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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빛과소금> 성탄 특집 전도용 원고, '하나님이신 사람의 탄생, 어떻게 부인할 수 없는 역사가 되었나?'

작성자Stephan|작성시간22.12.01|조회수62 목록 댓글 1

하나님이신 사람의 탄생, 어떻게 부인할 수 없는 '역사'가 되었나?
 
“난 천지를 만드신 하나님은 믿어. 예수는 잘 몰라도….” 목사가 된 동생에게 평소에 형님이 신조처럼 상기시켜주시곤 하는 말씀이지요. 형님은 제가 섬기는 교회에도 몇 번 오실 만큼 기독교에 특히 관심이 많으신 걸 압니다. 형수님 배경이 불교인지라 가족의 화목을 중시한다시며 내내 개인적인 결단을 미루고 계신 줄도 알고요. 그렇다면 형님에게는 지금이 어쩌면 예수님이 어떤 분이신지를 편견 없이 더욱 명확하게 파악해놓는 일이 중요한 때가 아닐까 싶네요. 사실은 그분이 바로 형님이 믿는다는 그 창조주 하나님 자신이기 때문입니다.
 
“기독교는 왜 그리 배타적이냐? 각자 좋은 대로 믿음 갖고 사는 종교인들을 그냥 그대로 놔두면 될 걸!” 기독교가 여느 종교의 하나라면 형님이 가끔 이렇게 성토하시는 말씀이 백번 옳습니다. 그러나 기독교는 그 창시자인 ‘예수’라는 분이 곧 모든 사람을 창조하시고 그들 각자의 구원과 심판에 관여하시는 하나님이시라고 믿습니다. 만약 이 주장이 사실이라면, 기독교는 모든 사람의 삶이나 죽음과 관련되고, 아직 예수님을 잘 모르는 형님과도 직접 관련됩니다. 그래서 기독교는 단순히 종교의 하나가 아니라 ‘창조질서’ 그 자체라는 거지요.
 
이 글에서는 성탄절을 앞두고 형님께 역사적 실존인물이면서도 ‘하나님이신 사람’이셔서 너무도 낯설고 희귀한 예수라는 분의 탄생이 믿을 만한 역사성을 가졌는지에 대해 간략하게라도 나누고 싶습니다. 예수님에 대해 전할라치면 “자칭 신이라 해서 논란이 많은 그 사람이 인류역사에 정말 실존했던 인물인지 내가 어떻게 알아?”라고 반박하는 분들이 적지 않아서요. 물론 이런 문제는 반복 실험이 가능하거나 동일한 사건을 반복해 보여줄 수 있을 때만 가능한 과학적 방법으로는 증명하기가 쉽지 않습니다. 
 
그래서 역사상의 사건이나 인물들에 관한 의문에 답을 찾고자 할 경우 기독교변증에서는 법사학적 증명(증거의 비중에 의한 판단) 방법을 사용합니다. 이 방법은 구두나 문서에 의한 증언과 증거물들에 의존하는데요. 예를 들어, 형님이 지난 주에 어느 식당에서 밥을 먹었는지를 증명하려면, 다시 지난 주로 되돌아가 동일한 행동을 반복해서 보여주시기는 어렵겠지요? 그럴 때는 형님을 기억하는 식당 주인의 기억이나, 형님이 가지고 있는 식당 영수증 등의 이차 자료를 증거로 삼아야 할 겁니다.
 
예수님이 2천 년 전에 이스라엘 땅에 태어나셨다는 사실 또한 반복 재생이 불가능한 일이어서 이와 비슷한 증거들을 활용해야 합니다. 이런 증거들을 무시해버리면 고대로부터 인류역사에 존재했던 유명인들의 탄생이나 실존의 역사성을 제대로 확인할 방법 또한 없어집니다. 철학자 칼 야스퍼스는 “과거의 역사적 인물의 실재는 그가 남긴 영향력을 증거로 알 수 있다”고 말했습니다. 플라톤이나 아리스토텔레스가 중요한 역사적 인물인 이유는 단 하나입니다. 그들이 남긴 저작물들의 비범한 영향력 때문입니다. 현대인들이 고대 시대로 돌아가 그들의 생존 여부를 일일이 다 확인해볼 순 없는 노릇입니다. 예수님의 역사적 실재는 지금 우리 주변의 수많은 교회와 기독교인들의 존재 자체가 충분히 입증합니다. 
 
더구나 세계사와 모든 사람의 생일은 예수라는 분이 태어난 해를 기준으로 BC(Before Christ, 주전)와 AD(Anno Domini: In the years of the Lord, 주후)의 연대 안에 다 들어 있습니다. 모든 사람은 출생신고를 할 때마다 원하든 원하지 않든 예수님이 태어나신 해를 시인해야만 합니다. 법사학적 증명 방법을 활용할 때 이러한 실제적인 영향력 또한 누구나 인정할 만한 증거물에 해당하는데, 성경이라는 공인된 하나의 문서에 의한 증명 또한 이 못지않게 탄탄한 증거물이 됩니다.
 
사람이 뭔가를 올바로 인식하고 믿는 통로로 보통 이성과 경험, 권위를 듭니다. 그러나 우리가 이성과 오감을 통해 직접 경험해서 얻을 수 있는 지식은 극히 제한되어 있습니다. 그래서 권위라는 제3의 인식 방법이 필요합니다. 일상을 돌아보면, 우리는 이미 많은 지식을 단순히 권위를 믿고 의지하는 통로를 거쳐 습득하고 있습니다. 
 
형님은 9·11테러 사건을 뉴욕에서 직접 목격하진 못하셨지요? 그러나 그 현장을 보도한 CNN과 같은 특정 언론매체의 권위를 통해 그 사건이 실제로 일어났다는 걸 알고 또 믿고 있습니다. 그 권위를 신뢰하지 못한다면 9·11테러가 실제로 일어난 사실이라 해도 계속 그 진실을 모른 채로 살아갈 겁니다. 이처럼 어떤 사실이 각자에게 유효한가 그렇지 않은가는 특정의 권위를 믿는가 안 믿는가에 달려 있습니다. 사실 권위에 대한 암묵적인 믿음이야말로 이 세상을 살아가는 데 가장 기본적인 도리입니다.
 
성경은 하나님이신 예수님이 온 인류의 죄를 대속하시려고 죄 없는 사람으로 이 땅에 오시기 위해 동정녀인 마리아에게서 태어나셨다고 증언합니다. 이 사건의 진실성 여부는 이 특정 사실을 처음부터 ‘독점 보도’해온 성경의 권위가 믿을 만한가 아닌가로 가려집니다. 권위의 신뢰성 여부가 사실 여부를 결정하니까요.
 
성경의 권위를 입증할 만한 증거는 CNN이나 뉴욕타임스와는 비교조차 할 수 없을 만큼 풍부합니다. 무엇보다 1948년 이스라엘의 국가적 회복과 같은 굵직한 역사적 사건들에 대한 예언의 성취는 그 책의 권위를 확고하게 해줍니다. 특히 이스라엘 민족 전체가 오랫동안 고대해온 구원자 메시아로 이 땅에 오실 예수님의 탄생과 사역에 대해서는 그 민족의 역사책이기도 한 구약성경에 모두 예언되어 있었고, 실제로 예수님에게서 그대로 다 성취되었습니다.
 
예수님은 베들레헴에서(미 5:2) 여자의 후손(창 3:15)과 유대인의 시조인 아브라함의 씨(창 22:18)로 처녀에게서 태어나셨고(사 7:14), 갈릴리 지방에서 사역을 시작하셨습니다(사 9:1). 온갖 치유의 기적을 베푸시고(사 35:5-6), 주로 비유로 가르치시며(시 78:2), 가까운 친구에게 배반당해(시 41:9) 은 30세겔에 팔리셨습니다(슥 11:12). 매 맞고 침뱉음 당하신 후(사 50:6) 도둑과 함께 십자가에 달려(사 53:12) 손과 발이 못에 찔리셨고(시 22:16), 죽으신 후 부자의 묘에 묻히셨다가(사 53:9) 사흘 만에 부활하셔서(시 16:10) 승천하시고(시 68:18), 하나님 우편에 앉으셨습니다(시 110:1).
 
또한 구약성경의 첫 다섯 권의 책을 쓴 모세는 메시아를 가리켜 “나와 같은 선지자 하나”(신 18:15)라고 예언했는데, 실제로 예수님과 모세는 여러 면에서 닮았습니다. 둘 다 태어나기 직전까지 하나님께서 침묵하신 400여 년의 기간이 있었고, 둘 다 태어날 때 다른 아기들이 죽어야 했고, 둘 다 이집트에서 나왔으며, 예수님은 산상수훈을, 모세는 시내산에서 십계명을 받아 전한 것까지도 서로 닮은꼴입니다.
 
인류역사상 어떤 인물도 예수님처럼 한 민족의 역사 전체가 일관된 초점을 갖고 고대하며 그 인물의 탄생과 생애를 그 민족의 공적인 역사서에 세세하게 예언까지 해놓았던 경우는 없습니다. 그분의 동정녀 탄생이 거짓이라면, 그분의 인격과 사역과 죽음, 부활이 다 거짓이고, 그분이 역사적으로 남긴 진실한 영향력의 증거물인 기독교 역시 모두 거짓입니다. 서양 문명의 두 기둥은 헬레니즘과 헤브라이즘이며 서양사는 곧 교회사이기도 한데, 이 모든 것 또한 허구가 되고 맙니다. 아무것도 없는 데서 그 존재 자체가 기적적인 정교한 우주와 지구, 각종 동식물과 인간의 몸을 창조하신 하나님께 동정녀 탄생의 기적은 결코 불가능하거나 유별난 일이 아닙니다. 
 
물론 예수님이 탄생하신 날은 성경에 명시되어 있진 않습니다. 현재 성탄절로 삼은 12월 25일은 원래 이교도들의 태양신 축제일이었습니다. 기독교를 로마의 국교로 정한 콘스탄틴 황제의 밀라노 칙령(AD 313년) 이후 교회는 당시 로마의 전통적인 축제일을 예수님의 탄생을 기념하는 날로 삼았습니다. 당시의 다신교적 종교들과 종교적 갈등 관계에 있던 기독교가 이 날을 우상숭배나 태양신 축제의 날이 아닌 ‘기독교의 날’로 만들어 당대 사람들의 관심을 예수님께로 돌리고자 했던 차선책이었던 거지요.
 
그러나 현재 성탄절이 전 세계적으로 많은 국가의 공휴일로 지정된 사실에도 이미 예수라는 존재의 역사적 실존성이 전제되어 있습니다. 불교에서는 붓다가 가르쳤다고 알려진 그 철학이 중요하지 실제로 그가 존재했는지, 그 가르침이 실제로 그로부터 비롯되었는지 하는 역사성은 크게 중시되지 않습니다. 그러나 기독교 진리에는 예수라는 분의 실존과 그의 생애와 죽음, 부활의 역사적 사실성 자체가 핵심적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의 전기를 쓴 의사 누가는 그분의 탄생과 사역을 가리켜 “우리 중에 이루어진 사실”이라고 표현했고, 그 사실의 목격자가 많다고 증언했습니다(눅 1:1-2). 예수님이 정말 인류역사 속에 딱 한 번 공식적으로 나타나신 하나님이시라면 이제 형님은 더 이상 막연하거나 추상적인 하나님을 구하지 않아도 된다는 것, 이것이 바로 성탄의 복음(Good News)입니다!
 
-안환균, <빛과소금>(두란노) 2022년 12월호 특집 원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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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작성자Stephan 작성자 본인 여부 작성자 | 작성시간 22.12.02 성탄 시즌을 맞아 이 글을 주위 지인들에게 전도용으로 많이 전해주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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