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음은 일제시대 문맹률에 관한 조사결과들이다.
1920년대 문맹율
1920년대의 문맹율은 어느 정도였을까?
당시 동아일보는 2천만 인구 중의 1%만이 교육을 받았다고 말하고 있으니 그 문맹율은 논할 가치조차 없는 형편이었다.(자료; 일제시대 문맹율 추이, 노영택 1994년)
동아일보는 1922년 1월 5일자 사설에서 "신문 한 장은 고사하고 일상 의사소통에 필요한 서신 한 장을 능수하는 자가 역시 백인에 1인이면 다행이라 하겠도다" 라며 참담한 조선민중의 문맹상태를 언급하고 있었다.
당시 1920년대 동아일보의 사설을 통해서 유추할 수 있는 문맹율을 정리하면 대체로 1921년 99%, 1922년 99%, 1925년 절대다수, 1927년 대다수, 1928년 90% 등으로 정리할 수 있다. 가히 1920년대는 조선 민중 절대다수가 문맹의 상태였던 것이다.
이러한 참담한 현실 앞에서 당시 조선, 동아일보 등의 신문들은 문맹의 타파야말로 민족의 역량을 강화하는 첫걸음임을 주장하며 문자보급운동에 적극 나섰다. 20년대의 브나로드 운동으로부터 시작된 문맹타파운동이 시작된 것이다.
1930년대의 문맹율
당시 조선일보 1934년 6월 10일자 사설은 이렇게 말한다.
"지식 없이는 산업이나 건강이나 도덕이나 지지 발달될 수가 없다. 문맹 앞에는 항상 밑몰을 함정이 횡재했으니 그들의 가는 곳에는 위험과 저주가 따라다닐 뿐이다. .... 전 인구의 1천분의 20밖에 문자를 이해하지 못하고 학령아동의 3할 밖에 취학할 수 없는 현하 조선상태에 있어서 간이한 문자의 보급은 민족의 갖일 최대의 긴급사라 하겠다. "
조선일보가 1929년 시행한 문자보급운동의 성과로 한글로 자기 주소 성명을 쓸 수 있게 된 자가 2849명으로 약 3000명이 되었다고 밝힌다.
그러나 이는 2000만 조선민중의 숫자와 비교하면 극히 미미한 수준에 불과한 것이다.
1930년대에는 조선총독부가 공식적으로 조사한 문맹율의 통계가 있다.
바로 1930년의 <조선국세조사보고>에 나오는 공식화된 통계인 것이다. 일제 시대에 유일하게 공식 조사결과로 남아 있는 문맹율에 대한 통계이다.
이에 의하면 전 인구의 약 77.7%가 문맹인 것으로 나타나 있다.
1920년대에 비하면 다소 개선되었다고 할 수 있을지 몰라도 이 역시 약 80%에 달하는 절대 다수의 조선 민중이 일자무식의 상태에 있었음을 증명하는 자료이다.
그러나 일본인의 경우에는 10세 이상자 약 3%만이 문맹으로 드러나 그 차이가 극심했음을 알 수 있다.
(일제기 청소년문제에 대한 연구, 김현철 2000년)
문맹율 80~90%라는 것은 민족의 역량이 사실상 0의 상태에 있었음을 말하는 것이다. 이는 1984년 콩고의 문맹율 40.4%, 1983년 적도기니의 38.0%보다 거의 두 배이상의 문맹율인 것이며 1970~80년대 극도의 빈곤과 기아선상에서 허덕이던 아프리카에서도 이 정도의 문맹율은 찾기 쉽지 않다.
해방후의 문맹율
이러한 극심한 문맹율은 해방 후까지도 거의 개선되지 않았다. 1940년대에는 태평양전쟁기간을 거치면서 국민교육이 거의 이루어질 수 없었고 1950년대에는 625라는 민족사상 최대의 참화를 겪었다.
거의 대부분의 국민이 교육의 혜택과는 거리가 먼생활을 했고 하루하루 먹고살기도 버거웠으며 굶어 죽지 않으면 다행인 생활이 매일매일 이어졌다. 60년대 말까지도 전주예수병원에서 기생충 1063마리를 뱃속에 안고 죽은 아이가 나올 정도로 비참하고 가난한 일상의 연속이었다.
이런 비참한 상황이니 1950년 625가 발발하자 1917년 11월 생으로 당시 겨우 33세 정도였던 정일권이 대한민국의 육해공군 총 사령관에 임명되는 안쓰런 현상마저 벌어졌던 것이다. 지금으로 따지면 중소기업하나 맡기기도 버거울 젊은 사람에게 대한민국의 운명을 맡길 수 밖에 없었던 어이없는 현실이 당시의 조국의 처량한 모습이었다.
대한민국의 문맹율이 확실히 개선되기 시작한 것은 국민교육헌장 등을 반포한 60년대 이후라고 보아야 한다.
대한민국이 일제 식민지와 625의 전화로 인한 폐허, 그리고 80% 정도의 국민이 문맹이었던 이러한 만난을 극복하고 오늘의 성장을 이룬 것은 한 마디로 기적이라 할 수밖에 없다.
이 모든 개혁과 변혁의 소용돌이는 어디서 나왔을까.
이 에너지의 중심에는 박정희가 있었다. 결코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다.
박정희가 5000년 민족사의 질곡을 끊어 내고 이룩한 조국 번영의 토대는 그 어떤 비난으로도 덮을 수 없는 기적이며 감동의 역사라 평가할 수밖에 없는 것이다.
박정희에게 피해를 보았다고 찌질거리며 흠집내기에 목숨걸고 사는 일부 극소수 인사들이 사라진 이후 역사는 박정희를 무에서 유를 창조하여 조국의 번영을 이끈 최고의 지도자로 평할 것이다.
댓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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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러브 선 작성자 본인 여부 작성자 작성시간 13.05.04 거의 99.9%에서 80%대까지 문맹율, 한글모르는 숫자를 줄였군요.. ㅋ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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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미륵돼지 작성시간 13.05.05 친일파들은 일제때 발전지수를 들이밀며 조선은 일제로 인해 삶의 질이 개선됐다고 하는데 개소리죠. 일본 입장에서 식민지 조선이 뭐가 예쁘다고 지들한테 아무 득도 없는 짓을 왜 했겠습니까... 저게 조선인 좋으라고 행한 일이 아닌거죠. 한반도에 조선을 심으려고 교육을 통해서 반도인에게 반도조선을 세뇌시킨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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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러브 선 작성자 본인 여부 작성자 작성시간 13.05.05 한반도에 한글을 보급발전시킨 것은 반도조선인으로 하여금 삶의 질을 개선시켰다고 생각하는 것은 오해입니다. 반도조선을 묶겠다는 일제의 만행입니다. 한글이 우수한 글자인 것은 분명하나, 한글은 원래 대륙조선의 국민들이 후반에 즐겨 사용하던 언어문자였습니다. 대륙조선의 흔적을 없애기위해 중국에서의 한글사용은 금지내지는 없애고 또한 한자사용도 없애고 그대신 간체자를 들고 나와 한글을 대신하려 한 것이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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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러브 선 작성자 본인 여부 작성자 작성시간 13.05.05 겉으로 선전은 한글학회를 탄압하며 한글을 보급하는 것을 금지한 것으로 보이지만, 속으로는 한글을 각급학교에 보급한 것입니다. 왜정때 우리부모님도 보통학교(국민학교)를 다녔는데, 일본어와 한글을 모두 배워 쓰고 말할 정도였으니까 이를 보아도 알 수 있습니다. 그나마 보통학교를 다니지 않은 국민들은 까막눈이 당연한 사실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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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러브 선 작성자 본인 여부 작성자 작성시간 13.05.05 그전에 조선은 반도건 대륙이건 근대적인 학교에서 한글을 교육시킨다는 것은 없는 일이었습니다. 금시초문이라는 것입니다. 난생 처음있는 일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