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AFE

선택과 예정론

칼빈 그리고 칼빈...

작성자꿀꿀|작성시간15.05.05|조회수154 목록 댓글 0

< 에피소드 1 >

칼빈,, 그리고 칼빈... 내가 들은 칼빈은 젊은 천재,,
어둠과 혼란의 세상에 홀연이 개종하고 나타나
영원할 진리의 정수를 퍼올려 교회와 시대를 이끈 하나님의 사람..

제네바의 한 도시를 정하여 믿음과 삶의 신앙적 규율을
생명처럼 불어넣고 그 자신 맨 먼저 소명의 짐을 지고
정신과 실천에서 보석같은 빛을 냈다는 사람..

< 에피소드 2 >

도서관에서 책 한권을 읽었는데 우리나라에서 번역된지
3년정도 된 칼빈에 관련된 "폭력에 대항하는 양심"이라는 책..
거기서 얼핏 스쳐 숨어버린 다른 칼빈을 보게 되었다.
다른 칼빈의 뒷모습,, 자신과 다른 교리를 주장했다는 이유로
세르베투스라는 신학자를 카톨릭의 종교회의에 넘기다가 뜻대로 되지 않
자 제네바에 숨어 들어온 그를 잡아 자신의 권위를 이용하여 화형시켜 버
렸는데. 그것은 개혁교회 역사가운데 가장 어두운 부분으로 기록되어 있다.

후에 칼빈은 자신의 저서 "기독교 강요" 교정판에서
"신앙과 교리가 다르다는 이유로 사람을 죽여서는 안된다"는
항목을 슬그머니 삭제해 버렸고. 또한 경건한 신학자인 카스텔리오가
세르베투스에 대한 문제를 제기하자 그마저 사형시키려 하였는데,
거의 사형결정이 내려지는 상황에서 카스텔리오는 탈진하여 죽게 되었다.

이 책은 세르베투스에 대한 전기물의 성격을 띤 책이기에 부분부분
저자의 흥분된 감정과 주관이 혼합되어 있고 많은 사료들을 근거로 했다지
만 그것들은 충분히 재검토되어야 하는 문제점이 있음을 직시한다.
그러나 내가 느끼는 점은 책에서 말하는 그런 양심의 자유의 문제나
종교라는 이름으로 가해지는 폭력에 대한 것보다...

칼빈의 치리방식에 대한 것이다. 당시 칼빈의 지도아래 제네바에서는
종교적인 이유로 수십명이 사형을 당하고 추방을 당했다.
제네바 시의회의 기록을 통해 보면 칼빈은 많은 제도적 방법으로 개혁을 완성하려 하였다.

예를 들어, 예배에 빠진 자를 감금한다든지, 카드놀이를 하는 자를
감금하고, 케익에 어떤 화려한 모양을 넣었다고 해서 이틀을 금식하도록
한다든지.. 무수히 많은 조항들과 그에 따른 감시와 교회의 제제가 행해졌다.

제도와 사회적 권위를 통하는 방법은 많은 사람들을 효과적으로 조절하기
에 적절하다. 상하 조직을 세우고, 통일된 일원화의 정치력을 통하면 대중
을 다스리기 쉬워진다. 복종의 계율과 징계를 적절히 사용하여 반대자를
추방하고 나면 모든 사람들은 거기에 순응한다. 카톨릭이 그랬던 것처럼.

로마의 국교화 이후 교회 안에 많은 사람들이
무수히 들어올 때 많은 경우 그들은 제도를 통해 조절되었고
교리는 절차적으로 가르쳐지고 신앙은 세례라는 이름으로 정당하게 되었다.
물론 그 일을 수행하는 자들은 대부분 믿음과 성실로 행하였을지 모른다..
하지만 그들은 몰랐다. 가장 인간의 가장 좋은 것들도 하나님의 원수가 된다는 것을..
그 때부터 교회는 제도화되고 철학화되고 결국 인간화되었다.

칼빈이 행한 많은 일들 중에는 "믿음을 가진 인간"이 할 수 있는
선한 일들이 방대하게 나타난다. 그러나 그 일들이 위에서 말한 것처럼
외적으로 행해졌다면 그것은 심각한 영적 문제가 아닐 수 없다.
이러한 문제는 구약 뿐만 아니라 신약 교회 2천년 안에 계속되었던 문제이
고 오늘날의 교회에 더욱 팽배해진 문제이다.

인간의 선한 의지와 윤리와 문화의 결과가 아름답다 하여
신앙이라는 이름으로 포장되면 그 안에서 진정한 생명은 썩게 된다.

< 에피소드 3 >

2000년 8월에 출판되어 반향을 불러 일으켰던 책 "기독교 죄악사"가 있다.
저자는 이대 교목으로 계신 조찬선이란 목사님이시다.
(필자는 그 분을 개인적으로 전혀 알지 못한다.)
책 내용 중에 칼빈에 대한 내용이 있기에 관심 있게 들여다 보았다.
역시 그 책에서도 내가 위에서 지적했던 비슷한 내용을 지적하고 있었다.

종교법원(Consistory Court)을 중심으로
13.000여명의 제네바 시민을 신정으로 다스리면서
세례식 때 웃었다고 사흘을 감방에 가두고
예배에 불참하면 벌금형을 내리고
아침식사 때 파이를 먹었다고 사흘간 물과 빵만 먹게 하고
눈먼 바이올린 연주자가 춤곡을 연주하였다고 추방하고
카드놀이 한 사람의 목에 카드를 걸고 기둥에 묶어 두고
예정설을 반대한다고 도로에서 채찍질하고 화형시키고
술취해 칼빈을 욕했다고 쇠꼬챙이로 혀를 찌르고 추방시키고
자크 그뤼에라는 사람은 칼빈을 위선자라고 했다고 고문후 사형시키고
칼빈은 종교법원을 통해 4년간 58명의 무고한 시민을 사형 또는 화형시켰
다. 그들 대부분은 단지 칼빈의 신학이나 신정에 반대한 이유 때문에 죽었
다. 제네바에서 칼빈에게 반대하는 것은 하나님의 종에게 반대하는 것이며
곧 하나님께 반대하는 것과 같은 것이었다.

칼빈은 천주교가 500년 이상 거의 1000년이 되어 집행한 화형을
단 십수년 만에 개신교의 이름으로 자행하게 만들었다.
그래서 당시 제네바에서 칼빈에게 반대하는 것은
교황에게 반대하는 것보다 무서운 일이 되었다.
이 내용들은 모두 제네바 시에 남아 있는 종교법원의 기록에 의한
것들이며 역사적 사료로 증거된 내용들이다.

나는 처음에는 누구나처럼 칼빈을 존경했었지만 이러한 사실을 알게 되면서
과연 칼빈이 성령을 따르는 사람이었나
인간의 지혜를 따르는 사람이었나 하는 회의를 갖었었다.

그런데 조찬선 목사님은 "기독교 죄악사" 하권 114페이지에서
칼빈을 가리켜 "구원받지 못한 영혼"이라는 발언까지 하고 있다.
칼빈은 그리스도를 따르고 믿었던 카스텔리오나 그뤼에, 세르베투스 등
수십명의 사람들을 단지 신학이나 종교상의 이유로 고문, 처형, 화형시킨
"살인자"이기 때문에 성도일리 없다는 것이다.

그 옛날 예수님이 유대 종교지도자들에 의해서 죽임을 당한 것과
힘없는 카스텔리오나 그 밖의 사람들이
신학적인 차이 때문에 칼빈에 의해 죽임을 당한 것이 다른 것인가?

< 에피소드 4 >

사실 개혁주의 신학자들도 대부분 이 일들을 알고 있다.
그러나 일반적인 대세는 칼빈의 어두운 면들이
그 시대의 상황-종교적 충돌에 의한 생명의 위협과, 폭력과
전쟁이 휘몰아 치는 상황에서 기독교 신앙을 위한
어쩔 수 없었던 일이었다고 말한다. 세르베투스의 화형에 대해서도
칼빈이 화형을 시키지 않기 위하여 시의회를 설득했다고 변론한다.

기세론자들은 칼빈이 어거스틴과 더불어 대표적인 문화의 변혁자라고 본다.
그러나 칼빈이 원했던 것은 문화의 변혁이 아니라 카톨릭보다 철저한
신정정치 곧 "국가적 권력의 교회"이었음을 알아야 한다.
문화는 단지 그것을 이루는 권력의 방편이었을 뿐이고...

칼빈은 제네바를 외적으로 다스렸다. 곧 성경의 표현대로 육적으로 다스렸
다. 칼빈 이후 종교개혁이 유럽대륙에서 영국과 신대륙으로, 그리고 식민
지 국가들로 확산되었지만 그에 따르는 외적 폭력과, 살인과, 침략들이 개
신교의 이름으로 자행되었다는 것을 간과할 수 없다.
우리가 숭고한 신앙으로 이해하는 청교도들도 아메리카 원주민들을
학살하고, 그들의 보금자리를 빼앗고, 온갖 만행을 저지른 일에
앞장섰다는 사실을 인식해야 한다. 그것은 자신만이 성경을 올바로 해석
할 수 있고, 자신만이 정통이요, 그에 반대하는 자는 다 단죄하고 멸하려
했던 칼빈의 배타적 우월주의의 연장선상에 있는 것들이다.

이 글을 통해 기독교를 너무 부정적으로 전한다든지,
혹은 개혁주의에 대하여 환멸을 느끼게 하는 것이 필자의 의도가 아니다.
필자가 굳이 이런 어두운 글을 드러내는 것은 신앙의 실체를 바로 보고
평범함 이상의 철저한 믿음의 깊이에 들어가지 않으면
다른 사람에게 속고 나 자신에게 속겠기에.
그리고 역사와 교회의 실패를 바로 보지 않으면
내가 비평하는 기세론자보다 더 못한 사람이 되겠기에
믿음의 지각으로 이 글을 쓴다.

출처: www.cresal.net    

 

다음검색
현재 게시글 추가 기능 열기
  • 북마크
  • 공유하기
  • 신고하기

댓글

댓글 리스트
맨위로

카페 검색

카페 검색어 입력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