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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근대사 인물]帝王들의 성공학]2 조선 태종

작성자개척자.|작성시간05.08.20|조회수156 목록 댓글 0
帝王들의 성공학]2 조선 태종

조선 태종-결단의 리더십 (2003.01.16) -조선일보

호랑이 없는 곳에서 ‘토끼가 왕 노릇 한다’는 말이 있다. 하지만 호랑이 있는 곳에서도 여우는 왕 노릇 한다. ‘호가호위’(狐假虎威·호랑이의 위세를 여우가 사용한다)는 정통성 있고 강력한 통치 리더십을 망가뜨리는 친·인척 및 방자한 공신(功臣)들의 행태에 어울리는 격언이다.

태종(1367~1422·재위 1401~1418)은 즉위 전부터 조선 왕조를 연 아버지 태조 못잖은 강력한 리더십을 발휘했다. 새 왕조 개창에 저항한 정몽주(鄭夢周) 등 고려 충신들을 제거하는 데 앞장섰고, 두 차례 왕자의 난 때는 친형제까지 죽였다. 여기에는 하륜(河崙)의 미래를 내다보는 예지, 조영무(趙英茂)의 빠른 정보 제공, 이숙번(李叔蕃)의 용기 있는 군대 통솔, 그리고 특히 부인 민(閔)씨와 그 동기들의 거사 준비가 결정적이었다.

그러나 일단 권력을 잡고 나서는 달랐다. 부인 원경왕후의 남자 형제 넷 모두를 군주에 대한 ‘불충(不忠)’이라는 죄목으로 제거했고, 태종 편에 선 공신 이숙번도 멀리 떨어진 함양 별장으로 내친 후 다시 보지 않았다. “인간을 대접하는 도리가 야박했다”는 평가가 나온 것도 이 때문이다.

권력 내부에서는 비정할 만큼 공(公)과 사(私)를 나눴지만, 백성들의 평가는 달랐다. 조선왕조실록은 당시 사람들이 태종을 친부모처럼 여겼다고 쓰고 있다. 이런 리더십은 어떻게 얻은 것일까? 결론부터 말하면, 이는 태종의 유교적 이상사회를 구현하려는 개혁적 통치 때문이었다. 권력 주변에는 사람이 꼬이게 마련이다. 또 권력을 잡으려면 여러 사람의 도움을 받지 않을 수 없다. 그러나 이 많은 사람 중에 시대가 필요로 하는 인물들만을 골라내 개혁의 완성으로 이끌고 갔다는 데 태종 리더십의 위대함이 있다.

태종 이방원은 태조 이성계의 아들들 중에서 유일하게 유학을 공부했고, 스무살 전에 과거 급제 한 뛰어난 학자였다. “고려 말 정치가 혼란스러워 백성의 마음이 흩어지는 것을 보고(政散民離) 개연히 세상을 구제할 뜻이 있었다”는 게 유학을 공부한 이유였다. 태종은 왕위에 오르자마자 정몽주와 길재(吉再)를 고려 충신으로 현양했다. 섬에 유배된 고려 왕족들을 육지에 나와 살게 했다. 태종에 맞섰기 때문에 죄인으로 죽은 남은(南誾)과 이제(李濟)의 공로를 인정하여 반대를 무릅쓰고 사면하여 태조 묘정에 배향했다. 민심의 향배를 꿰뚫어 본 것이다.

태종은 “예전 사람들은 재앙을 당하면 반드시 자신을 책망하고 남에게 돌리지 않았다”는 유교 경전의 신조를 지켰다. 백성들이 고통을 겪는 가뭄과 홍수가 일어나서 언관들이 책임 소재를 문제삼았을 때도 큰 틀을 지킨 신하들을 희생양으로 삼지 않았다. 대신 통치권자인 자신에게 허물을 돌려서 대신과 언관 모두를 보호하는 ‘책임정치’를 실천했다. 심지어 죽을 때에도 “가뭄이 지금 심하니 죽은 뒤에도 앎이 있다면 반드시 이 날은 비가 오도록 하겠다”는 유언을 남겨, ‘태종의 비(太宗雨)’라는 말이 퍼졌다. 청렴한 유학자 민제(閔霽)가 사위로 삼을 만한 면모, ‘허물이 있는 가운데서 허물없기를 구하는’ 정자(程子)의 지향과 같은 인간이자, ‘하늘의 뜻과 백성의 마음이 돌아오는 것을 알고’ 처신한 통치자라는 면모가 있었던 것이다.

이렇게 보면, 정몽주와 태종이 주고받았다는 단심가(丹心歌)와 하여가(何如歌)도 백성들을 판단의 중심에 두는 유학자의 선택이란 측면에서 재평가할 필요가 있다. 정몽주의 ‘단심가’는 군주에 대한 신의를 지키는 사대부의 기상을 드러낸 데 반해, 태종의 ‘하여가’는 사대부의 기상을 꺾으려 했다고 본다. 하지만 태종의 시조를 왕조나 군주에 대한 충절보다 백성들의 삶을 더 중요하게 고려한 선택으로 볼 순 없을까. 특히 오늘날처럼 다양하고 새로운 삶의 욕구를 실현하려는 민초들의 공공영역이 확장되면서 민주주의가 구현되는 시대에는 고결한 ‘단심가’보다 함께 가는 ‘하여가’가 보다 의미 있지 않을까.


▲사진설명 : 서울 서초구 내곡동의 헌릉.태종과 원경왕후가 묻혀 있다.
/주완중기자


실록은 민씨 형제들이 임금 태종보다는 당시 세자였던 양녕대군의 마음을 사로잡으려 했다고 기록하고 있다. 공신 이숙번 역시 교만방자해서 주색을 좋아하고 사치에 탐닉하면서도 민씨 형제처럼 세자 개인의 눈에 들려고 노력하다가 탄핵받았다. 강력한 통치권에 정면 도전(不忠)했다기 보다는 ‘호랑이의 위세를 여우가 (오래도록) 사용’하려 한 교만함, 곧 태종의 유교적 통치 리더십을 망가뜨려 버릴 위험성 때문이었다. 실록은 이를 “임금의 덕을 어지럽혀서 살아가는 백성들에게 해를 끼치기 때문”이라고 썼다.

그렇다고 태종이 군주가 되도록 도운 신하들을 모두 제거한 것은 아니다. 개혁 목표에 동의하고, 사심없이 실천한 공신들은 끌어안았다. 조선왕조의 최고 정책결정기구인 의정부 제도를 정립하고, 화폐(저화) 사용을 권장하는 정책을 추진하여 국가의 큰 줄기를 잡아간 하륜은 죽을 때까지 태종의 스승으로 대접받았다. 평민 출신 장군인 조영무는 추진력은 부족했지만, 사사로운 정에 기대기보다 백성을 걱정하는 마음에서 나온 올곧은 언론 때문에 인정받았다.

유학자 군주인 태종의 솔선수범은 이후의 군주들이 적극적으로 친·인척 또는 공신들의 비합법적 권력 행사를 통제하는데 앞장서게 만들었다. 그렇지 않을 경우, 여우가 왕 노릇 하는 호가호위(狐假虎威) 사태가 생겨나서, 그 재앙이 통치 리더십은 물론 일반 백성의 생존권에까지 미치기 때문이다. “큰 줄기’(大體)를 알고 지켜내는 대신과 올곧은 눈과 귀의 책임을 수행하는 언관은 흔들지 않지만, 사사로이 나서는 영특한 친·인척과 공신은 흔든다.” 태종이래 문민시대를 연 조선 사람들의 역사 경험이 말하는 지혜이다. 세종대왕이 아버지 태종이 바라마지 않던 유학에 입각한 문민정치를 이상적으로 실현한 임금으로 칭송 받는 것은 결코 우연이 아니다.

오늘날 우리 사회에는 ‘자리’에 걸맞는 인물은 나서지 않고 고사하는 반면 실력이 못되는 인물은 각종 연줄이나 공훈 등의 수단을 동원하여 앞으로 나서다가 나라를 망치는 사례가 비일비재하다. 태종의 단호하고 원칙있는 친·인척, 공신 척결이 소중한 까닭은 여기에 있다.

(朴光用·가톨릭대 교수·국사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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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종의 개혁정책

議政府체제 확립… 정책결정 제도화
비판언론 역할 司諫院은 독립기구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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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종은 국왕 중심의 중앙집권체제 강화를 위해 강력한 개혁을 추진했다. 우선 공신들이 거느린 개인 사병(私兵)을 없애고, 국가의 정규군 체제를 확립했다. 중앙 관료제 개혁도 뒤따랐다. 특히 대신들의 합의 기구인 의정부(議政府) 체제를 정비하여 대신들의 정책결정권을 제도화했다.

비판적 언론을 담당하는 사간원을 독립기구로 만들어서 언관 제도를 강화한 것도 주목할 만하다. 대신들의 권력에 대한 견제 장치였지만, 군주인 자신에 대한 비판도 수용했다. 관료 제를 감시하기 위해 신문고를 설치, 백성의 소리를 들으려 했다. 경제 면에서는 전국적 토지 조사 사업인 양전 사업을 실시하여 국가의 토지 파악 능력을 극대화했다. 동시에 과전법 체제를 강화하여, 관료들이 세금을 거둘 수 있는 권리를 본인 당대에만 갖도록 하는 등, 관료들의 토지 지배권을 제한하는 조치들을 취함으로써, 국가 재정을 안정적으로 운영하는 토대를 완성했다.

호패법 실시와 호적제도 정비는 국가의 국민 파악 능력을 강화하기 위한 조치였다. 특히 보통 농민인 양인(良人) 확대책을 사용하는 동시에, 양인의 노비화는 강력하게 막는 조치들을 취했다.

이런 태종 연간의 중앙정부체제 확립, 국민에 대한 파악과 지배력 강화, 전국 토지 상황 파악을 통한 안정적인 재정 확보 등의 개혁 정책은 후계자인 세종의 학문 정치를 가능하게 만들었고, 조선 문화의 황금시대를 여는 밑거름이 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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