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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위인전

총명하고 너그러운 왕자 광평대군廣平大君

작성자도경당|작성시간04.11.30|조회수330 목록 댓글 0

 

조선왕조의 기틀을 바로 세우고 나라가 발전 할수 있는 기반을 탄탄히 다지고, 문화의 전성기를 구가했던 시대는 세종의 치세기였다.

세종대왕은 태조이성계의  다섯째 아들 태종 이방원의 세째아들로 맏형 양녕대군 이제가 세자에서 폐위당하자 세자에 책봉되었다.

세종은 어릴적부터 공부하기를 게을리 하지 않고 총명하고 명석한 학행으로 부왕 태종의 뜨거운 관심을 받았다.

세종은 태종의 양위를 받고서 조선 제 4대왕의 등극 한 이후, 자신이 배워온 학문적 경험을 토대로 건국한지 30년 도 안된 나라의 기틀을 튼튼히 하였다.

정치를 안정케 하고 국방을 강화했으며, 과학기술또한 지대한 관심을 쏟아 놀라운 발전을 이루었다.

무엇보다 옛 글자를 본받아 그것을 더욱 체계화하여 훈민정음을 반포하였고, 백성들이 문자를 쓰는데에 불편함이 없도록 하였으니 세종 치세기에는 혼란스러운 건국 초의 문제들을 극복하여 모든 것이 안정되어졌다.

정치적으로도 문화적으로도 안정기를 맞이하여 참으로 오래만에 민족의 문화전성기를 구가하였다.

세종의 안정된 치세를 도와주고 문화의 꽃이 활짝 피울 수 있었던 것은 세종의 정책에 참여한 여러 신하들과 학자들의 공이 있었지만 세종의 아들들도 돋보였다 할 수 있겠다.

세종의 첫째 아들 문종은 비록 심약하였으나 부친을 닮아 총명함을 갖춘데다가 세자의 자격으로 부친의 국사를 잘 보필하였다.

특히 인사권을 담당하면서 인재등용의 공평함, 어느 한 쪽도 막히지 않은 언로를 자유롭게 열어 나라일에 막힘이 없도록 하였다.

그리고 세종의 아들들 중 어느누구보다도 야심이 컸던 수양대군은 부친의 편찬사업을 도와주기도 하였다.

한편, 세종대왕의 다섯째 아들인 광평대군은 여러 왕자들 중에서도 성품이 너그럽고 용모가 풍미하여 세종이 사랑했던 아들 중의 하나이다.

광평대군은 이름이 여璵 자가 환지之, 호가 명성당. 시호는 장의懿이다.

그는 1425년에 출생하여 1435년, 성균관에 입학하였다.

그는 어릴적부터 총명하고 자질이 뛰어나 13세의 어린나이로 함경도 종성의 경재소를 관리하여 북변의 국방강화와 풍속 교화에 일익하였다.

그는 부친못지 않게 학문에 열중하여 효경, 소학, 좌전 및 사서삼경에 능통하였음은 물론이요, 국어, 음률, 산수에도 밝았다.

또한 격구에도 뛰어났으며 서예에도 일가견이 있었다.

다재다능하였던 그의 재능은 그 자손들이 하나씩 하나씩 그 심성을 이어닮아 각계에 걸쳐 두각을 나타내었다.

모든 방면에 걸쳐 천재적인 능력을 보인 광평대군은 애석하게도 19살의 나이로 요절하여

부친 세종이 매우 슬퍼했다고 한다.

생전인 1437년, 태조 이성계의 일곱번째 아들 무안대군 방번의 양자가 되어 무안대군의 뒤를 이어 부친 세종과 사촌형제지간이 되는 우스운 일도 있다.

자신이 가진 재주를 모두 뜻한 바 펼치지 못하고 아깝게 요절한 광평대군은 조선의 왕자들 중에서도 그 매력이 매우 출중할 것이다.

 

 

 

오랫동안의 공백을 깨트리고...도경당 삼가 서함..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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