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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독교와 타종교

기독교와 타종교들의 접점은 전혀 없나?... '타종교에 있는 진리들을 무조건 무시해서 기독교인들을 무시하는 비기독교인들이 많다'

작성자Stephan|작성시간22.09.22|조회수29 목록 댓글 0

기독교와 타종교들의 접점은 전혀 없나?... '타종교에 있는 진리들을 무조건 무시해서 기독교인들을 무시하는 비기독교인들이 많다'

 

<기독교는 타종교로부터 무엇을 배울 수 있는가?>(제럴드 맥더모트/IVP)

 

조기축구회에서 기독교인이 아닌 분들에게 축구하면서 복음을 전한다는 친구가 있다. 어떻게 복음을 전하냐고 물었더니 패스로 전한단다. “축구할 때 특히 패스를 잘 해준다. 내가 먼저 공을 차지해서 골을 넣으려 하지 않고 다른 사람들이 골을 넣도록 도와주는 걸 그들이 안다.” 축구만 아니라 모든 삶의 현장에서 명심할 말이다.

 

“사람들에게 환생에 대한 갈망이 있다는 건 어떻게 봐야 하나?” 필자가 섬기는 교회가 매년 봄에 갖는 변증전도 집회인 갓토크 콘서트에서 한 청년 비신자가 제기한 질문이다. 모든 사람에게 죽지 않으려는 영생에 대한 갈망, 완전한 나라와 왕, 완전한 나에 대한 갈망이 있는데, 이는 그 갈망을 채워줄 대상이 있다는 증거라는 전도 메시지에 대한 반론이었다.

 

물론 이 또한 시공간을 초월한 뭇사람들의 영생에 대한 갈망이 특정 시대나 문화에 따라 왜곡된 가운데 표출된 거라고 대답하면 그만이다. 그러나 바로 이런 미묘한 차이가 타종교 안에서 기독교 진리의 흔적들을 살피려 할 때 종종 맞닥뜨리는 혼란스러움이다. “종교는 서로 다 통한다”는 말에 언뜻 수긍하면서도 왠지 어딘가 찜찜한 복음주의자들이 많은 이유이기도 하다. 그래서 타종교에 대한 기독교변증의 관심도 어디까지나 기독교와 타종교들 간의 차이점을 비교하는 데 초점을 둔다. 그 과정에서 기독교의 절대진리성을 드러내는 게 주된 목적이다.

 

“타종교에도 기독교인이 배울 만한 하나님의 계시가 있다”고 말하는 이 책 역시 구원의 문제에 관한 한 기독교의 절대진리성을 확고히 전제한다. 그러나 이제는 선교적인 차원에서도 진리와 계시의 문제에서는 타종교의 규범적 주장들을 진지하게 받아들일 때라고 주장한다. 저자가 이 책을 쓰게 된 동기에는 “타종교 가운데 있을 수 있는 진리를 그리스도인들이 존중하지 않아서 그리스도인들에게 귀기울이지 않기로 작정한 비그리스도인들이 많다”(p.16)는 문제의식이 짙게 깔려 있다.

 

일반계시와 특별계시, 그리고 ‘계시된 모형들’

 

이 책에서 저자는 타종교에도 구원을 얻기에는 불충분하지만 하나님 자신이 주신 하나님에 대한 참된 지식이 계시되어 있다고 본다. 이는 자연이나 양심처럼 모든 사람에게 접근 가능한 지식이 아니어서 일반계시는 아니지만, 죄와 죽음으로부터 구원받는 길을 제시하는 것도 아니어서 특별계시도 아니다(P.73). 저자가 타종교에 있다고 말하는 계시는 제3의 유형으로 ‘계시된 모형들’(revealed types)이라 불린다.

 

종교들이 우리에게 줄 수 있는 것은 새로운 계시가 아니라 이미 그리스도 안에 있고 성경에 묘사된 계시를 더 잘 볼 수 있도록 돕는 것인데, 저자는 이렇게 성경적 계시에 대한 해명을 도와주는 계시를 ‘계시된 모형들’이라고 명명한다(p.283). 그동안 타종교에는 구원의 진리가 없다는 면만 부각시킨 복음주의자들은 이러한 ‘계시된 모형들’에는 거의 무관심했다고 본다.

 

이렇게 전통적인 교리나 역사로서의 계시에 대한 이해에서 한 걸음 더 나아가 실재의 모든 차원을 포괄하는 다차원적인 계시 이해를 주장하는 저자는 하나님께서 때로 이스라엘과 교회 밖에 있는 사람들에게도 그분 자신을 계시하셨고, 교회가 때로 그들로부터 배웠다는 사실을 성경 속의 실제 사례들로 보여준다.

 

구약에서는 아벨, 에녹, 노아, 욥, 멜기세덱, 아비멜렉, 이드로, 라합, 룻, 나아만, 느부갓네살, 다리오, 스바 여왕을 들 수 있다. 게다가 히브리인들은 하나님을 나타내는 셈족 이름 ‘엘’(El)을 가나안 사람들로부터 차용했고, 구약의 잠언 22:17-24:22은 비히브리적인 초기 이집트의 지혜 전통으로부터 가져온 것으로 널리 알려져 있다(pp.106-116).

 

신약에서도 예수님은 이교도들의 믿음을 칭찬하시고 유대인들에게 그들의 예시로부터 배우라고 권고하셨다. 사렙다의 한 과부와 나아만, 말씀만으로도 치유를 확신한 로마 백부장과 수로보니게 여인 등이 그들이다. 사도 바울의 글에는 당대 헬라의 스토아학파와 견유학파의 특정 주제들이 가득하고, 스토아학파의 수사학과 추론의 전통을 포함해 당시에 활동하던 철학자들의 문체와 상투어들이 차용되어 있다. 이런 사례는 하나님의 백성이 자신들의 전통 밖에 있는 자들로부터 하나님에 대해 배운다는 개념이 성경에 위배되는 현상이 아님을 시사한다(pp. 117-123).

 

성경 외적 전통인 신플라톤주의의 도움을 받아 성경을 충분히 연구함으로써 하나님의 초월성과 이 세상의 불완전성을 올바로 이해했던 아우구스티누스, 아리스토텔레스의 자연 개념과 기독교의 창조 교리를 조화시켜 창조된 육체의 선함에 대한 기독교적 믿음을 소생시키고, 자연은 실재일 뿐만 아니라 선하며 그것 너머에 무언가가 있음을 보여주려고 하나님이 사용하시는 도구라고 본 토마스 아퀴나스, 그리고 르네상스 인문주의 시대에 기독교 계시의 본질과 의미를 더 잘 이해해나가는 데 이교 사상가들의 도움을 받은 장 칼뱅 등의 경우도 마찬가지다(pp.163-179).

 

하나님은 때로 타종교들 가운데 그분의 더 온전한 기독교적 실재들의 모형을 심어놓으셨다는 조나단 에드워즈의 모형론을 큰 틀로 삼아 저자는 이 책에서 불교와 도교, 유교, 이슬람교에 있는 ‘계시된 모형들’을 소개한다. 이 책에서 저자가 각 종교에서 기독교가 배울 만하다고 본 것들 중 가장 인상적인 내용 몇 가지만 요약해본다.

 

불교, 궁극적 실재를 제한하지 않는 수행

 

첫째, 불교는 기독교인들에게 궁극적 실재(기독교에서는 하나님)를 단순히 단어나 개념과 동일시하려는 위험성을 상기시켜준다. 사람들의 일반적인 경험과 사고의 견지에서 최종적 진리는 그들이 ‘공’(空)이라 칭한 것이다. 그리고 그것은 우리가 가진 개념들 너머에 있어 정확하게 규정하기 어렵다. 토마스 아퀴나스는 하나님의 본질은 이성으로 이 세상에서 이해할 수 있는 모든 것을 넘어선다는 것을 인식할 때 비로소 온전하게 파악된다고 주장했다. 하나님의 아름다우심은 우리가 가진 아름다움의 개념을 초월한다. 하나님을 우리의 유한한 이 세상 기준과 동일시함으로써 하나님을 오염시키지 않도록 주의해야 한다.

 

둘째, 초기 불교 사상가들은 어떤 것도 스스로 존재하지 않고 각 사물은 인과관계의 무한한 연결망에 의존한다고 확신했다. 이를 통해 세상은 독자적으로 존재하는 실체들의 연속이 아니라 그리스도 안에 “함께 섰느니라”(골 1:17)고 하는 성경의 주장이 더욱 뒷받침된다. 붓다의 아나타(anatta), 즉 ‘무아’(無我)의 교리는 변화하지 않는 대상은 없으며, 다른 모든 것의 기본 원리인 ‘무’(無)가 있다는 가르침이다. 그리스도인에게 모든 것은 순전히 하나님의 은혜로 시시각각 유지된다. 이 개념은 요즘 문화의 소유욕 강한 개인주의와 그것이 갖는 전적으로 자율적이고 비관계적인 자아에 대한 환상을 교정하는 건강한 수단이 될 수 있다.

 

셋째, 중국 선종(선불교)에서는 사람이 일상생활의 모든 세부적인 일 속에서 궁극적 실재를 발견할 수 있다고 가르쳤다. 세상에서 물러날 필요가 없으며, 모든 사람은 항상 우리 앞에 있는 실재를 보는 것을 배울 필요가 있다. 지금도 하나님을 경험하기 위해 많은 것을 할 필요가 없다. 해야 할 것은 스스로를 잠잠하게 하고 고요해지는 것이다.

 

도교, 무위 사상 속에 녹아 있는 연합의 도

 

서양에서는 노자와 장자가 저술한 <도덕경>과 <장자>로 인해 종교적 도교보다 철학적 도교가 더 익숙하다. 도교의 ‘무위’(無爲) 사상은 난해한 개념으로 “아무것도 하지 않는다”는 뜻이다. 즉 사람은 행동을 취하지 말아야 하며, 도가 행동하기를 기다려야 한다는 뜻이다. 행동의 부재가 아니라 행동 자체에 애착을 보이지 않으면서 행동하는 것이다. “성인은 작위하지 않으므로 실패하지 않으며, 집착하지 않으므로 잃지 않는다. 성인은 결코 큰 것을 행하려 하지 않음으로써 능히 그 큰 것을 성취한다”(도덕경).

 

장자에게 덕의 삶은 계산의 결과물이 아니라 영적 연합의 산물이다. “행복은 찾기를 멈출 때 비로소 찾는 것이다”(장자). 도와 연합한 무사무욕으로 인해 자아의 끔찍한 요구로부터 해방된다. 성령이 들어와 사시게 하면 자신이 첫째가 되고 인정받으려는 자아의 강한 욕구에 복종할 필요가 없다. 도교 사상가들이 무정한 도의 작용을 신뢰함으로써 만족을 깨달았다면, 기독교인들은 자신들을 위해 고난을 겪으심으로써 그분의 돌보심을 친히 보여주신 하나님을 더 많이 신뢰할 수 있다.

 

유교, 덕의 본질적 가치에 헌신하는 기쁨

 

공자에게 하늘은 그가 지닌 덕의 저자이자 기도의 대상이었다. 인간의 본성에 대한 유교의 교리는 실제적 선함보다 잠재적 선함을 강조한다. 인간은 네 가지 덕의 ‘싹’, 즉 측은하게 여기는 마음, 부끄러워하고 미워하는 마음, 사양하는 마음, 시비(是非)를 가리는 마음을 가지고 태어난다고 단언한다. 그러나 맹자에 따르면, 이는 단지 사람이 선해질 수 있는 가능성이 있으며 또 사람들이 나쁘게 된다면 그들의 타고난 자질 때문이 아니라는 의미다. 야고보는 사람이 죄를 범할 때 하나님이나 원래의 본성이 아니라 자신의 욕망을 탓해야 한다고 말했다(약 1:13-16).

 

유교에서 덕을 추구하는 것은 외적 보상 때문이 아니라 그것의 본질적 가치 때문이었다. “거친 밥과 마실 물이 도를 따를 때 얻는 전부라 해도 행복하다. 현자들은 부유하고 유명할 때도 지나칠 수 없고, 가난하고 유명하지 않을 때도 목적에서 빗나갈 수 없다. 모든 사람이 다 좋아하는 사람이 되는 것보다 나쁜 사람들이 싫어하는 사람이 되는 것이 더 낫다”(논어). 맹자는 스스로에게 참되게 자기반성을 하는 것보다 더 큰 기쁨을 누린 적이 없다고 했다. “네가 대접받기 원하는 만큼 다른 사람을 대접하도록 최선을 다하라. 그러면 너는 이것이 인(仁)에 도달하는 가장 빠른 길임을 알 것이다”(맹자).

 

이슬람교, 공공 광장에서 강조되는 종교의 미덕

 

사심 없는 사랑에 대한 수피즘(이슬람교 신비주의의 한 운동)의 전통은 지옥에 대한 두려움이나 천국에 대한 소망 때문이 아니라 하나님 그분 자체로 그분을 사랑한다는 것을 보여준다. 9세기 이후 수피즘은 전 세계에 걸쳐 대중적 이슬람교의 기초가 되었다. 무함마드는 궁극적인 미덕은 하나님의 뜻에 대한 복종이며, 이것이 참된 종교의 본질이라고 말한다. 무슬림에게 기도의 핵심은 예배이며, 간구를 주로 하는 기도 생활은 불균형적이고 자신에게만 몰두하는 것이라고 본다.

 

또한 이슬람교를 통해 종교와 관련 없는 공공 광장은 있을 수 없는 이유를 이해할 수 있다. 무슬림들은 인간의 마음은 교정할 수 없을 정도로 종교적이라고 믿는다. 참된 하나님을 예배하거나, 아니면 다른 어떤 것을 신으로 예배(우상숭배)할 것이다. 무신론자조차도 종교적이며, 아마도 자연이나 행복, 가족, 또는 자아를 신으로 예배할 것이다. 종교를 진리에 대한 객관적 근거가 없는 자유로운 담화로 이해하면서 종교와 도덕을 여론에 내맡기는 처참한 서구의 현재 상태와 신정(神政)을 주장하는 세속적 이슬람교 사이에서 어떻게든 길을 찾아야 한다.

 

다문화 시대에 필요한 변증전도적 접촉점

 

칼 바르트나 본회퍼의 전통에서는 인간이 만든 종교나 종교성 자체가 하나님의 계시에 대립한다. 그러나 기독교를 종교의 하나가 아니라 창조질서 그 자체로 본다면, 타종교에도 ‘참 빛 곧 세상에 와서 각 사람에게 비추는 빛’(요 1:9)이 작용한다. 그래서 타종교에도 진리의 조각들이 있지만, 왜곡되고 부족하고 미완성의 형태로 존재한다. 예수님을 통한 온전한 계시인 기독교를 만나지 않고는 구원도 진리도 완성되지 않는다.

 

구원과 진리의 문제에서 기독교의 최종적인 유일성은 예수님의 구속을 중심으로 한 독특한 역사성에서 타종교의 추종을 불허한다. 그러나 애초부터 하나님은 자연세계를 창조주와 성경의 영적 진리를 드러내도록 만드셨다. 이 공통분모가 타종교의 긍정적인 면들을 이해하고 타종교인들에게 복음을 전할 때 그들의 가치관을 존중하고 그들의 신앙에 공감해주는 데 유의미한 접촉점이 된다.

 

실제로 타종교인들은 하나님과 구원의 관계를 맺지 않고도 하나님의 진리에 대해 많은 것을 알 수 있고, 어떤 강조점에 대해서는 기독교인들보다 더 진지한 충성과 열심을 보이기도 한다. 이 사실을 인정하고 타종교인들을 한 특정 종교의 대변자나 이교도의 한 사람으로 보기보다 하나님의 형상을 가진 인격적인 한 개인으로 존중하는 겸손하고도 열린 태도가 필요하다. 이는 지금과 같은 다문화, 다종교 시대에 특히 더 요긴하며, 인문학적 통찰의 중요성이 강조되는 이 시대의 흐름 또한 지혜롭게 활용하는 사려 깊은 변증전도적 접근이 될 수 있다.

 

-더 깊은 탐구를 위한 연관 질문

 

1. 타종교에도 기독교인이 배울 만한 하나님의 계시가 있다는 주장에 대해 거부감이 든다면 그 이유는 무엇일까? 타종교에 진정한 의미에서의 구원은 없어도 하나님의 계시는 있고, 선교적 차원에서 타종교의 진리를 인정하자는 주장은 어떤 면에서 받아들일 만한가?

 

2. 성경에 등장하는 인물이나 교회사의 사례들로 볼 때 하나님의 백성이 자신들의 전통 밖에 있는 자들로부터 하나님에 대해 배운다는 개념이 성경에 위배되지 않는다면, 현재 신앙인들의 삶에는 이와 관련된 경험으로 어떤 사례를 들 수 있을까?

 

-더 깊은 탐구를 위한 관련 도서

 

<무례한 기독교>(리처드 마우, IVP)

 

오늘날과 같은 다원주의 사회에서는 과격한 십자군식 승리주의나 진리의 잣대가 없는 무분별한 포용주의를 지양하고 ‘신념 있는 시민교양’(convicted civility)을 개발하여 각자가 공적 영역에서 하나님의 나라와 의를 지혜롭게 드러내는 데 더욱더 신중해야 한다고 권유하는 책.

 

“예수님이 창녀와 세리를 ‘용납하셨을’ 때 그분이 그들이 성적 혹은 경제적 행위를 묵과하신 것은 아니다. 그분은 그들의 불미스러운 행위에도 불구하고 그들을 사랑하셨다. 하나님의 신실하고 창조적인 자녀로서 살 수 있는 잠재력이 그들에게 있다고 인정하셨던 것이다. 그것이 바로 우리가 다른 사람에게 마땅히 보여야 할 용납의 자세다. 타인이 하는 어떤 행위든 포용하는 상대주의적 태도는 선의를 베푸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진정한 기독교적 교양이 아니다”(p.28).

 

<인도로 간 붓다: 그의 삶과 가르침>(암베드카르, 청미래)

 

내세가 아닌 현세에서의 인간 구원의 진리와 그 실천을 강조한 붓다의 삶과 그의 가르침에 대한 입문서. 후대의 대중적인 불교가 붓다를 신격화하면서 왜곡시킨 가르침과 붓다의 실제적인 가르침의 차이를 분별하게 해준다.

 

“붓다는 영혼을 믿었는가? 그는 믿지 않았다. 그의 영혼설은 아나타, 즉 무영혼설로 불려지고 있다. 붓다의 영혼 부정의 논거는 그의 신의 존재 부정 논거와 동일했다. 그는 영혼의 존재 여부에 관한 논의도 무익하다고 주장했다. 그는 영혼 신앙은 신 신앙과 마찬가지로 정견(正見)을 함양하는 데에 유해할 뿐만 아니라 신 신앙 이상으로 미신의 온상이라고 지적했다. 붓다는 영혼의 환생은 믿지 않고 물질의 환생을 믿었다”(p.188, 235).

 

-안환균, <기독교 팩트체크>(두란노)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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