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구려가 망하자 아버지 사계(舍鷄)를 따라 당나라 안서(安西)에 가서 음보(蔭補)로 유격장군(遊擊將軍)에 등용되고, 20세 때 장군(將軍)에 올랐으며, 안서 절도사(安西節度使) 부몽영찰(夫蒙靈 )의 신임을 얻어 언기진수사(焉耆鎭守使)가 되었고, 740년경 톈산산맥[天山山脈] 서쪽의 달해부(達奚部)를 정벌한 공으로 안서 부도호(安西副都護)에 승진하고, 이어 사진도지병마사(四鎭都知兵馬使)에 올랐다.
747년 토번(吐蕃:티베트)과 사라센제국이 동맹을 맺고 당을 견제하려고 동진(東進)하자, 행영절도사(行營節度使)에 발탁되어 군사 1만을 인솔, 파미르고원을 넘어 사라센제국과 동맹을 맺은 72개국의 항복을 받고 사라센제국의 동진을 저지, 그 공으로 홍려경어사중승(鴻'A卿御史中丞)에 오르고 이어 특진 겸 좌금오대장군동정원(特進兼左金吾大將軍同正員)이 되었다. 750년 제2차 원정에 나가 사라센과 동맹을 맺으려는 타슈켄트[石國]를 토벌하고 국왕을 잡아 장안(長安)에 호송한 공로로 개부의동삼사(開府儀同三司)가 되었으나, 장안의 문신들이 포로가 된 타슈켄트 국왕을 참살했기 때문에 이듬해 서역 각국과 사라센이 분기하여 연합군을 편성, 탈라스의 대평원으로 쳐들어왔다.
이를 막기 위해 다시 7만의 정벌군을 편성, 제3차 원정에 나갔다가 크게 패하고 후퇴, 귀국 후 밀운군공(密雲郡公)에 봉해졌다. 755년 안녹산(安祿山)이 반란을 일으키자 정토군 부원수로 출전, 선발군으로 나가, 패전한 우군을 구원하기 위해 방어 담당지역을 무단이동한 사실에 대하여, 평소 사원(私怨)을 품고 있던 부관이 과장하여 밀고(密告)함으로써, 진중에서 참형되었다.
이상입니다
중국 쥐새끼 만한 것들이 어디서 덤벼~~~다 죽었어!!!!
댓글
댓글 리스트-
작성자기원전 취객 작성시간 05.02.16 -.- 고선지가 더 오래된 인물입니다. 서양의 고선지 나폴레옹이 맞는 표현
-
작성자업타운소년 작성시간 05.03.24 고구려 후예라고 해도 고구려의 부흥이나 우리민족의 이익을 위해 한 일은 없는걸로 아는데... 피는 흐르지만 죽는 그날까지 중국사람으로 사셨던 것 같아 별로... 단지 우리민족을 위해 아무일도 하지 않았는데 핏줄이라는 이유로 자랑스럽게 생각할 필요는 없을듯..
-
작성자업타운소년 작성시간 05.03.24 저번에 어떤님께서 고선지장군은 고구려의 부흥을 도모할만한 상황이 충분히 되었는데도 신경조차 쓰지 않았다고 말씀하셨던게 기억나는데... 고구려부흥과 민족의 번영을 위해 서역을 얻었더라면 더 좋았을텐데요..
-
작성자고구려우리꺼~! 작성시간 06.04.09 윗분말대로 고선지 장군은 고구려의 피가 흐르고는 있었지만 정신은 중국인이였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