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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극 드라마

[[연개소문]]연개소문 게시판 펌

작성자하늘님마음|작성시간07.02.04|조회수231 목록 댓글 1
 나는 고구려의 대막리지 연개소문(淵蓋蘇文)이다. 내가 집권하고 있는 동안 우리 대고구려 제국은 천하제일의 강국이었다. 내가 죽은 뒤에도 나는 당 태종(唐太宗)과 그의 아들 고종(高宗)이 지배하던 한족(漢族) 오랑캐에게 공포의 대상이었다. 당대뿐만 아니라 당나라가 망한 뒤에도 나에 대한 공포심은 한족의 머릿속에서 오랫동안 떠나지 않았다. 이러한 나 연개소문이 후세에 황제와 대신들을 마구 죽이고, 국정을 전횡한 포악한 독재자로 알려져 온 것은 오로지 우리 제국의 멸망과 더불어 우리 고구려인의 손으로 기록된 진실한 역사가 모두 사라져버렸기 때문이다.

 

  고구려가 망한 뒤 고구려의 역사는 중국 오랑캐의 손에 의해 쓰여졌고, 그 뒤 고려시대에 자칭 ‘신라의 후예’ 김부식(金富軾)이 당나라와 신라 측의 시각에 편중되게 고구려의 역사와 나의 행적을 기록했던 것이다. 당나라와 신라인들에게 공포의 대상, 증오의 대상이었던 까닭에 이 사람 연개소문은 세상에 두 번 다시 태어나서는 안 될 패역무도한 인물, 부정적인 인간상으로 낙인찍혔던 것이다.

  나는 동명성제(東明聖帝)께서 건국하시고, 광개토태왕(廣開土太王)과 장수대왕(長壽大王)께서 전성기를 이룩하시고, 명림답부(明臨答夫) 을지문덕(乙支文德) 장군께서 위엄을 드높인 천손족(天孫族)의 나라 대고구려 제국의 역사를 빛내고자 신명을 다 바친 사람이다. 하지만 지금 이곳 저승에서 나는 자식 농사를 잘못 지어 나라를 망친 죄인이기에 그분들 앞에 차마 얼굴을 들지 못하고 있다. 물론 내 못난 자식 세 놈도 감히 내 앞에 낯짝을 내밀지 못한다.

  어느 시대 어느 민족이라도 제 나라의 역사를 바로 알고, 굳세게 지켜야 하며, 그 역사에서 교훈을 얻어야 한다. 근래 한족(漢族)의 나라 중국이 이른바 ‘동북공정(東北工程)’이란 이름 아래 국가적 사업으로 벌이는 고구려사와 발해사를 탈취하려는 음모에 너희 후손들은 보다 현명하고 강력하게 대처하지 않으면 안 된다. 최근 중국은 일본에 이어 한국사를 왜곡하는 것도 모자라 아예 빼앗아가려고 시도하고 있지 않느냐. 중국에게 역사를 빼앗긴다면 나 또한 그대들과는 전혀 상관없는 중국 오랑캐로 둔갑하고 말 것이다.

  중국사회과학원은 2002년부터 2007년까지 대형 국책 연구사업인 동북공정을 벌이고 있다. 너희 한국 돈으로 3조 원의 막대한 예산을 들여 추진하고 있는 이 동북공정은 엄연히 한국사의 일부인 고구려사를 중국사의 일부로 편입시키려는 것이 그 목적이다. 10여 년 전부터 발해사를 중국사의 일부라고 왜곡해온 중국이 고구려사까지 약탈하려는 의도는 어디에 있겠느냐. 간단히 말해서 우리 동이족의 후예인 한민족이 많이 살고 있는 동북 3성, 곧 요녕성․길림성․흑룡강성 등에 대해 너희가‘만주는 우리 땅’이란 소리를 꿈에도 하지 말라는 뜻이다. 나아가 조선족 등 소수민족의 독립운동을 뿌리부터 짓밟으려는 것이다.

  또한 더 나아가서는 고구려는 중국인이 세운 중국의 지방정권이었으니 북한이 붕괴되면 그러한 연고권을 내세워 중국의 괴뢰 정권을 세우겠다는 무서운 음모를 감추고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너희 후손들은 각별히 정신 차리지 않으면 안 된다.

  서쪽으로 요하에서 동북쪽으로 송화강 유역, 만주 대륙은 단군조선의 발상지요, 단군조선 다음에는 부여와 고구려와 발해가 차례로 일어섰던 동이족의 주류 한민족 5천 년 역사의 중심지였다. 비류(沸流)와 온조(溫祚) 형제가 모친 소서노(召西努)를 모시고 남하해 세운 백제는 고구려와 같이 부여에서 갈라져 나왔고, 신라도 건국의 주체세력인 박혁거세(朴赫居世) 김알지(金閼智) 일족이 만주에서 남하했다. 대조영(大祚榮)의 발해, 거란족의 요나라, 여진족의 금나라와 청나라가 모두 우리 부여와 고구려와 신라에서 갈라져나간 선진 문물의 기마민족 동이족의 일파였으니, 결국 만주는 우리 한민족사의 요람이요 근거지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중국은 고구려와 발해가 현재 자기네 영토에 있었던 나라라는 이유 하나만 가지고 중국사의 일부라는, 참으로 단순하고 어리석고 유치하기 그지없는 오랑캐다운 억지 주장을 펴고 있는 것이다. 중국의 사학자라는 자들은‘고구려와 발해는 중국 중앙정권의 지방 통치기구에 불과하고, 그 주민은 중국 북방의 소수민족’이라는 터무니없고 황당무계한 헛소리를 내뱉고 있다. 이런 식으로 나가다가는 고구려와 발해뿐 아니라 고조선과 부여도 만주 땅에 있었으니 그 역사가 중국사의 일부라고 생떼를 쓰지 않는다는 보장이 없지 않겠는가. 뿐이랴. 더 나아가 백제는‘고구려의 별종’이고, 고려는 고구려의 뒤를 이었으니 그 또한 중국사의 일부라고 나온다면, 너희 후손들은 역사도 없는 나라가 되어버릴 것이고, 결국은 제 나라 역사도 지키지 못하고 빼앗긴 못난 민족이 되어버릴 것이다. 그리고 조상들에게는 죽어서도 볼 낯이 없는 못난 후손, 후손들에게도 두고두고 못난 조상 소리를 들을 것이다.

  중국 오랑캐들이 이렇게 역사를 왜곡하고, 이웃 나라들의 역사를 탈취하고자 광분하는 데에는 또 다른 비밀, 무서운 음모가 숨어 있다. 그 흉계는 5천 년 중국사를 돌이켜보니 정작 한족의 역사란 보잘것없었기 때문이다. 저희가 천하의 중심이라며‘중국’을 자처해왔지만 한족이 세운 나라라고는 한나라와 송나라, 그리고 명나라 정도에 불과했던 것이다. 역사상 가장 광대한 영토를 가졌던 원나라는 어느 민족의 역사인가. 우리 동이족과 같은 뿌리인 몽골족의 역사였다. 오늘의 중국 국경을 확정한 청나라는 누가 세웠는가. 오랑캐라고 깔보던 여진족이 세운 나라였다. 발해 이후 만주의 주인이 되어 송나라를 깔아뭉갠 요나라는 거란족이, 금나라는 여진족이 세우지 않았던가. 여진족의 왕성(王姓) 애신각라(愛新覺羅)는 ‘신라를 사랑하고 잊지 말자’는 뜻이니 본래 신라 김씨였다.

  그런 까닭에 현재 중국 영토 안에 있던 나라의 역사는 동이(東夷) 서융(西戎) 남만(南蠻) 북적(北狄) 할 것 없이 모두 중국의 역사로 둔갑시키려는 것이다. 그래서 너희 후손들도 발해사에 이어 바야흐로 고구려사까지 빼앗길 위기에 처한 것이다.

  사람이든 나라든 어려울 때 도와주고, 슬플 때 위로해주는 좋은 이웃을 만나야 한다. 그런데 현재 너희 한국과 국경을 맞댄 중국과 일본이 좋은 이웃이냐. 천만의 말씀이다! 역사적으로 볼 때 한국이 중국과 일본의 침략을 당한 것은 수천 번도 더 된다. 그리고 현대에 들어서는 터무니없는 역사왜곡으로 너희 후손들을 괴롭히고 있으니 저승에서 바라보는 나로서도 참으로 딱하고 괴롭다. 너희가 여기에서 더 못난 후손이 되지 않으려거든 정신을 바짝 차려야 한다. 왜구의 후예 일본의 역사왜곡이 식민 지배를 정당화하려는 목적이라면, 중국의 역사 탈취는 패권주의적 역사관의 발로다. 몽골사․티베트사의 경우와 마찬가지로 한국고대사를 중국변방사로 둔갑시키려는 매우 불순한 목적을 가지고 있다.

  요하유역과 발해만 일대, 만주는 고조선문명의 발상지요, 우리 한민족사의 요람이었다. 고조선에 이어 부여 고구려 발해가 차례로 일어난 우리 고대사의 중심지였다. 역사적 사실이 분명함에도 불구하고 중국은 고구려사 발해사의 왜곡 탈취도 모자라 이제는 동북아 고대문명 전체를 중국사의 일부로 편입시키려는 문명사 빼앗기를 시도하고 있는 것이다.

  중국은 이미 알려진 동북공정에 이어‘탐원공정(探源工程)’을 통해 우리 고대사의 뿌리인 요하문명(遼河文明)을 중국사에 편입시키려는 의도를 노골화하고 있다. 탐원공정이란 중국의 신화시대를 역사시대로 편입하려는‘단대공정(斷代工程;1996~2000년)’에 이어 중국문명의 기원을 추적하는 작업이다. 중국학계는 이 공정을 통해 ‘고구려 민족은 기원전 1600~1300년에 은상씨족(殷商氏族)에서 분리됐다’는 터무니없는 주장을 하고 나섰다. 고구려가 중국의 고대국가 하(夏) 상(商:殷) 주(周)의 하나인 상나라에서 갈라져 나왔다는 어처구니없는 궤변이다.

  이들이 이런 역사왜곡을 자행하는 까닭이 또한 황당무계하다. 그동안 중국사의 기원은 황하문명설(黃河文明說)이 주류로 자리잡아왔었다. 그러나 근래 요하 유역에서 기원전 7000~1500년의 신석기 청동기 유적이 대거 발굴되었는데, 빗살무늬토기․비파형청동검․돌무덤 등 한국고대사의 특징인 유물유적이 대거 출토되었다. 특히 중국 측이 위기를 느낀 것은 기원전 1700~1100년대의 은허(殷墟) 유적보다 훨씬 오래전의 갑골문이 이 지역에서 출토된 사실이다. 이는 고조선의 요하문명이 중국의 황하문명보다 앞섰다는 분명한 반증이 되기 때문이다.

  결국 중국은 3대 공정을 통해 고구려사 발해사 뿐만 아니라 고조선사, 즉 한국문명사의 기원까지 왜곡하고 탈취하려는 속셈을 여실히 드러내 이제는‘중국문명은 황하문명뿐 아니라 요하 유역의 동북문명이 합쳐진 것’이라는 해괴한 논리를 전개하고 있다. ‘동북문명’이란 새로운 명칭을 만들어내면서까지 고조선사를 탈취하려는 것이다.

  중국인들의 비뚤어진 한국역사관은 뿌리가 깊다. 중국인들에게는 ‘한국이 조공을 바치고 책봉을 받았던 속국’이었다는 인식이 머릿속 깊이 박혀 있다. 조공 책봉이 일종의 외교관계였다는 사실은 안중에도 없다. 예를 들자면 최근의 중국영화 <신화>를 보니 고조선의 공주가‘나라와 백성을 살리기 위해’진시황(秦始皇)의 후궁으로 끌려간다는 내용이 나오더구나. 참으로 기가 막혔다! 만주와 한반도 전체를 아울렀던 대제국 고조선이 진시황 따위가 두려워 공주를 바쳤다는 기록은 양국 역사책 어디에도 없다. 이는 중국이 천하의 중심이고 주변국은 모두 오랑캐라는 오만무례한 중화사상에서 비롯된 역사패권주의적 발상에 불과하다.

  사정이 이럼에도 불구하고 너희 사학계와 정부는 무엇을 하고 있느냐. 고구려사․발해사에 이어 백제와 고려사도 중국의 변방사가 되고, 고조선사까지 빼앗기고, 한민족사를 빛낸 숱한 영웅호걸이 모두 중국 오랑캐로 둔갑해도 괜찮다는 말이냐. 너희 정부는 귀중한 혈세를 터무니없고 엉뚱한 데다 낭비하지 말고 그 절반, 아니 10분의 1이라도 역사지키기를 위한 예산으로 책정해야 할 것이다. 그리고 대 중국, 대 일본 외교에도 보다 주체적이고 자주적인 자세를 가져야 마땅하리라.

  그리고 김일성 김정일 부자의 세습왕조 북한이 붕괴되면 순탄하게 통일을 이룰 수 있다고 생각하지 마라. 그것은 참으로 멍청한 생각이다. 중국은 연고권을 주장하여 너희가 숨 한 번 내쉴 새도 주지 않고 괴뢰정권을 세울 것이다. 그것이 이른바 동북공정이니 뭐니 하는 것들의 노림수라는 사실을 뼈저리게 깨달아야만 한다. 아아, 사태가 이토록 비상한 지경에 이른 것은 너희 모두가 역사의 교훈을 망각하고, 역사교육을 소홀히 한 데서 비롯된 자업자득이 아니고 무엇이랴!

  너희 후손들이 역사의 교훈을 망각하다가 나라를 빼앗겼던 일제강점기에 민족사의 소중함을 통렬히 깨달았던 사학자 단재(丹齋) 신채호(申采浩)가 나의 전기 <연개소문전>에서 이렇게 말했다.

  - 연개소문은 당 태종 이하 당시 전 중화인에게 공포의 대상이었다. 신․구 <당서>가 비록 그 국가적인 수치를 꺼리어 당시의 전쟁 사실을 적을 때에 연개소문의 공격적 사실을 빼고 방어전의 사실만 썼을 뿐이다. 그럴뿐더러 그 방어전의 기사 가운데도 오직 안시성(安市城)의 한 번 전역(戰役)을‘당의 군사가 그들을 공격했으나 이기지 못했다’고 적은 것 이외에는 당 태종이 승리한 것으로 적었다. 그러나 그‘막리지, 더욱 교만․방자하였다’, ‘막리지, 감히 나오지 못하였다’ 등 문구의 측면을 보아 당인(唐人)의 연개소문에 대한 공포가 어떠했는지를 증명할 수 있다. 이위공(李衛公)의 <병서>에‘막리지는 자칭 병법가였다’고 한 비웃는 말의 이면에서 연개소문의 전략을 감탄한 의사가 적지 않음을 볼 수 있다.

  요양의 개소둔(蓋蘇屯)과 산해관에서 북경까지의 여러 곳에 가끔 있는 황량대(謊糧臺)와 직예․산서성의 각지에 산재하는 고려영(高麗營)이 연개소문의 군사가 중화 각지에 출몰한 유적임을 말할 수 있다. 그러한즉, 만일 연개소문이 죽지 않았으면 당의 군사가 고구려의 한 치 땅을 빼앗지 못했을 것은 명확한 사실이다. -

  너희처럼 제 정신을 잃지 않았던 신채호는 나 연개소문이 당 태종 이세민(李世民)의 침략전쟁 때 방어전만 펼친 것이 아니라 오히려 역습을 가해 중국 내륙까지 진격했다는 사실을 밝혀낸 것이다. <삼국사기> ‘열전’의 개소문편을 보면 김부식의 사대주의적․유학자적 역사관이 적나라하게 드러나 있다. 두 번 다시 읽어보기도 싫지만, 이야기 전개를 위해 할 수 없이 그 대목을 소개한다.

  - 그가(연개소문이) 바른 도리로써 임금을 섬기지 않고 잔인․포악한 짓을 제멋대로 하여 대역죄까지 지었다. <춘추>에 임금을 죽인 역적을 토벌하지 않는 것은 그 나라에 현인이 없음이라고 했는데, 소문은 제 몸뚱이를 보전하여 제 집에서 죽었으니, 이는 요행이라 할 수 있겠다. -

  이 무슨 개방귀같은 헛소린가! 김부식이 당과 신라의 큰 적이었던 나를 평가한 잣대가 같은 책인 <삼국사기> ‘열전’에서 고려 태조 왕건(王建)의 맞수였던 궁예(弓裔)와 견훤(甄萱)을 평가한 것과 별다름이 없었던 것이다. 하지만 이런 김부식도 나 연개소문이 불세출의 영웅호걸이란 사실만큼은 인정하고 들어갔으니, ‘그는 의표가 씩씩하고 뛰어났으며, 의기가 장하여 작은 일에 구애받지 않았다’는 구절과, ‘열전’끝부분의‘송나라 신종(神宗)이 왕개보(王介甫 : 王安石)와 국사를 의논할 때“당 태종이 고구려를 치다가 어째서 이기지 못했는가?”하니 왕개보는 “개소문이 비상한 사람이기 때문이었습니다.”라고 대답했다. 그렇다면 소문도 또한 재능이 있는 사람이었다.’라고 한 대목이 그렇다.

  나에 대한 역사적 평가는 이처럼 극명하게 엇갈리지만, 나는 분명히 고․당전쟁의 주역이었으며, 중국사에서 가장 잘난 왕으로 꼽히는 당 태종 이세민의 유일한 맞수였다. 하지만 나는 이세민을 전혀 대단한 인물이라고 여기지 않는다. 제 형제를 잔인하게 죽이고, 제 아비를 내쫓고 임금 자리를 차지한 그런 패륜아를 어찌 나와 같이 취급할 수 있단 말인가. 

  나 연개소문은 영양왕(嬰陽王) 18년(607년)에 동부에서 태어났다.

  조부는 연자유(淵子遊)이고 부친은 연태조(淵太祚)로서 야금(冶金)에 뛰어나고 활을 잘 다루었다. 그런데 나의 아들과 손자들의 성씨가 무슨 까닭에 천씨(泉氏)가 되었는가. 이것은 이세민의 아비 이름이 이연(李淵)이기 때문에 기휘(忌諱), 즉 이를 피하기 위해 천씨로 둔갑시킨 것이다. 저희 임금 이름과 같기 때문에 남의 나라 집권자의 성씨를 제멋대로 바꾼 것인데, 김부식이 이를 그대로 좇아 <삼국사기> ‘열전’에서‘개소문(혹은 蓋金)의 성은 천씨이다. 스스로 물속에서 태어났다고 하여 무리를 현혹시켰다’고 했으니 이 얼마나 한심한 노릇이냐.

  어쨌든 나 연개소문은 동부대인 연태조의 아들로 태어나 영웅적 기상과 비범한 의기로 15세에 이미 세상에 그 이름을 널리 떨쳤다. 그리고 아버지가 돌아간 뒤 동부대인의 직위를 계승했다.

  그렇게 하여 국정에 참여하여 영류왕(榮留王) 14년(631년)부터는 천리장성의 축조를 감독하기도 했다. 내가 나라를 바로잡고자 혁명을 일으킨 것은 영류왕 25년(642년) 9월이었다. 내가 혁명을 일으킨 직접적 원인은 무능한 황제 영류왕과 멍청한 대신들이 나를 제거하기로 모의했기 때문이었다. 이런 음모를 미리 알아낸 내가 대신 180여 명을 수도 장안성 남쪽 교외에 열병식을 거행한다고 초청하여 모조리 숙청해 버렸던 것이다. 즉 내가 당하기 전에 선수를 친 것이었다. 그리고 군사를 이끌고 황궁으로 쳐들어가 영류왕을 제거하고, 그의 아우인 고대양(高大陽)의 아들 고보장(高寶藏)을 새 황제로 내세웠다. 그렇게 하여 나 연개소문은 고구려의 최고 권력자가 되었던 것이다.

  그렇다고 해서 내가 단순히 권력을 장악하기 위해서, 피를 흘리기 좋아해서 혁명을 일으킨 것은 결코 아니었다. 혁명의 간접적 원인은 영류왕과 그의 측근 대신들이 당나라에 대해 굴욕적인 저자세 외교정책을 펼쳐 나의 분노를 샀기 때문이었다. 그 무렵 우리 고구려와 주변국의 정세를 다시 살펴보라.

  나의 거사로 제거된 영류왕은 이름이 고건무(高建武). 영양왕의 이복동생이다. 영양왕 23년(612년)에 수 양제(隋煬帝)의 침공으로 고수전쟁이 벌어지자 영양왕은 건무를 평양성방어사령관에 임명했다. 건무는 수나라 군사를 대파하고 평양성을 지키는 큰 전공을 세웠다. 그리고 618년에 영양왕이 죽자 제위에 올랐다. 그런데 황제가 된 영류왕은 전쟁영웅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영양왕의 강경책과는 반대로 유화적 외교정책을 채택했다.

  한편, 그해에 중국에서는 수나라가 멸망하고 당나라가 들어섰다. 그 이듬해에 영류왕은 사신을 보내 당나라 건국과 고조 이연의 즉위를 축하했다. 이어서 621년에도 사신을 보냈다. 그러자 당은 그 이듬해에 사신을 보내 고수전쟁 중 생긴 포로교환을 제의했다. 고구려가 여기에 응함으로써 양국은 일시적이지만 좋은 관계를 유지했다. 하지만 수나라와 목숨을 걸고 싸웠던 대부분의 장수와 노병은 이런 저자세 굴욕적 유화책에 불만을 품었다.

  그런데 영류왕 9년(626년)에 당나라에서 정변이 일어났다. 이연의 둘째아들 이세민이 친형인 태자 이건성과 동생인 이원길을 죽이고, 아비를 위협하여 왕위에 오른 이른바 현무문의 사건이 벌어졌던 것이다. 형제를 죽이고 아비를 협박하여 왕좌를 강탈한 이 형편없는 패륜아 이세민이 바로 중국사의 대표적 임금이란 당 태종이다. 어떤 멍청한 자들은 나의 적수로 신라의 김춘추(金春秋)나 김유신(金庾信)을 꼽기도 하지만, 김춘추 김유신 따위는 내 눈에 차지도 않았다. 나보다 아홉 살 많은 이 이세민이야 말로 굳이 말하자면 나 연개소문과 더불어 당시 동북아시아의 패권을 다투던 가장 강력한 적수라고 할 수 있었다.

  이세민은 중국통일이 마무리되자 이번에는 천하통일로 눈길을 돌렸다. 그런데 영류왕이 이런 중국 오랑캐들의 음흉한 속셈도 모르고 무슨 귀신이 씌웠는지, 아니면 무슨 약점을 잡혔는지 또다시 당에 사신을 보내 동돌궐의 힐리가한을 사로잡은 것을 축하하고, 고구려와 당의 국경을 표시한 지도(봉역도)까지 보냈던 것이다. 외교를 이 따위로 형편없이 하니까 오랑캐들에게 우습게 보인 것이다.

  고구려의 계속되는 저자세 외교정책에 자신감을 얻은 이세민은 그 이듬해인 631년에 장손사(長孫師)를 사신으로 보내 수나라 전사자들의 해골을 수습해 매장하고 위령제를 지냈다. 그러나 그것으로 끝난 것이 아니라 우리 고구려가 세운 전승기념물인 경관(京觀)까지 제멋대로 허물어버리고 돌아갔다. 이런 당나라 오랑캐들의 오만방자한 처사와 고구려 조정의 굴욕적인 저자세 외교에 나를 비롯한 고구려 무장들의 분노는 폭발 직전에 이르렀다.

  영류왕은 장수들의 불만을 무마하기 위해 남쪽으로는 신라를 공격하고, 당나라의 침공을 예방하는 천리장성을 축조토록 했다. 그러나 이세민은 638년부터 642년까지 토번․서돌궐․고창국 등을 복속시킨 뒤 고구려를 향해 칼끝을 겨누기 시작했다. 그래도 눈치를 못 챈 영류왕은 태자 고환권(高桓權)을 사신으로 보내고, 대신들의 자제도 당나라 국학에 입학할 것을 요청했다. 이에 더욱 고무된 이세민은 영류왕 24년(641년)에 진대덕(陳大德)을 사신으로 보내 고구려의 지리를 비롯한 정세를 낱낱이 염탐해오도록 시켰다. 동부대인과 막리지 직위에 올라 천리장성 축조를 감독하며 이런 사정을 훤히 꿰뚫고 있던 나는 이대로 두었다가는 나라가 망할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영류왕을 끼고 도는 썩어빠진 주화파 대신들이 사사건건 강경책을 주장하고 나서는 나를 제거하려고 들었다. 그런 까닭에 나 연개소문이 결국 선수를 쳐서 군사를 일으켰던 것이다.

  혁명에 성공하여 새 황제를 내세우고 최고 실권자가 된 나 연개소문이 어떻게 생겼을지 궁금한 사람이 많을 것이다. 정확하지는 않지만 중국 오랑캐들이 <구당서>에 이렇게 썼다.

  - (연개소문은) 수염이 길고 몸집이 크며 칼을 다섯 개나 차고, 좌우 사람이 감히 우러러보지 못했다. 항상 그 속관에게 땅에 엎드리게 하여 그 등을 밟고 말에 올랐으며, 말에서 내릴 때에도 그랬다. 밖에 나갈 때는 반드시 병졸들을 길에 벌이고 인도자가 길게 불러 행인을 물리치면 백성이 두려워 피하고 다 엉겁결에 구렁텅이로 빠졌다. -

  그런데 내가 다섯 자루의 칼을 찼다는 기록이 마치 사람들에게 위압감을 주고 공포심을 불러일으키기 위함이라고 오해하기 쉽지만, 당시 고구려의 무사라면 누구나 칼을 다섯 자루씩 차고 다녔으니 이는 위압감이나 공포분위기 조성과는 전혀 상관이 없는 것이다.

  내가 혁명을 일으켜 황제를 바꾸고 최고 권력자가 되었다는 보고를 받은 이세민은 아연 긴장했다. 이세민은 신하들에게 이렇게 말했다.

  “개소문이 자기 임금을 죽이고 나라 정사를 독판치고 있으니 이는 진실로 용서할 수 없는 일이다. 오늘 우리의 병력으로 고구려 땅을 빼앗기는 어렵지 않으나 백성들을 수고롭게 하고 싶지 않다. 그러므로 나는 거란과 말갈을 시켜 그들의 버릇을 길들이고자 하니 의견들이 어떠한가?”  

  그러자 이세민의 처남인 장손무기(長孫無忌)가 이렇게 대답했다.

  “개소문이 자기의 죄가 큰 줄 알고 우리가 토벌할까 두려워서 방비를 든든히 하고 있사오니 폐하께서 우선 참고 계시면 개소문이 방심을 하게 되어 또 교만하고 게을러져서 그의 죄악이 더욱 커질 터이니 이렇게 된 뒤에 쳐도 늦지 않을 것입니다.”

  그 무렵 고구려의 남쪽에서는 백제와 신라가 치열한 혈전을 벌이고 있었다. 백제의 의자왕(義慈王)이 즉위 이듬해인 642년에 친히 군사를 이끌고 신라의 40여 성을 빼앗았으며, 장군 윤충(允忠)은 대야성을 함락시키고 성주 김품석(金品釋) 내외를 죽였다. 그런데 김품석은 바로 김춘추의 사위였다. 다급해진 신라의 선덕여왕(善德女王)은 당나라에 사신을 보내는 한편 김춘추를 고구려로 보내 구원을 요청토록 했다. 하지만 김춘추는 나의 명령에 따라 감금당했다가 아무 소득도 없이 도망치다시피 귀국해야만 했다.

  당시 나는 신라보다 백제와 손잡는 것이 더 유리하다고 판단했다. 당과의 전쟁이 불가피할 경우, 만일 백제를 적으로 돌린다면 백제와 당의 수군이 황해에서 연합함대를 형성해 대동강을 거슬러 올라오면 큰일이라고 생각했던 것이다.

  신라의 구원 요청을 받은 당은 보장왕 3년(644년)에 대국으로서 분쟁을 조정한다는 되지도 않은 명목으로 현장(玄獎)을 고구려에 사신으로 보내 신라를 공격하지 말고 화친할 것을 권했다. 마침 신라를 공격하여 두 성을 함락시킨 내가 황제의 소환명령을 받고 장안성으로 개선해 현장에게 이렇게 말했다.

   “우리가 신라와 적대하는 것은 오늘에 새로 생긴 일이 아니다. 수나라가 우리를 침범했을 때 신라가 그 틈을 타서 오백 리의 땅을 도둑질해갔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신라가 그 땅을 돌려주지 않으면 결코 화해할 수 없다!”

  그러자 현장이 이렇게 반문했다.

   “이미 지난 일을 따져서 무엇 하겠습니까? 옛 땅을 찾기로 말한다면 귀국이 차지하고 있는 요동도 옛날에는 모두 중국 땅이 아닌지요? 그러나 우리 대당은 그것을 돌려달라고 하지 않는데 유독 고구려만 옛 땅을 찾으려고 고집하는 것이 옳은 일입니까요?”

  이에 내가 대노하여 벼락처럼 호통을 쳤다.

   “이런 단매에 때려죽일 오랑캐 새끼를 봤나! 이야말로 적반하장이구나! 네 놈들이 우리 요동 땅을 옛날 중국 땅이라고 하는 것은 유철(劉澈 : 한 무제)이 도둑질하여 이른바 한사군(漢四郡)을 두었던 것을 말하는 모양인데, 그렇게 따진다면 지금 너희 나라 영주나 유주도 모두 옛날 우리 고구려 제국의 군현이었다. 내가 살아 있는 동안 반드시 되찾고 말 터이니 돌아가서 너의 왕에게 그렇게 전하라우! 알갔네?”

  이렇게 푸대접을 당하고 쫓겨나다시피 한 현장의 보고를 받은 이세민은 고구려 정벌의 결심을 더욱 굳혔다. 하지만 좀더 명분을 쌓고 시간을 벌기 위해 다시 한 번 장엄(蔣儼)을 사신으로 보내 나를 만나보게 했다. 하지만 나는 장엄이란 호로자식을 아예 토굴 속에 가두어버렸다. 그러자 이세민은 기다렸다는 듯이 옳다구나 하면서 그해 11월에 마침내 고구려정벌군을 일으켰던 것이다. 이때 동원된 당나라 군사는 요동도행군총관 이세적(李世勣)이 이끈 육군이 6만여 명, 평양도행군총관 장량(張亮)이 이끈 수군이 4만 3천여 명, 말 1만 필, 전함이 500척이었다. 이 10만여 명의 침략군은 당 태종의 친정(親征)과 함께 30만 명이 넘는 대군으로 불어났다.

  그 이듬해인 보장왕 4년(645년) 4월에 요하를 건넌 이세적의 당군은 신성과 건안성을 공격했으나 고구려군의 철벽같은 수비에 성을 함락시킬 수가 없었다. 우리 고구려는 이미 수백 년 전부터 중국 오랑캐의 침략을 당해오는 동안 터득한 청야전술(淸野戰術)에 능했다. 이는 들판을 텅텅 비워 사람 한 명, 곡식 한 톨 남기지 않고 우물까지 막은 뒤에 모두 산성에 들어가 철통같이 지키는 전술이었다. 이세적은 군사를 돌려 10일간의 맹공 끝에 개모성을 함락시킨 뒤 요동성으로 공격 방향을 틀었다. 요동성은 전에 수 양제가 수차 공략하다가 실패한 고구려의 중요한 방어 거점이었다. 나는 요동성이 포위당하자 보병과 기병 4만 명을 보내 구원토록 했다.

  한편 5월에 이세적의 뒤를 따라 수십만 친군을 거느리고 뒤따르던 이세민은 200리에 걸친 요하의 늪지대인 요택에 흙을 퍼붓고 초목을 베어 다리를 놓고 가까스로 이를 건너 요동성에 이르렀다. 이때 이세민 녀석은 돼먹지 않은 자만심에 들떠 요택의 다리와 장비를 모두 부수어버리는 큰 실책을 범했다. 자칭 병법의 대가라는 자 치고는 도저히 범할 수 없는 어리석은 짓이었다.

  그렇게 우리 국경을 넘어와 수백 겹으로 요동성을 에워싼 당군은 300근짜리 큰 돌을 250m나 날릴 수 있는, 당시로서는 최신예 중무기인 포차(砲車)로 성벽을 공격했다. 바위에 맞은 성벽마다 구멍이 뻥뻥 뚫리고 무너지자 고구려 군사와 주민들이 급히 목책을 쌓아 방어했다. 당군이 당차로 성문과 성루를 부수어도 똑같이 막아냈다. 필사적 투혼이었다. 그렇게 10여 일 동안 치열한 공방전을 전개하다가 하루는 당군이 남풍을 이용하여 화공을 퍼부었다. 성루와 성안의 많은 집이 불탔다. 요동성의 군사와 백성은 사력을 다해 밀려드는 당군에 맞서 싸웠으나 결국 역부족으로 성은 함락당하고 말았다.

  요동성 점령에 기세가 오른 당군은 이번에는 백암성을 공격했다. 이 보고를 받은 나는 오골성의 군사 1만 명을 구원부대로 보냈지만 결국 오랑캐들의 인해전술에 밀려 우리 군사들은 물러날 수밖에 없었다. 백암성의 군사와 백성들도 악전고투했지만 비겁한 성주 손대음(孫代音)이 당군과 몰래 내통하는 바람에 성은 적의 수중에 떨어지고 말았다. 비겁하고 비열한 자는 어느 시대 어느 나라에나 있게 마련이다.

  요동성과 백암성에서 우리 군사와 백성 수만 명을 포로로 잡고, 60만 석에 이르는 군량을 확보한 당군은 이번에는 안시성으로 진격하여 성을 겹겹으로 포위했다. 후방에 안시성을 두고는 고구려의 내륙으로 진격할 수 없었으므로 안시성은 두 나라 모두에게 더없이 중요한 군사적 요충이었다. 당시 안시성에는 지용을 겸비한 출중한 장수 양만춘(楊萬春)이 성주로 있었다. 나는 북부 욕살(褥薩 ; 도독) 고연수(高延壽)와 남부 욕살 고혜진(高惠眞)에게 고구려군과 말갈군 15만 명을 이끌고 안시성을 포위한 당군의 배후를 치게 했다. 그러나 이들은 요동방면군 총사령관인 대대로(大對盧) 고정의(高正義)의 작전명령에 따르지 않고 마음대로 작전하다가 당군의 유인책에 빠져 무너져버렸다.

  사흘간에 걸쳐 안시성 외곽 주필산에서 벌어진 서전에서 우리 군은 아깝게도 패하고 고연수와 고혜진은 항복했지만, 전투는 결국 우리 고구려군의 승리로 끝났다. 나와 고정의의 작전대로 우리 고구려의 주력군 15만은 끈질긴 지구전을 펼쳐 적군의 보급선과 진격로를 차단하는데 성공하여 최대한 적군을 피로하게 만들고 마침내 승리할 수 있었던 것이다.

  이제 당군은 안시성을 함락하고 진격하든가, 아니면 퇴각하든가 양자택일밖에 남은 수가 없었다. 안시성전투는 그해 7월에 본격적으로 불붙었다. 강하왕(江夏王) 이도종(李道宗)이 선공을 퍼부었으나 성은 꿈쩍도 하지 않았다. 이세민은 포차나 당차 같은 공성무기로 하루에 6, 7차씩 공격해도 별 효과가 없자 7월 15일부터 9월 15일까지 60일간 50만 명을 동원해 성벽보다 높은 토산을 쌓았다. 그러나 이도종의 지휘로 이룩된 그 토산은 며칠도 안가서 무너져버렸다. 그것도 성벽 쪽으로 무너져 성벽 일부도 무너져버렸다. 그러자 고구려군 수백 명이 재빨리 무너진 성벽을 통해 밀고나와 토산을 점령했다. 그리고 참호를 파서 당군의 진격을 막은 뒤 불을 놓고 방패로 담을 쳐 수비를 굳건히 했다. 화가 난 이세민은 토산 책임자 부복애(傅伏愛)의 목을 쳐버렸다.

  이후 양군은 토산을 두고 4일간 치열한 접전을 벌였는데 결과는 우리 고구려군의 승리였다. 때는 음력 9월 말. 찬바람은 불어오고 양식도 떨어져가고 있었다. 안시성은커녕 자기들이 쌓은 토산조차 탈환하지 못한 이세민은 마침내 이번 전쟁은 승산이 없다는 결론을 내렸다. 남은 길은 퇴각뿐. 결국 이세민은 후퇴명령을 내렸다. 이세민이 급히 퇴각을 결정한 것은 추위도 추위지만 무엇보다도 나 연개소문이 당군의 보급선을 차단하고 유격전을 펼쳤기 때문이었다. 그런데 간교 음흉한 중국 오랑캐들이 사서에서 어떻게 썼는지 좀 보라.

  - 황제가 생각하기를 요동은 일찍 추워져서 풀이 마르고 물이 얼어 군마를 오래 머물게 할 수 없으며, 또한 군량이 장차 떨어지겠으므로 군사를 철수하라고 명령했다. …안시성 밑에서 군사로 시위를 하고 돌아가니 성안에서는 모두 자취를 감추고 나오지 않았다. 성주가 성에 올라 절하며 작별하니 황제는 그가 성을 굳게 지킨 것을 칭찬하면서 겹실로 짠 명주 100필을 주어 임금 섬기는 성의를 격려했다. -

  이런 웃기는 소리가 다 있느냐! 추위와 굶주림에 지친 군사를 이끌고 황급히 도망치기 바쁜 판에 무슨 여유로 군사 시위를 하며, 또 패퇴하는 주제에 적장을 가상타고 칭찬하며 상까지 주었다는 것이 말이나 되는 소린가. 중국 오랑캐들이 제 나라 역사의 치부를 가리려는 간교 음흉함이 이토록 심한 것이다.

  어쨌든, 그렇게 퇴각하여 요택을 건너는데 수레와 말들이 제대로 움직이지 못하자 명색이 황제라는 이세민이 몸소 말채찍 끈으로 섶을 묶어 진창을 메우며 황망히 달아났던 것이다. 그해 음력 10월이었다. 이렇게 고당전쟁은 나 연개소문의 빛나는 승리로 막을 내렸다.

  사실 고당전쟁에서 고구려군 최고사령관은 대막리지인 나 연개소문이었고, 그리고 요동방어전의 야전군사령관은 재상인 대대로 고정의였다. 양만춘은 직급이 고구려 관직 중 제5위인 위두대형으로서 안시성을 지키는 욕살이었고, 또 안시성은 요동성과 신성보다 규모도 작은 편이었다. 따라서 안시성주가 나의 유혈혁명에 반대하고, 또 나를 쳤으나 이기지 못했다는 따위의 일부의 헛소리는 전혀 믿을 게 못되는 것이다.

  나는 퇴각하는 이세민을 추격해 만리장성 너머 오늘의 북경 일대까지 진공했으며, 이 전쟁 이후 3년 만에 이세민이 죽은 뒤에는 직예성 산서성 등지까지 원정하여 일시적이나마 고구려의 군현을 설치하기도 했다. 이는 비록 사서에는 빠졌으나 오늘날까지 남아 있는 북경에서 산해관에 이르는 사이의 황량대와, 산동성 하북성 등지의 고려영이라는 지명, 북경 인근의 고려진․고려성 등이 증명해주고 있다.

  그런데 중국 오랑캐들은 <신당서>에서 또 이런 웃기는 기록을 남겼다.

  - 당 태종은 회군하면서 연개소문에게 궁복(弓服)을 내렸는데 연개소문은 이것을 받고도 사자를 보내 사례하지 않았다. 이에 조서를 내려 조공을 깎아버리라고 했다. -

  명색이 천자니 황제니 하는 자가 치욕스러운 패전 끝에 퇴각하면서 어느 겨를에 씹어 먹어도 시원치 않을 불구대천의 원수인 나에게 선물을 바치고, 또 그것을 받고도 감사의 인사를 하지 않았다고 조공을 깎으라고 했다니, 이는 참으로 허풍선이 중국 오랑캐다운 황당무계한 발상이요, 형편없는 뻥이라고 할 수밖에는 없다.

  그렇게 해서 제1차 고․당전쟁은 고구려의 승리로 끝났는데, 이세민은 죽을 때까지 패전의 치욕을 잊지 못하고 설욕의 기회만 노렸다. 하지만 나에게 혼이 너무나 크게 난 탓에 정면공격은 못하고 그 대신 산발적이며 국지적인 도발을 꾸준히 계속했다.

  보장왕 6년(647년)에는 우진달(牛進達)을 청구도행군총관으로 삼아 산동성 내주에서 바다를 건너 공격토록 하고, 이세적을 요동도행군총관으로 삼아 육로로 침공토록 했다. 그러나 이들은 모두 우리 고구려군의 맹렬한 반격에 아무 소득도 없이 패퇴했다. 그 이듬해에도 설만철(薛萬徹)이 청구도행군대총관이 되어 3만 명을 이끌고 내주에서 바다를 건너 아리수(압록강)로 들어와 박작성을 공격했지만 고구려군의 결사적 응전에 퇴각했다.

  보장왕 8년(649년) 4월에 마침내 우리 고구려의 숙적 이세민이 죽었다. 그가 죽기 전에 고구려를 치지 말라고 유언했다는 기록도 있지만 이는 새빨간 거짓말이다. 그는 죽기 직전까지 고구려에게 설욕하지 못한 것을 필생의 한으로 여기고 있어서 수많은 전함을 건조하고 30만 대군으로 제4차 고구려원정을 꾀하다가 죽어버린 것이었다. 그의 사인은 정확히 밝혀지지 않았지만 아마도 나 대막리지 연개소문에게 패한 것이 가장 큰 원인이었을 것이다. 안시성주 양만춘에게 맞은 화살촉의 독으로 죽었다는 설도 있고, 요택을 건널 때 피부병과 등창이 나서 앓다가 죽었다고도 하고, 패전의 치욕을 당한 원한이 만성두통이 되어 죽었다는 설도 있으니, 어느 쪽이 맞든 결국 이세민은 나 연개소문 때문에 죽은 셈이다.

  이세민의 뒤를 이어 즉위한 당 고종은 아비의 한을 풀어주기 위해 보장왕 14년(655년)에 정명진(程明振)과 소정방(蘇定方)을 보내 또다시 우리나라를 치게 했으나 실패했다. 또 보장왕 17년과 그 다음해에도 정명진과 설인귀(薛仁貴) 등을 보냈으나 역시 패퇴했다.

  보장왕 19년(660년) 8월에 신라와 당의 연합군이 백제를 멸망시켰다. 그리고 그 여세를 몰아 그해 12월에도 우리나라를 공격했지만 결과적으로는 아무 소득이 없었다. 그 이듬해 4월에 초조해진 당 고종은 35만 대군을 동원해 친정에 나서려다가 여러 신하들이 말리는 바람에 포기하고 말았다. 하지만 장수들을 보내 계속해서 고구려를 공격토록 했다. 그해 9월에 나는 맏아들 남생(男生)에게 군사 3만을 주어 아리수를 지키게 하니 당군이 감히 강을 건너지 못했다. 보장왕 21년(662년). 당군은 정월부터 또다시 고구려를 침공했다. 이런 망할 오랑캐 새끼들! 나는 머리끝까지 분노했다. 나는 친히 군사를 거느리고 출전해 사수싸움에서 당군 총사령관인 방효태(龐孝泰)와 그의 아들 13명 및 전군을 몰살시키고, 평양을 침공하던 소정방까지 패퇴시켰다.

  나 연개소문은 보장왕 23년(664년)에 58세를 일기로 죽고 맏아들 남생이 막리지를 세습하여 권력을 장악했다. 내 죽음의 원인은 병명을 알 수 없는 급성 괴질인데, 나는 죽기 전에 남생 남건(男建) 남산(男産) 세 아들을 불러 이렇게 유언했다.

   “너희 형제는 고기와 물같이 화합해 벼슬을 다투는 어리석은 짓을 하지 말라. 만일 그런 일이 있으면 반드시 이웃의 웃음거리가 될 것이다.”

  그러나 이것은 내가 죽은 뒤에야 깨달은 사실이지만 자식 농사를 잘못 지은 것이 화근이었다. 내가 죽은 지 불과 2, 3년도 안되어 세 아들놈이 권력투쟁을 벌여 결국 고구려를 멸망의 길로 이끌었기 때문이다. 사실 내가 그런 유언을 한 것도 평소 세 아들놈의 사이가 나쁜 것을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자식들에게 권력을 세습한 것이 돌이킬 수 없는 나의 과오였다. 그런 의미에서 말한다면 정권이란 자질과 자격을 갖춘 자에게 돌아가야만 한다는 것도 내가 남긴 교훈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자질도 없고 자격도 없는 자가 국가지도자 자리에 앉아서 오만무례한 이웃 나라에게는 질질 끌려 다니거나 무작정 퍼주기나 하면서 헛세월이나 보낸다면, 그런 나라의 앞날에 무슨 희망이 있겠는가. 그런 지도자는 나라가 망하기 전에 일찌감치 끌어내리는 것이 천만번 마땅할 것이다.  

  고구려는 내가 죽은 뒤에 세 아들이 내전을 벌인 끝에, 둘째 남건이 막리지가 되어 국정을 전담하여 당군의 침략을 막으려 했지만 이미 기울기 시작한 국운은 둑이 터진 제방과도 같아서 걷잡을 수 없었다. 보장왕 27년(668년) 고구려의 내분을 둘도 없는 호기로 삼은 당은 반역자 남생을 길잡이 삼아 50만 대군으로 고구려를 침공했다. 설상가상으로 나의 동생인 연정토(淵淨土)까지 12개 성을 들어 신라에 항복했다. 신라도 20만 대군을 동원하여 당군과 합세하여 고구려를 공격했다. 남건․남산 등이 죽을힘을 다해 도성을 지켰지만 이미 때는 늦어버려 그해 9월에 항복하고 말았다. 이로써 동명성제께서 개국한 동방의 대제국 고구려는 천년도 못되어 무상한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져버렸던 것이다.

  끝으로 다시 한 번 강조하여 당부하노니 너희 후손들은 역사를 바로 보고, 역사에서 교훈을 찾기 바란다. 고구려가 망한 것은 당나라의 침략보다도 지도자 자질도 자격도 없던 나의 못난 자식놈들 때문이었다. 그런 까닭에 지금 너희가 나의 무덤이 어디에 있는지도 모르게 된 것이 아니냐.

  그러나 저러나 이제 중국 오랑캐들에게 고구려의 역사마저 빼앗기고 만다면 동명성제와 영락대제와 을지문덕 장군, 그리고 나 또한 국적이 중국 오랑캐로 둔갑하고 말겠지만, 너희도 역사를 빼앗긴 못난 후손, 못난 조상이 된다는 사실을 뼈저리게 깨달아야만 하리라. 그보다도 너희가 남북통일을 이루지기도 전에 김정일정권이 폭삭 망해버리면 북녘에 중국의 괴뢰정권이 잽싸게 들어설까 매우 걱정되는구나! 그렇게 되면 나는 이 저승에서도 동명성제와 영락대제, 을지문덕 장군 등 어르신들을 볼 면목이 더욱 없어지게 되겠구나!

  사태가 이처럼 심각함에도 불구하고 너희 못난 후손들은 집안싸움이나 계속할 작정이냐! 북을 쳐서 군사를 내보낼 때 쇠(징)를 쳐서 군사를 불러들이는 어리석음을 범하지 마라. 그에 앞서서 싸우지 않고도 이기는 법을 찾아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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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가의 말

  정치와 경제가 어지러운 것은 역사의 교훈을 무시한 탓이다. 역사를 바로 보고 바로 가르쳐야 현재의 잘못을 바로잡고, 미래의 좌표를 제대로 세울 수 있다. 되지 않게 돌아가는 요즈음 나라꼴을 보면 연개소문이 되살아나 새 판을 짜고, 부국강병책을 강력하게 펼쳤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든다. 영류왕이나 선조처럼 군수 노릇은커녕 면장 이장도 제대로 못할 경박하고 경망스럽고 저질스러운 자들이 대통령 총리 장관 자리에 앉아 거들먹거리며 국정을 농단한다면 그 나라가 어찌 잘 되겠는가.

  이 말세 같은 난세에 연개소문 이순신 같은 절세영웅이 새삼 그립다. 그런 까닭에 최고지도자의 리더십이 중요하다고 강조하는 것이다.

  나는 이번 2월 중에 마야출판사에서 새 책 <한국사 제왕열전>을 출간한다. 나라의 밝은 앞날, 바람직한 앞날을 위해 지난 3년간 심혈을 기울인 책이다. <연개소문> 드라마 동호인을 비롯한 독자 여러분의 격려와 성원을 당부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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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작성자냥냥냥냥γ | 작성시간 10.01.03 연개소문..천하의 대영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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