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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택과 예정론

[스크랩] 원전강해, 구원(11) “예정론, 무엇이 문제인가(10)”

작성자소망을|작성시간16.06.11|조회수40 목록 댓글 0

Veri-Chip이 짐승의 표일까?   아닐까?

격론이 되고 있습니다.

단순히 격론으로만 끝날 문제가 아닙니다.

생명이 걸린 문제이기 때문입니다.

베리칩의 보편화는 이제 문 앞에 이르렀습니다.

보편화되면,

모든 사람들은 조지 오웰이 쓴 소설 <1894>에 나오는,

빅브라더에게 감시되는 시스템 속에서 살아가야만 합니다.

 

(13:16-17) 그가 모든 자 곧 작은 자나 큰 자나 부자나 가난한 자나 자유인이나

종들에게 그 오른손에나 이마에 표를 받게 하고 누구든지 이 표를 가진 자

외에는 매매를 못하게 하니 이 표는 곧 짐승의 이름이나 그 이름의 수라

 

(14:11) 짐승과 그의 우상에게 경배하고 그의 이름 표를 받는 자는 누구든지 밤낮

쉼을 얻지 못하리라

 

(14:9-11) 만일 누구든지 짐승과 그의 우상에게 경배하고 이마에나 손에 표를

받으면 그도 하나님의 진노의 포도주를 마시리니 그 진노의 잔에 섞인 것이

없이 부은 포도주라 거룩한 천사들 앞과 어린 양 앞에서 불과 유황으로 고난을

받으리니 그 고난의 연기가 세세토록 올라가리로다

 

 

Veri -Chip 논쟁은,

단순히 베리칩 자체의 문제가 아닙니다.

그 논쟁의 뿌리는 구원관에 있습니다.

칼빈주의 개인 예정론의 관점에서 보면 종말적 상황이 이해가 안됩니다.

어떻게 창세 전에 예정된 사람이,

단순히 자신의 선택으로 베리칩을 받았다고,

구원이 상실될 수 있느냐는 것입니다.

 

20113,

재미고신총회 북서노회는,

베리칩에 관한 본 노회의 성경적 입장이란 성명을 통해,

베리칩은 짐승의 표가 아니라고 주장했습니다.

그 이유가 무엇이었을까요?

그 뿌리는 개인예정론에 있었습니다.

 

예수를 믿어도 베리칩을 받으면 그 구원을 상실할 수 있다는 주장은,

 오직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으로 말미암는 구원에 정면으로 대치하며,

 외부의 어떤 힘을 인하여 구원을 상실할 수 있다고 말하는 것은,

 십자가 피의 공로를 사단의 능력이 압도할 수 있다는 잘못된 가르침이다

- 재미고신총회 북서노회

 

 

20117,

OC(오렌지카운티)교협도 다음과 같이 성명을 발표했습니다.

 

베리칩에 관한 오해로 인해 교계와 교회, 성도들에게 영적 혼란을 주며 두려움을

 주고 있음에 주목해 왔다.

  베리칩이 요한계시록에 나오는 짐승의 표라는 주장은 전혀 사실무근이며 무지한

 주장이요, 성도들로 하여금 잘못된 종말론을 심어 주려는 사탄의 계략이다.

 특히 구원은 베리칩을 받고 안 받고의 문제가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를 믿느냐

 안 믿느냐로 결정되는 것이기 때문에, 베리칩을 짐승의 표로 보고 베리칩을 맞으면

 구원을 잃는 것으로 호도하는 것은 미혹의 영에 사로잡힌 잘못된 성경해석이요,

  이단성 해석임을 천명한다

 

 

모두 베리칩을 구원의 문제와 연관시키고 있습니다.

종말의 문제가 구원에 뿌리를 두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그를 믿는 것이 구원의 핵심이기에,

베리칩이 그 구원의 의미를 퇴색시키거나 무효화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종말을 보는 시각의 문제는 결국 구원관에 의해 결정됩니다.

한번 받은 구원은 결코 상실되지 않는다는 관점에서 짐승의 표는,

인간의 선택에 의해 구원이 상실되므로 상징일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나,

구원은 상실될 수 있다라는 관점에서 보면 짐승의 표는,

우리의 선택에 의해 구원을 상실할 수도 있는 결정적인 것입니다.

 

 

 

상실할 수도 있는 구원

어떤 분들은 이 말에 격분을 일으키기도 한다.

그러나,

그것이 성경의 가르침이다.

 

성경은...

하나님의 구원하시는 은혜를 누렸던 사람도,

불순종이나 나태함으로,

구원을 잃어버린바 될 수 있다고 가르친다

 

(고전9:23-27) “내가 복음을 위하여 모든 것을 행함은 복음에 참여하고자 함이라.

운동장에서 달음질하는 자들이 다 달릴지라도 오직 상을 받는 사람은

한 사람인 줄을 너희가 알지 못하느냐 너희도 상을 받도록 이와 같이

달음질하라.

이기기를 다투는 자마다 모든 일에 절제하나니 그들은 썩을 승리자의 관을 얻고자 하되 우리는 썩지 아니할 것을 얻고자 하노라.    그러므로 나는 달음질하기를 향방 없는 것 같이 아니하고 싸우기를 허공을 치는 것 같이 아니하며 내가 내 몸을 쳐 복종하게 함은 내가 남에게 전파한 후에 자신이 도리어 버림을 당할까 두려워함이로다

(/ 어떤 분은 바울이, 구원이 아닌 사명을 상실할 수 있다는 뜻으로 한 말이라고 합니다. 아닙니다구원을 말하고 있습니다. 앞으로 상세히 다룰 것입니다)

 

(5:4) “율법 안에서 의롭다 함을 얻으려 하는 너희는 그리스도에게서 끊어지고

은혜에서 떨어진 자로다.

우리가 성령으로 믿음을 따라 의의 소망을 기다리노니

(/ “너희는 갈라디아 교인들입니다)

 

(2:12) 두렵고 떨림으로 너희 구원을 이루라

 

(10:26-29) “우리가 진리를 아는 지식을 받은 후 짐짓 죄를 범한즉  다시 속죄하는

제사가 없고 오직 무서운 마음으로 심판을 기다리는 것과 대적하는 자를 태울 맹렬한 불만 있으리라.

모세의 법을 폐한 자도 두세 증인으로 말미암아 불쌍히 여김을 받지 못하고 죽었거든 하물며 하나님의 아들을 짓밟고 자기를 거룩하게 한 언약의 피를 부정한 것으로 여기고 은혜의 성령을 욕되게 하는 자가 당연히 받을 형벌은 얼마나 더 무겁겠느냐 너희는 생각하라

 

 

성경에 기록된 많은 실례들은,

인간의 불신과 반역, 고의적인 불경에 의하여,

인간을 구원하시려는 성령의 역사가,

거절되거나 소멸될 수 있음을 입증하고 있다.

 

(63:8-10) “그가 말씀하시되 그들은 실로 나의 백성이요 거짓을 행하지 아니하는

자녀라 하시고 그들의 구원자가 되사 그들의 모든 환난에 동참하사 자기 앞의 사자로 하여금 그들을 구원하시며 그의 사랑과 그의 자비로 그들을 구원하시고 옛적 모든 날에 그들을 드시며 안으셨으나 그들이 반역하여 주의 성령을 근심하게 하였으므로 그가 돌이켜 그들의 대적이 되사 친히 그들을 치셨더니

 

(7:51) “목이 곧고 마음과 귀에 할례를 받지 못한 사람들아 너희도 너희 조상과 같이

항상 성령을 거스르는도다

 

(살전5:19) “성령을 소멸(σβέννυτε extinguish, suppress)하지 말며

 

(6:4-6) 한 번 빛을 받고 하늘의 은사를 맛보고 성령에 참여한 바 되고 하나님의

선한 말씀과 내세의 능력을 맛보고도 타락한 자들은 다시 새롭게 하여 회개하게 할 수 없나니 이는 그들이 하나님의 아들을 다시 십자가에 못 박아 드러내 놓고 욕되게 함이라

 

(고후6:1-2) “우리가 하나님과 함께 일하는 자로서 너희를 권하노니 하나님의 은혜를

헛되이 받지 말라.   이르시되 내가 은혜 베풀 때에 너에게 듣고 구원의 날에 너를 도왔다 하셨으니 보라 지금은 은혜 받을 만한 때요 보라 지금은 구원의 날이로다

 

 

 

하나님의 은혜는,

절대 거절될 수 없다는 칼빈의 가르침(불가항력적 은혜)도,

어거스틴에게서 물려받은 사상이다.

 

어찌하여 부르심을 받은 자들이 모두 은총에 순종하지 않는가?

  어거스틴은 이에 대하여 예정의 교리를 가지고 답변하였다.

  영원 전부터 어떤 사람은 구원을 받도록 예정되었으며, 어떤 사람들은 형벌을

  받도록 예정되었다.

  이처럼 예정된 자들의 수는 고정되어 있고 변경시킬 수 없으며, 또한 서로 교체될  

  수도 없다.”

                                                              Philip Schaff, 234

 

하나님의 은혜를 거절하거나 받아들이는 근거마저도,

예정에 돌림으로써,

성경에 맞지 않는 주장을 한 셈이다.

 

 

 

아르미니우스 발견한 것은 다음과 같다.

(아르미니우스가 옳은 것을 말함이 아니다. 비교적 옳다는 것이다)

 

성경에 무조건적인 선택이나 절대적인 예정으로 생각되는 표현이나 실례들이 있다.

대표적인 것이 어거스틴과 칼빈이 예정론의 뿌리를 내린 9장이다.

그러나 사도 바울이 열거한 야곱과 에서, 애굽왕 바로, 이스라엘 민족, 진흙과 토기장이의 실례들은 하나님께서 누구는 구원하고 누구는 멸망 받도록 작정하셨다는 것을 설명하는 개인 예정의 문맥이 아니다.

사명과 역할을 위한 선택,

그것은 하나님께서 창세 전에 예정하신 절대적인 구원의 계획을 이루는데 필요한 사람들의 역할과 사명을 설명하는 문맥에서 쓰여진 것이다.   즉 개인구원 예정이 아니라 사명과 역할을 위한 예정인 것이다.

 

9장은 아르미나우스에게는,

사울을 바울로 변화시킨 다메섹이었다.

그리스도인을 핍박했던 사울이 다메섹에서 그리스도의 제자 바울이 되었으니,

그렇게 불러도 될 법하다.

한 때 베자의 제자였으며 철저한 칼빈주의자였던 그가,

9장에서 빛을 받아 변했다.

다메섹처럼...

그 후 오히려 칼빈과 베자를 맹공한다.

 

 

아르미니우스가 칼빈주의자였을 때 롬9장은,

그에게는 칼빈의 개인구원예정을 입증하는 성경이었다.

그러나,

그가 빛을 받은 후,

9장은 개인구원예정을 반박하는 것이 되었다.

그는 롬9장이 사역예정이었음을 발견한 것이다.

우리도,

다메섹 이전이 아니 다메섹 이후의 눈으로 이 부분을 다시 읽어보자.

 

(9) “내가 그리스도 안에서 참말을 하고 거짓말을 아니 하노라 나에게 큰 근심이

있는 것과 마음에 그치지 않는 고통이 있는 것을 내 양심이 성령 안에서 나와 더불어 증언하노니 나의 형제 곧 골육의 친척을 위하여 내 자신이 저주를 받아 그리스도에게서 끊어질지라도 원하는 바로라.

그들은 이스라엘 사람이라 그들에게는 양자 됨과 영광과 언약들과 율법을 세우신 것과 예배와 약속들이 있고 조상들도 그들의 것이요 육신으로 하면 그리스도가 그들에게서 나셨으니 그는 만물 위에 계셔서 세세에 찬양을 받으실 하나님이시니라 아멘.

그러나 하나님의 말씀이 폐하여진 것 같지 않도다.   이스라엘에게서 난 그들이 다 이스라엘이 아니요 또한 아브라함의 씨가 다 그의 자녀가 아니라 오직 이삭으로 부터 자라야 네 씨라 불리리라 하셨으니 곧 육신의 자녀가 하나님의 자녀가 아니요 오직 약속의 자녀가 씨로 여기심을 받느니라. 약속의 말씀은 이것이니 명년 이 때에 내가 이르리니 사라에게 아들이 있으리라 하심이라. 그뿐 아니라 또한 리브가가 우리 조상 이삭 한 사람으로 말미암아 임신하였는데 그 자식들이 아직 나지도 아니하고 무슨 선이나 악을 행하지 아니한 때에 택하심을 따라 되는 하나님의 뜻이 행위로 말미암지 않고 오직 부르시는 이로 말미암아 서게 하려 하사 리브가에게 이르시되 큰 자가 어린 자를 섬기리라 하셨나니 기록된 바 내가 야곱은 사랑하고 에서는 미워하였다 하심과 같으니라

                       (이 부분은 예정론, 무엇이 문제인가(3)을 참조하라)

그런즉 우리가 무슨 말을 하리요 하나님께 불의가 있느냐

그럴 수 없느니라.

모세에게 이르시되 내가 긍휼히 여길 자를 긍휼히 여기고 불쌍히 여길 자를 불쌍히 여기리라 하셨으니 그런즉 원하는 자로 말미암음도 아니요 달음박질하는 자로 말미암음도 아니요 오직 긍휼히 여기시는 하나님으로 말미암음이니라.

성경이 바로에게 이르시되 내가 이 일을 위하여 너를 세웠으니 곧 너로 말미암아 내 능력을 보이고 내 이름이 온 땅에 전파되게 하려 함이라 하셨으니 그런즉 하나님께서 하고자 하시는 자를 긍휼히 여기시고 하고자 하시는 자를 완악하게 하시느니라

네가 내게 말하기를 그러면 하나님이 어찌하여 허물하시느냐 누가 그 뜻을 대적하느냐 하리니 이 사람아 네가 누구이기에 감히 하나님께 반문하느냐 지음을 받은 물건이 지은 자에게 어찌 나를 이같이 만들었느냐 말하겠느냐

토기장이가 진흙 한 덩이로 하나는 귀히 쓸 그릇을, 하나는 천히 쓸 그릇을 만들 권한이 없느냐 만일 하나님이 그의 진노를 보이시고 그의 능력을 알게 하고자 하사 멸하기로 준비된 진노의 그릇을 오래 참으심으로 관용하시고 또한 영광 받기로 예비하신 바 긍휼의 그릇에 대하여 그 영광의 풍성함을 알게 하고자 하셨을지라도 무슨 말을 하리요 이 그릇은 우리니 곧 유대인 중에서뿐 아니라 이방인 에서도 부르신 자니라.

호세아의 글에도 이르기를 내가 내 백성 아닌 자를 내 백성이라, 사랑하지 아니한 자를 사랑한 자라 부르리라.    너희는 백성이 아니라 한 그 곳에서 그들이 살아 계신 하나님의 아들이라 일컬음을 받으리라 함과 같으니라.

이사야가 이스라엘에 관하여 외치되 이스라엘 자손들의 수가 비록 바다의 모래 같을지라도 남은 자만 구원을 받으리니 주께서 땅 위에서 그 말씀을 이루고 속히 시행하시리라 하셨느니라. 또한 이사야가 미리 말한 바 만일 만군의 주께서 우리에게 씨를 남겨 두지 아니하셨더라면 우리가 소돔과 같이 되고 고모라와 같았으리로다 함과 같으니라.

그런즉 우리가 무슨 말을 하리요 의를 따르지 아니한 방인들이 의를 얻었으니 곧 믿음에서 난 의요 의의 법을 따라간 이스라엘은 율법에 이르지 못하였으니 어찌 그러하냐 이는 그들이 믿음을 의지하지 않고 행위를 의지함이라.  부딪칠 돌에 부딪쳤느니라.   기록된 바 보라 내가 걸림돌과 거치는 바위를 시온에 두노니 그를 믿는 자는 부끄러움을 당하지 아니하리라 함과 같으니라

 

이와 같이,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을 선택하신 것은,

이스라엘 구원 자체가 아니라,

이스라엘을 통해 세상을 구원하기 위해서였다.

따라서,

이스라엘은 사명 공동체인 것이다.

그것이 그들의 부르심의 목적이었다.

 

사도 바울은

이스라엘의 사명과 역할이,

예정과 선택의 목적이었음을 분명히 하기 위해,

용도(用途)에 적절하게 쓰이기 위해 진흙으로 만들어지는 토기와

그것을 자기가 원하는 용도에 맞게 마음대로 만들 수 있는 주권을 가진 토기장이의 실례를 들어 설명한 것이다 (9:19~24)

 

사도 바울 자신도,

이방인에게 복음을 전할 사명을 위해 부름받은 택한 그릇이었으며(9:15),

이러한 선택에도 불구하고,

내가 내 몸을 쳐 복종하게 함은 내가 남에게 전파한 후에 자기가 도리어 버림이 될까 두려워함이로다(고전9:27)고 고백하였다.

사도 바울이 구원을 받은 것은,

끝까지,

예수 그리스도를 자신의 구주로 믿고 순종하며 사명에 충실한 결과였지,

구원받도록 예정된 선택의 기계적인 결과가 아니었다.

 

 

누구도,

당신의 구원을 책임지지 않습니다.

크고 두려운 구원을,

하나님께 책임 지우지 마십시오.

그것은...

당신을 너무 무책임한 사람으로 만드는 것입니다.

창세 전에 갇혀

종말적으로 다가온 자발적인 선택의 갈림길에서,

그가 이미 하셨으니...”라고 손을 씻고 있다가,

무책임의 결과를 고스란히 맞을 수 있음을 경고하고 싶습니다.

 

하나님께서,

당신의 구원을 위해 열어 놓으신,

십자가를 통한 구원은,

당신이,

자아를 죽이고, 자신을 부인하고,

날마다 죽고,

쳐서 복종하며,

두렵고 떨림으로,

성령의 열매를 맺어가는 길입니다.

이 좁은 길을 가는 것을

구원을 이루어가는 것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이 길을...

당신은 걷고 있습니까?

 

 

 

예정론, 무엇이 문제인가(11)는 다음에 계속됩니다.

                                                   주께서 읽는 자들의 눈을 여시길....

 

 

예정론, 무엇이 문제인가(11)”예정론, 무엇이 문제인가의 마지막 부분입니다.

 이 부분을 다룬 후 구원원전강해가 시작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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