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AFE

한국 위인전

[현대의인물]우 장춘

작성자가을바다|작성시간05.10.07|조회수93 목록 댓글 0

1898 일본 도쿄[東京]~1959. 8. 10

농학자.

우장춘
별기군 훈련대 제2대 대장을 지내다 을미사변에 연루되어 일본에 망명한 우범선(禹範善)의 맏아들로 태어났다. 1916년 구례중학교를 졸업하고 도쿄제국대학[東京帝國大學] 농과대학 실과에 진학했고, 1919년 졸업과 함께 일본 농림성(農林省) 농사시험장에 취직하여 육종학(育種學)연구를 시작했다. 1922년부터 〈유전학 잡지〉에 〈종자에 의해 감별할 수 있는 나팔꽃 품종의 특성에 관하여〉 등 다수의 논문을 발표하며 왕성한 연구활동을 보였다. 1930년 나팔꽃에 관한 그의 박사학위 제출용 논문이 시험장의 화재로 소실되어 뜻을 이루지 못했으나 4년여의 노력 끝에 〈종의 합성〉이라는 논문을 다시 작성·제출하여 1936년 도쿄제국대학 농학박사학위를 받았다. 이 학위논문은 세포유전학연구에서 게놈을 분석하고 기존의 식물을 실제로 합성시킨 최초의 사례로서 〈일본 식물학 잡지〉에 발표되어 세계적인 명성을 얻었다. 박사학위 취득 후에도 기사(技師)가 되지는 못하고 계속 기수(技手)에 머물렀으나 1937년 다키이종묘회사[瀧井種苗會社]연구농장장으로 초빙되어 자리를 옮겨 1945년 사임할 때까지 의욕적인 연구는 물론 〈원예와 육종〉을 발행하는 등 육종의 과학화를 위해 노력했다. 8·15해방 후 식민통치로 피폐해진 농촌을 구하고자 1947년부터 벌어진 우장춘 박사 귀국추진운동에 답하여 귀국을 결심하게 되어 1950년 한국농업과학연구소(1953년에 중앙원예기술원으로 개칭)의 초대소장에 취임했다. 귀국 후 무·배추 등 채소와 볍씨 품종개량에 정열적인 노력을 기울였으며 육종학에 대한 인식을 높이고자 일본의 기하라[木原] 박사가 개발한 씨없는 수박을 재배하고 후진양성에도 힘써 김종·진정기·김영실, 그리고 원우회의 제자들을 길러내 한국 농업근대화에 커다란 기여를 했다. 1953년 중앙원예기술원 원장, 1954년 학술원 추천회원, 1958년 농사원 원예시험장 책임자가 되었다. 1959년 대한민국 문화포장을 받고 같은 해 8월 10일 위·십이지장 궤양으로 죽었다.

다음검색
현재 게시글 추가 기능 열기
  • 북마크
  • 공유하기
  • 신고하기

댓글

댓글 리스트
맨위로

카페 검색

카페 검색어 입력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