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경에 예정에 관한 말씀이 있다. 칼빈도 예정을 말한다. 칼빈의 예정론은 교리의 기초가 되었고 거기서 모든 건물이 세워졌다. 그렇다면... 칼빈의 예정론이 성경의 예정론인가? 칼빈주의 예정론의 “태풍의 눈”은 바로 이 점이다. 칼빈주의는 이 질문에 대해 “당연히”라고 할 것이다? “칼빈만큼 성경을 교리적으로 잘 체계화한 사람이 어디 있느냐?” “칼빈만큼 교리를 통해 하나님의 영광을 높인 자가 누군가?” 정말 그럴까? 칼빈이 말한 절대예정과 이중예정, 그리고 그의 제자 베자가 발전시킨 “타락 전 예정”. 그것은 성경이 말씀하시는 예정일까? (절대예정, 이중예정, 타락 전 예정설은 “예정론, 무엇인 문제인가(2)” 참고하세요) 시각을 열어야 한다. 열기 위해서 먼저 전제(前提)된 사고에서 빠져 나오자. 그리고 아무 것도, 어떤 선입견도 없이 성경을 보자. 칼빈주의는 개인예정을 말하고 있다. 성경도 개인예정을 말씀하고 있을까? 창세 전에 하나님께서 한 사람, 한 사람의 구원을 예정하셨을까? 그러나 “예정론, 무엇인 문제인가(1)” 에서 말했듯이 성경이 말씀하시는 예정은... 개인예정이 아니라 공동체예정이다. “예정에 관한 말씀은 있다. 그러나 하나님은 창세 전에 개인 개인을 예정 하신 것이 아니라 공동체를 예정하신 것이다” 이 점에 대해서 칼빈주의의 성경적인 반박은 다음과 같다. “개인 예정에 관한 성경말씀이 있다. 렘1:4-5, 왕상13:2, 사44:28, 행9:15 등이 그것이다” 그 구절들이 개인예정에 관한 말씀일까? “(렘1:4-5) 여호와의 말씀이 내게 임하니라. 이르시되 내가 너를 모태에 짓기 전에 너를 알았고 네가 배에서 나오기 전에 너를 성별하였고 너를 여러 나라의 선지자로 세웠노라” 하나님께서 예레미야 개인을 태어나기도 전에, 죄를 짓기도 전에 알았고, 성별했다는 이 말씀이 개인예정을 증명하는 구절일까? 그러나 “구원”이라는 선입견을 버리고 다시 읽어 보자. 지금 하나님께서 예레미야를 태어나기도 전에 구원하셨다는 것을 말씀하는 것이 아니다. 예레미야가 태어나기도 전에 “여러 나라의 선지자로” 하나님께서 사용하실 것을 예정하셨다는 것이다. 다시 말하면 구원을 예정하신 것이 아니라 “사명을” 예정하신 것이다. 이것을 “사명 예정”이라고 한다. 하나님은 구속사에 있어서 특별한 방법으로 역사를 이끌어 가신다. 그래서 “미리 아시는” 하나님께서 그 시대에 맞는 자신의 사역자를 세우신다. 예레미야는 그런 점에서 “특별히 예정된 사역자”였다. “(왕상13:2) 하나님의 사람이 제단을 향하여 여호와의 말씀으로 외쳐 이르되 제단아 제단아 여호와께서 이와 같이 말씀하시기를 다윗의 집에 요시야라 이름하는 아들을 낳으리니 그가 네 위에 분향하는 산당 제사장을 네 위에서 제물로 바칠 것이요 또 사람의 뼈를 네 위에서 사르리라 하셨느니라” 이 말씀 역시 사역 예정이다. 하나님께서 가나안의 우상 종교에 물든 이스라엘 백성들을 개혁할 왕, 요시아를 예정해 놓으셨다는 말씀이다. 요시아 개인의 구원을 예정하셨다는 말씀이 아니다. 가장 어두운 시대에, 가장 위대한 개혁자 요시아를 사용해서 어둠을 몰아 내시겠다는 하나님의 사역예정에 관한 말씀이다. “(사44:28, 45:1) 고레스에 대하여는 이르기를 내 목자라 그가 나의 모든 기쁨을 성취하리라 하며 예루살렘에 대하여는 이르기를 중건되리라 하며 성전에 대하여는 네 기초가 놓여지리라 하는 자니라. 여호와께서 그의 기름 부음을 받은 고레스에게 이같이 말씀하시되 내가 그의 오른손을 붙들고 그 앞에 열국을 항복하게 하며 내가 왕들의 허리를 풀어 그 앞에 문들을 열고 성문들이 닫히지 못하게 하리라“ 놀랍게도... 이 예언을 하고 있는 이사야 선지자는 200년 후의 일을 말하고 있다. 200년 후 고레스라는 왕이 나올 것이다. 아직도 유다가 바벨론이란 나라에게 멸망당하기도 전에... 바벨론에게 멸망당한 후, 그 바벨론을 메데와 파사가 무너뜨릴 것이고 그 후... 다시 파사의 고레스가 나올 것이다. 그는 이스라엘을 포로에서 해방시킬 것이며 성전건축을 허락할 것이다. 하나님은 고레스를 가리켜 이렇게 부르셨다. “기름 부음을 받은 고레스” 200년 후 실제로 이 예언이 성취되었음을 역대기 기자가 이렇게 기록한다. “(대하36:22-23) 바사의 고레스 왕 원년에 여호와께서 예레미야의 입으로 하신 말씀을 이루시려고 여호와께서 바사의 고레스 왕의 마음을 감동시키시매 그가 온 나라에 공포도 하고 조서도 내려 이르되 바사 왕 고레스가 이같이 말하노니 하늘의 신 여호와께서 세상 만국을 내게 주셨고 나에게 명령하여 유다 예루살렘에 성전을 건축하라 하셨나니 너희 중에 그의 백성된 자는 다 올라갈지어다. 너희 하나님 여호와께서 함께 하시기를 원하노라 하였더라“ 그렇다면 고레스가 하나님을 신앙했을까? 그의 구원이 예정되었다는 뜻인가? 그렇지 않다. 역사적 증거는 그는 페르샤의 왕으로 다신론자다. 여호와도... 그가 섬겼던 수많은 신들 중 하나였다. 이 말씀은 고레스를 개인예정했다는 것이 아니다. 하나님이 그를 사역자로서 예정하셨다는 말씀이다. “(행9:15) 주께서 이르시되 가라 이 사람은 내 이름을 이방인과 임금들과 이스라엘 자손들에게 전하기 위하여 택한 나의 그릇이라” 하나님께서 다메섹에 살던 아나니아라는 사람에게 하신 말씀이다. 사울(후에 바울)이 다메섹으로 가는 길에서 강한 햇빛으로 시력을 잃었다. 다메섹의 한 집에서 시력을 잃고 절망하고 있는 사울에게 가라고 하셨다. 아나니아는 하나님의 명령을 이해할 수 없었다. 사울은 수많은 그리스도인을 죽이려고 했던 자인데 그의 눈을 고쳐주라니... 그러나 아나니아에게 하나님은 설명하셨다. 이 사람은 “택한 나의 그릇이다” 이 말씀을 하나님께서 바울이 태어나기도 전에 그의 구원을 개인예정하셨다고 말하는 것은 얼마나 억지스러운가... 문자 그대로 “내 이름을 이방인과 임금들과 이스라엘 자손들에게 전하기 위하여 택한 나의 그릇“이다. 하나님은 바울을 이렇게 사용하시기로 사역예정하신 것이다. 바울 자신도 구원이 예정된 사람이 아니었기에 이렇게 말한다. “(고전9:27) 내가 내 몸을 쳐 복종하게 함은 내가 남에게 전파한 후에 자신이 도리어 버림을 당할까 두려워함이로다” “버림을 당하다”라는 “아도키모이”는 “자격이 박탈되다”라는 뜻이다. 다른 사람을 구원의 길로 인도해놓고 자신은 구원의 자격이 박탈될까봐 전전긍긍하며 두려워했던 바울의 마음을 읽을 수 있다. “(롬9:10-13) 그뿐 아니라 또한 리브가가 우리 조상 이삭 한 사람으로 말미암아 임신하였는데 그 자식들이 아직 나지도 아니하고 무슨 선이나 악을 행하지 아니한 때에 택하심을 따라 되는 하나님의 뜻이 행위로 말미암지 않고 오직 부르시는 이로 말미암아 서게 하려 하사 리브가에게 이르시되 큰 자가 어린 자를 섬기리라 하셨나니 기록된 바 내가 야곱은 사랑하고 에서는 미워하였다 하심과 같으니라” 롬9장만큼 개인예정론을 힘 있게 뒷받침하는 구절도 별로 없다. (앞으로 롬9장은 따로 다룰 것입니다) “리브가에게 이르시되 큰 자가 어린 자를 섬기리라 하셨나니 기록된 바 내가 야곱은 사랑하고 에서는 미워하였다 하심과 같으니라” 그러나 이 말씀은 성경의 두 구절이 합쳐진 말씀이다. 창25:23절과 말1:2-3절이다. “큰 자(에서)가 어린 자(야곱)를 섬기리라”한 구절은 창25:23절에 나온다. “(창25:23) 여호와께서 그에게 이르시되 두 국민이 네 태중에 있구나 두 민족이 네 복중에서부터 나누이리라 이 족속이 저 족속보다 강하겠고 큰 자가 어린 자를 섬기리라 하셨더라“ 이상하게 이 구절을 야곱과 에서, 그들이 복 중에 있을 때 하나님께서 에서를 버리시고 야곱을 택하셨다고 이해한다. 그런 의미는 전혀 없다. 그냥 하나님 말씀은 섬김에 관한 것이다. 에서가 야곱을 섬길 것이라는 예언이다. 구약을 찾아보면 에서와 야곱이 살아있을 동안 에서가 야곱을 섬긴 적이 없다. 오히려 야곱이 형 에서를 섬겼다. 얍복강에서 자기를 죽이려고 400명을 데리고 형 에서가 온다는 전갈을 듣고 야곱은 밤새워 기도한다. 그가 얼마나 절박했으면 몇 차례의 선물을 형에게 먼저 보내 마음을 풀려했다. 그 후 그가 형을 만났을 때 형 앞에 거의 기다시피 가서 머리를 숙인다. 다소 노가 누그러진 형에게 “마치 하나님을 뵌 것 같습니다”라고 말한다. 야곱의 일생 동안 형의 섬김을 받은 적은 없다. 이 말씀은 약 1,000년이 지나 다윗 왕 때 성취되었다. 에돔 족속이 유다족속을 섬긴 것이다. 그렇다면 하나님께서 “큰 자가 어린 자를 섬기리라”하신 것은... 장차 1,000년 뒤 하나님 말씀이 얼마나 정확하게 성취되는지를 예언하신 대목일 뿐이다. “내가 야곱은 사랑하고 에서는 미워하였다”는 말라기의 말씀이다. “(말1:2-3) 여호와께서 이르시되 내가 너희를 사랑하였노라 하나 너희는 이르기를 주께서 어떻게 우리를 사랑하셨나이까 하는도다 나 여호와가 말하노라 에서는 야곱의 형이 아니냐 그러나 내가 야곱을 사랑하였고 에서는 미워하였으며” 말라기 선지자의 이 말씀은 야곱과 에서가 태어났던 때로부터 1,600년 후다. 다시 말하면 이 말씀은 그들의 삶의 결과론적인 말씀이다. 야곱은 사랑받을만한 삶을 살았고, 에서는 미움받을만한 삶을 살았다. 에서의 삶에 관해서 성경은 이렇게 말씀하고 있다. “(창25:29-34) 야곱이 죽을 쑤었더니 에서가 들에서 돌아와서 심히 피곤 하여 야곱 에게 이르되 내가 피곤하니 그 붉은 것을 내가 먹게 하라 한지라 그러므로 에서의 별명은 에돔이더라. 야곱이 이르되 형의 장자의 명분을 오늘 내게 팔라. 에서가 이르되 내가 죽게 되었으니 이 장자의 명분이 내게 무엇이 유익 하리요. 야곱이 이르되 오늘 내게 맹세하라 에서가 맹세하고 장자의 명분을 야곱에게 판지라. 야곱이 떡과 팥죽을 에서에게 주매 에서가 먹으며 마시고 일어나 갔으니 에서가 장자의 명분을 가볍게 여김이었더라“ 후에 히브리서 기자는 에서의 행동을 이렇게 기록했다. “(히12:14-17) 모든 사람과 더불어 화평함과 거룩함을 따르라 이것이 없이는 아무도 주를 보지 못하리라. 너희는 하나님의 은혜에 이르지 못하는 자가 없도록 하고 또 쓴 뿌리가 나서 괴롭게 하여 많은 사람이 이로 말미암아 더럽게 되지 않게 하며 음행하는 자와 혹 한 그릇 음식을 위하여 장자의 명분을 판 에서와 같이 망령된 자가 없도록 살피라. 너희가 아는 바와 같이 그가 그 후에 축복을 이어 받으려고 눈물을 흘리며 구하되 버린 바가 되어 회개할 기회를 얻지 못하였느니라“ 망령된 에서의 행실에 근거해서 말라기서는 말씀하고 있다. 하나님께서 야곱은 사랑하시고, 에서는 미워하셨다고... 더 이상 이 구절에서 개인구원의 예정론을 찾을 수 없다. (더 많은 내용은 앞으로 쓸 것입니다) 예정론은 있다. 개인예정론도 있다. 그러나 개인예정론의 대상은 오직 그리스도 예수 한 분 뿐이시다. “(행3:20) 주께서 너희를 위하여 예정하신 그리스도 곧 예수를 보내시리니” 그 외 예정에 관한 말씀은 모두 공동체 예정이다. 하나님은 창세 전에(창세 전, 이 부분에 대한 것은 자세히 다룰 것입니다) ... “하나님의 자녀를 이루실 공동체를 만드실 것을” 예정하셨다. 그 공동체는 하나님의 은혜에 믿음으로 반응하여 나아오는 모든 자들로 이루어진다. 아직 이루어지지 않은 구원을 향하여... 오늘도... 육체와 세상과 사단과의 전쟁을 치르며... 두렵고 떨림으로 마침내 구원을 이룰 사람들로 채워질 자녀 공동체... 그것은 하나님의 계획이며 설레임이다. 그리고 그 나라를 사모하는 우리들의 설레임이기도 하다. 이미 구원은 시작되었으나... 아직 받은 줄 여기지 않고 푯대를 향해 달려가서 마침내 이루어낼 그 자녀들... 가장 소중한 것을 놓치지 않기 위해... 마치 밭에서 발견한 보화처럼... 기뻐하고... 가서... 자신의 소유를 팔아.... 마침내 그 밭을 사고야 마는 사람들... 어떻게 해서든지 이르기 위해 달려가는 사람들... 그들을 성령께서 도우시며 위로하신다. 이들을 자녀 공동체라고 부르고 싶다. 장차... 그 시간... 심장이 멎어 버릴 것 같은 그 순간... 하나님께서 그 자녀들의 눈에서 눈물을 닦이시고... 세마포 옷으로 갈아 입히시고... 그들의 머리에 의의 면류관을 씌우실 그 날을 바라보며... 오늘도 피뭍은 전투복을 벗지 않고 전신갑주를 입은 채로 세상을 살아내는 사람들... 하나님의 자녀로 이루어질... 그 영광스러운 공동체를 멀리서 바라보고... 환영하며... 나그네로, 외국인으로... 살아가는 이 땅의 낮선 외국인들은... 그 공동체에 반드시 이를 것이다. 그 날을 위해... 오늘도 쉬지 않고 달린다. 성령과 함께... 주여! 우리 속에 주님의 형상이 맺혀지게 하소서. 예정론, 무엇이 문제인가(4)는 다음에 계속됩니다. 주께서 읽는 자들의 눈을 여시길.... 원전강해, 구원(5) “예정론, 무엇이 문제인가(4)”|구원 원전강해
이 글은 논쟁을 불러 일으키거나... 격한 반응을 일으킬 수도 있습니다. 적어도 칼빈주의자이거나 그 사상에 젖어 있는 분들이라면... 충분히 공감합니다. 철저한 칼빈주의 목사로 20여년 이상 살아왔던 사람이기에... 교회와 신학교에서 칼빈주의적 관점으로 로마서를 가르쳐왔습니다. 그래서, 더욱 마음이 무겁습니다. 그러나 지금... 제 영혼의 고백은 마치 “Amazing grace” 1절과 같습니다. Amazing grace how sweet the sound (놀라운 은혜입니다. 얼마나 감미로운지) That saved a wretch like me (나 같은 형편없는 자를 구원하시다니) I once was lost, but now i'm found was blind, but now I see. (전 잃어버린 자였지만 이제는 발견했습니다. 소경이었지만 이제 눈을 떴습니다) 한 때... 칼빈주의에 갇혀 소경이었던 제게 눈을 뜨게 하신 하나님께 감사드립니다. 이 글을 읽다 격해지시면 그냥 조용히 덮으십시오. 그러나 한번 깊이 생각도 해보시고, 기도해보십시오. 그래도 계속 그러시다면... 제가 할 수 있는 것은 당신을 위해 기도할 것 밖에 없습니다. 이 글을 읽는 모든 분들을 십자가에 못 박히신 주님의 사랑으로 사랑합니다. 칼빈주의 교리의 꽃은 5대 강령이다. 전적타락, 무조건적 선택, 제한적 속죄, 불가항력적 은혜, 궁극적 견인. 영어로 각 강령들의 첫 자를 따서 만들면 "TULIP"이란 단어가 된다. 문자 그대로 칼빈주의 개인 예정론의 꽃(튜울립)이 5대 강령이다. 개인 예정론이 뿌리라면 5대 강령은 꽃이다. 튜울립이 아름답듯이 칼빈주의는 5대 강령이 아릅답다고 말한다. 성경의 진리를 잘 드러낸 아름다운 교리다... 과연 그럴까? 5대 강령은 처음부터 끝까지 하나의 흐름 속에 있다. 전적 타락되었기 때문에 무조건적 선택이 되었고, 무조건적 선택이 되었기 때문에 제한적 속죄가 있다. 제한적 속죄 때문에 불가항력적 은혜가 발생하고, 불가항력적 은혜 때문에 궁극적 견인이 된다. 1. 전적 타락. 범죄한 인간은 스스로의 구원을 위하여 아무 것도 할 수 없을 만큼 전적으로 타락하였으며, 실제로 중생은 회심보다 우선한다. 2. 무조건적 선택 사람의 어떠함이나 행위에 상관없이, 하나님의 창세 전에 작정하신, 바꿀 수 없는 예정에 따라 구원과 멸망이 각각 정해졌다. 3. 제한 속죄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모든 사람을 위하여 돌아가신 것이 아니라, 절대적인 예정에 의해 선택된 사람들만의 속죄를 위해 돌아가셨다. 4. 불가항력적 은혜 하나님께서는 성령을 통하여 선택된 자들이 회개하고 구원을 받지 않을 수 없도록 저항할 수 없는 은혜로 역사하시지만, 저주가 예정된 자들에게는 이 은혜가 주어지지 아니한다. 5. 궁극적 견인 불가항력적인 은혜로 믿음을 가지게 된 사람은 결코 상실되지 않으며 끝까지 보존된다. 인간의 자유의지는 완전히 타락되었기 때문에 구원은 인간의 반응이 필요 없다. (전적타락) 오직 구원은 하나님의 일방적인 시작이요 완성일 뿐이다. 그래서... 택자와 버릴 자를 하나님이 결정하신다(무조건적 선택).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돌아가신 것은... 오직 선택된 자만을 위해서다(제한 속죄) 성령께서 십자가의 구속을 적용하시는 대상은 제한 속죄의 대상뿐이다. 예수님은 선택된 자만을 위해 죽으셨기 때문에... 성령은 그들만을 위해 역사하신다. 강제적으로... (불가항력적 은혜) 그리고... 불가항력적으로 주어진 은혜를 받은 택한 자들은... 결코 구원이 상실되지 않는다(궁극적 견인). (앞으로 칼빈의 5대 강령이 주장하는 성경구절의 오역을 쓸 것입니다) 이에 대해 아르미니우스는 5대 전제를 말한다. (우리는 칼빈주의도 아르미안주의도 아니다. 오직 성경이 말씀하시는 구원을 믿을 뿐이다) 1. 자연적 무력함 타락한 상태의 자연적인 인간은 스스로 선하게 될 수도 없고, 새로워 질 수도 없다. 의지를 새롭게 하시는 성령의 은혜가 없이는 인간은 자신이 구원에 대해 무력하고 무능하다. 2. 조건적인 선택 하나님이 예지하신 바에 따라, 사람의 믿는 여부를 조건으로 한 선택에 의하여 인간을 구원하시기로 창세 전에 작정하셨다. 3. 보편적 속죄 예수 그리스도의 속죄의 죽으심은 모든 사람을 위한 것이며, 이것을 제한시키는 것은 각 사람의 믿는 여부에 달려 있다. 4. 저항이 가능한 은혜 하나님의 은혜가 선행됨이 없이는 인간의 구원은 시작될 수도 없고, 진행될 수도, 보존될 수도 없다. 그러나 구원에 필요한 하나님의 은혜는 그 역사하시는 방식 때문에 인간의 악한 의지에 의하여 거부될 수 있다. 5. 조건적 견인 하나님의 은혜는 사람을 죄와 유혹에서 능히 지키시고 보존해 주시지만, 인간의 나태함에도 불구하고, 이 은혜가 상실되지 않는다는 것은 아직 성경에 의하여 증명되지 않는다. 인간은 전적으로 타락한 것이 아니라 자력으로는 구원에 이르지 못할 정도로 자유의지가 타락했다(자연적 무력함). 이 무력한 모든 인간을 위해 예수님은 십자가에서 죽으셨다(보편적 속죄) 그리고 이 은혜에 반응하는 자들을 조건적으로 선택하기로 작정하셨다 (조건적 선택) 하나님의 은혜에 반응해서 믿음을 가진 자라 할지라도... 그의 강팍함이나 죄로 인해 은혜는 거절될 수(구원이 취소될 수)있다. (저항 가능한 은혜) 그리하여... 하나님은 끝까지 믿음으로 반응하는 자를 조건적으로 견인하신다. (조건적 견인) 한 때 베자의 제자였지만 코른헤르트를 비판하기 위해 세워졌던, 철저한 칼빈주의였던 아르미니우스, 그가 로마서 9장을 연구한 끝에 오히려 베자와 칼빈이 틀렸다고 말했다. 그는 이렇게 말한다. “인간의 구원은 예수 그리스도를 구주로 믿는 믿음으로 되는 것이지, 하나님의 일방적인 예정에 따른 무조건적인 선택에 의하여 기계적으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다. 하나님의 은혜는 모든 선한 일의 시작이요, 계속이요, 마침이다.... 그러나 이 은혜는 저항할 수 없는 것이 아니다. 성경에 의하면 많은 사람이 성령을 거역하였고, 제공된 은혜를 거절하였기 때문이다. 만약 인간이 하나님의 은혜를 거절할 수 없다면... 인간이란 하나님의 손 안에 있는 한 낱 꼭두각시에 불과한 것이다. 하나님은 인간을 그러한 꼭두각시가 아니라 자녀가 되기를 원하시기 때문에, 하나님의 사랑은... 당신의 거저 주시는 은혜가 인간에 의하여 저항 받을 수 있도록 용납하셨다. 요한복음 3장 16절처럼 하나님의 은혜와 인간의 반응을 확실하게 논증하는 구절은 없다. 이토록 확실한 성경의 논증에 기초하여 하나님과 인간 사이에 존재하는 관계는 자율적인 사랑의 관계지 일방적인 선택으로 이루어지는 기계적인 관계가 아니다. 그리고 인간이 하나님의 은혜를 저항할 수있는 까닭은 은혜의 속성 때문이 아니라 그 은혜가 역사하는 방식 때문이다. 하나님께서 범죄까지도 예정하셨다고 가르치는 타락 전 예정설은 선택 받지 못한 인간은 자신들의 범죄 여부에 관계없이, 예정된 영원한 멸망으로 들어간다는 결론에 이르게 함으로써, 하나님이 인간이 범한 죄의 창시자로 오해되는 신성모독인 것이다” 신학자 와인쿱은 이렇게 말한다. “하나님에 대해 말해질 수 있는 신성모독 중에 가장 심각한 것은 하나님을 죄의 창시자로 보는 것이다. 죄와 상관 없이 피조물들을 이미 예정된 멸망으로 저주 받도록 인도하기 위하여 하나님을 인간이 범한 죄의 창시자로 설명하는 것은 신성모독이다... 그 어느 누구도 이와 같은 신성모독을 선하신 하나님의 탓으로 돌릴 수 없다“ (칼빈주의와 웨슬레 신학、밀드레드 와인쿱, 한영태 역, 생명의 말씀사 1987. p49) 아르미니우스는, 진정한 그리스도인적인 분위기에서 이 문제를 토의할 수 있는 국가 차원의 종교회의를 열어주도록 국회에 요청했다. 그러나... 그의 이러한 요청이 이루어지지 못한 채 과로와 병고에 시달리던 그는... 1609년 10월, 49세를 일기로 참으로 짧았지만 경건한 일생을 마쳤다. 교회사가(史家) 필립 샤프는 이렇게 평가한다. “그는 유식하고 유능한 신학자였으며, 그의 생애를 쓰디 쓰게 만든 논쟁의 와중에서도 그는 온유함과 그리스도인다운 정신을 드러냈다..... 남들에 의하여 정죄를 받았으나 그는 아무도 정죄하지 않았다“ 계속해서 필립 샤프는 이렇게 당시의 역사를 써내려 간다. “그가 죽은 다음 해인 1610년... 아르미니우스의 가르침을 지지하는 46명의 칼빈주의 개혁교회 목사들은 논쟁을 성경적인 원칙에 의하여 해결하는 온전한 방편으로 다섯 가지 신조를 공인해 주도록 탄원하는 항변서를 국회에 제출하였다. 이에 대하여 엄격한 칼빈주의 지도자들은... 즉시, 반대의 입장을 표명하는 반항변서를 제출하였으며, 아르미니우스 지지자들은 칼빈주의에 항의하는 항변자라는 이름이 붙여졌다. 두 주장이 합의에 이르지 못하고 논쟁이 가열되자, 화란의 칼빈주의자들은 자신들에게 유리했던 당시의 정치상황을 이용하여 반대파를 제거하는 불상사가 발생했다. 열렬한 칼빈주의자로 중앙집권제를 주창하던 총독 Maurice는, 1618년 7월 쿠데타를 일으켜, 그의 정적으로 아르미니우스의 가르침을 지지하며 공화제를 주창하던 지방자치주의 국가 지도자 올덴바르네벨트와 다른 유력한 아르미니우스 지지자들을 투옥하였다. 그런 다음, 서둘러 같은 해 11월 13일, 국가가 일방적으로 소집한 종교회의가 도르트에서 열렸다. .... 도르트 회의 참석 인원 102명이었다. 그 중 18명은 정부가 임명한 칼빈주의 신학자였고, 나머지 의장 및 서기 등 모든 회원은 엄격한 칼빈주의자였다. 아르미니우스파 사람은 없었다. ... 그리하여 아르미니우스파의 운명은 사전에 이미 결정되어 있었다. 그야말로... 사람에 의하여 예정된 예정론의 예정대로 된 승리였다. 6개월 간이나 계속된 종교회의는 154번의 회의를 거치며 논란을 계속하다가 이듬해인 1619년 5월9일 막을 내렸다.“ 도르트 회의 결의 내용 * 타락 전의 예정에서 타락 후의 예정으로 바꿈 * 이전의 칼빈주의 예정설을 그대로 승인 * 아르미니안의 5개항은 모두 이단의 신조로 정죄 * 회의 폐막 4일 후인 5월 13일, 투옥 중이던 아르미니안 정치 지도자 올덴바르네벨트를 처형 * 당대 최고의 학자로 해양법의 아버지로 불리우는 그로티우스에게는 종신형을 선고 * 200명의 아르미니안 목사들을 성직에서 추방 도르트 회의에 대한 역사적인 평가는 다음과 같다. 도르트 종교회의는 칼빈주의자들이 자행한 로마 가톨릭식의 종교재판이었다. - Motley 도르트 신조를 지금까지 공적인 표준 신조로 인정하고 있는 교회는 화란 밖에서는, 미국에 있는 화란 개혁교회뿐이다. 우리는 칼빈주의와 아르미니안과 싸우려는 것이 아닙니다. 어떤 주의(ism, 主義)가 더 옳다고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교리라는 수건에 가려진 성경을 말하고 싶은 것입니다. 교리에 목숨을 걸어선 안됩니다. 교리에서 인용하고 있는 성경을 그대로 받아들여선 안됩니다. 그것이... 칼빈주의든, 아르미니안이든, 웨슬레안이든... 답답한 것은, 성경을 가장 신뢰하고 있는 분들에게 성경이 저항받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성경이 말씀하고 있는 그대로... 있는 그대로, 구원에 관한 말씀을 읽고 해석해야 합니다. 물론, 어려움이 많을 것이다. 왜냐하면 안경을 벗는 일은 쉬운 일이 아니기 때문이다. 오래 동안, 그렇게 봐왔기 때문에... 제가 안경을 벗는데 30년이 걸렸습니다. 30년 동안 전 안경을 쓰고 있는지도 몰랐습니다. 가장 성경적이라고 자부하면서... 그러나, 이제야 제가 얼마나 어리석었는지를 깨닫습니다. 하나님의 “Amazing grace”로... 예정론, 무엇이 문제인가(5)는 다음에 계속됩니다. 주께서 읽는 자들의 눈을 여시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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