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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택과 예정론

같은 하나님을 믿는데 왜 칼빈과 웨슬리의 구원 예정론이 다른가?

작성자Stephan|작성시간13.03.14|조회수681 목록 댓글 5

 

 

 

같은 하나님을 믿어도 성경을 어떻게 이해하고

해석하느냐에 따라 교리가 달라질 수 있다고 봅니다.

칼빈은 어거스틴의 구원론을 종교개혁기에 부활시켰지요.

어거스틴은 구원은 믿음으로부터, 교회로부터,

그리고 신적 작정에 의해 받는다고 주장했습니다.

특별히 교회에도 구원의 권위를 둠으로써

가톨릭 전통 형성에 신학적 이론의 기초를 제공한 셈이 되었습니다.

 

이후 가톨릭 교회를 통한 구원에 세례나 기부, 선행이 중시되면서

은혜와 믿음의 교리가 약해지고

행위구원의 조짐을 보이며 타락의 길을 걷게 되자

개신교 종교개혁이 일어나 은혜와 믿음을 강조하게 됩니다.

이때 칼빈은 이 은총의 부분을 더 확고히 강조하기 위해 

어거스틴의 신적 작정론을 그대로 가져와

그의 구원론과 예정론에 도입합니다. 

행위구원이 횡행하던 당시로서는

은총과 하나님의 주권을 강조하는 일이 중요했지만

그러다보니 결국 이중예정론으로까지 발전하면서

다시 너무 한 쪽으로 치우치게 되는 결과를 낳고 말았지요.  

 

원래 철저한 칼빈주의자였던 알미니우스는

당시 칼빈의 교리에 반대하는 성도 한 사람의

입장을 반박하기 위해 성경을 연구하다가

오히려 칼빈의 이론이 성경적이지 않다는 걸 발견하고는

지금 알미니즘으로 알려진 교리를 발표합니다.

이것을 요한 웨슬리가 목회현장에서

실천신학적으로 균형있게 다듬었다고 봅니다.

믿음으로 구원받는다는 주장은 옳았지만 교회와 신적 작정에도

똑같은 무게를 부여한 어거스틴의 가르침에

성경적인 균형을 잡으려 시도했다고 볼 수 있겠지요.

 

하나님께서는 인격적인 사랑의 대상을 얻으려고

하나님을 거부할 수도 있고 받아들일 수도 있는

자유의지를 가진 인간을 만드셨는데,

창세 전부터 어떤 사람은 지옥으로,

어떤 사람은 천국으로 보내기로 결정했다고 한다면

애초부터 세상을 만들 이유 자체가 없어지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이중예정설이나 제한속죄설은

성경적으로 확고한 지지를 받기 어려운 교리라고 느낍니다.

 

오히려 하나님은 누가 하나님을 사랑할지를 미리 아시고

그들을 구원에로 예정하셨다고 믿는

웨슬리식 예지예정론이 비교적 더 성경적인 맥락이라고 봅니다.

사람은 전적으로 부패했지만

하나님을 아예 거부해버릴 정도로 타락하지는 않도록

일반적인 선행은총을 부여하셨다는 전제도 받아들일 만하고요.

 

또는 하나님은 처음부터 예수님만을 예정하셨고

그 외에는 모두 그 예수님을 구주로 믿는 사람들의 공동체를 예정하신 것이지

개인을 구원으로 예정하시진 않는다는 주장도 의미 있어 보입니다.

에베소서를 포함해 예정에 대해 말하는 대다수의 구절들이

'우리'라는 공동체를 지칭한다는 점에서 설득력이 있다고 봅니다.

성경의 수많은 구절들에서 '누구든지 예수님을 믿으면' 

이 예정된 공동체에 들어올 수 있다고 초청하는 것을 보면

쉽게 납득할 수 있는 주장이기도 하고요.

 

또한 개인 예정 같아 보이는 구절들도 많은 경우 

구속사에서 일시적인 역할을 부여하는 사역적인 예정이지

구원으로의 예정은 아니라는 맥락은

대표적인 로마서 9장 등의 문맥을 봐도 분명해 보입니다.

이스라엘을 포로에서 돌이킬 고레스를 예정했다는 부분이나

에서보다 야곱을 더 사랑했다고 말씀하시는 부분이 다

구원과는 상관없이 구속사의 계보에서 쓰임받는

각 개인의 특정 역할을 중시한 사역적 예정이었다는 거지요.

 

이 이슈는 앞으로 더 조심스럽게 하나씩 밝혀나갈 부분이라고 봅니다만,

복잡한 만큼 댓글 논쟁 정도로 해결할 수 있는 부분이 아니기에

시간을 두고 차근히 이해하는 과정이 필요하다고 생각합니다.

물론 인간의 제한된 이해와 경험과 해석 능력 때문에

기본적으로는 늘 어느 한 쪽의 입장만이 절대적이라는 교만은

끝까지 경계하면서 진행해야 할 문제라고 믿습니다.

 

다만 칼빈주의와 알미니안주의의 5대 강령 같은 양쪽의 입장은

어느 한 고리도 빠질 수 없이 전체가 하나의 논리로 면밀하게 연결되어 있기 때문에

교회사적으로도 구원론에서는 어떤 신자도 이 둘 중

어느 한 쪽 편에 서지 않을 수 없다는 건 분명한 것 같습니다.

성경에는 분명히 예정에 대한 언급이 있고

하나님의 주권과 인간의 자유의지에 대한 언급도 있고

그에 따라 속죄와 구원, 성도의 견인 문제에 대한 가르침이 나오는데,

이 부분을 나름대로 해석하려면 지금으로선

이 두 가지 양대 신학의 틀을 벗어나기는 어렵기 때문이지요.

 

적어도 그렇게 양자택일이 불가피한 것이 현실이라고

인정하는 태도를 갖는 건 중요하다고 봅니다.

말하자면 적어도 이 문제에서는 ‘대충 그렇겠지’ 하는 식으로

어중간하게 믿고 지나가면 안 된다는 거지요.

이 문제에서 제3자로 그저 손 놓고 방관하고 있어도 되는 사람은 없습니다.

둘 중 어느 것이 더 성경적인 진리인가를 찾는 일은 그만큼 중요합니다.

각 개인의 영원한 영혼 구원의 문제가 달려 있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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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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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작성자Stephan 작성자 본인 여부 작성자 | 작성시간 13.03.14 웨슬리의 견인론에 대한 글을 읽고 한 회원님이 던진 댓글 질문에 제가 간략히 올린 답글입니다. 예정론의 내막을 한눈에 살필 수 있습니다.
  • 답댓글 작성자기독네티즌 | 작성시간 13.03.14 칼빈과 웨슬리의 구원론이 아니라, 변증전도연구소에서 성경이 말하는 구원에 대한 글을 별도로 다루었으면 합니다.
  • 작성자예술가의 정원 | 작성시간 13.03.14 올리신 글 감사합니다 천천히 생각하며 읽겠습니다. 저같은 평신도들은 그때 그때 생각나는 대로 주장할 수 있는데,, 목사님처럼 변증전도자의 입장에서는 항상 고민하고 고려하시게 되는 애로사항이 많을 것 같습니다^^
  • 작성자예술가의 정원 | 작성시간 13.03.14 이미 구원받을 사람이 예정되있다 하는 이야기는 참 이해하기 어려웠습니다. 이미 천국가고 지옥갈 사람이 예정된 것이라면 하나님이 우리를 가지고 노시는 분으로 보입니다^^ 그러나 또 만세전에 우리를 택했다 이런 부분은 또 어떻게 해석해야 할지 모르겠습니다, 저는 뭐 사실 대충 그렇겠지라는 믿음이고 그래서 그런지 몰라도 우리에게는 어렵고, 이해가 않가고 도무지 불가능한 것들을 없는것도 있는것으로 부리시는 하나님은 가능하다는 정도로 믿습니다. 그러나 영혼구원을 위해 변증전도를 하시는 목사님에게는 대충 믿을 수 없을줄로 압니다 웨슬리 쪽의 해석이 더 이해가 가며, 전도자 입장에서도 더 용이한것 같습니다 하나님께서
  • 답댓글 작성자예술가의 정원 | 작성시간 13.03.14 목사님에게 지혜를 주셔서 영혼구원에 올바른 것으로 깨닫게 하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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