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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위인전

[현대의인물]김 구(구안동)--마음 속의 38선이 무너지고야 땅 위의 38선도 철폐될 수 있다

작성자가을바다|작성시간05.10.07|조회수147 목록 댓글 0

1876. 7. 11 황해도 해주~1949. 6. 26 서울.

항일독립운동가·정치가.

개요

김구
일제강점기 대한민국임시정부의 주석을 지내며 항일민족운동을 전개하였으며, 해방 후 ...
대한민국임시정부의 요인들(왼쪽부터 이유필·신익희·윤현진·안창호·손정도·정인과, 제2열 오른쪽이 김구, 제3열 3번째 ...
일제침략기 대한민국임시정부의 주석을 지내며 항일민족운동을 전개하였으며, 해방후 남한만의 단독정부수립에 반대하여 통일민족국가건설운동을 전개한 반외세 민족주의자이다(→ 민족해방운동).

초년

본관은 안동. 아명(兒名)은 창암(昌巖), 본명은 창수(昌洙), 구(龜)·구(九)로 개명했다. 자는 연상(蓮上), 호는 연하(蓮下)·백범(白凡). 아버지는 순영(淳永)이며, 어머니는 곽낙원(郭樂園)이다. 1887년 11세 때 아버지가 집안에 세운 서당에서 한문과 한글을 익혔다. 15세에는 정문재(鄭文哉)의 서당에서 당시(唐詩)와 〈대학〉을 공부하고 과문(科文) 등을 익혔다. 17세때 우리나라 마지막 과거인 경시(慶試)에 응시하기 위해 해주에 갔으나, 매관매직을 보고 과거를 포기하고 돌아와 풍수지리서·관상학·병서 등을 읽으며 훈장을 지냈다.

동학교문활동과 의병활동

1893년 동학의 평등주의에 감화되어 입도한 뒤 포덕(布德)에 힘을 기울여 접주(接主)가 되었다. 1894년 황해도 도유(都儒)로 뽑혀 보은집회에 참가하였다. 여기서 손병희(孫秉熙)를 만났으며, 제2대 교주인 최시형(崔時亨)으로부터 팔봉도소접주(八峰都所接主)라는 첩지를 받는 등 북접계열로 동학교문활동을 했다. 1894년 갑오농민전쟁이 일어나자 친일정권은 일본군과 연합하여 농민군을 공격하는 한편, 동학교도 전체를 비적(匪賊)으로 몰아 탄압했다. 귀향길에 농민전쟁을 목도한 그는 그해 9월 삼남에서 올라온 경통(敬通:通文)에 호응하여 해주 죽산장(竹山場)에서 척양척왜(斥洋斥倭)의 깃발 아래 선봉장으로 해주성을 습격했으나 실패하였다. 그뒤 배신한 우군(友軍) 이동엽(李東燁) 부대의 습격을 받아 대패했다. 이 사건을 계기로 동학군 토벌에 나선 신천(信川) 진사 안태훈(安泰勳:安重根의 아버지)의 집에 은거했으며, 위정척사계열인 유인석(柳麟錫)과 동문인 고능선(高能善)의 문하생이 되었다. 그로부터 큰 영향을 받아 춘추대의(春秋大義)에 입각한 명분론적인 세계관에 몰입하였다.

1895년에는 남만주로 건너가 김이언(金利彦) 의병부대에 참여하여 일본군을 공격했으나 참패했다. 을미사변이 일어나 명성황후(明成皇后)가 살해되자 충격을 받고 1896년 2월 귀국하여 안악(安岳)으로 오는 도중 치하포(河浦)에서 일본군 중위 쓰치다[土田壤亮] 를 때려 죽인 뒤 집에서 은신중 체포되었다. 1897년 사형이 확정되어 집행되기 직전 고종의 특사로 집행이 정지되었으나, 일본공사 하야시[林權助]의 압력으로 출옥하지 못했다. 1898년 탈옥하여 삼남일대를 떠돌다 하동 쌍계사(雙溪寺)에서 피신생활을 했다. 그해 가을 공주 마곡사(麻谷寺)에서 승려가 되었으며, 서울의 새절을 거쳐 평양근교 대보산(大寶山) 영천암(靈泉庵)의 방주가 되었으나 1899년 환속하였다.

애국계몽활동기

1900년 강화도로 건너가 개화인사들과 교유하고 교육과 계몽사업에 힘을 기울였다. 이 과정에서 존중화양이적(尊中華攘夷狄) 사고의 틀을 벗어나 애국계몽운동을 전개하기 시작했으며, 1903년 기독교에 입교하면서부터 본격적으로 이 운동에 참여하였다. 이해 황해도 장연에 봉양학교(鳳陽學校)를 설립하고 교육에 힘을 기울이다 백남훈(白南薰)에게 인계하고 공립학교 교원이 되었다. 1905년 일본제국주의자들이 을사조약을 강제로 체결하자 진남포 예수교회 에버트청년회 총무로 서울 상동교회(尙洞敎會)에서 열린 을사조약반대전국대회에 참석했다. 이동녕(李東寧)·이준(李儁)·전덕기(全德基) 등을 만나 을사조약 철회를 주장하는 상소를 결의한 뒤, 대한문 앞에서 읍소를 하고 종로에서 가두연설을 했다. 그러나 이 방법으로는 효과가 없을 뿐만아니라 국민들 또한 지식이 없고 애국심이 박약하여 나라를 건질 수 없다고 판단하여 교육사업 등 계몽활동에 전념하기로 결정하고 돌아왔다. 1906년 종산 서명의숙(西明義塾)의 교원이 되었으며, 1907년에는 안악 양산학교(楊山學校)의 교원이 되었다. 1909년에는 재령 보강학교(保强學校) 교장을 겸했다. 1909년에는 해서교육회(海西敎育會)를 조직하여 학무총감(學務總監)이 되어 도내 각지 강습소를 다니며 교육의 필요성을 역설하고 애국심을 고취시켰다. 강연 주제는 "한인이 배일(排日)하는 이유는 무엇인가?"라는 것 등이었다. 이때 안중근이 이토 히로부미[伊藤博文]를 저격한 사건이 발생하자, 사건관련자로 일본헌병대에 체포되어 해주감옥에 투옥되었다가 불기소로 풀려났다. 안창호(安昌浩)가 주도하는 비밀애국계몽단체인 신민회(新民會)의 회원이 되었으며, 1910년 양기탁(梁起鐸)이 소집한 비밀회의에 황해도 대표로 참석했다. 이 회의에서 국내에서는 무력 항쟁을 하고 만주에는 광복군을 양성하기 위한 무관학교를 설립하여 일제와 투쟁하기로 결의했다. 그러나 1911년 안악(安岳) 부호들을 협박하여 독립운동자금을 빼앗아 서간도에 무관학교를 세우려 했다는 소위 안명근(安明根:안중근의 종제)사건의 관련자로 5월에 체포당했다(→ 안악사건). 김홍량(金鴻亮) 등 양산학교 관계자들도 서울에 압송되었다. 혹독한 고문을 당하고 17년형을 선고받아 복역중 감형되어 1914년 7월 가출옥되었다. 그뒤 양산학교장인 김홍량의 동산평농장(東山坪農場) 농감(農監)이 되어 학교를 세우고 소작인을 교육하는 등 농촌계몽운동을 했다. 1919년 3·1운동이 일어나자 압록강을 건너 상해로 망명하였다.

상해 임시정부 활동기

상해로 망명한 그는 안창호의 추천으로 임시정부의 초대 경무국장이 되었으며, 1923년 내무총장에 취임하여 상해임시정부의 진로를 둘러싸고 제기된 창조론(創造論)과 개조론(改組論) 등의 갈등을 해소하기 위하여 마련된 국민대표회가 분열로 치닫자 국민대표회의 해산을 명하였다. 1924년 국무총리대리를 거쳐 1926년 12월 국무령(國務領)이 되었다. 1927년 약체화된 당시 임정의 처지와 구성원상 국무령제로는 내각 구성조차 어려워 국무위원제로 개정하여 국무위원 겸 주석이 되었다.

이러한 임정활동에서 그는 사회주의를 배척 반대했으며, 이승만의 외교론과 안창호의 준비론에 대하여는 별다른 비판을 하지 않았다. 1928년 사회주의계열을 제외한 민족주의계열의 단결을 도모하기 위하여 이동녕·이시영(李始榮)·조소앙(趙素昻) 등과 한국독립당(韓國獨立黨)을 창당했다. 1932년에는 청년들을 모아 한인애국단을 조직하여 일본인 침략주의자들의 암살사건을 지휘했다. 이봉창(李奉昌)·윤봉길(尹奉吉)의 의거가 대표적인 성공사례이다. 이 사건으로 일경의 탄압이 강화되자 상해를 탈출했다. 1933년 난징[南京] 에서 장제스[蔣介石]을 만나 광복군 무관양성소 설치와 항일전투방략을 협의했다. 1934년 국무위원직을 박탈당하기도 했으나, 1935년 한국국민당을 조직하고 의정원 비상회의에서 국무위원에 재선되었다. 1937년 중일전쟁이 발발하여 일본의 폭격이 심해지자 임시정부를 장쑤 성[江蘇省]의 전장[鎭江], 후난 성[湖南]의 창사[長沙]로 옮기는 한편, 임정에 군사위원회를 설치하고 6단체를 통합하여 한국광복전선을 결성했다. 이는 공세를 강화해가는 일본과 최후 결전을 앞두고 여러 갈래로 갈라진 민족독립운동 진영을 통합하고 결전태세를 갖추기 위한 작업의 일환이었다.

1940년 이러한 노력의 결실로 민족주의자들의 단일정당조직으로 조선혁명당·한국독립당·한국국민당 등 3당을 한국독립당의 이름아래 통합하여 집행위원장에 추대되었으며, 임시정부 국무회의의 주석으로 선출되었다. 1941년 11월 25일 임시정부는 좌우합작의 이념적 통합을 실질적으로 보여주는 '대한민국건국강령'을 제정·공포했다. 이것은 통합된 단일정당조직이 단순한 물리적인 결합에 의한 것이 아니라 이념적인 융합차원으로까지 진전되었다는 것을 보여주는 결정체였다. 한국의 건국정신은 정치 경제·교육의 평등을 보장하는 삼균주의(三均主義)에 있으며, 3·1독립선언에 입각하여 수립된 정부는 민족자력으로 이민족의 전제를 물리치고 5천년 군주정치의 낡은 껍질을 벗겨 새로운 민주제도를 확립하고 사회계급을 타파함을 목적으로 한다는 이 건국강령은 사회주의적 이념을 도입한 좌우합작 타협의 소산물이었다. 이 좌우합작은 전민족적 차원에서 결성된 것이 아닌 김구와 김원봉(金元鳳) 사이에 이루어진 것이었지만, 좌우연합전선상 매우 귀중한 경험이었다. 또한 이는 이들을 주체로 민족해방을 쟁취한 뒤 추진할 새로운 국가건설의 가늠자로서 임시정부의 진로를 보여주는 것이기도 했다.

이해 가을 충칭[重慶]임시정부는 한국광복군을 조직하고 총사령관에 지청천(池靑天), 참모장에 이범석(李範奭)을 임명하고 일제를 무력으로 몰아낼 계획을 추진했다. 1941년 12월 9일 5개항의 대일선전포고문을 발표하고 임전태세에 돌입했다. 1942년 7월에는 중국정부와 광복군에 대한 정식협정을 체결하여 연합군과 더불어 항일공동작전에 나설수 있는 기초를 마련했다. 1944년 4월 충칭 임시정부 주석에 재선되었으며, 부주석에 김규식, 국무위원에 이시영·박찬익(朴贊翊)을 선출하고 결전을 위한 준비에 박차를 가하였다. 일본군에 강제로 끌려나온 학도병을 광복군에 편입시켰으며, 미육군전략처(OSS)와 제휴하여 국내침투를 위한 특수부대로 광복군특공대를 편성하여 국내진공작전을 세우고 계획을 추진하였다. 그러나 일본이 전격적으로항복을 선언함으로써 참전하지 못한 채 8·15해방을 맞이하였다.

해방정국기의 활동

1945년 9월 3일 '국내외 동포에게 고함'이라는 성명과 임시정부는 빠른 시일내에 곧 입국할 것 등 14개항으로 되어 있는 '임시정부의 당면정책'을 발표하고 임시정부의 대표자격으로 귀국을 서둘렀다. 그러나 미군정은 임시정부를 인정하지 않았기 때문에 11월23일 개인자격으로 김규식 등 임정 국무위원들과 귀국했다. 그뒤 전국을 순회하며 자유·평등·행복의 신한국을 역설하며 국가건설에의 발을 내디뎠다. 그러나 12월 27일 모스크바 3상회의에서 한국에 대하여 미국·영국·소련·중국 등 4개국이 5년간 신탁통치한다는 신탁통치안이〈조선에 관한 모스크바 3상회의 결정서〉로 결의되자 반탁투쟁을 주도했다. 이 중심체는 비상정치준비회였다. 이 단체는 이승만의 독립촉성중앙협의회와 합치기로 하고 비상국민회의로 개칭하였다. 1947년 2월 14일에는 제2차 비상국민회의전국대회를 열고 독립촉성국민회와 민족통일본부를 합칠 것을 결의하고 국민의회로 바꿨다. 이 시기, 그의 정치적 입장은 '삼천만동포에 경고함'이라는 성명에 잘 나타나 있다. 독립진영의 재편성, 새로운 합작위원회의 구성, 신탁통치반대, 미소양군의 철퇴로 38선 철폐, 자주독립정부 수립 등이 그것이다. 그는 즉시 독립을 열망하였으며 이에 따라 민족자주와 반탁을 일치시켜 반탁운동을 맹렬히 전개하였다. 이러한 가운데 한국문제는 유엔으로 넘겨졌다. 1947년 11월 유엔감시하에 남북총선거에 의한 정부수립결의안을 지지하며, 완전자주독립노선만이 통일정부수립을 가능하게 한다고 주장했다. 1948년 2월 26일 총선거를 감시하려 파견된 유엔한국임시위원단의 입국을 북한이 거부함으로써 선거가능지역인 남한만의 총선거를 실시하자는 미국 제의가 유엔소총회에서 결정되었다. 이에 그는 단독선거에 의한 정부수립에는 절대 반대하는 입장을 취했다. 이미 2월13일 '삼천만동포에게 읍고(泣告)함'이란 글에서 "마음 속의 38선이 무너지고야 땅위의 38선도 철폐될 수 있다"고 호소하고 "이 육신을 조국이 수요한다면 당장에라도 제단에 바치겠다. 나는 통일된 조국을 건설하려다가 38선을 베고 쓰러질지언정 일신의 구차한 안일을 위하여 단독정부를 세우는 데는 협력하지 않겠다"고 굳은 의지를 천명한 바 있었다. 이승만과 한민당계열이 선거를 주장하고 준비를 서두르자, "38선을 그대로 두고는 우리 민족과 국토를 통일할 수 없을 뿐만아니라 민생문제도 도저히 해결할 수 없다"고 하며 이들과 결별하고 민족자주와 조국통일을 위한 시도를 추진했다.

그는 1948년 4월 19일 38선을 넘어 평양에서 열린 전조선 정당사회단체대표자연석회의와 남북요인회담, 김구·김규식·김일성·김두봉의 4자회담에 참석하고 5월5일 서울에 돌아왔다. 도착성명에서 자주적이고 민주적인 통일조국을 재건하기 위하여 남조선 단정을 반대하며 미소양군의 철퇴를 요구하는 데 의견이 일치하였음을 밝혔다. 그러나 5월10일 남한 단정을 위한 총선거가 실시되고, 9월 9일 북한이 정부수립을 선포하는 등 통일이 점차 불가능한 상태로 빠져들어갔지만 통일조국 실현을 위한 그의 노력은 계속되었다. 암살되기 한달전 "동족상잔의 유혈과 국토양단의 위기를 방지하고 자주·민주의 원칙하에 조국의 완전독립을 쟁취하려는 나의 주장과 태도는 변함이 없다"고 소신을 밝히고, 이승만과의 합작은 통일정부가 설 때만이 가능하다고 했다. 통일된 자주적 민족국가수립이 그의 최대의 목표였다.

1949년 6월 26일 집무실인 경교장(京橋莊)에서 육군 현역 장교 안두희(安斗熙)가 쏜 총탄을 맞고 서거했다. 장례식은 7월 5일 서울운동장에서 국민장으로 거행되었으며, 효창공원에 안장되었다. 1962년 건국공로훈장 중장(重章)이 추서되었다. 저서로 〈백범일지〉가 있다.

崔元奎 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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