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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위인전

[스크랩] [근대사 인물]신채호 申采浩 [1880.11.7~1936.2.1]

작성자기원전 취객|작성시간05.02.12|조회수95 목록 댓글 0

강도 일본이 우리의 국호를 없이하며, 우리의 정권을 빼앗으며,

우리의 생존적 필요 조건을 다 박탈하였다.

경제의 생명인 산림, 철도, 광산, 어장..... 내지 소공업 원료까지 다 빼앗아,

일체의 생산 기능을 칼로 베며, 도끼로 끊고, 토지세·가옥세·인구세·가축세·지방세·주초세·비료세·종자세·영업세·청결세·소득세....기타 각종 잡세는 날로 증가하여 혈액은 있는 대로 다 빨아고..

대다수 인민 곧 일반 농민들은 피땀을 흘리어 토지를 갈아

그 해의 소득으로 가족이 입에 풀칠할 수도 없을 정도이고,

일본 강도에게 바쳐 그 살을 찌워 주는 소나 말이 될뿐이며 ,

나중에는 그 소나 말의 생활도 못하게 일본에서 오는 이민자들이 증가하여

<딸깍발이> 등쌀에 우리 민족은 발디딜 땅이 없어 산으로 물로 서간도로 북간도로,

시베리아의 황야로 몰리어 가 굶주리는 귀신이나 떠돌아 다니는 귀신이 될 뿐이며

강도 일본이 헌병정치를 단행하여 우리 민족이 한걸음의 행동도 임의로 못하고,

언론·출판·결사·집회의 일체 자유가 없어 고통과 분한이 있으면 벙어리의 가슴이나 만질 뿐이요,

행복과 자유의 세계에는 눈뜬 소경이 되고,

자녀가 나면 <일어를 국어라, 일문을 국문이라>하는

노예 양성소- 학교로 보내고,조선 사람으로 혹 조선 역사를 읽게된다 하면 ...

<삼한시대 한강 이남을 일본 영토>라 한 일본놈들이 적은 대로 읽게 되며,

신문이나 잡지를 본다 하면 강도 정치를 찬미하는 반(半) 일본화한 노예적 문자뿐이며,

똑똑한 자제가 난다하면 환경의 압박에서 염세 절먕의 타락자가 되거나 그렇지 않으면

<음모사건>의 명칭하에 감옥에 억류되어 주뢰, 가쇄, 단근질, 전기질, 바늘로 손톱밑·발톱밑을 쑤시는,

수족을 달아매는, 콧구멍에 물붓는, 생식기에 심지를 박는 모든 악형을 다 당하고,죽거나

요행히 살아서 옥문을 나온대야 종신 불구의 폐질자가 될 뿐이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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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관 고령(高靈).

필명 금협산인(錦頰山人)·무애생(無涯生). 호 단재(丹齋)·일편단생(一片丹生)·단생(丹生).

1880년 11월 7일 대전에서 출생

1897년 신기선(申箕善)의 추천으로 성균관(成均館)에 들어가 1905년 성균관 박사가 되었으나, 그해 을사조약이 체결되자 《황성신문(皇城新聞)》에 논설을 쓰기 시작하였다. 이듬해 《대한매일신보(大韓每日申報)》 주필로 활약하였으며, 내외의 민족 영웅전과 역사 논문을 발표하여 민족의식 앙양에 힘썼다. 1907년 신민회(新民會)와 국채보상운동(國債報償運動) 등에 가입·참가하고, 이듬해 순 한글 《가정잡지》를 편집·발행하였다. 또한 《대한협회보(大韓協會報)》 또는 《기호흥학회보(畿湖興學會報)》 등에 논설을 발표하고 1909년 일진회(一進會) 성토에 앞장섰다. 1910년 4월 신민회 동지들과 협의 후 중국 칭다오[靑島]로 망명, 그곳에서 안창호(安昌浩)·이갑(李甲) 등과 독립운동 방안을 협의하고 블라디보스토크로 건너가 《권업신문(勸業新聞)》에서 활동하다가, 1914년 이 신문이 강제 폐간되자 그 해 남북 만주와 백두산 등 한국 민족의 고대 활동무대를 답사하였다. 1915년 상하이[上海]로 가서 신한청년회(新韓靑年會) 조직에 참가하고, 박달학원(博達學院)의 설립 운영에도 힘썼다. 1919년 상하이에서 대한민국임시정부 수립에 참가, 의정원(議政院) 의원, 전원위원회 위원장 등을 역임했으나, 한성임정(漢城臨政) 정통론과 이승만 배척운동을 내세워 공직을 사퇴하고 주간지 《신대한(新大韓)》을 창간하여 임시정부 기관지 《독립신문(獨立新聞)》과 맞서기도 하였다. 그 후 비밀결사 대동청년단(大同靑年團)단장, 신대한청년동맹(新大韓靑年同盟) 부단주(副團主) 등에 피선되었다. 1923년 민중의 폭력혁명으로 독립의 쟁취를 부르짖고 임시정부 창조파(創造派)의 주동역할을 하다가 다시 베이징[北京]으로 쫓겨가 다물단(多勿團)을 조직 지도했으며, 중국과 본국의 신문에 논설과 역사논문을 발표하였다. 1925년경부터 무정부주의를 신봉하기 시작, 1927년 신간회(新幹會) 발기인, 무정부주의 동방동맹(東方同盟)에 가입, 1928년 잡지 《탈환》을 발간하고 동지들과 합의하여 외국환을 입수, 자금 조달차 타이완으로 가던 중 지룽항[基隆港]에서 피체 10년형을 선고받고 뤼순[旅順] 감옥에서 복역 중 1936년 옥사했다. 적과 타협없이 독립투쟁을 전개하는 동안 ‘독립이란 주어지는 것이 아니라 쟁취하는 것이다’라는 결론에 도달, 이와 같은 견해가 곧 그의 역사연구에도 그대로 반영되어 고조선(古朝鮮)과 묘청(妙淸)의 난(亂) 등에 새로운 해석을 시도했고 ‘역사라는 것은 아(我)와 비아(非我)의 투쟁이다’라는 명제를 내걸어 민족사관을 수립, 한국 근대사학(近代史學)의 기초를 확립했다. 저서에 《조선상고사(朝鮮上古史)》 《조선상고문화사(朝鮮上古文化史)》 《조선사연구초(朝鮮史硏究艸)》 《조선사론(朝鮮史論)》 《이탈리아 건국삼걸전(建國三傑傳)》 《을지문덕전(乙支文德傳)》 《이순신전(李舜臣傳)》 《동국거걸(東國巨傑)》 《최도통전(崔都統傳)》 등이 있다. 1962년 건국훈장 대통령장이 추서되었다. [민족반역자처단협회] 작성&출처-민족반역자처단협회 (http://cafe.daum.net/kokoi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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