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몽고군의 총원수인 '살례탑'을
활을 쏘아 즉사케 하였다".
고려 고종 18년(서기1231)에 몽고족이 여러 나라를 정복하고 드디어 고려에 침입하게 되었다. 이로부터 몽고는 전후 30여년 동안에 여섯 차례에 걸친 대대적인 침략을 하였으니 고려의 전국토는 유린될 대로 유린되었고 많은 문화재의 손실 또한 보게 되었다. 그 예로 경주 황룡사의 9층목탑과 고려 현종 때 조판한 부인사 소장의 대장경의 소실 등을 들 수 있다. 당시 고려 조정은 아무런 대책 없이 몽고군의 침략을 맞이하여서 주로 산성전투나 인근 섬으로의 도피방어 위주의 항전을 거듭하여 몽고군은 우후죽순으로 전국토를 마음대로 유린하였다. 이러한 가운데 몽고군에게 큰 타격을 주고 대승을 거둔 분이 계시니 바로 승장 김윤후 장군이다. 김윤후는 본래 중이었으나 고종19년 몽고병의 제2차 침입 때 경기
도 용인 처인성에서 몽고군의 총원수인 '살례탑'을 활로 쏘아 즉사케 하였다. 이 공으로 김윤후는 상장군으로 제수되었으나 공을 다른 사람에게로 돌리고 사양하였다. 그러나 조정은 끝내 그의 공을 인정하여 섭랑장으로 삼았고 충주산성의 방호별감이 되어 우리고장을 지키게 되었다. 충주에는 몽고의 제1차 침입 때 양반별초의 관군과 노군잡류별초라는 일반 백성과 노비로 결성된 두 부대가 있었다. 1차 침입시에도 충주성은 온전하였는데 이는 노비군과 잡류병력이 힘을 합쳐 몽고병을 물리친 것이지 관군인 양반별초는 충주부사와 판관 등과 더불어 모두 성을 버리고 도망가기에 바빴다 한다. 이 때 이들이 피난 간 곳이 아마 월악산 덕주산성이 아닌 듯 싶다. 어쨋든, 김윤후 장군은 충주산성에 부임하자 이러한 지난날의 경과 등에 대해서 관심을 갖고 몽고의 제5차 침입 때 노군잡류군의 사기를 진작시켜 승리를 거두게 되었던 것이다.
"만일 능히 힘을 내어 싸워 이긴다면 귀하고 천한 신분을 막론하고 모두 관작을 제수케 하리라" 하고 관노의 호적을 모두 불 살라 버리고 믿음을 보였다.
고종40년 여름 몽고는 "야굴"이라는 장수로 하여금 제5차 침입을 강행하였다. 야굴이 이끄는 몽고군은 양주,여주의 두 성을 함락하고 충주를 포위하였다. 야굴이 몽고에 소환되고 그 뒤를 이어 "아모간"과 당시 반역자인 "홍복원"이 주축이 되어 무려 70여일 동안 계속 충주성을 위협하였으나 함락치 못하였다. 70여일의 포위된 속에서 군량이 거의 떨어지고, 오랜 전투로 모두들 지치게 되자, 김윤후는 병사들을 격려하고, 지난날 노군과 잡류들의 승리를 상기시키면서 "만일 능히 힘을 내어 싸워 이긴다면 귀하고 천한 신분을 막론하고 모든 관작을 제수케 하리라" 하고 관노의 호적을 모두 불살라 버리고 믿음을 보였다. 그리고 적에게서 빼앗은 소와 말을 나누어 주었더니 자유를 갈망해 오던 관노들은 감격하여 힘을 내어 죽기 아니면 살기로 혈전을 벌였다. 이에 몽고군은 충주의 공략이 불가능함을 느끼고, 충주 이남의 지역에 대한 공격도 포기하고 후퇴하게 되었다.
자유를 갈망하는 민중들의 인권승리 !
충주산성의 전투는 비록 대몽항쟁의 길이 남을 전쟁사적 승전이라기 보다도 인간다운 자유를 갈망하는 민중들의 인권승리라고도 할 수 있다. 만일 고려 조정이 초기부터 이와 같은 힘의 원천을 찾아내어 천민들의 신분을 해방시키고 몽고군에게 대항케 했었더라면 굴욕의 역사는 없었을지도 모른다. 충주는 이와 같이 몽고군의 침략 초기부터 끝까지 성을 지킬 수가 있었던 유일한 대몽항전의 기록을 갖게 되었으며, 이를 계기로 고종 41년(1254년)에 충주는 국원경(國原京)으로 승격되는 영광을 안게 되었다. 현재 충주산성의 위치에 대해 논란의 여지가 많으나 가장 유력지로 노루목 강변 대림산성으로 논의의 초점이 모아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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