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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사 인물]문무를 겸비한 대 이인(異人), [강감찬] 장군

작성자新雨師(신우사)|작성시간05.04.13|조회수208 목록 댓글 0

[소식] 역사인물 탐구│강감찬 장군
 
 
 문무를 겸비한 대 이인(異人), [강감찬] 장군
 
 
 고려 초 국제정세
 [강감찬](姜邯贊, 948~1031, 정종3∼현종2) 장군의 본관은 금주(衿州: 현 서울 관악구 봉천동)이며 훗날 인헌공파(금천 강씨)의 파조(派祖)가 된다. 그가 태어난 해는 태조 왕건이 고려조를 개국(918)한지 꼭 한 세대가 흐른 3대 정종 대이다.
 
 당시 국제정세를 보면, 한족이 세운 국가 중 한(漢)과 더불어 문화의 최전성기를 이루었다는 당(唐, 618~907)이 이미 멸망하고, 야율아보기(耶律阿保機)가 요하(遼河) 유역의 유목민족들을 규합한 다음 황제를 칭하며 거란을 건국(916)한 직후였다. 거란은 926년 대진국(발해) 멸망 이후 화북의 연운(燕雲) 16주를 획득, 947년 국호를 요(遼)로 개칭한 다음 계속 남진정책을 실시하였고 960년 송(宋)이 건국됨으로써 대치상태를 이루게 된다.
 
 원래 거란을 비롯한 돌궐, 말갈, 몽골, 흉노, 여진 등은 모두 기마종족들로서 환웅배달 시절부터 우리 민족의 같은 연맹종족들이었다. 이런 역사적 배경에선지 이들은 지금까지도 유독 우리민족에 강한 유대감을 표하고 있다. 돌궐의 후예인 터키가 그렇고, 몽골이 그렇다.
 
 당시 거란은 자기들과 거의 동시에 개국한 고려에 형제국으로서 옛 우의를 회복하자고 사절단을 보내었다. 그러나 고려는 거란이 보내 온 사신을 섬에 유배시켜 버리고 선물로 보내 온 낙타를 굶겨죽이기도 했다.
 
 이에 대해선 거란이 대진(발해)을 멸망시킨 데 따른 보복이라는 말도 있으나, 필자 생각엔 고려를 건국한 주축들이 당의 유학파인 신라계 사대부들이어서 이미 중화사관에 빠져 있었던 것이 주된 이유이지 않나 한다.
 
 아울러 대진(발해)의 멸망에 관해서도 외세에 의해서가 아니라 천재지변에 의해서라는 새로운 설이 발표된 적도 있다.(1998년『KBS일요스페셜-「제3편 불의 시대」방영)
 
 
 3차에 걸친 거란의 고려침략
 아무튼 거란은 고려를 3차에 걸쳐서 침략하게 된다. 제1차 침략은 993년(성종 12) 10월 요의 소손녕에 의해서였고, 이때 활약한 인물이 담판으로 오히려 강동 6주를 획득한 서희 장군이다. 요의 제1차 침략의 목적은 고려와 송의 관계를 단절시키고 요와 교류하게 하려는 것이었다. 이로써 요는 고려에 대해 형식적이나마 사대의 예를 받아 침략의 목적을 달성했으며, 고려는 강동 6주를 획득하여 북진정책의 일환으로서 실리를 얻게 되었다. 그러나 실제로 고려는 비공식적으로 송나라와 계속 교류하였고, 또한 강동 6주가 동여진 정벌에 전략적 가치가 크다는 사실이 인식되면서 요는 재침략의 기회를 엿보게 되었다.
 
 1010년(현종 1) 11월 요의 성종은 직접 40만 대군을 거느리고 침략해 왔으며, 이를 거란의 제2차 침략이라고 한다. 침략의 명분은 고려왕실의 내분을 징벌하는 것이었지만 실제 목적은 송나라와의 교류를 완전히 차단하고 강동 6주를 되찾으려는 데 있었다. 고려의 현종은 나주(羅州)까지 피신하기에 이르렀지만, 고려는 강동 6주를 돌려주지도 않았으며 1013년에 거란과 국교를 끊고 다음 해에 송나라와 다시 교류하였기에 요는 다시 침략을 감행하게 된다.
 
 1018년 12월 요의 소배압이 10만 대군을 이끌고 침략해 오니 이것이 제3차 침략이다. 고려는 [강감찬]을 상원수, 강민첨을 부원수로 삼아 20만 대군으로 대비하였다. 요는 초전부터 고전을 면치 못하였고 결국 퇴각하다가 귀주에서 [강감찬]의 공격으로 대패, 10만 대군 가운데 살아남은 자가 수천 명에 불과했는데, 이것이 유명한 귀주대첩(龜州大捷, 구주대첩이라고도 함)이며 살수대첩(을지문덕), 한산대첩(이순신)과 함께 우리 민족의 3대 대첩인 것이다.
 이 때 [강감찬] 장군의 나이는 70살 고령이었다.
 
 
 문무(文武)를 겸비한 [강감찬]
 장군은 원래 문신이었는데 그가 거친 관직을 보면 983년에 문과에 장원급제하여 예부시랑(禮部侍郞)이라는 벼슬에 올랐고, 한림학사(翰林學士), 이부상서(吏部尙書) 등을 지냈다. 지금으로 치자면 외무부, 내무부, 교육부 등을 두루 거쳤다고 볼 수 있다. 만년에 장군은 스스로 관직에서 물러나 자연과 글을 벗하며 조용히 살았다고 한다. 저서로는『구선집』, 『낙도교거집』등이 있으나 전해지지는 않는다.
 
 [강감찬] 장군 하면 빠짐없이 등장하는 수식어가 있다. ‘키가 유난히 작고 못생겼으나 어려서부터 재주와 용맹이 뛰어났다.’ 고 전한다. 장군이 문과에 급제하여 관직에 나아갔던 때는 그의 나이 30대 중반을 훌쩍 넘겼을 때였으니 상당히 늦은 감이 있다. 대기만성형이라고나 할까.
 
 
 [강감찬] 장군의 탄생지, 낙성동(落星洞)
 도전에 보면 상제님께서 장군에 대해 언급한 대목이 두 군데 나온다. 5편 337장에서 박공우 성도님이 “막내아들 주신은 누구입니까?” 하고 상제님께 여쭈니 “[강감찬]이니라.” 하신 대목과 7편 78장의 ‘[강감찬]의 벼락칼 공사’ 이다.
 
 인걸은 지령이라는 말이 있으니, 장군이 태어난 지명에 대해 살펴보자.
 
 서울시 관악구의 낙성동(落星洞)은 [강감찬] 장군의 탄생지라고 하여 낙성대를 세운 마을로서 탑골이라고도 불린다. 낙성대 외에 봉천동 마애석불 또한 관악구의 주요 문화재인데 미륵불상이다. 관악산은 예로부터 개성의 송악산, 파주의 감악산, 포천의 운악산, 가평의 화악산과 더불어 경기 5악(五岳)에 속했던 산으로, 서울의 남쪽 경계에서 과천, 안양, 수원에까지 이른다.
 

 관악산은 산세가 활활 타오르는 불의 형국이라 한다. 때문에 대원군이 경복궁을 재건할 때 그 불기운을 누르기 위해 광화문 앞에 바다의 신으로 불을 끄는 신물(神物)인 해태를 만들어 세우고, 주봉(主峰)인 연주대 뒤 높은 바위에도 작은 연못을 파서 물을 가두어 두고 관악산의 불기운을 억누르기 위해 애썼다고 한다. 불은 문명(文明)을 상징하기도 하니 이 또한 의미가 깊다.
 
 그리고 고려가 망하자 유신 열 사람이 관악산 절에 숨어살며 송도를 향하여 통곡을 하였다 하는데, 이로부터 임금을 생각한다는 뜻으로 연주대(戀主臺)라는 이름이 생겨났다고 전한다.
 
 이는 근래에 사부님께서 누차 말씀해주신 바 있는 두문동 성수 공사의 역사적 배경인 고려 말 72인의 충절을 연상케 한다. 아울러 ‘주군을 그리워한다(戀主)’는 뜻도 오늘날에 와서는 또 다른 의미로 다가온다. 굳이 덧붙이자면 ‘그리워한다’ 는 ‘기다린다’ 는 말로도 대체할 수 있다. 물론 망국의 주군이 아니라 새 시대를 열어갈 주군일 터.
 
 
 
 
 문곡성 기운을 가지고 태어난 [강감찬]
 [강감찬] 장군은 구전설화의 주인공이기도 하다. 그에 얽힌 신이한 행적들이 많았고 그만큼 그의 인품과 능력이 민중의 가슴에 깊이 각인되어 왔음을 알 수 있다. 이제 그에 대해 알아보고자 한다.
 
 그의 출생지인 낙성대는‘별이 떨어진 곳(落星)’이란 전설에서 유래하니 이러하다. 한 사신이 밤에 동리로 들어서는데 큰 별이 인가로 떨어지는 것을 보고 관리를 보내어 그 집을 잘 살펴보도록 하였다. 마침 그 집의 부인이 사내아이를 낳았고 사신은 이 일을 이상하게 생각하여 그 아이를 데려다가 기르게 되었으니, 곧 [강감찬]이었다.
 
 뒤에 송나라 사신 중에 학식이 깊은 사람이 있었는데 [강감찬]을 보러 와서는, “문곡성(文曲星)이 사라진 지가 오래 되었습니다. 그 별이 어디 있는지를 알 수가 없더니 오늘 공을 뵈오니 공께서 바로 문곡성이시군요.” 하고 말하면서 곧 계단 아래로 내려가서 예를 베풀었다고 한다. 문곡성은 북두칠성의 네 번째 별로서 벌성(伐星)이라고도 하니, 하늘의 이법으로 무도한 것을 치는 일을 한다. 오행 중 수(水)에 속하며 하늘의 모든 권리를 한 손에 거머쥔 별이다. 하늘의 저울추인 천권성이라고도 한다.
 
 그 문곡성이 고려로 건너왔는데 그 분이 바로 [강감찬] 장군이라는 것이다.이는 지하철 낙성대 역의 타일 모자이크 그림의 연원이기도 하다.
 
 
 [강감찬] 장군의 기행이적
 
 마마신을 부리다
 장군의 추한 외모에 대해서도 전해오는 이야기가 있다. 원래 장군은 얼굴이 아주 잘생겼는데 큰일을 할 수 없다 하여, 스스로 마마신을 불러 얼굴을 얽게 하여 일부러 추남이 되었다고 하는데, 자세한 이야기는 지면관계상 생략한다. 그런데 마마신 곧 시두손님은 천자(天子)의 출현과도 직접적인 관련이 있는 막강한 신인데 장군은 마마신을 수하처럼 부리고 있으니 그 도력의 경지가 참으로 지극함을 알 수 있다.
 
 
 개구리를 잠재우다
 [강감찬] 금와훤(姜邯贊禁蛙喧) 전설이다. 장군이 경주 도호사로 있을 때, 경주성 내의 개구리가 너무 소란스럽게 울어 백성들이 잠을 이룰 수 없었다. 이에 장군이 돌에다 명령서를 써서 개구리 왕에게 보냈더니, 그 이후부터는 경주성 내의 개구리가 울지 않았다고 한다. 이는 설화로 전하는 내용이지만 실제로는 장군이 사람을 시켜 수면제 역할을 하는 약초를 구해 그것을 갈아 연못에 뿌려 개구리들을 잠들게 했다는 말도 있다. 아무튼 못생긴 사또라 하여 장군을 무시하던 고을 백성들은 그 후 장군의 말을 잘 따르게 되었다.
 


 손으로 벼락을 꺾다
 또 장군이 한성판윤에 부임했을 때, 남산(또는 삼각산)에 사는 수백 년 된 호랑이가 중으로 변신하고 길을 지나는 사람을 수없이 해친다는 민원을 듣고, 편지로 호랑이를 불러와 크게 꾸짖어 앞으로 새끼도 평생에 한 번만 낳고, 몇몇 산에만 살게 했다고 한다.
 
 그 밖에 모기를 없앴다는 이야기, 개미퇴치 이야기 등이 있는데, 하늘에서 내리치는 벼락을 손으로 꺾었다는 이야기에 이르러서는 전술했듯이 도전 7편 78장에서 상제님이 “[강감찬]이 벼락칼을 잇느라 욕보는구나. 어디 시험하여 보리라.” 고 하신 말씀과 직결된다고 하겠다.
 아울러 벼락은 지고의 권능을 상징하므로 이또한 장군의 높은 도격을 말해준다고 하겠다.
 
 
 부적으로 물을 말리다
 장군이 한여름 강릉에서 원주로 행군하던 중대화면 하안미를 지날 때였다. 이 일대는 늘 물이 귀하여 봄 가을에는 먹을 물이 부족하여 고생을 했는데, 장군이 목이 말라 물을 긷는 아낙네에게 물을 청했으나 아낙네가 인심이 고약하여 물이 없다고 거절하자 장군이 이를 괘씸하게 여겨 이 마을에 다시는 물이 나오지 못하도록 부적을 한 장 써 붙이고 갔다고 한다. 그 후부터 이 마을에는 우물을 파도 물이 나오지 않는다 하는데, 요즈음도 물이 귀하기는 매 한가지라고 한다. 이 이야기 또한 장군의 신통력을 말해주고 있지만 한편으로는 매정한(?) 일면을 엿보게도 한다. 그러나 그렇기만 했다면 민중의 가슴에 그렇게 깊숙이 포용되지 못했을 것이다.
 
 
 아랫사람에게 베푼 깊은 배려
 
 다음은 장군의 아랫사람에 대한 속 깊은 배려를 느끼게 하는 일화이다.
 
 장군이 귀주대첩에서 승리를 거두고 돌아오니 현종은 직접 영파역(迎波驛)까지 마중을 나와 오색비단으로 천막을 치고 전승을 축하하는 연회를 벌였다. 이 자리에서 현종은 그의 손을 잡고 금화팔지(金花八枝)를 머리에 꽂아주는 등 극진한 환영을 했다. 연회가 한참 무르익을 무렵, 장군이 현종의 눈치를 살피며 슬며시 일어나 내시를 향해 따라 나오라고 눈짓을 보냈다. 밖으로 나온 장군은 먼저 주위를 살펴 아무도 없는 것을 확인한 후 말하기를.
 
 “내가 조금 전 밥을 먹으려고 밥주발을 열었더니 빈 그릇이더구나. 아마도 너희들이 실수를 한 듯싶구나.”
 이 말을 듣는 순간 내시의 얼굴이 노랗게 변했다. 벌을 받을 게 틀림없기 때문이다.
 “장군님, 죽을죄를 지었습니다. 어떤 벌이든 달게 받겠습니다.”
 내시는 무릎을 꿇은 채 벌벌 떨며 잘못을 빌었다. 그러나 [강감찬]은 두 팔로 내시를 일으켜 세우며 말했다.
 “됐다. 그만 일어서거라. 내 한 가지 묘안이 있으니 시키는 대로 하여라.”
 [강감찬]은 내시의 귀에 무언가를 나지막이 속삭였다. 잠시 후 연회장으로 들어온 [강감찬]은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사람들과 어울렸고 그때 내시가 [강감찬] 곁으로 다가가 말했다.
 “장군님, 진지가 식은 듯 하오니 바꿔드리겠습니다.”
 빈 밥그릇을 들고 물러 나온 내시는 따뜻한 밥이 소복한 그릇을 들고 다시 나타났다.
 
 이 이야기들은 모두 그의 이인적인 면모를 부각시키고 있다고 볼 수 있으며, 이는 장군이 최치원 선생 등과 마찬가지로 도가(道家)의 맥을 계승하고 있음도 어렵지 않게 짐작할 수 있다. 실제로 이능화의『조선도교사』를 보면 선도사상의 맥락을 이어주는 인물에 장군의 이름을 포함하고 있다.
 실로 [강감찬] 장군은 위난을 당하여서는 구국의 명장, 평화 시에는 현명한 관리로 문무와 도력, 이상과 행동을 겸비한 겨레의 대 이인이었으니, 이로써 천상 조화정부에서도 막중한 역할을 수행하게 되었으리라 감히 미루어 생각해 보는 것이다.
 
 글·김병철

 

 

 

출처 : 월간개벽 2005년 1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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