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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극 드라마

[[이순신]]명량해전(鳴梁海戰)과 울돌목

작성자대표운영자|작성시간05.08.06|조회수92 목록 댓글 0

명량해전(鳴梁海戰)과 울돌목

위    치 : 전남 해남군 문내면 학동리

내    용 :

  명랑해협은 진도와 해남 화원반도 사이의 좁은 수로를 말하는데 현재는 진도대교의 붉은 기둥이 우뚝서있다. 해남읍에서 진도 방향으로 30㎞정도를 달리면 진도대교의 붉은색 기둥이 바다보다 먼저 눈에 들어온다. 이곳이 바로 세계해전사상 그유래를 찾아볼 수 없는 대 전과를 올렸던 명량대첩이 있었던 울돌목이다. 울돌목이란 바다물이 울며 돌아 나가는곳이라 하여 옛부터 불려 오던 곳이다. 이곳은 지금 진도대교와 함께   우수영관광지가 조성되어 역사의 산교육장으로, 나그네의 쉼터로 각광받고 있는 곳이다.  그러나 이에 앞서 왜 이곳이 국난극복의 산교육장이 되어야 하는가를 쓰고져 한다. 임진왜란과 몰락해가는 조선의 수군, 그한 가운데 선 주역 이순신, 그리고 원균과 조정의 간신배들 ....... 그러나 이순신은 존재했고 또 그가 존재하므로서 13척의 전함을 몰고나가 무려 333척의 왜군 대 전함선단과 맞서 싸울 수 있었으며, 수백의 수군으로 1만이 넘는 대군과 대적할 수 있었다. 그리고 대승하였다. 왜군은 무려 31척을 수장시키고 91척을 파괴되었으며 그외 200여척이 대부분이 피해를 입고 물속에 빠져 죽고, 살려달라고 허우적거리는 부하와 동족을 버리고 수류를 따라 도주한곳, 이 성스러운 곳 "울돌목, 명량해협" 지금도 도도히 물은 흐르고 있으되 이순신장군의 기백과 호국의 일념이 흐르는 물에 어른거리는곳이다

● 명량해전 이야기

 

   왜놈들은 역사적으로 국력이 팽창하면 한반도를 침략하고, 국력이 쇠약해지면 바다를 방패삼아 칩거해왔다. 1592년 일본은 혼란스런 전국시대가 가고 풍신수길의 등장과 함께 서양문물을 받아들이면서 중흥을 맞이하게 되는데 이때 전국의 통일과정에서 발생된는 불만세력과 국론을 한데 규합하고 대륙으로의 진출을 위하여 당쟁만을 일삼고 있던 허약한 조선을 침략하기에 이른다. 왜군이 침략해오자 허약한 조선은 부산, 동래, 탄금대, 임진강, 평양성등에서 연전 연패하여  선조가 의주로 피난을 한가운데 임해군을 포함한 왕자 2명이 포로가 되었으며, 국토는 피로물들고 왜군의 약탈, 방화, 살인등 아비규환이 전국각지에서 벌어지고 있었다. 그러나 왜군은 부산 - 대구 - 문경 - 충주 - 서울 - 평양에 이르는 주요축선만을 점령하고 전격적으로 진격하므로서 작전지역이 신장되어 지휘통제, 보급등에 많은 제한을 받고 있었다. 이때 한민족 특유의 저항의식이 되살아나면서 전국각지의 뜻을 가진 지사들이 의병을 규합하여 유격전을 전개하니 그 대표로 조헌, 고경명, 승장 영규등 수없이 많은 의병이 출범하여 많은 전과를 올리고 있었다. 때를 같이하여 조선의 관군도 초기전투에서의 참패를 딛고 재편성하여 조직적인 전투력을 발휘하였는 바 행주산성의 권율, 진주성의 김시민등이 대승을 거두었다. 이후 선조의 요청으로 명나라의 지원군이 이여송을 총사령관으로 하여 한반도에 진출하여 초기 평양성을 탈환하는등 기세를 올리는 듯 하였으나 항상그러하듯이 조선을 위기에서 구출하고 왜군을 축출하기 보다는 왜군이 조선을 점령후 압록강을 넘어 명나라로 침략하는 것을 방지하는데 그목적을 두고 소극적으로 임하였으며 이마져도 벽제관 전투에서 참패하여 서울수복을 눈앞에두고 결전을 기도하던 조선관군을 실망시키고 평양성으로 후퇴하여 칩거하고 있어 모처럼 행주대첩으로 조성된 서울탈환의 호기도 포기하지 않을 수 없게 되었다. 그러나 하늘은 조선을 포기하지 않은 듯 이순신이라는 명장을 이땅에 내려주시므로서 위기의 조선에 한가닦 희망이 보이기시작 하였던 것이다. 전라 좌수여 이순신 장군은 1592년 5월부터 9월까지 4회에 걸쳐 옥포, 당항포, 한산도, 부산포등에 출병하여 가는곳마다 승리하여 총 왜군함선 186척을 수장시키는 세계 해군전사에 빛나는 전과를 거두었다. 그런나 수군만으로는 한계가 있었으며 육지에서의 합동작전이가능했다면 왜군의 후방을 완전히 차단할 수 있는 기회를 놓치고 말았다. 그러나 왜군은 육지에서의 의병활동과 해상에서의 이순신의 출현으로 더욱 어려움을 겪게되고 이로 말미암아 어정쩡한 명과의 화의를 구실로 삼아 명군과 조선군을 기만하면서 안전하게 철수하여 영남지방일대에 집결 전투력을 복원하고 재침략을 위한 기회만을 엿보고 있었다. 그러나 철수과정에서 지난날 진주성에서의 참패에 대한 보복으로 10만 대군을 이끌고 진주성을 공략, 함락시킨뒤 진주성내의 남녀노소를 가리지 않고 도륙하여 그사상자가 6만을 넘었다하니 그만행을 알 만하다. 그러나 명군을 이을 알고도 지원요청에 응하는척 말로만 왜군에게 공격을 중지할 것을 요청하는등 소극적으로 임하므로서 지원군으로서의 기대를 져 버리고 있었다. 한편 진주성 함락후 전승연회에서는 진주성에서 장열히 산환한 최경회 장군의 후실인 논개(주논개)가 기생으로 가장하여 연회가 익을 무렵 왜군장수를 껴안고 남강에 뛰어드니 조국과 지아비에게 제물을 헌수하며 조선여인의 정절을 보여주기도 하였다.

    한편 전쟁의 장기화에 대비하여 왜군은 진주성을 함락시킨후 서생포에서 거제도에 이르는 남해안일대의 각성들을 거점으로 장기주둔 준비를 하면서 명군과의 협상을 유지하고 있었다. 그러나 국제사회의 힘의 논리는 냉정하게 적용되어 개전 및 피해 당사자인 조선은 완전 배제된 가운데 명군과 왜군이 서로의 실리를 놓고 강화교섭을 벌이고 있었으며 이를 이용하여 전려을 재정비 하여 재기를 꾀하려는 목적으로 일부병력을 제외한 주력을 본국으로 철수시켜 장기전으로 발전되어가고 있었다.

    따라서 1593년 9월 명군은 대부분 철수하여 본국으로 귀환하였으며  왜군은 명군철수와 때를 같이하여 철수하는체 하였으나 명군이 철수하고난 뒤인 1595년 (선조 28년)까지도 잔류병력이 3만 8천여명을 넘었다. 이에 조선은 짧은시간내 전력을 정비하고 증강하기 위하여 노력을 경주하면서 민심을 수습하고 있었으나 국토의 동남단을 왜군이 점령한 상태하에서 극도의 불안은 계속되고  있었다.  선조임금은 1593년 10월1일 폐허화된 서울로 환도하여 군사력 증강을 꾀하였으며 우선적으로 수도방위군의 신편제에 주력하였다. 이에 명나라에서 개발 왜구소탕에 크게 효과를 내었던 절강병법(浙江兵法)도입을 삼도 도체찰사 유성룡의 주도하에 본격화, 훈련도감을 창설하고 군제을 개편사는한편 포수(조총수), 살수(창검수), 사수(궁병)을 양성하고 있었고 명군과 왜군이 사용하는 신병기를 개발하고 도성을 신, 보축하는등 전력증강을하고 있었다. 그러나 식량의 부족, 부정부패의 만연, 전염병발생, 가렴주구에 시달린 민중들의 반란등 국가적 역량부족과 사회 혼란 때문에 전력증강을 위한 소기의 성과를 거두지 못하므로서 1597년 정유재란이 발발 하였고 조선의 능력으로 왜군을 이땅에서 몰아내는데 제한을 받게 되었다. 그러나 조정의 간신배들은 이와중에서도 당쟁만을 일삼고 있으니 참으로 딱한 역사의 아픔일지라.

한편 명군은 조속히 전란을 종식시키고 군대를 조선에서 철수하기 위하여 조선조정을 배제하고 왜군과 협상, 화의 교섭을 진행하고 있었으나 상호 주장에 대한 이견차를 좁히지 못하고 4년간의 지리한 협상이 결렬되므로서 이듬해인 1597년(선조29년) 정유년에 재침략하니 이를 정유재란(丁酉再亂)이라고한다. 왜군은 1차 침략인 임진왜란시 철수하지 않고 조선에 잔류하고 있던 2만여 병력외에 8개대 14만여명을 7월초순까지 영남 남해안에 상륙을 완료시키고 재침략을 준비하고 있었다. 그러나 조선수군의 명장 이순신을 제거하지 못하고서는 수륙양면작전을 수행할수 없을뿐아니라 해상교통로가 제한을 받게 되므로 이순신장군을 제거하기 위한 음모를 진행하게 된다.

    ● 이순신 장군의 하옥과 조선수군의 몰락

        왜군은 이순신장군을 제거하고 조선수군을 일거에 괴멸시키기 위하여 소서행장의 부하인 요시라를 밀정으로 조선에 파견하여 경상우병사 김응서에게 접근하여 "왜군의 수장 가등청정이 오래지 않아서 바다를 건너올 것인데 내가 그시간과 가등청정이 탄 배를 가르쳐 줄테니 조선에서는 통제사를 시켜 이를 공격하게 하시오 "라고 허위 정보를 제공하였다. 이 왜군 첩자 요시라는 조선말을 유창하게 하는 2중 간첩으로서 보잘것없는 정보를 제공하고 조선의 조정으로부터 도사(都事)라는 벼슬까지 받았지만 어디까지나 왜군의 간첩이었는데도 김응서는 이 허위정보를 사실로 믿고 도원수 권율에게 보고 하고 권율은 다시 이를 조정에 보고하니 조정에서는 이를 믿고 이순신에게 출동을 명령하였다.  그러나 이 명령을 하달하기 위하여 방문한 권율에게 이순신은 "일개 첩자의 말을 듣고 적정을 파악하지 않은채 병력을 출동시키는 것은 적의 함정에 빠질 수 있다"라고 하며 출병을 하지 않았다. 이에 물만난 물고기마냥 조정의 간신배들은 이순신을 헐뜯기 시작했고 드디어 선조는"조정을 속이고 적을 놓아 치지 않았다"라는 죄목으로 이순신을 파직하고 체포하고 대신 원균으로 삼도수군 통제사를 임명하였다. 서울로 압송된 이순신은 갖은 고초를 겪으며 옥고를 치르고 1597년 3월 4일 권율장군의 휘하에 백의종군하도록 하였다.

       한편 이순신을 제거하고 통제사가된 원균은 체면상 출병하지 않을 수 없어 3월 9일 거제도 일대로 출병, 매복중인 왜군선 3척을 발견 격멸시켰다. 이후 권율은 육군이 현선에서 왜군을 견제하고 수군을 부산방면으로 출격시켜 왜군의 상륙을 저지하고 해상권을 장악하기 위하여 원균에게 부산방면으로의 출동을 명령하였다. 이에 원균은 100여척의 함선과 모든 장수들을 이끌고 한산도를 출발하여 부산방향으로 향하였다.  원균의 함대는 거제도를 지나 다 왜군함선을 발견하고 이를 쫒고 쫒기며 풍랑과 싸우다 노를 젓는 군사가 피로에 지쳐 함선이 분산되고 더 이상 전진하지 못하자 가덕도에 도착하여 심한 갈증으로 병사들이 섬에 올라 물을 먹고 있을무렵 왜군이 기습을 가하여 400여명이 전사하고 겨유 퇴각하여 거제도방면으로 이동 칠천량(漆川梁)에 정박하였다. 이에 권율은 원균을 곤양으로 불러 패전의 책임을 추궁하고 다시출전할 것을 독려하였다. 그러나 원균은 칠천량의 함대로 복귀하여 며칠간을 폭음으로 허송하고 있었고 왜군은 수륙양면에서 기습을 달성하기 위하여 철저한 준비를 하고 있었다. 드디어 7월 15일 야음을 이용하여 600여척의 함선과 거제도의 육군이 수륙양면에서 기습하자 혼비백산 달아나기 바빴다. 원균은 남은 함선을 수습하여 칠천량 서남방으로 후퇴하였으나 미리 매복하고 있던 왜군 함선에 또다시 대패하고 위기를 모면하고자 배를 버리고 고성부근 추성포에 상륙하였으나 왜군의 추격에 걸려들어 전사하였고 이억기, 최호,배흥립등 부장과 수많은 장병 및 100여척의 함선을 포함 전멸하였다. 이때 겨우살아남은 경상우수사  배설(裵楔)이 12척의 잔선을 수습하여 한산도로 후퇴하여 주민을 피난시키고 병영과, 무기, 식량을 소각한다음 전라도 방향으로 후퇴하니 조선수군은 몰락의 위기를 맞이하고 있었다.

    ● 이순신의 재기와 명량(鳴梁 울돌목)해전

        칠천량 해전에서 조선의 수군을 괴멸시킨 왜군은 남해안일대의 해상을 장악하자 수륙병진으로 전라도와 충청도를 공략하기위하여 2개방면의 육군과 1개방면의 수군으로 편성하여 일제히 공격을 개시하니 한반도는 또다시 전화에 휩싸이며 위기의 상황을 맞이하고 있었다. 왜군 육군은 창녕에서 전주로, 곤양에서 남원을 경유 전주로 공격하여  일거에 천안, 괴산까지 진출하였으나 괴산전투에서 명군과 조선군에게 대패하여 더 이상 진출하지 못하고 영남 남해안의 왜군 본거지로 철수하였다. 수군은 1500여척의 대함선단을 어란진에 정박하고 이중 333척의 선단을 구성하여 서진을 계획하고 있었다.(난중일기에는 133척, 충무공 전서 행록에는 333척으로 기록됨)

        한편 원균의 참패로 해상권을 상실한 조선조정에서는 이순신을 재기용하여 8월 3일 삼도수군 통제사에 재임명하였다. 이에 이순신이 구례, 곡성, 순천등을 거쳐 겨우 병력 120여명을 모집하였다. 장흥에 도착한 이순신은 전라우수사와 합류하여 기지를 진도 벽파진에 진영을 편성하였다. 휘하에는 12척의 함선을 구했던 배설을 포함 유능한 장수들이 모여들었다. 그러나 이후 배설은 병을 칭하고 육지로 도주한뒤 선산에서 도원수 권율에게 체포되어 처형되었으나 이로 인하여 수군의 사기는 땅에 떨어지고 말았다.

         배설이 처형되고난뒤 조정에서는 수군병력이 허약하니 상륙하여 권율의 통제하 육전을 전개하라고 명령하였다. 이번에도 이순신은 다음과 같은 장계로서 선조를 설득하였다. "이제 신에게 전함이 12척이 있습니다. 죽을 힘을 다내어 막아 싸우면 아직도 할 수 있습니다. 비록 전함은 적지만 신이 죽지 않았으므로 적이 감히 우리를 업신여기지 못할 것입니다."라고 하여 선조의 승인을 받았다. 그리고 왜군과의 일전을 위하여 작전을 구상하고 기지를 우수영(화원반도)으로 이동하였다. 이곳에서 세계 해전사에 커다란 획을 긋는 명량해전을 준비하고 있었던 것이다.

         울돌목  이곳은 현재 진도대교가 가설되어 있는곳으로 화원반도와 진도사이를 흐르는 좁은 해협으로 수로의 폭이 썰물 때 180미터에서 밀물 때 320미터까지 변화하며 하루 내내 서해와 남해의 바닷물이 합쳐지거나 풀어지며 진귀한 풍광을 연출한다. 수로가 협소하고 조수가 빠르며 해저가 불규칙하여 이곳을 흐르는 '바다가 울며 돌아나간다 '하여 명량(鳴樑), 울돌목 이라고도 한다. 이곳은 왜군이 서진을 하기위하여  통과할수있는 지형으로 이순신장군은 이곳으로 왜군을 유인하여 울돌목의 특성을 이용, 미미한 전투력으로 왜군을 섬멸하고져 계획하였던 것이다. 따라서 이곳 울돌목에 쇠줄을 설치 울돌목의 양편에서 왜군의 함대가 수류를 타고 빠르게 진격할 때는 쇠줄을 당겨서 왜군함선이 쇠줄에 걸려 진출하지 못하도록하고, 조선수군이 진격할 때는 이를 풀어 수류를 타고 진격할 수 있도록 설치하였다.(이 쇠줄을 설치하였던 흔적은 12년전 진도대교가 가설되기전까지 현재의 진도대교 교각자리에 있었다고 한다) 한편 왜군은 육상전투에서 실패한 왜군은 수군을 서진시켜 한강하구를 이용 직접서울로 진출하기위하여 출병을 서둘러 어란포에서 서진하여 전라도방향으로 진출하는 지름길인 이곳 울돌목을 통과하기위하여 출병하였다. 이순신은 왜군이 접근한다는 정찰결과 보고를 받고  곧 12척의 함선에 전투태세를 갖추는 한편 우수영부근의 주민을 육지로 피난시키고 9월 15일 우수영 앞바다에 12척의 함선을 전면에 포진시키고 100여척의 민간선박에 깃발을 달고 멀리 뒤에서 진을 편성하도록 하므로서 왜군에게 대 수군이 진을 친 것으로 기만하고 있었다.  한편 육지로 대피시킨 주민들은 숨을 죽이고 숨어서 이 역사적 순간을 지켜보고 있었다. 왜군의 수군은 조선수군이 이미 괴멸되어있는 것으로 보고 울돌목의 빠른 물살을 타고 돌진해 왔다. 때를 같이하여 울돌목에 설치된 쇠줄을 당기니 빠른 물살을 타고 돌진하던 333척의 왜군선단이 선두 함선이 쇠줄에 걸려 멈춰서자 뒤따라오던 함선들이 한데 뒤엉켜 아수라장으로 변하고말았다. 이때를 놓칠세라 이순신의 함대가 접근하면서 지자총통과 현자총통등 함포사격을 집중하였다. 좁은 지역에 몰려있는 왜군의 함선들은 조선수군의 함포공격을 받으며 우왕좌왕 부서져 수장되어가고 있기를 1시간여 드디어 조수가 썰물로 바뀌면서 왜군수군의 반대방향으로 급물살이 형성되고 있었다. 이에 왜군수군은 조류를 따라 퇴각을 하게되고 조선수군은 급물살을 타고 왜군의 함선단으로 돌진하여 함포를 발사하고 공격을 퍼부었다. 한편 육지의 기슭에서 숨어서 관전하던 주민들이 왜군 함선 한 복판에서 좌충우돌하는 조선수군을 보면서 발만동동구르며 안타까워 하고 있을 즈음 왜군수군이 물살을 따라 도주하기 시작하자 수없이 파괴된 왜군함선과 물에빠진 왜군들만이 아우성을 치고 조선수군만이 울돌목의 한복판에 우뚝버티고 있는 모습을 보면서 서로를 끌어안고 함성을 지르며 눈물을 흘렸다고 한다.

        이전투에서 왜군수군은 122척의 함선이 수장되었으며 8000여명의 왜군이 수장되었다. 부근에있는 피섬은 이때 왜군이 흘린피가 섬전체를 뒤덮었다 하여 붙여진 이름이라고 한다. 반면 조선의 수군은 수십명이 부상을 입는 정도의 가벼운, 아니 전혀 피해를 입지 않았다.전투가 종료된뒤 이순신장군은 당사도로 병영을 옮겨 차후 작전에 대비하도록 하였다.

    ● 명량해전의 승리 분석

        세계전사에 유래 없는 대승을 거둔 조선수군은 우연히 승리한 것이 아니다. 그당시 왜군은 서양문물을 받아들여 조총을 사용하고 조총에의한 신식군대의 전술을 사용하여 육전에서는 크게 위용을 떨쳤으나 함선의 건조기술이 조선에 미치지 못하여 해상에서는 칠천량해전을 제외하고 모두 패하였다. 그이유는 조선수군의 함선과 왜군의 함선을 비교하면 알 수 있다. 물론 거북선이라는 세계최초의 철갑선 말고도 일반적인 함선에서 기술의 차이가 확연함을 알 수 있다. 당시 왜군이 사용하던 함선은 "안택선"이라고 하며 조선의 함선은 "판옥선" 이라고 한다. 이 두함선은 외형으로 보아서는 대동소이하다. 2층구조로 되어 있으며 1층에는 노군(꾼)이 2층에는 전투원이 승선하고 배의 한가운데 지휘소로 쓰이는 가옥형 건축물이 하나 더있다. 그러나 안택선은 배의 앞머리가 뾰족하고 배의 바닥또한 유선형으로 제작 속도를 빨리 할 수 있도록 설계되어있으나 해전에서 가장 중요한 함포를 배치할 수 없도록 설계되어있어 전투시 조총을 주로 사용하였고 특히 배를 건조시 판자와 판자를 맞대어 쇠못으로 연결하므로서 바다의 염분에 쉽게 녹이슬고 견고하지 못하여 충돌시 조그만 충격에도 배가 파괴되는 취약점을 안고 있었다. 반면 조선의 판옥선은 배의 앞부분이 넓고 바닥또한 넓게 만들어져있어 속도보다는 회전반경이 작고 좁은 공간에서 쉽게 방향전환이 가능하고 특히 수심이 낮은 곳에서도 능히 전투를 수행할수 있으며 배를 건조시 판자와 판자를 연결시 "ㄴ , ㄱ"로 홈을 파고 결합한뒤 참나무 못을 만들어 "S"자로 박아넣으므로서 견고하고 바닷물에 의하여 판자가 더욱 견고하게 만들어졌으며 이렇듯 충격에 견딜 수 있도록 설계한 함선에 동,서,남,북 어떤방향으로도 함포를 설치하여 발사할 수 있도록 배치되었다. 따라서 명량해전시 이순신이 승리를 거둘 수 있었던 것은 탁월한 전투지휘와 지형지물을 이용한 전술사용, 그리고 조선기술을 바탕으로한 함선의 강점에 있었던 것이다. 그러므로 왜군함선 333척에 둘러 쌓인 조선수군이 사방으로 함포를 발사하며 왜군선박의 취약점인 함선의 측면을 충격하므로서 순식간에 왜군대함선단이 괴멸되었던 것이다.

    훗일 이순신장군은 난중일기에서 "적에게 겹겹이 둘러쌓여 병사들은 겁을 먹고 어찌 할줄모르며....."하는 내용의 그당시 긴박했던 순간을 기록하고 있으며  러시아 함대를 괴멸시켜 일본의 전쟁영웅이된 도고제독은 "나를 영국의 넬슨에 비교할 수는 있으나 이순신장군에게는  견줄 수 없다. "라고 기술하고 있다.

    ● 그곳에 가면

        그곳에 가면 명량해전의 승전고가 들릴 듯한 우수영 한켠에는 충무사가 있다. 유달산 돌로 쌓았다는 계단 오른편에는 전라우수영 장수들의 공적비 30여개가 서있고 마지막 계단을 오르면 하늘로 치솟은 노송 숲 사이에 충무공의 사당이 한 눈에 들어온다.  충무사 소슬문을 지나면 명량대첩에 관한 내용을 기록한 높이 2,67m 폭1,14m 크기의 명량대첩비가 이순신 장군처럼 늠름하게 서 있다.
    명량대첩비는 숙종 때 학자인 예조판서 이민서가 짓고 당대의 명필인 이정영, 김만중이 전자로 써서 비문을 새겨 해남군 문내면 동외리에 세웠다. 일제시대에 이르러 조선에 대패한 기록이 적힌 이 비가 성하게 있을 리 만무했다. 일제는 비를 경복궁 근정전 뒷들에 파묻어 버렸다. 그러나 1945년 해방이 되자 우수영 주민들은 '충무공유적복구기성회'를 조직하여 일제에 의해 훼손되거나 잃어버린 유적을 복원할 계획을 세운다. 수소문 끝에 경복궁에 묻힌 대첩비를 찾아내어 어렵사리 우수영까지 옮겨져 왔으나 비각을 짓고 비를 세우려면 많은 경비가 필요했다. 걸궁패(풍물패)를 조직하여 모금하거나 비문을 탁본하여 관공서에 팔아 모은 돈으로 1950년 드디어 비가고가 비를 세울 수 있었다.
    명량대첩비에는 충무공의 혼이 들어있는 탓일까. 6.25 한국전쟁과 1980년 5.18광주 민중항쟁 당시에는 나라를 걱정하는  눈물을 흘렸다한다. 우리나라에서는 밀양에 있는 사명대사비와 함께 신비한 비석으로 알려지고 있다.



    <출처:http://www.sds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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