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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위인전

[스크랩] [근대사 인물]민영환 (閔泳煥 1861∼1905 철종 12∼고종 42)

작성자기원전 취객|작성시간05.02.12|조회수58 목록 댓글 0
강화도조약의 파기를 상소하였으나 뜻이 이루어지지 않자 죽음으로 항거할 것을 결심, 본가에서 자결 순국하시기 전 마지막 유언....



"" 을사조약으로 나라의 외교권이 박탈당한 엄청난 사변은

바로 우리의 죄가 아니던가 ! "

" 아, 나라의 수치와 국민의 욕됨이 이에 이르렀으니

우리 민족은 장차 생존경쟁에서 모두 멸망하리라.

무릇 살기를 바라는 사람은 반드시 죽고,

죽기를 기약하는 사람은 도리어 삶을 얻나니,

나 민영환은 죽음으로 황제의 은혜에 보답하고

2천만 동포 형제에게 사죄하려 하노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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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후기의 문신인 민영환은 17세 때 문과에 급제하여 병조판서·한성 부윤 등의 벼슬을 지냈다. 일본·미국·영국 등 여러 나라를 방문하여 견문을 넓히고, 선진국의 앞선 문물을 받아들여야 한다고 생각했다. 고국으로 돌아온 그는 즉시 여러 가지 제도를 개혁하는 데 힘쓰는 한편, 민권 신장에도 앞장섰다. 독립협회를 지원하다가 한 때 관직에서 파면 당했던 민영환은 관직에 복귀되어 나라 일을 보면서, 슬슬 간섭을 하고 들어오는 일본을 성토하면서 친일파들과 대립하다가 미움을 사기도 했다. 그러던 중 을사조약이 체결되자 조병세와 함께 대신들을 인솔하여 대궐에 나아갔다. 을사조약의 부당함을 임금에게 아뢰고 일본을 성토하기 위해서였다. 그러나 민영환 일행은 일본 헌병들에 의해 강제 해산되고 말았다. 다시 고종에게 상소를 올렸으나 이미 대세는 기울어 있었다. 지금의 국무총리인 의정 대신 조병세가 약을 먹고 자살했고, 민영환도 유서를 남기고 자결하였다. 그의 충절을 기려 나라에서는 충정이라는 시호를 내렸다. 조선 말기의 문신·순국지사. 자는 문약(文若), 호는 계정(桂庭). 본관은 여흥(驪興). 서울 출생. 호조판서 겸호(謙鎬)의 아들이다. 1895년 일제가 명성황후(明成皇后)를 시해하는 을미사변을 일으키자 주미전권대사를 거부하고 낙향하였다. 96년 4월에는 러시아황제 니콜라이 2세 대관식에 특명전권공사로 참석하였는데, 이때 중국 상하이[上海]와 일본·미국·영국·네덜란드·독일·폴란드 및 러시아를 횡단하는 등 해외파견사절로는 최초로 세계일주를 하였다. 다음해 1월에도 영국·독일·러시아·프랑스·이탈리아·오스트리아를 특명전권공사로서 방문, 러시아 황제에게 고종의 친서를 전달하고 각국 외교사절을 예방하였다. 두 차례의 해외여행으로 서구문물제도와 근대화 모습을 직접 체험하였다. 독립협회를 적극 후원하고, 일본의 내정간섭에 항거하여 친일내각과 대립하였기 때문에 한직(閑職)인 시종무관(侍從武官)으로 좌천당하였다. 1905년 11월 을사늑약이 체결되어 나라를 빼앗기게 되자 의정대신 조병세(趙秉世)와 함께 조약의 파기를 상소하였으나 뜻이 이루어지지 않자 죽음으로 항거할 것을 결심, 본가에서 자결하였다. 그의 충절을 기려 나라에서는 후하게 예장(禮葬)하라는 명령과 함께 대광보국숭록대부의정대신(大匡輔國崇祿大夫議政大臣)을 추증하였고, 의절의 정문도 세웠다. 62년 건국훈장 대한민국장이 추서되었다. 유고에는 《해천추범(海天秋帆)》 《사구속초(使歐續草)》 등이 있다. 시호는 충정(忠正). .[민족반역자처단협회] 작성&출처-민족반역자처단협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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