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AFE

사극 드라마

[[한반도]]국새(옥새)에 관한 재밌는 상식

작성자개척자.|작성시간06.07.19|조회수267 목록 댓글 0
국새(옥새)에 관한 재밌는 상식 [0]
455933 | 2006-04-27
추천 : 0 / 신고 : 0 | 조회 : 82  | 스크랩 : 0

<출처ㅣ 다음>
우리나라를 상징하는 국새에 금이 가 다시 제작해야하는 때에 국새가 갖는 상징성과 제작 방법에 있어 전통적 의미를 살려야 한다는 주장이 있어 화제다

국새의 주요 요소로는 표면[인면(印面)]에 새기는 글의 내용, 손잡이[뉴(&#37397;, 紐)]에 해당하는 영물, 이 손잡이에 매단 끈[수(綬)]이 있는데, 역사적으로 정통성 있는 국새가 되기 위해서는 그 끈에 관심을 가져야 한다는 것이다

단국대학교(총장 권기홍) 석주선기념박물관에서 전통복식학의 대가인 고 석주선 박사 서거10주년을 맞아 출판하는 『석주선 관장 추모논총집』에 수록된 논문에 따르면 수의 길이와 장식, 색상 등에 있어 전통에 바탕을 두어 제작하여 상징적 의미를 강화시키자 한다.

즉 초기의 수가 신분에 따라 세세한 부분까지 제도로 규정되었는데 황제의 경우 그 길이가 거의 8m에 달하였고, 색도 여러 가지를 사용하였으며, 수 중간에 옥환을 두고 양쪽에서 맺어 연결하였다. 이를 바탕으로 새 국새를 제작함에 있어 끈을 좀 더 길게 하고, 다양한 색상의 실을 사용할 것, 또 옥환이나 국가를 상징할 수 있는 기타 조형물을 장식하여 원래 수가 가졌던 수(受: 받아들임)의 의미를 되살리는 것도 의미 있는 일이라고 한다.

그러나 이러한 외형적인 면보다 먼저 이 수의 칭호에 주의할 필요가 있다고 한다. 신분에 관계없이 상하 통용되던 새(璽)가 진시황(秦始皇) 때 황제의 인(印)만을 의미하는 것으로 바뀌었고, 한(漢)나라 때 여기에 매는 끈을 수(綬)라 한 이후로 이 명칭이 줄곧 사용되었으므로, 지금처럼 우리말로 끈이라 하는 것은 굳이 바꿀 필요가 없다 하더라도 한자와 나란히 쓸 때는 원래의 칭호를 회복시켜 "綬"로 기재하는 것이 바람직하다고 한다. 한편 대한민국 전자정부 홈페이지에서는 끈[綬]을 “인끈”과 “매듭”이라 하였는데, 매듭은 본래 매듭을 짓는 결(結)을 의미하므로 인끈의 정통성에 그리 부합하지 않다는 것이다

현재 좀 더 높은 상징성을 지닌 국새를 제작하기 위해 그 영물을 무엇으로 할 것인가에 모두의 관심이 모아져 있다. 그러나 새(璽)가 황제의 인을 지칭하기 시작한 초기에는 영물의 형태보다 여기에 매는 綬에 더 큰 의미를 두었는데 이러한 역사적 사실이 주목받지 못하고 있다.

綬는 그 글자가 진시황(秦始皇) 때 만들어진 것인데 이때는 새(璽)나 인(印)이 아니라 각종 형태의 옥을 연결하는데 사용되었다. 그러던 것이 한(漢)나라 때부터 새인(璽印)의 손잡이에 연결되기 시작하였다.

진한(秦漢) 시기에는 아직 옷의 색상으로 신분을 구별하는 복색제도가 정립되지 않았었고, 따라서 겉으로 신분을 구별하기 곤란한 면이 있었다. 이 때문에 몸에 지니고 다니던 인(印)을 연결하던 끈인 綬로 신분을 구별할 수 있도록 하였다.

중국 동화대학교(東華大學校) 박사과정에 있는 최규순씨가 추모 논총집에서 발표한 수(綬)에 관한 연구논문에 따르면 “綬의 구성요소&#8228;길이&#8228;색채&#8228;밀도&#8228;제직법 등이 신분에 따라 엄격하게 달랐다”며 “『후한서(後漢書)』에 따르면 황제와 황후, 황태후는 순황색 바탕에 황(&#40644;) 적(赤) 표(&#32313;) 감(紺)의 네 가지 색채를 사용한 황적수(&#40644;赤綬)를 사용 하였고, 길이 또한 764.6㎝에 달하는 아주 긴 수를 사용하였다”고 한다.
또 綬의 폭(37㎝)은 신분에 관계없이 동일하였으나 폭 내에 들어가는 실의 수, 즉 밀도가 신분에 따라 엄격히 제한되어 황제의 황적수가 10,000올을 사용하였음에 비해 가장 낮은 신분이 사용하던 황수(&#40644;綬)는 1,200올을 사용하였다. 같은 폭 내에 들어가는 실의 수가 이와 같이 달랐으므로 신분이 높을수록 가는 실을 사용하여 정교하게 짠 綬를 사용하였다

진한(秦漢) 시기의 인(印)은 대개 한 변의 길이가 2.5cm 이하로 작아서 간편하게 몸에 지니고 다닐 수 있었으나 위진남북조 시기를 전후하여 종이가 일상적으로 사용되기 시작하면서 그 크기가 커져 몸에 지니고 다니기 불편 해졌다. 또 복식제도에 있어서 복색에 의한 신분구별이 정착되어 더 이상 綬의 길이나 색 등으로 신분을 구별할 필요성이 줄어들게 되었다.

이렇게 하여 새인(璽印)과 綬가 분리되기 시작하였고, 이후 수는 예복을 이루는 요소의 하나가 되어 실용적 역할이 축소되고 예의와 장식적 역할이 점점 확대되는 결과를 낳았다. 색 사용에 있어서 수(隋)나라 이후부터 황제의 경우 여섯 가지 색채를 사용하는 것으로 정착되어 후대까지 변함없이 유지된다. 착용방법 또한 옆구리에 차던 것에서 혁대나 대대에 걸어 허리 뒤에 늘어뜨리는 것으로 변하였고 이러한 착용 방법 때문에 우리나라에선 후수(後綬)라 부르게 되었다.

우리나라에서 문헌상 고려시대부터 나타나 조선시대를 거쳐 대한제국 시기까지 왕 및 황제 이하 문무백관이 입는 제복(祭服)과 조복(朝服)의 구성요소로 착용된 후수는, 현재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된 종묘제례와 중요 무형문화제로 지정된 석전대제(釋奠大祭)때 여전히 사용되고 있다.

국새제작에 국민적 관심이 집중되고 있는 때에 국새의 전통적 의미를 역사적 시각에서 접근해야 한다며 그 근거를 발표한 최규순씨의 글은 석주선 관장추모 논총집에 전문이 수록되어 있다
단국대학교 석주선기념박물관(관장 정영호)에서는 1982년 개관이래 매년 5월2일 학술 세미나와 출토복식 특별전을 개최해 왔는데 올해는 석주선 관장 추모 논총집 발간과 더불어 국제 학술 세미나와 개관 25주년 기념 출토복식 특별전을 서울 역사박물관과 공동으로 개최 한다.
또한 재작년 발견되어 학계 초미의 관심사가 된 조선조 소년미라와 조선조 출토복식 및 복원품등 100여점의 우리옷과 재현품들도 전시될 예정이다.
이와 연계된 행사로 6월2일에는 하얏트호텔에서 "우리옷 선뵈기(패션쇼)" 행사가 있을 예정이다.
다음검색
현재 게시글 추가 기능 열기
  • 북마크
  • 공유하기
  • 신고하기

댓글

댓글 리스트
맨위로

카페 검색

카페 검색어 입력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