던 노력으로 비친다면, 유신진화론은 세속의 진화론에 무게중심을 두고 어떻게든 성경의 창조세계를 세속의 진화론 안으로 끌어들이려 했던 노력으로 비친다는 이 한 가지 사실만이라도 분명히 해두었으면 하는 아쉬움이 있습니다.

A2

균형 있는 태도의 필요성을 중심으로 제가 미처 생각지 못한 부분들을 짚어주셔서 감사합니다. 이 영역에 대해 경험적으로 지적하신 것들은 적절히 수용할 건 수용해서 균형을 찾아가는 데 나름 의미 있게 참고할 만하다고 느낍니다. 다만 저는 답글로 말씀해주신 것들과 관련해서 여기서는 한 가지만 되짚고 넘어가고 싶네요.

창조과학이 가장 굳세게 지지하는 6일 창조론 또는 젊은 지구론은 그 이론 자체에 대한 교조주의적 집착이 아니라고 봅니다. 이 부분은 어쩌면 모든 형태나 경향의 과학보다 앞서야 할 기본적인 신앙 고백의 차원을 최우선순위에 놓는 창조과학계 인사들의 신앙 자세와 관련되어 있다고 봅니다.

창세기의 1, 2장 또는 1-11장을 기본적으로 문자적으로 받아들이려는 토대 위에 역사적인 사실 그대로 해석하려는 태도, 복음주의 신앙의 아주 핵심적인 토대를 지키려는, 그래서 적어도 이 영역에서는 일종의 근본주의적 입장을 견지하려는 태도와 관련된 것이라고 봅니다.

이러한 태도에 대해 성경 기록의 사실성을 변증하는 일에 구조적으로나 내용적으로 장점도 많이 갖고 있는 창조과학 전체가 잘못되었고 사이비과학이라는 식으로 비판하고 매도함으로써 보수적인 성경관의 핵심적인 가치까지 무너뜨리려는 작금의 유신진화론자들의 행태나 성향의 위험성을 지적하고 경계하려는 것이라고 봅니다.

현재 교회 안의 많은 젊은이들과 초신자들은 성경 창세기를 문자 그대로의 사실로 받아들이는 창조 신앙을 갖고 있는데, 세상에 나가서는 진화론이 마치 당연한 과학의 대전제인 양 통용되는 현실 사이에서 큰 갈등을 겪고 있다고 봅니다.

신자도 개인에 따라 인간의 영적 타락 이후 자연세계도 그 영향을 받아 가시와 엉겅퀴를 내는 상태로 변화되면서 돌연변이, 자연도태, 양육강식이라는 패턴으로 나타나는 '진화 현상'을 하나님께서 허락하신 섭리의 한 영역으로 받아들일 수 있다고 봅니다.

그러나 문제는 '진화주의'로까지 나아간 무신론적 과학주의인데, 창조과학이 전투적, 교조적인 태도로 비쳐지는 위험을 감수하면서까지 성경 창세기의 창조 사건을 문자적 해석으로 지켜내려는 데는 이러한 왜곡된 시대 분위기가 작용한다고 봅니다. 6일 창조론을 정면으로 반박하는 유신진화론을 반대하는 주된 이유도 여기에 있다고 보고요.

결국 유신진화론이 창조과학보다 더 과학적이라거나 성경 창세기를 기록한 고대 저자의 의도에 더 맞다는 명분으로 과학의 이름을 빌려 창조과학을 공격하는 것 같지만 실은 보수 복음주의 또는 근본주의적 성경관, 신앙관을 공격하고 있는 것이라고 보기에 창조과학이 방어벽을 더 철저하게 둘러치려고 해오지 않았나 싶습니다.

성경을 보면 하나님의 6일 창조는 고대 신화의 양식에 맞게 기록했다고 주장하는 성경 창세기의 내용에서만 아니라 실제적인 역사의 맥락에서도 하나님께서 직접 하루를 24시간으로 받아들이게 하는 6일 창조에 대해 언급하셨습니다.

"안식일을 기억하여 거룩하게 지키라. 엿새 동안은 힘써 네 모든 일을 행할 것이나 일곱째 날은 네 하나님 여호와의 안식일인즉 너나 네 아들이나 네 딸이나 네 남종이나 네 여종이나 네 가축이나 네 문안에 머무는 객이라도 아무 일도 하지 말라. 이는 엿새 동안에 나 여호와가 하늘과 땅과 바다와 그 가운데 모든 것을 만들고 일곱째 날에 쉬었음이라. 그러므로 나 여호와가 안식일을 복되게 하여 그 날을 거룩하게 하였느니라"(출 20:8-11).

이 본문의 맥락상 하나님은 안식일이라는 24시간의 하루와 정확하게 대비해서 엿새 동안의 인간의 일과와 엿새 동안의 하나님의 창조를 말씀하신다고 보는 것 외의 다른 해석은 솔직히 상정하기 어려워 보입니다.

6일 창조를 받아들이면 기본적으로 수많은 시간을 가정해야 존립 가능한 모든 형태의 진화론은 아예 설 자리가 없습니다. 그래서 과학자들이 볼 때는 기적적으로 보이는 창조의 사건을 있는 그대로 기술하거나 보도하고 있는 듯한 창세기의 기록을 상징화시키거나 다르게 해석하는 것으로 끊임없이 6일 창조를 반대하는 것으로 보이기도 합니다.

그러나 그 근거는 다분히 심정적인 것으로 "미개한 고대 시대도 아닌 요즘 현대인들의 상식으로 세상이 6일 만에 창조되었다고 하면 누가 믿겠나? 그러니 유신진화론 정도의 적절히 중화된 진화적 창조론이 있어야 현대인들을 전도하기에도 좋다"는 것입니다. 이는 실제로는 예수님의 동정녀 탄생이나 부활 사건을 상식적으로는 못 믿는 것과 비슷한 경우인데도 신학적인 문제에 대한 너무 노골적인 반대는 부담스러웠는지 과학이란 이름으로 다른 영역을 통해 공격하지만, 보수적 성경관의 약화라는 결과는 비슷하게 도출되고 만다고 생각됩니다.

6일 창조를 창세기의 기록대로 문자 그대로 받아들이는 게 옳다고 보는 젊은 지구론은 엄연히 미국을 포함한 전체 복음주의계 안에서 정당한 창조론의 하나로 받아들여지고 있습니다. 왜 유독 한국에서만 그 창조론을 지지하는 것이 가장 주된 기반이 되어 거기서 파생된 여러 증거들을 살피고 그것을 통해 성경의 권위를 지키고자 하는 창조과학을 사이비 과학이니 뭐니 하며 과도하게 비판하는지 솔직히 이해하기가 쉽지만은 않네요.

결국 창조과학을 반대하면 어떤 면에서는 창세기의 상징적 해석이나 자유주의적 성경관을 용인한다는 암묵적 전제가 있기 때문에 이 싸움이 첨예한 대립으로 비쳐지는 건 어쩔 수 없는 측면도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런 대립이 꼭 나쁜 것만은 아니며, 그러한 대립의 상태나 과정 자체가 가치 있는 진리를 지켜내는 과정이 된다고 믿고 그렇게 행동할 신앙인의 자유도 충분히 존중되어야 한다고 봅니다.

마치 이제 성경도, 현재의 과학계도 용인해줄 만한 유신진화론이 나왔으니까 창조과학은 용도 폐기가 되어야 할 시점인데 아직도 시대에 안 맞게 고집스럽게 자신만 옳다는 식으로 주장하고 있다고 비판하는 것은 창조과학의 입장에서 볼 때 또 다른 교조주의로 여겨질 수 있습니다.

그러한 태도가 창조과학으로서는 성경 창세기를 융통성 있게 해석하는 자유주의 신학이 나왔으니 이제 보수 복음주의는 자리를 내주라는 단순구도를 받아들이라는 어이없는 몸짓처럼 느껴질 수도 있습니다.

시간이 지날수록 순수한 성경적 진리를 더 많이 발굴하고 장려하기보다 오히려 더 세속적인 성경관이 형성될 수도 있다는 것은 성경이 마지막때에 배도가 있을 거라는 경고를 통해 특히 주의깊게 경계하고 있다고 믿는 보수주의자들의 염려도 이쯤에서는 존중할 필요가 있다고 봅니다.

동성애가 선천적이라는 주장은 언론을 통해 먼저 세상에 터뜨려져 교회 안팎에 널리 회자된 이후에 뒤늦게 그 주장의 과학적 근거가 미약하다는 증거들이 다른 세속 과학자들에 의해 밝혀진 것으로 압니다. 그러나 이미 동성애가 선천적이라는 주장이 온 세상에 선정적으로 널리 알려지고 난 후라 이러한 증거에 대한 주장은 별로 주목받지 못해 아직도 이 주장이 옳다고 여기는 이들이 많습니다.

유신진화론도 꼭 이와 비슷한 패턴을 밟아가지 않을까 싶습니다. 유신진화론의 득세로 성경 창세기 기록의 권위가 이리저리 공격받고 의심받은 후에 훗날 그것이 거짓이라고 밝혀진다 한들 이미 때는 너무 늦었을 가능성이 높습니다. 지금 창조과학계와 보수 복음주의자들이 유신진화론을 경계해야 한다고 강하게 목소리를 내는 것도 이런 염려에서 비롯된 것이라고 본다면, 조금은 더 넓은 포용력을 갖고 이 문제를 대할 수 있지 않을까 싶네요.

- 한 페친의 댓글 질문에 답변한 안환균 목사의 페이스북 댓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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